온전하고 부족함이 없게 하려는 시험
야고보서 1:1-8
서울에 어느 교회 목사님이 새벽기도를 마치고 교회당을 나가니까 어느 집사가 교회 마당에서 교회당을 바라보고 뭔가 중얼거리고 있기에 ‘집사님 지금 뭐하십니까?’ 물었더니 ‘기도하고 나오다 빠진 것이 있어서 다시 기도 합니다’라고 하더랍니다.
우리의 믿음생활에 이러한 오해를 많이 볼 수 있습니다. 기도를 했기 때문에 도움을 받고 기도를 하지 못해서 일이 꼬이고 잘 풀리지 않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기도했으면 될 수 있었을 것인데 기도를 하지 않아서 되지 않았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불행한 일을 당했을 때 기도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기도하면 어떤 불행한 일도 당하지 않게 된다고 믿는 것입니다.
교회 다니고 예수를 믿으면 그날부터 하나님께서 도와주셔서 운이 터지고 어떤 악한 일도 만나지 않게 되리라고 믿는 것입니다. 기도하면 기도한 대로 뭐든지 척척 된다고 믿는 이러한 믿음은 신앙적 오해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신앙적 오해를 성도들이 많이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도를 하지 않아서 손해를 보았고, 실패를 했고, 넘어져 다쳤고, 사고가 났다고 합니다.
그러면 기도 할 줄도 모르고 전혀 기도하지 않은 사람은 아무것도 되는 것이 없어야 하는데 현실은 그러한 사람들이 기도한 사람들보다 불행한 일도 없이 잘 되는 것을 어떻게 이해를 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오히려 기도하지 않는 사람들이 기도하는 성도들보다 별 어려움이 없이 잘 되고 기도한 성도가 더 어려움에 빠져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러한 신앙에 오해가 없어야 합니다.
그렇다고 기도할 필요가 없다는 말씀은 아닙니다. 어려운 일이 있을 때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도와주십니다. 그러나 문제는 기도한 모든 것을 하나님이 다 응답하시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기도해도 응답이 없는 것은 하나님의 다른 뜻이 있다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어떤 때는 기도해도 전혀 응답이 없을 뿐 아니라 어려움은 더 계속되어질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땐 조용히 하나님의 뜻을 기다릴 수 있어야 합니다. 내가 바라는 것보다 다른 하나님의 뜻이 있기 때문에 내가 바라는 기도는 듣지 않으시고 하나님께서 더 큰 다른 일을 이루어 가시는 것입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이 복음을 듣고 예수를 영접하고 하나님 중심으로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그동안 도와주지 않았던 하나님께서 열심히 기도하고 말씀대로 살려고 하는 성도들을 귀하게 여기시고 어떤 어려움도 만나지 않도록 돌보아 주시고 지켜주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예수를 믿지 않았던 때보다 예수를 믿는 그날부터 어려움이 더 많았습니다. 핍박을 받았습니다. 매를 맞았습니다. 옥에 갇히기도 하고 하물며 죽기도 했습니다. 더 이상 견딜 수 없어 정들어 살던 고향을 떠나 야반도주를 해야만 했습니다.
그래서 이들은 여러 지방으로 흩어져야 했습니다. 가는 곳마다 환영하는 것이 아니라 냉대하는 것입니다. 추위에 떨며 굶주리는 어려움을 더 많이 받아야만 했습니다. 이러한 어려움을 당했을 때 믿음에 대한 혼란이 오는 것입니다. 믿어야 하나 말아야 하나? 차라리 믿지 않았다면 이런 어려움은 없었을 것이라는 생각에 빠져들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을 버리고 다시 돌아가기도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현실을 야고보가 듣고 그들에게 편지를 한 것입니다. 야고보가 믿음에 대한 혼란에 빠져 믿어야 하나 말아야 하나, 이러한 신앙적 회의에 빠진 성도들에게 편지를 하면서 안부를 묻고 인사를 하기도 전에 제일 먼저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당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2)는 말씀을 한 것입니다. 이 말씀을 최우선적으로 한 것을 보면 흩어진 성도들이 당하는 어려움이 얼마나 심각했던가를 상상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심각한 어려움을 당하는 성도들에게 야고보는 ‘여러 가지 시험을 당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고 했습니다. 당시 흩어진 성도들은 한두 가지가 아닌 여러 가지 시험을 당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시험을 당할 때 기쁘게 여기라고 했습니다. ‘시험’이란 기쁘게 여길 만큼의 즐거운 일이 아닙니다. 고달픔 입니다. 괴로움과 고통입니다. 굶주림과 냉대입니다. 기뻐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그런데 이러한 시험을 당하면 기뻐하라고 하였습니다.
시험을 당할 때 기뻐할 수 있는 이유를 말씀하였습니다. “이는”이란 시험을 당했을 때 기뻐할 수 있는 이유를 말씀하는 것입니다. 시험을 당했을 때 기뻐할 수 있는 이유는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3,4)고 말씀하셨습니다. 다시 말하면 시험을 통해서 ‘온전히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구비하여’란 ‘갖출 것을 갖춘다’는 뜻입니다. 온전하고 갖출 것 다 갖추어 조금도 부족함이 없도록 하기 위해 시험을 당하기 때문에 기뻐하라는 말씀입니다.
요즘 월드 컵 축구를 앞두고 국가 대표들을 선발하는 것을 뉴스를 통해서 볼 때 많은 축구 선수들 가운데 치열한 경쟁을 하여 뽑히게 됩니다. 뽑힌 것만으로 만족하는 것은 아닙니다. 뽑힌 그날부터 월드컵을 하는 그날까지 강도 높은 훈련을 해야 합니다. 얼음을 깨고 물속에 들어가기도 하고, 높은 산을 뛰어 오르기도 하고, 더운 지방에 가서 땡볕에 달리기도 하고, 음식을 조절하고, 기술적인 연구와 노력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피눈물 나는 지옥 훈련을 해서 월드컵에 뛸 수 있는 선수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강도 높은 훈련을 받을 때 포기하고 집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하루에도 몇 번씩이라 할 것입니다. 가족들이 보고 싶고 조용히 쉬고 싶어도 눈물을 삼키며 인내하는 자에게 월드컵에 뛸 수 있는 선수가 되는 것입니다. 포기하고 싶어도 포기하지 않고 강도 높은 훈련을 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힘들어도 참고 인내할 수 있는 것은 월드컵에 뛸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강도 높은 훈련을 이기지 못하고 요령을 피우다간 집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훈련 기간 중에 감독은 선수들의 상태를 보고 조금이라도 부족하면 돌려보냅니다.
성도에게 ‘시험’은 ‘믿음의 시련’이라고 했습니다. ‘시련’이란 용광로에 금광석을 녹이면 불순물은 다 타고 순금만 남는 것처럼 성도에게 시험은 더러운 세상적인 모든 것을 다 제거하고 온전하게 구비하는 것입니다. 시험의 목적이 성도를 괴롭혀서 고통스럽게 하기 위함이 아니라 조금도 부족함이 없도록 하고자 함입니다.
시험을 이길 수 있는 비결은 ‘인내’입니다.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앎이라”는 말씀은 시련을 통해서 믿음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되는 것을 알기 때문에 어떤 어려움도 참을 수 있는 것입니다. 이 진리를 알지 못하면 시련을 인내할 수 없는 것입니다.
믿음의 두 가지 형태가 있습니다. 하나는 자기 중심으로 믿는 것이고, 하나님 중심으로 믿는 것입니다. 복 받기 위해 기도하는 것은 자기 중심입니다. 자신을 위해 하나님을 섬깁니다. 능력있다는 목사에게 안수 받기 위해 몰려듭니다. 어떤 성도는 능력있다는 강사의 손을 잡아다 자기 머리에 얹고 안수해 달라고 하기까지 합니다. 이런 것은 축복을 구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중심 신앙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능력과 지혜와 사랑을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은 다 옳은 것입니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인도할지라도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는 것은 찬송하며 따라갈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많은 시련을 겪어도, 병들어도, 하나님의 하시는 일이라면 그것이 내게 있어야 하는 것이므로 허락하시는 것입니다.
요셉은 형들에게 팔려 애굽으로 끌려가서 보디발의 집에 종으로, 감옥에서 죄수로 살았습니다. 그러나 한 마디도 하나님을 향해 ‘하나님이 내가 왜 이래야 합니까?’, 불평을 하지 않았습니다. 형들이 잘못해서 자신이 고생한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종이 된 것도, 죄수가 되어 옥중에 갇힌 것도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므로 하나님의 뜻을 조용히 기다렸습니다. 하나님께서 요셉에게 이러한 시련을 하신 이유는 애굽의 총리가 되기 위함이요 이스라엘의 구원을 위함이였습니다. 만약 요셉이 자신이 당하는 시련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형들을 원망하고 보디발의 아내를 고발하고 나아가 하나님을 향하여 불평했더라면 평생을 옥에서 살아야만 했을 것입니다. 애굽의 총리가 되지 못할 뿐 아니라 이스라엘의 구원을 이루지 못하였을 것입니다.
다니엘이 사자굴에 던져지게 되는 시험을 당했을 때 누구를 탓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을 비방하고 반대하는 무리를 향해 저주하지 않았습니다. 왕에게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거나 악한 자들을 고발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시험하시는 것으로 받아들였습니다. 그리고 죽든지 살든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였습니다. 사자굴에 던져져도 하나님께서 던지시는 것으로 믿었습니다. 다니엘이 사자굴에 던져지는 시험을 당하므로 더 큰 총리가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왕은 네 사람이나 바뀌어져도 다니엘은 총리로 계속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만약 사자굴에 던져지지 않으려고 누구를 탓하고 하나님을 향하여 원망하였더라면 더 이상 총리가 되지를 못했을 것입니다. 이러한 진리를 알 때 시험을 당해도 기뻐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너희 믿음의 시련”이라고 했습니다. 중요한 것은 믿음입니다. ‘믿음’을 베드로는 금보다 더 귀하다고 했습니다(벧전1:7). 믿음에 금이 가면 불행하게 되는 것입니다. 부부가 서로 믿을 때 행복하지만 믿음이 깨어지면 더 이상 행복할 수 없는 것입니다. 남편이 조금 늦게 오면 어디 갔다 오느냐? 아내가 집에 없으면 어디 갔느냐? 서로 의심을 하기 시작하면 더 이상 행복할 수 없는 것입니다. 혹 의심스러운 일이 있을지라도 ‘내 남편을 그런 사람이 아니다’라고 믿었을 때 잘못했더라도 돌이킬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믿음’의 적은 ‘의심’입니다. ‘의심’은 무엇과도 같다고 했습니까? ‘의심하는 자는 마치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 같으니’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6)고 했습니다. ‘의심’이란 믿음을 병들게 하는 독소입니다. 의심하므로 모든 신뢰가 사라지고 불신하게 되는 것입니다. 부부간에 의심하면 그날부터 불행해지는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성도가 시험을 당했을 때 하나님을 ‘의심’하면 더 이상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시험을 당했을 때 조금도 의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믿음의 시련’이란 곧 의심을 제거하는 것입니다. 불순물을 빼내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 내 생각을 버리고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순종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믿음의 시련은 인내만으로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인내’는 어떤 어려움도 참고 그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발견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3)고 했습니다.
그런데 ‘인내’는 어려운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인내하지 못하여 실수를 하고 더 큰 어려움에 빠집니다. 그래서 인내하는 것은 더 어렵고 힘들기 때문에 어떻게 하라고 했습니까? 야고보는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5)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지혜가 부족하거든’이란 믿음의 시련을 인내하기가 힘들 때 하나님께 지혜를 구하는 것 입니다. 이럴 때 기도하는 것입니다.
바울과 실리가 빌립보 옥에 갇혔을 때 기도했습니다. 옥에서 나갈 수 있도록 기도한 것이 아니라 자신이 옥에 갇힌 것을 깨닫게 해 달라고 기도한 것으로 믿습니다. 그리고 시련을 인내할 수 있도록 기도를 한 줄로 이해가 됩니다. 이해가 되지 않을 때 불평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깨닫고 이해를 했을 때 찬송을 부른 것입니다. 이때의 바울과 실라의 기도와 찬송은 시험을 당하는 것을 기뻐하는 찬송인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시험을 당했을 때 기뻐하라는 말씀입니다. ‘기뻐하라’는 말씀은 원어적으로 자랑하고 싶어서 견딜 수 없는 기쁨을 의미합니다. 기뻐하는 체, 형식적인 기쁨이 아니라 기쁨이 충만한 상태를 의미합니다. 어떻게 보면 시험을 당했을 때 괴로워하고 불평하고 누군가를 탓하며 슬퍼할 수 있을 때 기뻐할 수 있다는 것은 심히 어려운 것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럴 때 기뻐할 수 있는 것은 차원 높은 성숙한 성도가 되는 것입니다.
어떻게 시험을 당하므로 기뻐할 수 있습니까? 그것은 시련의 인내를 통해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되는 것입니다. 조금도 부족함이 없는 온전하고 성숙한 성도가 되기 때문에 기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에게도 시험이 있습니다. 믿음이 큰 자에게는 큰 시험이 있고 믿음이 어린 성도에게는 작은 시험이 있습니다. 시험을 당했을 때 어렵고 힘들어도 인내하여 온전하여 지고 조금도 부족함이 없도록 하시는 하나님의 뜻으로 믿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시험을 기뻐하므로 시험 후에 오는 영광을 받아 누릴 수 있기를 진심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