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쌍자도시 장호원
충주시와 음성군, 노은면과 감곡면의 경계인 솔고개 휴게소에서
약먹기 위해 물 한 컵을 얻었다.
서울의 병원측에서는 매일 세번 복용하라지만 내 고집이 의사의
처방을 바꿔놓았다.
1회를 생략했고 복용약도 줄였다.
그랬음에도, 지금 1일 1회로 줄이려고 갖가지 실험중이다.
솔고개 내리막 길은 죽령 사건이 의식돼 더욱 조심스러웠다.
월정리, 상평리, 원당삼거리로 나와 왕장리(충북장호원)로 갔다.
청미천이 장호원을 둘로 갈라놓아 지리적으로 헷갈리는 곳이다.
경기 이천시의 장호원과 충북 음성군 감곡면 장호원으로.
지금은 전국에 걸쳐 야간통행금지가 없지만 바다에 접하지 않은
충북만 자유로웠던 시절이 있었다.
그 당시에는 경기도땅에서 통금시간에 쫓길 경우 청미천 다리가
해방구였다.
장호원의 양면이었다.
음죽군(陰竹郡)이 충북과 경기로 분할을 거듭하다가 결국 두동강
난 장호원, 즉 쌍자도시(雙子都市)가 되고 만 것.
충북과 경기의 장호원 일대를 수소문했으나 찜질방이 없단다.
외관상으로는 꽤 번화한 읍소재지인데 의아스러운 일이다.
불확실한 여주에 가서 헤매느니 아는 곳 금왕으로 갔다.
한남금북정맥때 하룻밤 묵었을 뿐인 찜질방이다.
영남대로때도 생극에서 그리로 갔고, 이 봉화대로때는 더 멀리서
그 집을 찾아갔으니 가히 단골손님이라 할 수 있겠다.
지방 교통망을 꿰뚫고 있어야만 가능한 일이다.
첫 버스편으로 도착한 감곡땅 장호원은 다행히도 막 어둠이 물러
나는 중이었다.
장호원(長湖院)은 예나 지금이나 사통팔달한 교통요지다.
3, 37, 38번국도의 교차지로 안성, 여주, 제천, 충주를 연결한다.
조선조에는 봉화대로의 중간지역으로 음죽군 유춘역(陰竹郡留春
驛:현 이황리 일대로 추정)에 딸린 원(長海院)이 있던 곳이다.
중남부 내륙지방 보부상들의 중요 통행로이기도 했다.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
10리 상거인 음죽(陰竹:大東地志)은 현 장호원읍 선읍리 일대다.
3번국도 샘재고개 삼거리 이후, 한참 가서 선읍휴게소와 음죽길
사이 왼쪽으로 설성면과 경계를 이루고 있다.
본래 음죽군 군내면 지역으로 음죽관아가 있는 현의 중심지였다.
매우 번창했던 마을이었으나 1914년 행정구역 개편때 중심지가
장호원읍으로 옮기면서 한적한 전원마을로 변했다는 것.
통폐합때 선흥리와 읍내리의 첫자를 따서 선읍리라 했단다.
웬 까닭인지 오늘따라 워밍업 시간이 충분히 갔건만 정상 수준에
오르지 못하는 다리 때문에 애를 먹고 있었다.
보통, 아침겸 점심식사후 복용하는 약을 미리 먹어보려고 이황리
휴게소에 들렀으나 썰렁했다.
손님이 없어서가 아니라 주인의 매너가 그랬다.
주인녀가 정녕 일확천금의 꿈을 꾸고 있나 보다.
떴다방 업자들과 한통속인가.
지적도를 앞에 놓고 소위 기획부동산업자 이미지의 일당과 숙의
하는데 골몰한 듯 기천원짜리 손님은 안중에 없으니 말이다.
이들, 떴다방업자의 근절 없이는 고지식한 양민들의 막대한 피해
또한 계속될 텐데.
하긴, 말이 양민이지 떼돈벌려는 욕심이 있기에 터무니없는 감언
이설에 넘어가는 것 아니겠는가.
약 효과도 발효되지 않았다.
길가에 자주 앉는 것도 민망스러울 지경이었다.
그 때마다 자료를 꺼내 보았다.
지점(위치) 확인이 필요하기도 했지만 그보다 자주 쉬어야 하는
것이 아마도 스스로 콤플렉스(complex)가 되어 그 카무풀라주
(camouflage)의 제스쳐(gesture)였을 것이다.
조금 더 나가 노변의 소규모 허브찜질방(?) 앞에 당도했을 때다.
내 옆에 멈춘 한 승용차(suv)에서 퍽 세련된 매력녀가 내렸다.
아까, 장호원으로 가는 도중에 길가에서 휴식중인 나를 인상깊게
보았는데 면대하게 되어 기쁘단다.
1996년 제주 해안도로의 자전거 일주때 삼방산 자락 사계리 이조
도시락집에서 겪은 경우와 어찌나 흡사한지.
나와 무관하게 주차할 차인데 그녀는 이것저것 간식거리가 담긴
도시락을 차 안에서 꺼내어 내게 내놓았다.
누군가 주인이 따로 있는 도시락인데 내게 준다는 느낌이었다.
캐나다 이민 수속중이라는 30대후반의 김종숙, 그녀는 내 주저를
의식했나 측은지심에서 그러는 것이 아니라고 강조했다.
내 이미지에 빨려들었다는 그녀의 말을 믿고 있는 것인가.
분수도 모르는 늙은이처럼.
그러나 묘한 일이다.
이후, 컨디션이 정상을 회복했으니까.
거들떠보지도 않은 식당녀가 있었는가 하면 임자있는 도시락까지
내밀며 관심갖어준 김종숙도 있었다.
칭찬은 고래도 춤을 추게 한다?
11월 11일을 PePeRo-day 대신 가래떡데이라던가.
그러고 보니 그녀가 준 도시락에는 가래떡이 있었는데 정녕 연인
에게 갈 것이 내게로 온 것인가.
교도소 유감
군부대 앞에서 면회를 기다리는 가족이나 친지들의 표정은 으레
환하고 힘차 보인다.
반가움의 엔도르핀이 생성돼서 그럴까.
그런데, 상승대 앞에 있는 이들이 모두 그늘져 보였다.
아마, 우울한 교도소를 연상하는 내 선입감 탓일 것이다.
그렇다.
상승대는 육군교도소다.
국군의 창설 이듬해인 1949년에 군법죄자 수용을 목적으로 생긴
육군형무소가 피난생활을 청산하고 경기도 성남으로 옮겼다.
그리고, 남한산성 옆에 있다 해서 소위 '남한산성'으로 불렸다.
일반 형무소처럼 이름을 교도소로 바꿨고, 1985년에 경기 이천시
장호원읍 이황3리, 설성산 자락인 현 위치로 이전했단다.
풍수지리를 참고했을까.
님비(Nimby)현상이 극에 달한 이즈음이라면 주민들의 이전 반대
시위가 한동안 계속됐을 기관인데.
군인이 어찌하다 저지른 과오 때문에 수용되는 감옥이다.
군이라는 특수사회의 생활 자체가 감옥에 다름 아니라는데 영어
(囹圄)의 몸이라면 혈기 발랄한 젊은이가 어찌 머물 곳이겠는가.
"새로운 미래를 개척하는 선진 교도행정으로 따뜻한 정이 흐르는
교정교화의 친절하고 공정한 열린 공간" 운운하고 있지만....
문득, 영남대로에서 가슴 아팠던 김재옥 여교사 가족(옛길: 영남
대로단상 4번글 참조) 사건이 떠올라 섬뜩했다.
고재봉 일병이 억울하게 저 교도소에 갇히지 않았더라면 참혹한
연쇄적 비극도 발생하지 않았으련만.
교도소란 어떤 곳인가.
"징역형, 금고형 또는 노역 유치나 구류처분 받은 수형자와 재판
중에 있는 사람 등을 수용하는 행형기관"이 사전의 뜻이다.
그러나, 범죄자를 수용, 교정하는 장소라는 지당한 답이 정답일
수 없는 현실이 개탄스럽다.
'유전무죄 무전유죄'의 절규에 함축된 페이소스(pathos), 운수의
차이일 뿐 감옥 안과 밖의 차이가 뭐냐는 항변이 왜 나오겠는가.
잔챙이들만 가둬둘 뿐 대도(大盜), 중범자(重犯者)들과는 무관한
곳이라면 당연히 사전이 오류를 범한 것 아니겠는가.
더구나 옛일은 다 논외로 하더라도, 대한민국 백일천하에서 정권
유지를 위해 날조된 죄인이 얼마나 많이 감옥을 채웠던가.
법치라는 칼에 희생당한 무고한 이들을 다 열거할 수 있겠는가.
진정 법대로 라면 칼자루와 칼끝의 관계가 얼마나 많이 뒤바뀔까.
교도소 안과 밖의 주인공이 얼마나 많이 바뀌어야 할까.
교도소 지붕에 백기가 나부끼는 것보다 이 분별이 교도소 존립의
본질이 아닐까.
이천시 중심가까지 강행
상승대 입구는 문드러니고개다.
이 고개를 넘은 선비 9명중 4명이 대과에 급제했단다.
그래서 고개 이름을 문득현(文得峴: 글을 얻은 고개)이라 했는데
'문드러니'로 구전되었다는 것.
상승대 면회실이 있고 그 효과인 듯 소규모 상권이 형성되었다.
문드러니고개를 가로지르는 한 등산팀을 만났다.
한남정맥 독조지맥(獨朝支脈) 종주중이라 했다.
한남정맥 문수봉(용인)에서 분기한 앵자지맥이 독조봉에서 다시
분화해 건지산 ~ 대덕산 ~ 설성산 ~ 문드러니고개 ~ 철갑산 ~
여주시 점동면 청미천으로 떨어지는 지맥을 타는 중이라고.
정맥도 맥빠지거늘 무한개발중인 지맥에 얼마나 지칠까.
그럼에도, 늙은이가 분수도 모르고 또 끼의 발동을 느끼는가.
지금껏, 오전 내내 힘겹게 걷고 있으면서도 그들과 함께 산으로
내빼고 싶다니.
3번국도는 고개 이후 잠시 설성면땅을 지나다가 여주군 가남면
은봉리를 통과한다.
은봉2리 길 우측의 전원단지 같은 건물들이 시선을 끌었다.
의료법인 고려의료재단 여주 세민 / 순영병원이다.
도시의 고층병원에 익숙해진 머리에는 충격이 아닐 수 없다.
저런 분위기에서는 의료서비스의 질과 무관하게 병이 절로 낫게
될 것만 같은 느낌이었으니까.
재작년 봄, 나는 쇄도해오는 지방의 환자들에게 서울을 양보하고
역으로 지방병원에 입원한 적이 있었다.
그 때, 이같은 분위기의 병원 정보가 있었다면 당연히 그리 달려
갔을 것이다.
이 병원은 유감스럽게도 정신과 전문병원이리니까.
치료는 커녕 낫던 병도 도지고 생병이 날 것만 같은 서울의 병원
으로만 몰려드는 현상이 참으로 안타깝다.
질좋은 의료 혜택을 바라는 마음이야 이해하지만 치료가 의료의
질만으로 되는 것인가.
음죽과 20리인 '장등점'(長磴店)은 여주군 가남면의 다운타운인
태평2, 4리다.
'선비 또는 섬배'로 불렸는데 한양 과거길의 선비들이 다 이 곳에
묵어서 선비마을이라 했단다.
또한, 선비들이 오직 글읽는데만 몰두함으로서 마을 사람 모두가
만사 태평했다 하여 태평리(太平里)라 부르게 되었다니까.
3번국도 구길을 따라 양화천 전천교(前川橋)를 건넜다.
태평리 앞개울에 놓였다 해서 전천교란다.
가남우체국에서 노자를 찾고 식육점식당에서 아침에 푸대접받은
몫까지 충분히 대접받았다.
김치찌개는 역시 푸줏간식당이 최고인 것이 그간의 내 경험이다.
장평삼거리, 대월휴게소를 지남으로서 다시 이천시로 환원됐다.
2011년에 개통예정이라는 성남 ~ 장호원간 도로 공사가 3번국도
(부발읍 응암리 앞)를 가로지르며 한창 진행중이다.
영동고속도로 이천IC, 사동삼거리, 하이닉스반도체 등을 지나서
이천시 중심가 목전에 도착했다.
하이닉스 외에도 현대엘리베이터, OB맥주공장, 신세계푸드 물류
가공센터 등 대규모 공장과 아파트들로 다운타운 못지 않다.
여기에도 찜질방이 있으나 아직 해가 남은데다 아침 나절과 전혀
다른 다리를 그냥 놀릴 수 있는가.
중심가 중리동까지 진출했다.
찜질방을 물었는데 젊은이는 무조건 자기를 따라오란다.
그는 직장때문에 부천에서 옮겨와 1개월 갸량 이용했다는 찜질방
앞까지 안내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