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그라스선글라스 곤충의 더듬이처럼, 남자는 긴 쇠막대기 하나를 들고 땅 이곳저곳을 쑤셔대고 있다. 쇠막대기 끝에 깨진 플라스틱 바가지 조각이 걸리고 낱낱이 흩어진 비닐 우산살이 걸려 올라온다. 그때마다 남자는 걸음을 멈춘 채 눈을 가리고 있던 수면용 안대를 떼어내고 주위를 둘러본다. 남자는 지금 낡은 단층 양옥이 헐린 공터, 예전에는 아이의 방이었던 자리에 서 있다. 남자가 걸어다닌 길을 따라 달의 분화구 같은 크고 작은 구멍들이 패어 있다.
공터 곳곳에는 이사간 사람들이 버리고 간 낡은 살림살이들이 남아 있어 남자의 걸음을 방해한다. 아이의 방을 지나 마루가 있던 자리를 가로질러 뒤뜰로 나온다. 낙엽을 긁어모아 쌓아둔 화단 안쪽에 빈 개집이 뒤집힌 채 버려져 있다. 화단 아래로 밑이 검게 타고 찌그러진, 손잡이가 달아난 양은냄비가 뒹굴고 있다가 남자의 발에 채며 멍든 소리를 낸다. 음식 찌꺼기가 달라붙은 양은냄비 속으로 남자의 얼굴이 일그러져 비친다. 누렁이라고 불린 개는 한밤중마다 장독대 위로 올라가 하늘을 보며 늑대 울음소리를 냈다. 소리를 좇아가다가 남자는 환기구의 프로펠러 날개 사이로 장독대의 큰 항아리 위에 올라선 개를 발견한다. 가로등 불빛 속에서 개의 털빛은 은회색으로 반짝인다. 마당 위로 거대한 그림자를 드리운 채 개가 하늘을 향해 목을 비틀 때마다 펌프질을 하듯 몸속 깊은 곳에서 울음소리가 올라온다. 태생 어딘가에 야생에 대한 그리움을 기억하고 있는 것일까. 누렁이는 양옥 사람들이 이사가기 며칠 전부터 보이지 않는다.
대문이 있던 자리 옆에는 농구 골대를 묶어둔 감나무가 한 그루 서 있다. 종종 아이가 던진 농구공이 골대를 벗어나 남자가 살고 있는 이층 담벼락으로 튀겼다. 감나무는 담 안에서 인도 쪽으로 긴 나뭇가지들을 뻗고 있었다. 담이 무너지고 드러난 감나무의 뿌리는 땅 위로 반쯤 솟아 뒤틀려 있다. 쇠막대기가 진흙 속에 박힌 채 꼼짝을 하지 않는다. 두 손으로 막대기를 잡고 빼내려는데 가느다란 웃음소리가 들려온다. 여자가 프로펠러의 전원을 끄고 날개 사이로 남자를 훔쳐보며 웃는다. 남자는 쇠막대기를 접어들고 부엌과 안방, 현관이 있던 자리를 단숨에 통과해 농구 골대까지 걸어나온다. 운동화 밑바닥에 진흙이 더께로 달라붙는다. 집으로 올라가는 현관턱에 신발을 비벼 흙을 떨어내는데 ‘킹 치킨} 화곡 3동 지점의 간판에 막 불이 켜진다. 주인 남자가 가게문을 열고 밖으로 나와 입간판의 스위치를 올리고 두 팔을 허리에 댄 채 간판을 올려다보고 있다. 킹 치킨 가게 문 앞 전봇대에 주인이 배달할 때 타고 다니는 빨간색 소형 오토바이가 비스듬히 묶여 있다. 하루에도 몇 번씩 주인은 100킬로그램의 몸을 소형 오토바이 위에 싣고 골목길을 탈탈거리며 돌아다닌다. 진흙은 잘 떨어지지 않는다. 아예 현관턱에 걸터앉아 쇠막대기 끝으로 신발 밑창을 긁어낸다. 이봐, 소주나 한잔 하지. 주인이 남자를 쳐다보며 입맛을 다신다. 또 그 얘기나 하려구요? 남자는 건달처럼 뒷주머니에 한 손을 꽂고 주인을 따라간다. 가게로 들어가다 말고 킹 치킨의 간판을 올려다본다. 커다란 네온 간판은 남자가 살고 있는 이층, 두 개의 창문을 절반쯤 가로막고 걸려 있다.
주인은 능숙한 손놀림으로 칼을 내리쳐서 닭을 잘게 토막낸다. 김이 오르는 튀김 압력솥에 닭 토막을 던져넣고 배의 조타기처럼 생긴 손잡이를 비틀어 뚜껑을 닫는다. 닭이 튀겨지기를 기다리며 남자와 주인은 소주를 연거푸 들이켠다. 뜸들이지 말고 바다 이야기나 해주세요. 호두 속 같은 얼굴에 금세 웃음이 번지며 주인은 기름때로 전 앞치마에 두 손바닥을 연신 문질러댄다. 그것들이 나타나면 바다는 온통 빙판처럼 반짝거리지. 그때부터 맥박이 빨라지기 시작하는 거야. 생각해보게. 길이가 3미터나 되는 것들을 냉동 창고로 던질 때 그 손맛이란. 그것들이 갑판 위에서 튀어오르는 것을 보고 있자면 심장이 바닷바람으로 차서 터질 듯 빵빵해지지. 그땐 심장도 튼튼했으니까. 주인은 말꼬리를 흐리며 가게 밖을 응시한다. 눈빛이 멀리 가 있다. 거리는 어두컴컴해지고 겨울바람이 밀물처럼 골목을 휩쓸며 분다.
여자는 바닐라 아이스크림을 먹고 있다. 텔레비전 화면을 가리고 앉아 다리를 길게 뻗고 허벅지 사이에 아이스크림통을 낀 채 밥숟가락으로 아이스크림을 떠먹는다. 여자는 2년 전 여름에 유행했던 은박이 티셔츠를 입고 있다. 낡고 낡은 탓에 은박이들은 다 떨어지고 등 위에 SUMMER 1994라고 박혀 있던 글자들은 흐릿하게 자국만 남아 있다. 녹아 흘러내리는 아이스크림을 핥으러 허겁지겁 숟가락에 입을 가져갈 때마다 견갑골이 불쑥 튀어나와 S자와 M자 두 개가 도드라진다. 간판에 가려지지 않은 창 위로 노랗고 붉은 네온 사인의 불빛이 반짝거린다. 반투명 창의 바둑판 무늬를 따라 불빛은 네모난 입자로 팽팽하다. 가장 크게 반짝거리는 것은 간판의 제일 오른쪽에 붙어 있는 킹 치킨점의 트레이드마크인 수탉의 머리다. 수탉은 벼슬 대신 커다란 왕관을 쓰고 부리를 벌린 채 웃고 있다. 그 수탉은 멀리서도 사람들의 주위를 끌 수 있도록 켜졌다 꺼졌다를 반복한다. 간판은 새벽 한시가 되어야 꺼진다.
남자가 화장실에서 손, 발을 닦고 들어올 때까지도 여자는 여전히 아이스크림이 든 숟가락을 핥고 있다. 먹는 것에 지칠 때마다 숟가락을 아이스크림 덩어리 가운데 꽂아놓고 텔레비전 화면을 흘끗거리기도 한다. 여자는 밤마다 아이스크림을 먹는다. 이 개월 전부터 급작스럽게 체중이 줄기 시작하면서 아이스크림과 초콜릿바, 드롭스 따위를 입에 물고 산다. 드롭스를 물고 잠이 들었다가 베개밑이 온통 파란 식염으로 물이 든 적도 있다. 남자는 방바닥에 배를 깔고 누워 노트를 펼쳐든다. 노트 위에는 며칠 전 ‘꿈의 극장}이라고 적어둔 네 글자가 전부다. 그 밑에 ‘나는 시력이 1.5이다}라고 적다가 말고 빗줄로 글씨를 지우고는 돌아눕는다. 남자는 일 주일째 집 옆 공터에 컴퍼스의 한 다리를 박아놓은 것처럼 그곳을 맴돌고 있다. 계획대로라면 벌써 극장까지 갔어야 한다. 기사 마감은 앞으로 일 주일 정도의 여유가 있다. 비행기가 요란한 소리를 흘리며 지붕 위로 날아간다. 텔레비전 소리가 묻힌다. 여자는 비행기가 멀어질 때까지 천장을 올려다본다. 오늘 내가 얼마나 먹어치웠는지 알면 아마 놀랄걸. 나무토막 같은 혀를 내밀며 여자가 중얼거린다. 프라이드 치킨 네 조각, 초코바 두 개, 율무차 석 잔, 비빔밥 한 그릇, 부대찌개, 거기다 공깃밥 하나를 추가해서 남김없이 다 말아먹었어. 숟가락을 입에 물고 여자가 남자를 돌아다본다. 남자는 파르르 떨리는 형광등 불빛을 보며 아직도 귓속을 날고 있는 비행기 소리를 듣는다. 공항은 버스로 30분 거리 안에 있다. 3분 55초마다 활주로로 비행기들이 뜨고 내린다. 입가로 흘러내린 아이스크림이 여자의 허벅지에 떨어진다. 봄이 되기 전까지 적어도 여자는 6킬로그램의 몸무게를 늘여야 한다. 지난 2개월 동안 여자의 몸무게는 8킬로그램이나 줄었다. 허리가 2인치 줄어들고 가슴 위로 세번째 늑골까지 앙상하게 드러나기 시작했다.
여자는 세면대 거울 앞에 서서 칫솔질을 한다. 남자는 조간신문을 들고 오다가 열린 문틈으로 화장실 안을 들여다본다. 칫솔을 들지 않은 한 손이 세면대 모서리를 짚고 있다. 온몸의 체중이 몰려 손목에는 전선의 플러스와 마이너스 같은 두 개의 힘줄이 돋아 있다. 소매가 없는 러닝셔츠와 반바지 아래로 여자의 맨살이 드러나 있다. 목과 겨드랑이, 허벅지 곳곳에 가늘고 긴 생채기들이 보인다. 시침핀에 찔리거나 긁힌 자국이다. 어떤 것은 딱지가 앉기 시작한다. 갑자기 칫솔을 입에 문 채 두 손으로 러닝셔츠를 걷어올린다. 나란한 두 개의 젖가슴이 세면대 거울 속에 떠오른다. 한 손은 러닝셔츠를 말아쥐고 치약 거품이 잔뜩 묻은 손으로 한쪽 젖가슴을 바스라지게 거머쥐었다가 풀어놓는다. 젖가슴이 탄력 없이 아래로 떨어지고 하얀 살갗 위로 거머리 흡반 자국 같은 다섯 개의 줄이 피멍으로 남는다. 여자는 상체를 세면대 거울로 바싹 끌어당겨 그림을 감상하듯 거울 속을 찬찬히 훑어본다. 검지손가락이 앙상하게 드러난 늑골 위를 차례로 훑어내려온다. 입 밖으로 치약 거품이 흘러내린다. 순간 세면대 거울 속에서 여자의 시선이 남자의 시선과 맞부딪친다. 여자가 허겁지겁 러닝셔츠를 내리며 눈을 가늘게 뜬다. 남자는 방으로 들어가려다가 여자의 흐트러진 머리카락 사이에서 반짝 빛나는 것을 본다. 파마기로 곱슬곱슬한 여자의 뒤통수에 주황색 드롭스 한 알이 머리카락을 감고 엉겨붙어 있다. 물을 묻혀 떼어내려 하지만 잘 떨어지지 않는다. 남자는 여자의 머리카락을 잡고 부엌으로 나온다. 여자는 여전히 칫솔을 입에 문 채 남자의 가슴께에 뒤통수를 들이대고 서 있다. 남자는 주방 싱크대를 뒤져 김 자를 때 쓰는 가위를 찾아 드롭스가 감겨 있는 여자의 머리카락 몇 올을 잘라낸다.
알록달록한 옷들과 신발, 채소상과 그릇상이 즐비한 난장들 사이를 비집고 남자는 바지 주머니에 양손을 넣고 어슬렁 걷는다. 상점은 들쑥날쑥 마구잡이로 서 있다. 길은 넓어지다가 갑자기 비좁아지기도 하고 예측할 수 없이 여러 갈래로 나뉘기도 한다. 지나치는 사람들에 어깨가 떠다밀리고 주머니 속에 넣은 손이 튕겨져 나오기도 하면서 남자는 시장 깊숙이 떠밀린다. 배추와 양파 주머니를 가득 실은 소형 트럭이 인파 사이를 비집고 들어오면서 계속 클랙슨을 울려댄다. 트럭을 피해 호박과 오이가 수북이 쌓인 가판대 사이에 낀 채 남자는 트럭이 지나가기를 기다린다. 시장 곳곳에 썩은 배추와 귤 따위가 무더기로 쌓여 심한 악취를 풍긴다. 좁은 길 가운데에 사내 하나가 주저앉아 마이크를 잡고 노래를 부르고 있다가 허겁지겁 자리를 옮긴다. 사내 앞으로 리어카가 한 대 놓여 있다. 리어카 안에는 고무줄 꾸러미와 병따개, 귀이개, 형광색 이태리 타월이 가득하다. 리어카를 길가로 조금 밀쳐놓고 그제서야 사내는 고무다리를 끼운 엉덩이를 들썩거리며 몸을 움직인다. 그 사이 트럭의 운전사는 고개를 창밖으로 내놓고 고함을 지른다. 트럭의 머리가 리어카를 받을 듯이 가까이 다가온다. 사내의 몸짓이 더욱 부산스러워진다. 엉덩이로 바닥을 쓸며 두 팔로 땅바닥을 헤집는다. 사내의 두 팔과 고무다리가 썰어놓은 낙지처럼 제각각 꿈틀거린다. 근육질의 두 팔 위로 썩은 배추 잎사귀가 달라붙고 귤이 짓눌려 터진다. 챙이 넓은 비치 모자를 눌러쓴 사내의 얼굴은 코 위로 짙은 그림자가 드리워져, 잘 보이지 않는다. 남자가 서 있는 가판대로 다가올수록 점점 호흡이 가빠져서 사내의 가슴은 지금이라도 공처럼 빵 소리를 내며 터질 것 같다. 트럭은 사내의 리어카를 밀치면서 길 안으로 들어간다. 트럭 뒤로 갈라진 사람들의 무리가 다시 모이고 사내는 다시 리어카를 밀며 길 한가운데로 나가 마이크를 잡는다.
희망 정육점의 붉은 불빛 앞으로 양곱창과 선지, 간이 든 돼지기름 깡통이 시장길에 나와 누린내를 풍긴다. 정육점의 나일론 차양 옆으로 극장의 간판이 비죽 드러나 있다. 3층 시멘트 건물 옥상의 난간에 동시상영이라고 쓰인 두 개의 간판이 매달려 있다. 간판의 하나에는 녹은 치즈 같은 젖가슴을 가진 금발 여자가 그려져 있다. 지하로 내려가는 극장의 입구에 손으로 휘갈겨 쓴 영화 상영 시간표가 바람에 펄럭인다. 폭이 좁은 계단을 내려가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선다. 형광등이 달린 낮은 천장 아래로 수족관 하나와 스프링이 쏟아져나온 융단 의자가 벽을 따라 놓여 있다. 수족관 안에는 플라스틱 물풀과 물레방아가 들어앉아 있고 얼룩덜룩한 무늬의 붕어 한 마리가 헤엄치면서 가끔 주둥이로 수족관 유리를 쳐댄다. 페인트가 흘러내린 WC라고 적힌 화장실 문 옆으로 음료수 냉장고와 먼지 앉은 스넥이 쌓여 있는 매점이 있다. 팝콘 기계 유리틀에는 버터가 흐른 채 굳어 있고 터지지 않은 옥수수 알갱이 몇 알이 달라붙어 있다. 다섯 평 남짓한 극장의 휴게실은 시골 기차역 부근의 지하다방과 흡사하다. 매표소에는 젊은 여종업원이 앉아 늘 과자를 먹는다. 유리창으로 된 매표소 위에는 영화 포스터들이 빼곡이 붙어 있어 여종업원의 얼굴은 보이지 않는다. 요금 3,000원이라고 쓰인 글자들 사이, 금과 3 사이의 조그만 틈으로 과자나 껌을 질겅거리는 입술이 얼핏얼핏 비친다. 붉은 립스틱을 입술선 밖으로 과장되게 내어그린 그 입술은 숫자 0자 중의 하나처럼 보이기도 한다. 맨처음 극장에 온 날 남자는 그 여종업원에게 ‘입술}이라는 이름을 붙여주었다. 입술은 매표구 밖은 물론 매점 가판대까지도 쉴 새 없이 눈을 굴리며 관찰한다. 매표구를 지나쳐 그냥 들어가는 사람을 향해 말 대신 매표구 밖으로 반쯤 내놓은 손가락을 신경질적으로 탁탁 내리친다. 남자가 오천원짜리 지폐를 들이밀자 마디마다 과자 가루가 묻은 입술의 손가락이 반달형의 매표구 밖으로 다지류의 곤충처럼 꾸물꾸물 나와 지폐를 가져가고 잔돈을 내어준다.
경사가 진 바닥 위에 80개의 의자가 다닥다닥 붙어 있다. 어둠이 눈에 익을 때까지 입구에 서 있다가 구석자리까지 허리를 구부리고 걸어간다. 스크린 위로 남자의 머리와 등이 낙타의 혹 같은 그림자를 만든다. 남자는 늘 C25 좌석에 앉는다. 등받이에 붙은 의자를 끌어당겨 앉으면 앞 의자의 뒷등받이에 무릎이 밭게 가닿는다. <카니발>이라는 제목의 영화는 벌써 중반부로 흐르고 있다. 이 영화는 아마도 최대 엑스트라 동원으로 기록될 만한 것이지만 3년 전 시내의 영화관에서 상영 일 주일 만에 간판을 내렸다. 완전무장을 한 군인들이 벌떼처럼 언덕 아래로 질주하고 있다. 군화 소리가 저벅저벅 울린다. 영화가 끝날 때까지 젊은 군인들이 무엇을 향해 뛰어가는지는 알 수 없다. 폭발음과 군인들이 손에 든 M16에서 뿜어내는 불길로 극장 안은 시끄럽다. 옆에서 나란히 뛰던 동료가 총에 맞아 덤불 숲속으로 튕겨나가도 여전히 군인들은 질주하며 총을 쏘아댄다. 극이 후반부로 흐를수록 군인들의 수는 점점 준다. 군인들의 얼굴은 분별할 수가 없다. 플라스틱 사출 기계로 한꺼번에 뽑아낸 장난감 병정 같다. 80개의 의자 등받이에는 한결같이 멕소롱 광고 문구가 찍힌 누런 시트가 씌워져 있다. 남자는 등받이에 머리를 기대고 앞좌석 등받이에 두 발을 걸쳐놓고 스크린으로 시선을 던진다. 벌써 일곱 번이나 본 영화이다.
스크린 오른쪽 중앙에는 삼각자 모양의 구멍이 뚫려 있다. 스크린 뒤에 종이를 붙여 땜질을 해놓았지만 영화가 진행되는 동안 그 구멍은 마치 버뮤다의 삼각지대처럼 모든 그림을 삼켜버린다. 그 위로 엉덩이가 지워진 군인 하나가 뛰어간다. 그 구멍과 가끔 의자 사이의 통로로 쥐가 돌아다니는 것만 제외한다면 이 극장은 시간을 보내기에는 가장 안성맞춤이다. 남자가 앉은 자리에서 한 줄 건너뛴 오른쪽에 청년이 앉아 있다. 점퍼 주머니에 손을 넣고 어깨를 잔뜩 오므린 채 스크린을 쏘아보는 옆얼굴이 폭발로 극장이 환해지는 순간순간 슬쩍 드러났다 사라진다. 두 눈은 번뜩이고 군인들이 나동그라질 때마다 욕지거리를 내뱉는다. 세시 삼십오분. 화요일. 회사에 다니는 사람들에게는 한창 업무로 바쁜 시간이다. 남자를 포함해 여섯 명의 사내들이 여기저기 흩어져 앉아 손에는 M16을 들고 완전무장의 무거운 몸을 이끌고 무언가를 향해 질주하는 것이 전부인 영화를 보고 있다. 그 많은 엑스트라가 죽어 쓰러지는 가운데 주인공은 늘 폭탄 세례 속에서도 살아남는다. 엑스트라가 수없이 죽어 넘어져도 관객은 전혀 동요하지 않는다. 연기가 걷히고 나면 여전히 그 속을 헤치며 뛰고 있는 주인공의 뒷모습이 보인다. 한 손에는 커다란 깃발이 들려 있다. 주인공은 여전히 질주한다. 영화의 배경은 2차대전 같기도 베트남 전쟁 같기도 하지만 전혀 낯선 곳 같기도 하다. 영화의 하이라이트인 지루한 폭발이 있는 동안 화면은 온통 회색 연기투성이다. 연기가 조금씩 흩어지면서 주인공의 얼굴이 드러난다. 얼굴은 시커멓고 이마의 탄흔에서 꽃봉오리가 벌어지듯 피가 솟구친다. 카메라는 점점 멀어지고 주인공은 겹겹이 쌓인 시체더미 속에 얼굴만 내밀고 누워 있다. 시체로 만들어진 언덕 꼭대기에 주인공이 들고 다니던 그 깃발이 꽂혀 있다. 그 위로 자막이 흐른다.
극장 안에 불이 켜지고 여기저기에 앉아 있던 사내들이 하나 둘 몸을 일으킨다. 매복에서 풀려난 군인들처럼 등받이 위로 서서히 머리가 드러나고 목과 상반신이 드러난다. 사내들은 불빛에 눈을 비비고 늘어지게 기지개를 켠다. 상아빛 스크린 위로 그림의 잔상들이 사라지면서 땜질 자국이 선명하게 드러난다. 칠십이 가까운 노인 하나가 문을 열고 들어와 제일 앞쪽부터 차례로 돌며 의자 밑의 쓰레기를 주워담기 시작한다. 남자는 매점 옆에 있는 공중전화로 가 잡지사의 한과장에게 전화를 건다. 한과장은 연신 무언가를 질겅거리며 전화를 받는다.
어때, 할 만해?
마감일까지 맞춰볼게요. 그런데 어디 이런 게 먹히겠어요? 임마, 그러니까. 재미있게 해보란 말이야. 전에처럼.
전화를 끊고 남자는 화장실의 문을 열고 들어간다. 두 개의 남자용 소변기 중 하나 앞에 그 청년이 서 있다. 소변기 앞에 선 채 남자는 곁눈질로 청년의 얼굴을 흘낏거린다. 머리 한쪽을 노랗게 물들이고 귓불에는 작은 금귀고리가 달랑거린다. 기껏해야 열일곱 정도의 나이다. 정말 멋지지 않아요? 바지 지퍼를 올리며 청년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린다. 본드를 흡입한 것처럼 동공이 확대되어 있고 왼쪽 관자놀이가 실룩거린다. 난 이 영화가 너무 맘에 들어요. 청년은 소변기 반대편 벽에 붙은 세면대로 가면서도 계속 중얼거린다. 그전에는 스파이 영화가 제일 좋았거든요. 귀퉁이가 깨진 세면대는 노랗게 때에 찌들어 있고 온수 수도꼭지는 아예 달아나고 없다. 소련이 붕괴되고 나니까 미국 스파이 영화도 영 재미가 없어졌어요. 청년은 냉수 수도꼭지를 비튼다. 수도꼭지는 맥없이 돌아가고 스테인리스 관을 타고 물방울이 하나, 둘 떨어진다. 세면대는 너무 아래 달려 있어 청년의 긴 등이 노래기처럼 둥그렇게 말린다. 두 손을 모으고 물방울을 받다가 세면대를 주먹으로 내리친다. 잇사이로 신음소리가 흘러나온다. 난 말이에요. 지금 공인된 적이 필요하다구요. 문을 발로 차고 나가던 청년이 휙 돌아서서 손으로 총을 만들어 세면대를 향해 한 방 날린다.
극장 안은 썩은 배추와 생선 내장을 한데 버무린 듯한 냄새가 난다. 천장에는 가느다란 틈을 타고 물이 샌 자국이 누렇게 번져 있다. 기사 마감일은 일 주일이 남아 있다. 일 주일 동안 남자는 철저한 맹인의 시각으로 기사 하나를 완성해야 한다. 한과장은 삼 개월 전에도 남자를 무덤 속에 집어넣었다. 경기도 부근의 공원 묘지였다. 마침 막 판 듯한 빈 묘혈이 하나 있다. 공원 관리인에게 웃돈을 집어주었다. 남자는 수의를 덧입고 관 속에 들어간 채 무덤 속에 묻힌다. 관 뚜껑 위로 흙이 던져지는 소리 속에 한과장의 웃음소리가 들린다. 남자는 그 속에서 꼬박 하루를 있었다. 한 시간이 지나면서부터 남자는 연신 야광 손목시계로 시간을 확인한다. 약속한 열 시간이 지났는데도 밖에서는 아무런 인기척이 없다. 문득 한과장이 과연 신뢰할 만한 사람인가 하는 의문이 스친다. 기껏해야 한과장에게 남자는 아르바이트 직원에 불과하다. 어쩌면 지금쯤 한과장은 남자를 이곳에 묻은 것조차 까맣게 잊고 술을 마시고 있을지도 모른다. 여보세요. 거기 누구 없어요? 숨을 쉬기 위해 관 위에 박아놓은 PVC 관에 대고 소리를 친다. 점점 고함소리는 욕설로 변한다. 약속한 시간에서 두 시간이 지나면서부터 남자는 죽음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한다. 내일, 아니면 모레 이 묘혈 속에 묻힐 누군가는 다른 장소를 찾아야 할 것이다. 관 뚜껑을 발로 차려 했지만 무릎이 굽혀지지 않는다. 손톱으로 뚜껑을 긁어대는 것도 쉽게 지친다. 고속도로에 서 있는 교통사고 안내판이 떠오른다. 고속도로를 달리다가 교통사고 안내판의 붉은 액정 숫자가 막 바뀌는 순간을 본 적이 있다. PVC관 위로 동전만하게 보이던 하늘은 달처럼 점점 이지러지더니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바지는 생똥과 오줌으로 범벅이 되어 있다. 관을 타고 비가 흘러들기 시작한다. 흙을 파내는 삽질 소리가 들리고 관 뚜껑이 벗겨진다. 거친 빗줄기에 튄 흙이 남자의 얼굴에 달겨든다. 웃으면 한쪽 입끝이 말려 올라가는 특유의 미소를 머금고 우산을 받쳐든 한과장이 남자의 얼굴을 내려다보며 서 있다.
‘죽음의 체험}이라는 제목으로 나간 지난 9월호 기사 밑에는 땀에 머리카락이 곱슬곱슬하게 말리고 눈 흰자위를 드러낸 채 관 속에 누워 있는 남자의 사진이 함께 실렸다. 그 전까지만 해도 한 달에 몇 번 잡지사로 나가 아르바이트로 기사의 교정을 보거나 사랑의 체험수기나 성형외과나 산부인과적 고민 따위를 대필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한과장은 이 기사로 어쩌면 기사 한 꼭지를 맡는 고정직을 얻게 될 수도 있다고 말했다. 스크린에는 지루하게 긴 정사가 이어지고 있다. 청년은 고양이처럼 의자 위에 올라앉아 스크린을 쏘아보고 있다. 누군가 중간에 들어와 스크린이 그림자로 얼룩지자 청년은 바지춤에 찔러넣은 손으로 총을 만들어 그림자에 겨눈다. 남자는 의자와 의자 사이의 통로에 바싹 엎드려 기다시피하며 극장을 나온다.
시장의 천막들 아래로 알전구들이 불을 밝히고 있다. 남자는 참치 통조림 두 개와 마요네즈 소스 한 통, 오이 천원어치를 산다. 육교를 건너는데 육교 아래로 낯익은 번호의 버스가 막 지난다. 여자가 버스에서 내려 천천히 보도 위로 올라선다. 뒤에서 내리는 사람들이 밀치는 바람에 어깨에 멘 핸드백이 미끄러져 떨어진다. 여자는 다시 고쳐 멜 생각도 하지 않은 채 핸드백을 땅바닥에 질질 끌며 걸음을 떼어놓는다. 발걸음을 떼어놓을 때마다 발밑으로 웅덩이가 패는 것 같다.
참치 통조림의 기름을 빼고 채썬 오이와 섞어 마요네즈에 버무리고 식빵 사이에 끼워 샌드위치를 만들면서 여자는 다가올 봄옷의 경향에 대해 수다를 떤다.
봄에는 화려하고 낭만적인 옷들이 주종을 이룰 거야. 블라우스도 단순한 것보다는 리본이나 소매가 풍성한 것들이 전부야. 얼마나 옷을 입고 벗어댔는지 난 벌써부터 봄이라면 지겨워.
싱크대에 기대고 선 여자의 날종아리 위에 연보라색 정맥이 나무뿌리처럼 얽혀 있다. 짧은 치마자락이 펄렁거릴 때마다 녹슨 못머리 같은 무릎이 드러난다. 여자는 오늘도 오십 벌이 넘는 옷을 가봉했다.
어떻게 알았어? 참치 샌드위치가 고칼로리 중의 고칼로리라는 걸 말야.
여자는 참치 샌드위치 한 개를 세 입에 다 먹어치운다. 봄이 오기 전까지 여자는 적어도 6킬로그램의 몸무게를 늘여야 한다. 여자는 중저가 브랜드 패션회사의 피팅 모델이다. 지금까지는 두터운 속옷을 몇 장 껴입고 했지만 봄이 되어 여름옷들을 가봉할 때면 그것도 어려워질 것이다. 겨울이 한창인 지금 여자는 봄옷을 가봉하고 있다. 여자의 회사에는 다섯 명의 디자이너들이 있다. 디자이너의 팔목에는 시침핀이 수없이 박힌 고슴도치 모양의 바늘통이 매여 있다. 조심성 없는 디자이너들이 찌르는 시침핀은 헝겊을 뚫고 들어와 함부로 여자의 살점까지 찌르고는 한다. 암홀 2센티미터에서 1.5센티미터로, 네크라인의 홈은 0.5센티미터 깊게. 마네킹 인형에 익숙한 사람들이었다. 가끔 여자가 낮게 신음소리를 낼 때면 그제서야 아주 잠깐 디자이너들은 아, 마네킹이 아니었지, 새삼스럽게 여자의 얼굴을 올려다보고는 한다.
바스락거리는 소리에 눈을 뜬다. 어둠 속에서 여자가 엎드린 채 베개 위로 손을 뻗어 드롭스의 은박 포장지를 벗긴다. 포장지가 찢어져나갈 때마다 남자의 신경은 곤두선다. 어느새 남자의 귀는 습자지처럼 얇아져서 작은 소리에도 더듬이처럼 민감하게 반응한다. 여자는 입에 드롭스 한 알을 물고 옆으로 누우며 한숨을 쉰다. 숨결에 시큼한 파인애플 향이 묻어 나온다. 여자는 짭짭 소리를 내기도 하고 이 사이로 드롭스를 굴리기도 한다. 파란색 식염으로 여자의 혀와 입천장은 금세 파랗게 물든다. 드롭스의 가운데 뚫린 구멍으로 여자가 내쉬는 한숨은 휘파람 소리를 낸다. 이불이 들썩이지 않게 살금살금 일어나 여자가 화장대 서랍을 연다. 킹 치킨의 네온사인은 화장대 거울 속에서도 반짝거린다. 방 어디에서도 그 간판의 불빛을 피할 수 없다. 여자는 약상자에서 옥도정기를 꺼내 뚜껑을 연다. 속옷을 들추고 뚜껑에 달린 솔로 액을 묻혀 어깨에 바른다. 옥도정기가 마를 때까지 앉아 있다가 다시 이불을 비집고 들어와 남자의 옆에 눕는다. 여자의 겨드랑이에서는 국화 냄새가 난다. 손으로 베개맡을 더듬거려 드롭스 한 알을 집어 또 입에 넣는다. 아깟것과는 시큼한 향이 조금 다르다. 노란색 오렌지맛일 것이다. 눈을 감아도 킹 치킨 간판의 불빛은 눈꺼풀 안에 무수한 점을 만든다. 색깔은 느껴지지 않지만 수탉의 왕관에 빨간색 불이 들어올 때면 송곳 같은 것이 눈알을 조금 더 깊숙이 찌른다. 남자의 머릿속은 온통 마름쇠로 위장된 모래사장 같다. 여자는 어느새 잠이 든 모양이다. 살짝 벌린 입 속으로 녹다 만 드롭스 한 알이 들어 있다.
킹 치킨의 간판이 창을 막고 있어 한낮에도 불을 켜두어야 한다. 문을 잠그고 여자의 발자국 소리가 계단 아래로 멀어진 후에야 남자는 일어난다. 여자의 베개맡에는 드롭스의 은박 포장지가 흩어져 있다. 종이 껍데기와 화장대 밑에 흩어진 머리카락을 주워들고 부엌으로 나온다. 며칠 동안 비우지 않은 쓰레기통에 참치 빈 깡통과 오이 껍질 사이로 노란색 드롭스가 달라붙은 머리카락 몇 오라기가 들어 있다. 오늘도 여자는 머리카락을 잘라낸 모양이다. 현관 신발장 위에 바이올렛 화분이 있다. 잎새 위에 하얗게 곰팡이가 폈다. 화분째 쓰레기통에 던진다. 자꾸 썩어나가는데도 여자는 계속 화초들을 사들인다. 화분이 놓였던 자리 옆으로 여자의 수첩이 있다. 신을 신다가 잊어버리고 그대로 놓고 간 모양이다.
버스 안에는 고작 네댓 명의 승객이 있을 뿐이다. 남자는 겨드랑이에 낀 여자의 수첩을 무릎 위에 올려놓으려다가 우연히 수첩을 펼쳐본다. 깨알 같은 여자의 글씨가 드러난다. 12월 15일. 어제 날짜의 메모칸이다. 김치 볶음밥, 피자 네 조각, 콜라 두 잔, 비빔밥, 참치 샌드위치 네 개. 평소 때라면 이틀치나 되는 칼로리를 여자는 하루에 섭취하고 있다. 앞 페이지로 넘긴다. 하루의 생활비와 그 달의 적금, 차비 따위로 빽빽하던 여자의 작은 수첩은 어느새 고칼로리의 음식 이름과 김치볶음밥 1930칼로리, 비빔밤 1150칼로리, 도우넛 6개 2526칼로리 따위의 메모들로 가득하다. 하지만 여자의 몸무게는 좀처럼 늘어나지 않는다. 비만요법 책자가 되어버린 여자의 수첩을 접어들고 남자는 버스 창밖을 내다본다. 무심한 얼굴을 한 사람들이 바쁘게 거리를 오간다. 내려야 할 정거장을 두 개나 지나친 후에야 남자는 버스에서 내린다.
복도를 서성거리며 남자는 여자를 기다린다. 좁은 복도를 사이에 두고 양 옆으로 똑같이 생긴 문들이 달려 있다. 사람들이 연신 옷과 천 두루마리를 들고 복도를 지난다. 수많은 문 중의 하나가 열리고 여자의 얼굴이 드러난다. 몸을 크게 움직일 때마다 시침핀이 살갗을 찔러 여자는 조심조심 남자에게로 걸어온다. 여자는 시침질만 된, 옷이라기보다는 헝겊 조각에 가까운 것을 걸치고 있다. 어쩐 일이야? 충혈된 두 눈에는 눈곱이 끼여 있고 남자를 쳐다보는 눈동자가 전구의 필라멘트처럼 흔들린다. 어깨와 겨드랑이, 허리에 시침핀들이 박혀 있고 수정사항들을 급히 적어 붙인 견출선그라스선글라스지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다. 급히 필요한 것도 아닌데 뭘. 자동판매기에서 커피를 뽑아주면서 여자는 낯선 사람을 대하듯 데면데면하다. 좀 있으면 점심시간이니까, 좀 기다릴 테야? 여자는 수첩을 들고 헝겊을 나풀거리면서 문 중의 하나를 열고 사라진다. 지나치는 사람들을 피해 커피를 마실 곳은 어디에도 없다. 남자는 커피를 그냥 쓰레기통에 부어버리고 회사를 나온다. 시침핀이 온몸에 꽂힌 여자는 동물원의 나비관에서 본 나비 표본 같다.
햇살이 따스하다. 남자는 수면용 안대를 끼고 쇠막대기를 든 채 공터 안으로 들어선다. 질퍽질퍽하다. 발을 뗄 때마다 흙이 발목을 잡아당긴다. 남자는 컴퍼스의 다른 다리처럼 다시 공터에 서 있다. 그 동안 몇 번이나 거리로 나갔지만 매번 육교도 건너지 못하고 돌아온다. 먼저 딛은 쇠막대기가 늪 속에 빠진 것처럼 끝이 닿지 않는다. 쇠막대기를 잡느라 구부정하게 구부렸던 허리를 펴지만 오히려 곧게 몸을 펴는 것이 더 어색하다. 남자는 더듬거리며 아이의 방을 지나 뒤뜰이 있던 곳까지 온다. 처음에는 진흙에 빠지지 않게 조심스럽게 걸었지만 포기하고 나니 오히려 편해진다. 뒤뜰에는 김치독을 묻었던 자리가 움푹움푹 패어 있다. 쇠막대기가 웅덩이를 지날 때마다 조금 더 깊이 빠진다. 마지막 웅덩이를 지나는데 쇠막대기 끝에 무언가 질끈하면서 닿는 것이 있다. 쇠막대기를 타고 기분 나쁜 무언가가 남자의 손바닥에 전해진다. 황급히 선글라스를 벗고 안대를 풀어젖힌다. 방금 막대기 끝이 박혔던 곳에 깊은 구멍이 나 있다. 조심스럽게 다가가 막대기 끝으로 흙을 파헤친다. 흙은 찰져 손에 힘이 들어간다. 쇠막대기가 활처럼 구부러지며 파르르 떨린다. 진흙이 조금씩 파헤쳐지면서 쇠막대기가 찌른 물큰한 것의 윤곽이 드러나기 시작한다. 털옷가지 같은 것이 진흙에 엉겨붙어 있다. 얼굴을 가까이 대고 자세히 들여다본다. 그러다가 남자는 뒷걸음질친다. 웅덩이에 발이 빠지고 신발 안으로 진흙이 타고 들어온다. 개의 머리다. 진흙이 엉겨붙은 개의 눈알이 반짝 빛난다. 다른 곳보다 먼저 부패하기 시작했는지 개의 눈알은 탁구공만한 크기로 돌출되어 있다. 얼었다 녹았다 하면서 개의 껍질은 바람 빠진 고무풍선처럼 흐느적거린다. 장독대 위로 올라가 하늘을 보고 울던 누렁이가 틀림없다. 허겁지겁 집으로 뛰어올라와 수화기를 든다. 신호음이 울린다. 남자는 다짜고짜 소리를 친다.
대체 날 뭘로 아는 겁니까? 무덤 속에 처박은 걸로 부족해 이제 병신짓까지 하라구요? 날 호락호락하게 보는 이유가 대체 뭐요? 전화기 속은 계속 신호음이 울린다. 남자는 맥없이 수화기를 놓고 일어선다. 현관에서 부엌을 따라 진흙투성이의 발자국이 찍혀 있다.
문을 잠그기 위해 손가락 끝으로 열쇠를 고른다. 열쇠의 홈을 손가락으로 더듬어 쥐고 열쇠 구멍을 찾아 몇 번 만에야 문을 잠근다. 계단의 난간을 손으로 더듬어 잡고 삼단으로 접은 쇠막대기를 길게 펼친다. 막대기로 먼저 계단을 더듬고 확인한 후에야 발끝을 조심스럽게 내려놓는다. 열다섯 개의 계단, 층계참, 다시 열다섯 개의 계단을 밟아 내려오는 도중 몇 번이나 안대를 풀어 내던지고 싶은 충동을 가까스로 참는다. 겨우겨우 현관 밖으로 나온다. 문을 나서자마자 튀김기름 냄새가 섞인 후텁지근한 수증기들이 얼굴에 달라붙는다. 튀김 압력솥 안에 갇혀 있던 김이 환기구 밖으로 하얗게 몰려나온다. 막대기 끝이 킹 치킨의 입간판이 가닿는다. 왼쪽으로 한 발짝 물러서서 한 걸음 떼어놓다가 남자의 얼굴은 차디차고 단단한 무언가에 부딪친다. 손바닥으로 더듬어본다. 손바닥이 닿는 곳은 온통 그것으로 막혀 있다. 밤 사이에 벽 하나가 쌓인 것일까. 막대기로 두드려보니 속이 빈 것 같은 공명이 울린다. 귀를 바싹 대어보니 그것은 율동감을 가지고 조금씩 떨리고 있다. 선글라스 밑으로 손가락을 넣어 안대를 조금 느슨하게 잡고 실눈으로 앞을 쳐다본다. 킹 치킨에 일 주일에 한 번씩 들르는 냉동차다. 붉은 왕관을 쓰고 활짝 웃고 있는 거대한 수탉 밑으로 대리점 문의 전화번호가 박혀 있다. 냉동칸의 빗장이 풀려 안이 들여다보인다. 털이 벗겨지고 목이 달아난 닭들이 여드름 자국 같은 모공을 드러낸 채 푸르스름하게 얼어 파란색 플라스틱 빵 상자 안에 차곡차곡 담겨 있다. 시동을 켜둔 채 운전사는 킹 치킨 가게 안에서 주인과 이야기를 하고 있다. 주인은 이야기 중간중간 두 팔을 양 옆으로 과장되게 뻗는다. 남태평양에서 3미터 길이의 참치떼를 잡아올리는 이야기가 분명하다. 남자는 안대를 눌러쓰고 쇠막대기로 아스팔트를 두드리며 엉거주춤 걷기 시작한다. 시장으로 가기 위해서는 교차로에서 육교를 건너야 한다. 교차로가 가까워질수록 자동차들의 소음이 커지고 사람들의 인기척도 늘어나기 시작한다. 육교를 건너고 삼성전자 대리점이 보이는 골목까지 걸어가 골목 안으로 꺾어 들어가면 시장이 시작된다. 그리고 희망 정육점 옆에 극장이 있다. 남자는 교차로를 벗어나지도 못한 채 몇 번이나 머릿속으로 극장까지 달려갔다 되돌아온다. 길 가던 사람들이 지나치면서 남자를 힐끗거린다. 쇠막대기보다 발이 먼저 나가는 남자를 보며 사람들은 숙달되지 않은 맹인이라는 것을 금방 알아챌 것이다. 지금이라도 안대만 벗어버리면 극장까지는 뛰어서 10분 거리다. 남자의 옆으로 사람들이 유령처럼 바람을 일으키며 지나친다. 여보세요. 낯선 목소리가 입에서 흘러나온다. 옆으로 지나치는 누군가를 향해 다시 허둥지둥 소리친다. 남자의 귀에 자신의 목소리는 터무니없이 크고 공포에 질려 있다. 여보세요. 여기 육교가 어딥니까? 얇은 손가락 두 개가 남자의 점퍼를 조심스럽게 끌어당겨 엉거주춤 선 남자의 몸을 왼쪽으로 조금 틀어놓는다. 50미터쯤 앞에 있어요. 곧장 가세요. 목소리는 다시 사라진다. 남자는 쇠막대기를 두드리며 앞으로 조금 나아가다가 깨진 보도블럭에 발이 걸리며 앞으로 고꾸라진다. 가로수 보호대에 콧등이 부딪히면서 시멘트 바닥에 얼굴이 갉힌다.
육교는 서른두 개의 계단으로 되어 있다. 육교의 난간을 붙잡고 건너편 인도로 내려선다. 고층건물들 아래의 응달에는 곳곳에 얼음이 얼어 있다. 남자의 걸음은 더욱 더뎌진다. 몇 번이나 멈춰서서 사람들에게 길을 물어본 후에야 겨우 시장으로 들어선다. 고무 다리를 감은 사내의 노랫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한다. 사내는 <저 높은 곳을 향하여>라는 성가를 부르고 있다. 짐수레와 트럭이 들어서면서 길을 비켜내줄 때마다 노래는 끊기고 한 박자씩 느려지기도 한다. 정육점 앞을 막 지나가려는데 뒤에서 트럭이 클랙슨을 울려댄다. 옆으로 조금 몸을 비킨다. 트럭이 서행으로 조금씩 들어서면서 트럭의 짐칸이 남자의 어깨를 떠다민다. 몸의 기준을 잡지 못하고 한손으로 바닥을 짚으며 주저앉는다. 손가락 끝에 물큰하고 미끈한 것이 만져지면서 주저앉은 남자의 바지 위로 우르르 쏟아진다. 정육점 문이 열리고 슬리퍼를 끄는 소리가 가까이 온다. 이게 무슨 난장판이야. 중년여자의 입김이 남자의 얼굴에 와닿는다. 화장수와 노리착지근한 입냄새에 섞여 이브껌 냄새가 난다. 미안합니다. 미안합니다. 남자는 고개를 이리저리 돌리며 중얼거린다. 일어서려다가 남자는 발 밑의 물큰한 것을 밟고 미끄러지며 다시 주저앉는다. 중년여자의 억센 손이 남자의 다리를 거칠게 들어올리고 다리에 감긴 양곱창을 떼어내 바구니에 주워담는다. 길 가던 사람들이 멈춰서서 웃기도 하고 뭐라고 한마디씩 주고받으며 사라진다. 이걸 어째. 흙이 다 묻었네 그래. 성치 않은 몸으로 왜 밖을 나다닐꼬. 방 안에나 처박혀 있을 일이지. 중년여자는 끙, 소리를 내며 바구니를 들어올린다. 슬리퍼 끄는 소리가 멀어진다.
극장의 계단을 밟고 아래로 내려갈수록 악취는 더욱 심해진다. 매표구에 돈을 내고 돌아서려는데 입술의 손가락이 유리창을 두들긴다. 아저씨. 거기 아저씨 말예요. 만원짜리를 내셨잖아요. 잔돈 받아가세요. 목소리에는 짜증이 덕지덕지 붙어 있다. 극장 안으로 들어선다. 더듬더듬 막대기로 짚으며 안으로 들어가는데 누군가 남자를 향해 소리친다. 빨리 앉아요. 그림자 때문에 하나도 안 보인다구요. 화장실에서 만났던 머리를 염색한 청년이다. 남자는 맨 구석자리로 가서 앉는다. <카니발>이라는 영화는 중반부가 흘러가고 있다. 폭발음이 들릴 때마다 눈앞으로 무수한 섬광들이 우르르 일어났다 사라진다. 소리가 나오지 않는 흑백 텔레비전으로 불꽃놀이를 구경하는 것 같다. 등받이에 머리를 기대고 다리를 앞좌석의 등받이에 얹는다. 폭격과 총소리 사이사이 청년의 억눌린 듯한 소리가 간간이 섞인다. 그래. 뛰어. 쏘라구. 젠장.
여자는 불도 켜지 않은 채 무릎을 감싸쥐고 앉아 있다. 남자는 목욕탕으로 들어가 얼굴을 씻는다. 비누가 닿을 때마다 왼쪽 뺨의 긁힌 상처가 몹시 아리다. 점퍼와 바지의 허벅지에는 비계 덩어리가 토사물 자국처럼 묻어 허옇게 말라 있다. 왜 이렇게 빨리 들어왔어? 아무런 대꾸도 없다. 실루엣으로 견갑골이 들먹이는 것이 보인다. 여자는 집에서 늘 이 낡은 은박이 셔츠를 입는다. 2년 전 이 셔츠를 처음 입었을 때, 여자는 유원지에서 아이들이 손에 쥔 알루미늄 풍선처럼 생기가 있었다. 끈을 놓치면 하늘로 유유히 떠오를 것 같았다. 남자는 낡아서 은박이가 떨어지고 글자가 지워진 여자의 등을 내려다본다.
허리가 일 인치 더 줄었어. 회사에서는 벌써 구인광고를 내놓았대. 점심을 먹는데 디자이너 미스윤이 이야기했어. 처음이래. 살이 빠져서 일을 그만두는 사람은.
여자는 오후 내내 옷을 갈아입는다. 봄에 시판할 옷을 확정하기 위해 사장과 부장급들이 다 모여 있다. 사무실 한쪽 칸막이 속에서 옷을 갈아입고 밖으로 나와 사람들에게 한번 보여준 후 다시 칸막이 안으로 뛰어들어가 다른 옷으로 재빠르게 갈아입는다. 서른다섯번째 옷이다. 소매가 풍성하고 속이 훤히 비치는 시스루 원피스를 입고 사무실 중앙에 선다. 사장이 옷을 자세히 보려고 의자에서 일어나 여자에게 가까이 다가온다. 손가락으로 옷감을 만져본다. 사장의 하얀 와이셔츠와 구김 없는 양복 위에 여자는 갑자기 물총처럼 구토를 하기 시작한다. 놀란 사장이 피할 틈도 주지 않고 점심에 먹은 부대찌개를 게워낸다. 물총처럼 솟구친 구토물이 군청색 양복 바지 가랑이 위로 쏟아져내린다. 내장처럼 불고 토막난 라면 가닥들이 달라붙어 하나씩 떨어지기 시작한다. 입을 틀어막고 화장실로 뛰어가면서도 여자는 복도에 구토를 해댄다. 나머지 일정은 취소되고 화장실에서 돌아와보니 아무도 보이지 않는다.
사장이 내 팔만 쥐지 않았어도 괜찮았을 거야. 그렇지 않아도 계속 속이 매슥거렸어. 향수 냄새가 내 속을 뒤틀어놓아서 겨우 참고 있었는데. 내 위 속에서 그렇게 많은 것이 쏟아져나올 줄 몰랐어.
두 달 만에 처음으로 여자는 드롭스를 물지 않고 잠이 든다.
주문한 식사가 나오기를 기다리며 한과장은 남자가 써온 기사를 건성으로 훑어본다. 남자는 손바닥을 계속 물수건으로 훔쳐내며 한과장의 얼굴을 흘낏거린다.
꿈의 극장이라? 제목 좋군. 앞을 볼 수 없는 사람이 극장을 찾아가는 길이라. 그러니까, 볼 수 있는 사람이 못 보는 것도 있고 보이지 않는 사람에게 보이는 것도 있다는 말이 되나? 종업원이 다가와 부대찌개의 뚜껑을 열고 라면을 반으로 분질러 넣는다. 아참, 이벤트 회사에서 전화가 왔더군. 자네가 쓴 기사를 본 모양이야. 대기업 신입사원 연수 때 그런 이벤트를 기획하고 있다는군. 남자는 문득 자신이 묻혔던 묘혈 속에 지금쯤 누워 있을 누군가를 떠올린다. 한과장이 밥 한 공기를 다 비울 때까지도 남자는 숟가락으로 국물만 홀짝거린다. 그런데 궁금한 게 있어. 무덤 속에 들어가 있는 동안, 솔직하게 어떤 기분이었나? 한과장은 이쑤시개를 입에 물고 헤어질 때 남자에게 묻는다.
집 앞에 앰뷸런스가 서 있다. 킹 치킨 가게 앞으로 사람들이 몰려들어 웅성거린다. 사람들 사이에 여자가 보인다. 여자는 은박이 셔츠 위에 파카를 걸치고 발돋움을 하고 서서 안을 들여다보고 있다. 앰뷸런스가 비상등을 켜고 요란한 소리를 내며 큰길로 사라진다. 사람들이 하나, 둘 흩어지고 앰뷸런스가 사라진 텅 빈 길 위에 주인의 운동화 한 짝이 떨어져 있다. 아저씨가 고혈압으로 쓰러지셨대. 닭을 튀기고 압력솥의 뚜껑을 여는데 갑자기 쿵 소리가 나길래 난 압력솥이 터진 줄 알았어. 여자는 남자에게로 걸어오면서 그제서야 짝짝이로 신은 신발을 들여다본다. 한 발은 운동화를 한 발은 남자의 슬리퍼를 신고 있다. 남자는 열린 문으로 가게 안을 들여다본다. 나란히 정리되어 있던 의자와 식탁이 한곳으로 밀려 쓰러져 있고 뚜껑이 바닥에 나뒹구는 압력솥 안에는 숯덩이처럼 탄 닭 토막들이 떠 있다.
킹 치킨의 간판에는 오랜만에 불이 들어오지 않는다. 오후 늦게 주인의 큰아들이라는 사람이 와서 입간판을 가게 안으로 들여놓고 셔터를 내린 후 커다란 자물통을 채워놓고 사라졌다. 마지막 비행기가 지나간 뒤에도 남자는 잠이 오지 않는다. 곁에 누운 여자도 자꾸 몸을 뒤척인다.
남자는 오토바이에 시동을 걸고 천천히 골목을 빠져나간다. 공터에는 인부 몇이 철근을 세우고 얽으면서 일층 골조 공사를 마무리하고 있다. 가을이 올 때쯤이면 5층 높이의 상가가 들어설 것이다. 오른쪽 반을 쓰지 못하게 된 주인은 지팡이를 짚고 일 주일에 한 번씩 가게로 와서 수금을 해간다. 태평양 한가운데서 만난 참치떼 이야기를 할 때마다 주인의 굳지 않은 왼쪽 입술이 묘하게 일그러진다. 하루종일 닭을 튀겨내고 주문을 받는 여자의 몸은 조금씩 기름 냄새에 전다. 남자는 배달을 마치고 오토바이를 몰아 시장까지 간다. 극장의 간판이 내려지고 다른 두 개의 새 간판이 막 옥상 난간 위로 끌어올려지는 참이다. 오토바이를 세우고 선 채 남자는 간판이 다 매달릴 때까지 지켜보다 돌아온다. 한과장에게는 딱 한 번 전화가 왔다. 다 좋은데 뭐랄까, 신선한 게 부족해. 오이를 팍 베물었을 때, 뭐 그런 것 말야. 결국 체험 시리즈 중의 하나인 ‘꿈의 극장}은 헛수고로 끝났다. 오토바이를 타고 언덕 꼭대기에 올라서면 비행기들이 지상의 관제탑으로 빛을 쏘는 것이 보인다. 남자는 전속력으로 오토바이를 몰아 언덕길을 내려온다. 여자는 킹 치킨의 앞치마를 두르고 닭을 튀겨내면서 주문받은 닭을 알루미늄 호일로 포장하다가 남자를 보고 웃는다. 그 오토바이가 이제서야 제 주인을 만났군. 오토바이는 몸피가 작은 남자에게 썩 잘 어울린다. 남자는 입간판과 간판의 스위치를 차례로 올리고 나서 허리에 양 손을 얹고 간판을 올려다본다. 킹 치킨 화곡 3동 지점의 네온사인에 차례로 불이 들어오면서 왕관을 쓴 수탉의 머리가 힘차게 반짝이기 시작한다. 남자는 안에 대고 여자에게 소리를 지른다.
정말 닭들도 웃을까?
여자는 미처 알아듣지 못한다.
요번에는 바루 뒷골목이야. 빨리 와야 해. 배달이 잔뜩 밀렸다구.
양념 통닭이 포장된 종이상자를 쥐고 오토바이에 올라타면서 남자는 네온 간판의 수탉을 유심히 올려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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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변화시키는 인터넷①』
(≫≪) 미군 희생 여중생들의 죽음을 애도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