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패 / 김광규
뚫어진 창호지 틈으로 햇살이 삐죽이 고개를 들이민다. 주인집 아저씨는 대청마루에 앉아 오늘도, 고운 천으로 문패를 닦
고 있다. 반짝반짝 빛이 나는 게 눈이 부시다. 아버지는 말없이 마당에 서서 그 모습을 한참이나 바라보신다. 하루해가 서산
으로 기울고, 묽은 어둠이 내려앉을 무렵, 아버지는 차가운 골목의 바람을 온몸으로 맞으며 말없이 대문 앞을 서성이신다.
문패에서 시선을 사뭇 떼지 못하는 아버지의 뒷모습이 그날따라 한없이 작아 보였다. 나는 인기척도 내지 못하고 한참 동안
담장 뒤에 숨어 발길을 묶어두어야 했다.
계절을 따라 이동하는 철새처럼 우리 가족도 추위가 오기 전에 서둘러 둥지를 옮겨야 하는 생활이 잦았다. 부모님은 밥을
먹는 것 보다 집을 구하러 다니는 횟수가 더 많았다. 해 질 무렵 돌아오신 부모님은 입과 발이 퉁퉁 부어 있었다. 오 남매나
되는 자식이 너무 많아 곤란하다는 집주인의 핀잔에 선뜻 집을 빌려달라는 부탁도 못 하고 돌아서기 일쑤였다. 초등학교에
다니는 자식만 세 명뿐이라고 둘러댄 것도 다 이 때문이었으리라. 쥐가 드나들 것 같은 집도, 손가락으로 몇 번이나 셈을 해
보고서야 계약이 이루어졌다. 피난민처럼 집채만 한 보따리를 이고, 지고 나서는 길목엔 잡초마저도 눈길을 주지 않는다. 집
주인은 문패 앞에 정승처럼 버티고 서있다. 안주인의 눈빛이 예사롭지 않게 길게 늘어지니 어머니는 등에 업고 있던 동생의
목을 슬그머니 누비처네 속으로 밀어 넣었다.
아버지의 소원은 문패를 가지는 것이었으리라. 기회가 전혀 없지는 않았다. 내가 중학교에 다닐 즈음, 달동네 언저리에 집
을 보러 다니며 어머니와 호기로운 다툼을 벌였다. 호사다마라 했던가. 차곡차곡 쌓여가던 성벽이 한순간 와르르 무너져 내
렸다. 조금의 이자라도 불릴 욕심에 집값으로 치를 돈을 계주에게 맡긴 것이 화근이었다. 야반도주한 계주를 찾아 어머니는
먹지도, 자지도 못하고 찾아다니셨다. 실성한 사람처럼 울고, 가슴을 치고, 때로는 허공을 바라보며 웃었다. 밤새 내린 비에
온몸을 흠뻑 적시고 돌아온 밤, 어머니는 며칠을 끙끙 앓아누웠다. 단념 아닌, 체념을 현실로 받아들이기 위한 어머니의 몸
부림은 길고도 깊었다.
아버지의 문패는 세상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았다. 식솔을 거느릴 당신 명의의 집도, 떳떳이 차려놓고 마음껏 장사할 가게
도 없었다. 입에 풀칠하기에도 빠듯한 생활의 연속에서 가게를 얻기에는 밑천이 턱없이 모자랐다. 가족이 기거하는 방 한 귀
퉁이가 아버지의 가게였다. 들고 나는 대로 물건을 쌓아놓고, 세월을 먹어 수시로 털털대는 고물 오토바이를 타고 ‘오일장’
을 찾아다녔다. 주변 사람들은 아버지를 이름 석 자 대신 ‘김 씨’라고 불렀다. ‘김 사장’도 아닌 ‘김 씨’라는 호칭은 친숙하지만
분명, 아버지를 얕보는 것이었다.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전쟁터처럼 닥치는 대로 일할 수밖에 없는 변두리 사람들의 하루살
이 인생이 바로 내 아버지의 삶이었다.
일터에도 엄연히 문패가 존재했고, 그것이 때로는 식솔들의 삶까지도 지배한다는 현실을 누구보다 아버지는 잘 알고 계셨
으리라. 아비의 문패가 ‘김 씨’면 그 자식들까지도 ‘김 씨의 자식’으로 불릴 수밖에 없다는 현실이 싫었을 게다. 장성한 자식
들이 장사하겠다고 입을 떼면 불같이 호통을 치셨다. 반듯한 직장에 들어가, ‘김 씨’가 아닌 떳떳하게 불릴 수 있는 문패를 갖
기 원했던 것도 그 때문일 성싶다.
문패는 사람의 성품까지 지배했다. 아버지는 어떤 사람에게도 노글노글했다. 세월이 흘러도 변하지 않았다. 매번 만나는
주인의 어깨는 대나무처럼 꼿꼿하고 당당하였지만, 아버지의 어깨는 굽은 소나무처럼 쉽게 펴지지 않았다. 그 모습이 부끄
럽기도 하고, 화도 나서 몇 번이고 오던 길을 되돌아 나갔던 적이 많았다. 집도 없고, 가게 한 칸 없다는 이유로 사람들에게
업신여김을 당하며 살았던 아버지. 하지만 아버지는 언제나 묵묵부답이었다. 세상을 살아내는 혼자만의 방식이었으리라. 중
년이 된 지금에서야 나는 아버지의 그런 마음을 조금이나마 알 듯도 하다.
집문서가 실질적인 소유의 개념이라면 문패는 심리적인 상징물이리라. 찌그러져 가는 초가삼간이라도 문패가 걸린 것을
보면 내게는 대궐처럼 다가왔다. 그 시대를 살아온 사람에게는 마음의 부를 상징하는 존재와도 같았다. 그렇기에 내가 집을
소유 했다고 해서 문패에 대한 갈증은 쉬이 해갈되지 않는다. 이루지 못한 아버지의 문패가 중년의 내 가슴에 흉터처럼 자리
매김하고 있기 때문이리라.
문패의 보이지 않는 힘은 내 안에도 들어와 있었다. 결혼 후 줄곧 남의 집에 세 들어 살면서, 나도 모르게 어깨가 움츠러들
었다. 큰 아이의 이마에 선명한 상처가 났다. 주인집 아이가 돌로 찍은 것이었다. 소독하는데 자꾸만 아이가 아프다고 운다.
아니, 아프다는 것보다는 자존심에 깊은 상처를 입은 듯했다. 아이들 싸움에 어른이 호들갑을 떤다는 안주인의 눈빛에 할 말
을 목구멍으로 삼키며 돌아섰다. 매일 드나들며 보아왔던 문패가 무언의 처신을 강요하고 있었다. 침잠되어 있던 그 힘은 나
를, 한없이 작게 만들었다. 문패 주인도 은근히 그런 힘을 믿었으리라. ‘너는 왜 가만히 맞고만 있었어.’하며 애꿎은 아이만
나무랐다. 그리고 그날 밤, 우리 부부는 한숨도 잠을 청할 수가 없었다.
남의집살이 십여 년 만에 대출을 받아 조그만 집을 마련했다. 아버지는 집 안에 얼른 들어서지 못하고 현관 앞에서 오래전
그날처럼 오도카니 서 계셨다. 문패가 아닌 아라비아 숫자 807. 아파트 호수 속에 무엇을 느끼셨을까. 뒷면에 감춰진 아들의
문패, 당신의 존함도 보셨을까. 설핏설핏 눈시울이 젖어오던 아버지를 모른 체하며 집 안으로 모시던 순간, 나는 비로소 어
떤 갈증에 대한 해갈의 느낌을 받았다. 비록 세월의 더께가 묻은 어쭙잖은 것이었지만 그것은 아버지도, 나도 턱밑까지 치밀
어 오르던 그동안의 서러움에 대한 돌파구가 분명했다.
그리고 얼마 후 아버지도 혼자만의 집을 일구었다. 화강석으로 된 번듯한 문패도 가졌다. 채 한 평도 되지 않는 터에 푸른
잔디도 심고, 키 작은 황금 측백나무도 심었다. 석공이 오로지 아버지만을 위해 정성스레 새겨준 문패였다. 가족 모두의 이
름이 반듯하게 올려 져 오로지 아버지만을 위해 영원히 존재하게 될 상징물이었다. 자연으로 돌아가는 길목에서 문패 하나
쯤 가지는 것은 지나친 욕심은 아닐 게다.
소유한다고 가지는 것이 아니며, 소유하지 않는다 하여 못 가지는 것도 아니리라.
오늘도 나는 삶의 문 앞을 서성인다. 저 멀리서 그 옛날 내 나이 즈음의 아들이 중년의 나를 힐끔 쳐다본다. 아들은 아비의
모습에서 무엇을 보았을까. 언젠가는 내 아들도 삶의 문 앞을 서성이게 되겠지. 내가 아버지의 문패였듯이 훗날, 아들 역시
도 나의 문패가 되어 주겠지.
오래전 집주인이 정성스럽게 문패를 닦던 것처럼 오늘은 아버지의 이름 석 자를 꾹꾹 눌러 몇 번이나 덧칠해본다.
-제17회 공무원문예대전 은상 작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