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의 삶을 '의식의 흐름' 기법을 통해 심리적·비유적으로 그린 작품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À la recherche du temps perdu〉로 널리 알려졌다.
생애와 작품
아버지 아드리앵 프루스트는 프랑스 일리에의 유서깊은 집안 출신으로, 나중에 위생국 총감, 파리대학교 의학부 교수를 지낸 저명한 외과의사였다. 어머니 잔은 부유한 유대계 가문인 베유 집안의 딸로, 파리 코뮌 이후의 혼란기에 숙부의 별장이 있는 오퇴유로 피난가서 마르셀을 낳았다. 어린 마르셀에게 천식 발작이 처음 일어난 것은 1880년이었고, 그는 이 질환 때문에 평생 고통에 시달렸다. 어린시절에 마르셀은 일리에나 오퇴유(이 두 곳이 그의 소설에 콩브레로 나옴), 또는 외할머니가 살고 있는 노르망디 해안의 휴양지로 가서 휴가를 보내기도 했다. 콩도르세 중·고등학교시절(1882~89)에는 학급 잡지에 글을 썼고 샹젤리제에 사는 예쁜 소녀 마리 드 베나르다키와 첫사랑에 빠졌다. 사교계 여인을 어머니로 둔 친구들 사귀었고, 철학교수 알퐁스 다를뤼의 영향을 받았다. 그는 오를레앙에서 군복무(1889~90)를 마친 뒤, 에콜 데 시앙스 폴리티크에 입학하여 법학(1893)·문학(1895)부문에서 학사학위를 받았다. 이 학교에 다니는 동안 그는 철학자 앙리 베르그송(마르셀의 6촌 매부였음)과 폴 데자르댕 및 역사학자 알베르 소렐의 영향을 받았다. 한편 마르셀은 스트로스, 아르망 드 카야베, 오베르농, 마들렌 르메르 부인 등의 살롱을 드나들면서 귀족계급의 가장 배타적인 객실을 관찰할 수 있는 단골이 되었다. 1896년에 그는 재치 있고 깊이 있는 단편집 〈즐거움과 나날 Les Plaisirs et les jours〉을 출판했는데, 이 책에 실린 작품들은 대부분 1892~93년에 잡지 〈방케 Le Banquet〉·〈르뷔 블랑슈 La Revue Blanche〉에 발표된 것들이었다. 1895~99년에 그는 자전적 소설 〈장 상퇴유 Jean Santeuil〉를 썼다. 이 소설은 미완성으로 끝난데다가 구성이 잘못되어 있지만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서 비로소 빛을 발한 그의 천재성이 나타나 있다. 이무렵부터 그는 사교계와 점점 멀어졌다. 건강이 나빠진 것도 이유였지만, 1897~99년에 드레퓌스 사건에 적극적으로 개입해 알프레드 드레퓌스의 구명운동에 참여함으로써 보수적인 상류귀족들과 관계가 서먹해졌기 때문이었다. 프루스트는 청원인단을 조직하는 데 협력했으며, 사회적으로 축출당할 위험을 무릅쓰고 드레퓌스의 변호인인 라보리를 옹호했다(프루스트는 실제로 축출되지는 않았지만 이 체험으로 귀족사회에 대한 미몽에서 깨어날 수 있었으며, 나중에 그의 소설에서도 재현됨). 1899년에 그는 존 러스킨의 예술평론을 만나면서 그동안 써온 〈장 상퇴유〉를 도중에 그만두고, 자연의 아름다움과 고딕풍 건축물에서 새로운 계시를 추구하게 된다. 특히 고딕풍 건축은 그가 보기에 영원에 대항하는 인간의 상징물이었다. 그는 "우주는 문득 내 눈앞에서 헤아릴 수 없는 가치를 새롭게 획득했다" 라고 쓰고 있다. 이러한 깨달음을 더욱 추구하기 위해 그는 1900년에 어머니와 함께 베네치아를 방문하고 프랑스의 성당들을 찾아 여행하면서 러스킨의 〈아미앵의 성서 Bible of Amiens〉·〈참깨와 백합 Sesame and Lilies〉을 번역했으며 서문을 쓰고 주를 달았다. 이 서문에는 원숙기에 이른 그의 산문 어투를 처음으로 볼 수 있다.
1903년에 아버지가 죽고 1905년에 어머니마저 죽자 외톨이가 된 그는 깊은 슬픔에 사로잡혔지만, 경제적으로 독립하여 방대한 장편소설을 마음껏 시도해볼 수 있게 되었다. 1905~06년에는 이 장편소설의 초기 형태가 적어도 하나는 탈고되었다. 1907년에 쓰기 시작한 장편소설의 또다른 형태는 1908년 10월에 쓰레기통으로 들어갔다. 이 소설을 쓰는 동안 프루스트는 〈르무안 사건〉(나중에 〈이발사 Le Figaro〉라는 제목으로 출판)이라는 패러디(발자크, 플로베르, 르낭, 생 시몽 등 프루스트가 좋아하는 프랑스 작가들의 문체를 풍자적으로 모방한 글) 연작을 썼으며, 이를 통해 자신의 문체에서 이질적인 영향을 제거하려고 애썼다. 이어서 프루스트는 그때까지 자신의 소설에 부족했던 철학적 기반을 확립할 필요를 느끼고, 〈생트 뵈브에 대한 반론 Contre Sainte-Beuve〉을 썼다. 여기서 그는 문학을 교양 있는 지성인의 오락으로 간주한 프랑스의 비평가 생트 뵈브의 견해를 반박하고, 우리가 습관 때문에 미처 보지 못하는 살아 있는 현실을 깊이 감추어진 무의식적 기억의 세계에서 해방시키는 것이야말로 예술가의 임무라는 문학관을 제시했다. 1909년 1월에 그는 달고 부드러운 비스킷(그의 소설에서는 마들렌 과자)을 곁들여 차를 마시다가 무의식적으로 어린시절의 기억이 되살아나는 것을 실제로 체험했다. 5월에는 그의 소설 주인공들이 그의 수필에 침투했고, 바로 그해 7월에 그는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쓰기 시작했다. 그는 1907~14년에 휴가를 보낸 노르망디의 해변 휴양지 카부르(그의 소설에는 발베크로 나옴)에서 만난 '매력적인 젊은 여인'과 결혼할 생각을 하고 있었지만, 결혼하는 대신 집안에 틀어박혀 소설 쓰기에 몰두한 결과 1912년 9월에 초고를 완성했다. 첫번째 권인 〈스왕네 집 쪽으로 Du côté de chez Swann〉는 유수한 출판업자인 파스켈과 올렌도르프에게 퇴짜를 맞았고, 소설가 앙드레 지드가 이끄는 지적인 잡지 〈누벨 르뷔 프랑세즈 La Nouvelle Revue Française〉에서도 거절당했지만, 1913년 11월 진보적인 젊은 출판업자 베르나르 그라세는 저자가 준 돈으로 이 책을 발행하여 약간의 성공을 거두었다. 당시 프루스트는 2권만 더 쓸 계획이었지만, 비서인 알프레드 아고스티넬리가 도망가서 죽은 데 따른 고통과 제1차 세계대전의 발발로 후속권을 서둘러 내놓지 못한 것은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전쟁 동안 그는 소설의 나머지 부분을 재검토하여 감정과 짜임새 및 구성을 더욱 풍부하고 깊이 있게 다듬었으며, 사실주의적·풍자적인 요소를 늘리고, 분량도 3배로 늘렸다. 그는 초기 단계에서는 아직 자신의 능력을 최대한으로 발휘하지 못했지만, 이 방대한 수정작업을 통해 그의 소설은 인간의 상상력이 이룩한 가장 심오하고 완벽한 위업으로 탈바꿈했다. 1914년 3월에 〈누벨 르뷔 프랑세즈〉는 〈스왕네 집 쪽으로〉를 거절한 것을 후회한 앙드레 지드의 부추김을 받아 그의 소설을 인수하겠다고 제의했지만, 이번에는 프루스트가 거절했다. 그러나 1916년 5~9월에 벌어진 협상은 성공적이었고, 1919년 6월에 〈꽃핀 소녀들의 그늘에서 À l'Ombre des jeunes filles en fleurs〉가 〈스왕네 집 쪽으로〉의 재판 및 〈모작과 작문집 Pastiches et mélanges〉과 동시에 발표되었다. 〈모작과 작문집〉에는 〈르무안 사건〉과 러스킨 번역의 서문들을 비롯하여 잡다한 글들이 실렸다. 1919년 12월에 〈꽃핀 소녀들의 그늘에서〉는 레옹 도데의 추천으로 공쿠르상을 받았고, 프루스트는 세계적인 저명 인사가 되었다. 〈꽃핀 소녀들의 그늘에서〉에 이어 〈게르망트가의 사람들 Le Côté de Guermantes〉·〈소돔과 고모라 Sodome et Gomorrhe〉는 그가 살아 있는 동안 그의 최종 교정을 거쳐 세상에 나왔다. 그는 파리에서 폐렴으로 죽었다. 원래 폐가 약했지만, 많은 사람들은 그것을 건강에 대한 지나친 걱정이 초래한 일종의 심기증으로 오해했다. 그는 마지막까지 〈갇힌 여인 La Prisonnière〉의 교정작업에 몰두하다가 쓰러져 죽었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마지막 부분인 〈갇힌 여인〉·〈사라진 알베르틴 Albertine disparue〉(원래 제목은 〈자취를 감춘 여인 La Fugitive〉이었지만 프루스트가 직접 새 제목으로 바꾸었을지도 모름)·〈되찾은 시간 Le Temps retrouvé〉은 그가 죽은 뒤에 출판되었기 때문에 교정작업이 어느 정도 진행되기는 했지만 그의 최종 교정은 거치지 못했다.
프루스트의 방대한 편지(지금까지 3,000통의 편지가 출판되었고, 그보다 더 많은 수의 편지가 출판될 예정임)는 우아하고 고상한 문체와 사상뿐만 아니라 그의 존재를 생생하게 전달해주는 것으로 주목할 만하며, 위대한 예술가의 우주를 이루고 있는 원료로도 매우 중요하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는 프루스트가 진리 추구라는 우의적 형태를 통해 자신의 인생을 이야기한 작품이기 때문이다.
맨 처음에 중년의 화자가 갖고 있는 어린시절의 기억은 집안의 친구인 스왕이 놀러온 어느날 저녁의 일뿐이다. 화자는 그날 저녁 어머니에게 잘 자라는 키스를 해달라고 조르다가 거절당한 기억을 중년이 될 때까지 간직하고 있다. 그러나 어느날 화자는 우연히 마들렌 과자를 곁들여 차를 마시다가 무의식 속에 묻혀 있던 기억을 되찾는다. 어린시절 휴가를 보낸 콩브레 마을의 풍경과 사람들이 기억에 되살아난 것이다. 사랑과 질투에 대한 불길한 여담 속에서, 독자는 스왕(상류사회에 받아들여진 유대인 예술 애호가)이 화자가 태어나기 몇 년 전에 부유한 부르주아인 베르뒤랭 집안의 살롱에서 만난 창녀 오데트에게 품고 있는 불행한 열정을 알게 된다. 사춘기에 이른 화자는 샹젤리제에서 질베르트(스왕과 오데트 사이에 태어난 딸)와 사랑에 빠진다. 발베크 해변에서 휴가를 보내는 동안 그는 잘생긴 젊은 귀족 생 루와 생 루의 괴짜 삼촌인 샤를뤼 남작, 그리고 알베르틴이 이끄는 소녀들을 만난다. 화자는 게르망트 공작부인을 사랑하게 되지만, 가을에 생 루가 사는 요새도시 동시에르를 방문한 뒤 다시 사교계에서 공작부인을 만났을 때는 사랑의 열병에서 깨어난다. 그가 게르망트의 세계를 여행하는 동안 겉보기에만 그럴 듯한 그 세계의 시와 지성은 뿔뿔이 흩어지고, 공허하고 빈약한 참모습이 드러난다. 샤를뤼는 늙은 재봉사인 쥐피앵과 젊은 바이올린 연주자인 모렐을 쫓아다니는 동성연애자임이 밝혀지고, 그때부터 소돔과 고모라의 타락한 악덕이 소설 전체에 만연한다. 발베크를 2번째로 찾아갔을 때, 화자는 알베르틴이 동성연애자가 아닐까 의심하고 알베르틴을 파리로 데려와 가두어놓는다. 화자는 샤를뤼가 베르뒤랭 집안 사람들과 모렐에게 비극적으로 배신당하는 것을 목격하지만, 그 자신의 질투와 열정은 알베르틴의 도망과 죽음으로 더욱 강해질 뿐이다. 화자가 그의 사랑을 망각하면서 시간도 함께 잃어버리고, 그가 그때까지 추구해서 얻은 모든 것에서 아름다움의 의미가 서서히 사라진다. 그리고 화자는 항상 쓰고 싶어했던 책을 단념한다. 오랫동안 요양원에 들어가 있던 화자는 전쟁 때 잠시 파리를 방문하여 폼페이나 소돔처럼 공중폭격을 받아 파괴된 파리를 목격한다. 자신의 악덕 때문에 허물어진 샤를뤼는 쥐피앵의 지옥 같은 매춘굴에서 발견되고, 질베르트와 결혼한 뒤 동성연애자가 된 생 루는 전쟁터에서 영웅적으로 싸우다가 전사한다. 전쟁이 끝난 뒤 게르망트 공작부인의 오후 리셉션에서 화자는 무의식 속에 묻혀 있다가 되살아난 일련의 기억을 통하여 자신이 과거에 경험한 모든 아름다움은 영원히 살아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시간을 되찾은 그는 죽음과 경주를 벌이면서 독자가 지금까지 읽은 바로 그 소설을 쓰기 시작한다.
프루스트의 소설은 순환구조를 갖고 있으며, 소설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계시의 관점에서 고려되어야 한다. 작가는 되찾은 시간의 시간 외적인 가치를 복원하고 있으며, 그의 주제는 구원이다. 다른 유형의 구원도 주제와 대조를 이루며 제시되어 있다. 화자의 부모는 타고난 선량함으로 구원을 받고, 위대한 예술가들(소설가 베르고트, 화가 엘스티르, 작곡가 뱅퇴유)은 예술의 이상적인 모습을 통해 구원을 받고, 스왕은 사랑의 고통을 통해 구원을 받으며, 샤를뤼조차도 리어 왕처럼 웅장한 타락을 통해 구원을 받는다. 프루스트의 소설은 궁극적 으로 낙천적이며, 인간의 종교적 체험을 배경으로 삼고 있다. 작품의 화자는 시간을 되찾는 순간, "내 작품의 재료는 나 자신의 과거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라고 말한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특성은 이 작품이 작가 자신의 인생을 이야기한 우화로서 프루스트 자신이 갖고 있는 의미에 있다. 작가는 이 작품에 나오는 사건·장소·등장인물들을 바로 자신의 인생에서 채택했다. 작가는 잃어버린 시간을 찾는 동안 아무것도 창조하지 않고 모든 것을 바꾸었을 뿐이다. 즉 사실들의 기본적인 통일성과 보편적인 의미가 드러나도록 사실들을 고르게 융합하고 변형시켜, 내적으로는 자신에게 작용하게 하고 외적으로는 인간 조건의 모든 측면에 작용하게 한 것이다. 이런 점에서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는 다른 주요소설들뿐만 아니라 요한 볼프강 폰 괴테의 〈시와 진실 Dichtung und Wahrheit〉이나 샤토브리앙의 〈죽음 저편의 회상 Mémoires d'outretombe〉 같은 자서전과도 공통점을 갖고 있다. 독창적·상징적인 이 2권의 자서전은 모두 프루스트에게 영향을 주었다. 프루스트는 자신의 성도착을 등장인물들에게 투사하여 속물 근성과 허영심 및 잔인함뿐만 아니라 성도착을 원죄의 주요상징으로 다루었다. 여성에 대한 그의 통찰과 여성에 대한 남성의 사랑(그는 소설 여주인공의 원형인 많은 여자들에게 사랑을 느꼈음)을 손상하지 않고 통찰했다. 그는 이성애와 동성애의 두 분야에서 가장 위대한 소설가에 속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