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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중국문명의 주인 동방족(동의족=동이족) | ||||||||||
<치우의 후예들>
절강성의 소흥 남쪽에 회계산(會稽山, 주 봉우리는 1,195미터의 동백산)이 있는데 중국인들은 지금도 우임금이 중국의 홍수를 다스렸고 제후들에게 논공행상을 했으며 죽어서 이곳에 묻혔다는 설명이다. 그런데 요, 순, 우가 다스리던 그 시대에 홍수가 문제가 된 곳은 양자강이 아니라 황하이다. 지역적으로 보면 하남성, 하북성, 산동성 일대이다. 반면에 우의 사당이 있다는 소흥과 회계산은 모두 양자강 남쪽이다. 학자들이 위의 설명에 신빙성이 없다고 지적하는 것은 당시의 교통 여건 등 제반 상황을 고려할 때 황하에서 수천 리 남쪽인 양자강 남쪽까지 우가 내려와 제후들을 다독거리고 이곳에 묻혔을 리가 없다는 것이다. 한나라 시대의 사상가 왕충(王充)이 저술한 『논형(論衡)』에서 왕충은 우임금이 회계에 왔다는 전설이 사실이 아니라고 밝혔고 중국인 임화동 박사는 『관자』와 『사기』에서 ‘우는 태산에서 제후를 봉하고 회계에서 왕위를 물려주었다’라는 구절을 근거로 초기의 회계산은 산동 태산 근처에 있었으며 소흥의 회계산은 산동에서부터 그 이름이 옮겨진 것이라고 말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사마천의 『사기』를 액면 그대로 인정한다면 사마천이 그렇게 적은 근거가 무엇인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그 대답을 중국의 양쇠도(梁釗謟)는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과거에 월족은 산동성과 절강성 일대에 살고 있었던 것 같다. 하우가 건국할 때에 동이 지역에 살고 있던 월족이 화하민족의 한 구성원이 되어 하나라를 건설했으므로 동이월족의 전설 중에 그들이 하의 후예라는 얘기가 전해지게 되었다. 그 후 문자로 기록할 때에 월왕 구천의 조상이 우의 후손이라고 쓰게 된 것이다.’ 양쇠도의 설명은 동이족과 월족의 관계를 간단하게 설명했는데 한마디로 치우천황이 헌원과 전투할 때 동이에 월족이 포함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앞에서 설명했지만 요ㆍ순이 원래 동이족이라는 것을 감안하면 그의 주장에 어느 정도 이해되는 점도 있다. 즉 하나라 때의 회계산은 지금의 절강성 소흥 근처가 아니라 산동성 태산 부근이라는 설명이다. 회계산은 산동에 있으면서 동이월족이 숭배하던 곳인데 후에 산동지구가 화하족에 융합되어 더 이상 월인이라고 부르지 않게 되었고 동이지역에서 절강지역으로 내려 간 월족이 그들의 조상을 생각해서 절강지역에 회계라는 이름을 다시 붙였다는 것이다.
이동식 기자는 위와 같은 설명이라면 중국 남방 지역의 월족과 한국인이 같은 부류라고 추정할 수 있다는 놀라운 사실에 주목했다. 우선 고인돌이 한국인과 월족과의 유대 관계를 설명해주는 실마리가 된다고 설명했다. 고인돌은 세계의 3분의 2가 한반도와 만주를 포함하는 지역에 분포되어 있어 동이족의 대표적인 유산이다. 특히 동이족의 고인돌은 다른 지역과는 달리 대부분의 경우 대형 고인돌이 중앙에 있고 그 주위에 소형 고인돌이 분포되어 있다는 점이 특이하다. 학자들은 고인돌 1톤을 옮기는 데 약 10명의 장정이 필요하다고 계산한다. 그런데 우리나라 고인돌의 상판만 해도 200톤이 넘는 것이 있는데 이것은 고인돌을 세울 당시에 2천여 명이 동원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고대에 2천명을 동원할 수 있다는 것은 상당한 집단이라고 볼 수 있다. 일반적으로 고대의 한 마을의 거주 인원을 150여 명 정도로 간주하므로 장정 2천명을 동원한다는 것은 적어도 40여 개 마을이 협조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한 마을에서 50여 명의 장정이 동원된다는 것으로 가정). 고인돌을 고고사적으로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고인돌에 부장품이 없더라고 청동기로 인정한다는 데 있다. 학자들은 청동기에 들어서서 비로소 국가라는 구조 형태가 성립될 수 있다고 인정한다. 고인돌을 만들기 위해 장정 2천명을 동원하기 위해서는 초보적인 위계질서나 제도가 갖추어져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고인돌의 건립 상한선이 중요한데 우리나라 전역에서 속속 확인되고 있는 고인돌 중 가장 오래된 것은 무려 5∼6천 년 가까이 거슬러 올라간다. 이 시기는 동이족이 중국의 화하족과는 전혀 다른 문명을 독자적으로 영위하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지역적으로 다소 떨어져 있다고 하더라도 같은 유형의 고인돌 문화가 발견된다는 것은 고인돌을 만든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같은 생각과 풍습을 갖고 있다고 추정하는 것은 무리한 일이 아니다. 인간의 삶에 있어 가장 중요한 의식 중에 하나인 사자를 매장하는 방법은 고대로부터 쉽사리 도입하거나 변경할 수 있는 풍습이 아니기 때문이다. 한반도에서 발견되는 고인돌과 같은 형태의 고인돌이 절강성에서도 발견된다는 것은 오히려 학자들을 고민에 빠뜨렸다. 한반도에서 절강성으로 가려면 과거에 동이지역이라고 간주되는 산동성을 통과해야 하는데 이들 지역에서 고인돌이 발견되지 않기 때문이다. 산동성에서 동이족의 근간이라고 볼 수 있는 고인돌이 발견되지 않는다는 것은 산동성을 동이족의 영역으로 간주한다는 것에도 큰 문제점이 있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학자들이 산동성에서 분명히 고인돌이 존재할 것으로 예상하면서도 증거가 발견되지 않아 애태우던 차에 1993년 신화통신은 산동성 문등시 고촌진에서 2미터 크기의 고인돌이 있다는 것을 보도했다. 이 발견은 우리나라부터 산동성을 거쳐 양자강 남쪽으로의 고인돌까지 연계될 수 있다는 자연스런 설명도 가능하게 만들어 주는 계기가 되었다는 데 더욱 큰 중요성이 있다. 중국의 원리(苑利) 교수는 매우 주목할 만한 가설을 발표했다. 그는 「한반도와 중국 소수민족의 문화관계 비교」에서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중국의 신화에서 치우는 황하 중심의 염황족에 밀려난 묘족(苗族)의 선조다. 이 묘족은 4000년 전 발해 북쪽 연안에 살다가 남쪽 하북성 삼하현으로 쫓겨간 민족으로 오늘날 중국 남쪽의 5개 성을 중심으로 살고 있다. 이들은 예맥족과도 밀접한 관련을 갖고 있다. (중략) 이들은 한반도 일대의 북맥(北貊)과 회하(淮河, 지금의 강소성 일대) 지방에 살던 남맥(南貊)으로 북맥은 3500여 년 전에 한반도로 건너갔다. 반면에 남맥은 진나라가 망하면서 그 유민들 중 한 부류는 한반도로 건너갔으며 또 한 부류는 운귀고원(雲貴高原, 오늘날의 운남성과 귀주성 일대의 고원)으로 쫒겨가 백족(白族)이 되었다. 이 민족을 중국에서 백월민(白越民) 또는 월족(越族)이라 부른다.’ 윈리 교수의 설명은 중국에서 백이(白夷)라고 부르는 일족이 맥족인데 북맥은 한반도와 만주 일대에 일찍부터 진출했고 회하와 양자강 일대에 살던 남맥은 일부가 한반도로 들어가고 다른 일부는 운남성으로 들어가 이들이 백족 또는 월족으로 불렸다는 것이다. 요컨대 양자강 일대에 살다가 운남성으로 들어간 백족과 우리나라로 들어간 북맥은 같은 민족이라는 것이다.
<토템도 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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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호 과학저술가 |
첫댓글 잘 읽었습니다.
잘 읽었습니다. 무지한 사람이 체계적으로 이해할 수 있도록 만들어진 우리 상고사에 관한 내용이 있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