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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살아지는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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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자료실 스크랩 [선禪, 병통과 치유] 6 ~ 10
그냥 추천 0 조회 4 13.01.30 12:58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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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유리병자선(琉璃甁子禪)

 

현실에 부딪히면 금방 박살나는 선수행

번뇌 소굴서도 마음 평온해야 참 수행자

 

유리는 맑고 투명해서 청정을 상징하지만 잘 깨진다는 단점이 있다. ‘유리병자선(琉璃甁子禪)’이란 ‘유리병처럼 살짝만 부딪혀도 깨지는 선(禪)’ 또는 ‘유리병처럼 툭하면 깨져 버리는 선수행’을 가리킨다.

번뇌를 만나면 부서지기 쉬운 선, 현실에 부딪히면 금방 박살나 버리는 선수행을 유리병자선이라고 한다.


‘마음이란 그림을 그리는 화가와 같다’는 ‘화엄경’의 법문처럼, 마음은 갖가지 번뇌 망상을 연출해 낸다. 아직 벌어질 기미도 없는 일을 태산처럼 걱정한다거나 혹은 타인이 나를 해칠 것으로 생각하여 미리 견제한다거나 미래에 대한 지나친 불안감으로 번민하는 등 스스로 불안 초조, 근심 걱정을 만들어 낸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 마음을 닦기 위하여 조용한 산사(山寺)나 수행처를 찾는다. 그런 곳은 조용하고 한가해서 가기만 해도 금방 마음이 평온해지고, 4, 5일쯤 되면 무언가 달라졌다는 느낌을 받는다. 복잡한 외부와 차단되어 있기 때문인데, 한결같은 공통점은 마음이 평온해졌다는 것이다. 환경적인 요인이 아니고 수행의 결과라는 것이다.
그러나 고요한 산속을 떠나 다시 세속으로 내려오면 수행의 힘은 여지없이 박살나고 도루묵이 되어 버린다. 언제 수행했던가 하고 반문할 정도로 원위치로 되돌아간다. 이런 수행은 단순한 환경적 요인에 의한 일시적인 현상일 뿐, 아무런 힘이 없다.


현실에 부딪히면 그대로 깨져 버리는 수행, 조금만 부딪혀도 산산조각이 나버리는 선수행, 그것이 유리선(瑠璃禪), 유리병자선이다. 특히 마약 중독자처럼 몇 달에 한번씩 주기적으로 수행처를 들락거리는 이들은 모두 유리병자선을 닦고 있는 이들이다.


유리병자선이라는 말은 원오극근(1063∼1135)의 어록에 처음 나온다.


‘참으로 바른 종안(宗眼, 正眼)을 얻지 못한다면 금강처럼 단단한 밤송이를 삼킬 수 없을 것이다.’

오조법연화상(원오의 스승)이 항상 말씀하시기를 ‘지금(송초) 여러 선원에서 참구하고 있는 선은 마치 유리병과 같다.

아끼고 보호해서 버리지 못하는 것을 제일로 삼는다. 나 노승으로 하여금 보게 하지 말라.

(보게 한다면) 철퇴를 가지고 부숴버릴 것이다.’라고 하셨는데, 내가 처음 화상으로부터 이 말씀을 듣고 곧 마음을 다하여 그것을 참구하였다(원오어록 12권)

(不得正宗眼. 便是跳金剛圈栗棘蓬不得也.

五祖和常云. 諸方參得底禪, 如琉璃子相似,

愛護不捨第一. 莫老僧見.

將鐵鎚一擊爾底碎定也. 山僧初見他如此說, 便盡心參他. ‘원오어록’ 12권).


즉, 아끼고 보호해서 버리지 못하는 것을 제일로 삼는다는 말은 현실을 피하여 조용한 곳에서 가만히 앉아 있기만 하는 것, 복잡한 일을 피하여 한가하게 지내는 것을 가리킨다.


또 원오선사는 ‘선사(先師, 입적한 스승, 즉 오조법연)께서 항상 말씀하시기를 유리병자선을 배우지 말라하셨다. 너무 가벼워서 사람들과 접촉하기만 해도 곧 산산이 부서져 버린다(先師常云. 莫學琉璃子禪, 輕輕被人觸著, 便百雜碎. ‘원오어록’ 13권).’라고 했다.

유리병처럼 현실에 부딪히면 그대로 박살나 버리는 선은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이다.


대혜선사도 ‘서장’에서 수없이 “고요한 곳(靜處)에서 수행, 그것 누가 못하느냐? 관건은 시끄러운 곳(鬧處)에서도 수행의 효과가 발휘되어야 한다” “고요한 곳(靜處)에서 수행하는 것은 시끄러운 곳(鬧處)에 대응하기 위함이다.’라고 강조하고 있는데, 요즘 수행자들도 귀 기울여야 할 것이다.

 

깨달음이나 현실에 안주하고 있는 것을 ‘유리전상(瑠璃殿上)’이라고 한다. ‘유리로 만든 궁전 위에 있다’는 말인데, 살짝만 쳐도 ‘쨍’하고 깨지는 궁전, 그것도 깨달은 것이라고 애지중지하는 이도 있다. 강철은 불에 들어갈수록 단단해진다. 번뇌의 소굴 속에서도 마음이 평온해야 진정한 수행자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7. 문자선(文字禪)-上

 

선의 진수나 심오한 이치 문자로만 해석

문학적 수사에 치중해 언어유희 비판도

 

‘문자선’이란 선의 진수나 심오한 이치를 언어문자로 표출·해석하는 것, 또는 고칙·공안 등을 언어적으로 풀이·해설·설명하는 것을 말한다. 즉 좌선을 통한 실제적인 참구보다는 선시(禪詩)나 게송 등 운문으로 선의 세계를 표출하는 것, 혹은 이론적·학문적·교학적으로 따지고 탐구하는 것을 말한다.


문자선의 시작은 고칙과 공안에 대하여, 게송이나 염고(拈古, 산문체 해설)·송고(頌古, 운문체 설명)·대어(代語, 대신 말함), 별어(別語, 별도로 말함)·평창(評唱, 산문체의 염송 해설)·착어(着語, 짧은 촌평) 등 주로 짧고 간결한 시적(詩的)인 언어를 통하여 표출·설명하기 시작한 송대(宋代, 북송)부터이다. 이것이 문자선이 탄생하게 된 동기인데, 여기서 출현한 것이 선문학의 백미이자 유명한 공안집인 분양선소(汾陽善昭, 947-1024)의 ‘송고백칙(頌古百則)’과 ‘공안대별백칙(公案代別百則)’ 그리고 설두중현(980-1052)의 ‘설두송고백칙’ 등이다. 특히 대혜종고의 스승인 원오극근(1063-1135)의 ‘벽암록’은 문자선의 극치였다고 할 수 있다.


선의 세계를 게송이나 착어 혹은 선시(禪詩) 등을 통하여 에둘러 표현하는 이른바 요로설선(繞路說禪)은 때로는 말장난에 그치는 문자선을 탄생시켰지만, 긍정적으로는 ‘선문학’이라는 새로운 장르를 낳았다. 특히 송대 사대부와 지식층 그리고 문인들이 선에 깊이 매료되어 선문화를 꽃피웠던 것은 선과 시(詩)의 만남 곧 선문학의 특성 때문이었다.


그러나 선(禪)은 학문적 언어적인 탐구를 통하여 알 수 있는 대상이 아니다. 선은 언어문자를 떠나서(不立文字) 마음으로 체득(心得)하여 진리불(眞理佛)인 법신과 하나가 되는 것이 선이다(一如). 비록 그 표현 방법과 수단은 언어문자를 쓰고 있지만(不離文字), 그 진수는 언어문자가 미치지 못하는 곳에 있다(言語道斷).


결국 문자선은 선의 이치를 드러내는 데 힘쓰기 보다는 문학적인 수사(修辭)나 기교, 시작(詩作) 등에 치중하게 되었고, 언어적 유희라는 비판을 낳게 되었다. 또 선어(禪語)의 표면적인 뜻에 가려서 정작 진실을 보지 못한다거나, 지나친 언어적 풀이나 문자적 해석으로 말미암아 선의 본질과 멀어지게 되었다.

비판은 드디어 ‘문자선’, ‘암흑두(唵黑豆)’, ‘문자법사(文字法師)’ 등 원색적인 신조어를 탄생시켰다.


암흑두(唵黑豆)란 문자를 읽고 있는 것을 말한다. 암(唵)은 우물우물 씹는다는 뜻이고, 흑두(黑豆)는 검은 콩으로, 문자를 가리킨다. ‘입으로 문자를 읽다’는 뜻인데, 과거 1980년대 초 운동권에서 학자나 공부에 열중하고 있는 학생들을 두고 ‘먹물들’이라고 비꼬아 말한 적이 있는데, 같은 말이다. 민주화 등 현실적인 문제는 도외시한 책상 앞에서 책이나 보고 있는 답답한 친구들이라는 말이다.


그리고 문자법사(文字法師)란 오로지 경전이나 논서에만 매달리는 사람, 또는 경전만 연구할 뿐, 참선에는 뜻을 두고 있지 않는 사람을 비하하는 말이다.


문자적으로 해석하는 사람, 교학만 하고 선수행은 하지 않는 사람, 종지(宗旨)는 모르고 말이나 언어문자에만 얽매여 있는 수행자를 비방하는 말이다. 그 밖에 언어문자로 반야지혜를 표현, 설명하는 것을 ‘문자 반야’라고 한다.


문자선에 대한 비판은 많은 선승들이 언급했지만, 그중에서도 톱(top)은 간화선의 거장 대혜선사(1089-1163)일 것이다. 그는 ‘서장’과 ‘보설’ 등에서 밤하늘의 별처럼 비판했다.


특히 무자화두를 참구할 때 주의해야 할 열 가지 사항인 ‘무자화두 십종병(十種病)’에는 ‘언어적으로 (무자를) 참구하지 말라(不得向語路上作活計)’, ‘문자를 인용하여 해석하려고 하지 말라(不得向文字中引證)’ 등 묵조선 비판 못지않게 문자선을 비판했다.

 

시대적으로 문자선이 만연했기 때문이었는데, 이 시대(북송) 시(詩)나 게송으로 선의 심의(深意)를 표출했던 선종의 송고문학(頌古文學)은 가히 르네상스를 이루었다고 할만하다. 

 

 

 

8. 문자선(文字禪)-下

 

문자선 오해해 아예 책 보지 말라는 건 무지

소가 마신 물 우유 되듯 지혜롭게 쓰면 양약

 

‘문자선’이라고 한다면 그 범위는 매우 넓다. 직접적인 의미, 비판적인 의미로는 참선은 하지 않고 언어문자, 또는 이론적, 학문적으로만 선을 탐구하는 것을 가리키고, 넓은 의미로는 선어록이나 공안에 대한 해석 및 주석, 풀이도 모두 문자선에 속한다.


또 오늘날 선(禪)과 관련 글이나 논문 등도 모두 문자선이고, 더 거슬러 올라가면 ‘임제록’, ‘벽암록’, ‘무문관’ 등 선어록도 모두 문자선이다.


간화선의 거장 대혜 선사는 문자선 비판의 최전방에 있었지만, 무려 30여 권에 달하는 어록을 남겼다(대혜보각선사어록 30권). 그는 고칙, 공안에 대해서도 가장 많은 게송과 착어를 붙였는데 그 책이 ‘정법안장’이다.


선승들이 문자선에 대하여 주의를 주는 것은 문자의 표면적인 뜻에 착(着, 집착, 매달림)한 나머지 문자 이면의 진정한 메시지를 파악하지 못하기 때문인데, 납자들 가운데는 문자선을 오해하여 아예 글자를 경시, 도외시하는 이들도 적지 않다.


그 결과 스스로 무식을 자초하여 한문 한 줄도 읽지 못하는 눈먼 맹선(盲禪)이 되어 버린다. 문자를 알되 너무 거기에 집착하지만 않으면 되고, 또 선어(禪語)의 분명한 뜻을 확실하게 알면 되는데, 문자를 원수로 여긴 나머지 ‘구더기 무서워 장 못 담근다’는 속담을 어김없이 실천해 버렸으니, 이야말로 어리석음이 지나친 것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불교수행의 목적은 탐진치 삼독을 제거하여 반야지혜를 성취하자는 것인데, 어리석음(무지)을 얼싸안고 있는 것이다.


예컨대 ‘무사(無事)’란 ‘심중무일사(心中無一事)’의 준말로서, 일생사를 다해 마친 사람, 깨달음을 이루어서 더 이상 해야 할 과제가 없는 사람, 더 이상 배울 것이 없는 사람(無學)을 뜻한다.


그런데 이 말을 착각하여 아무런 생각도, 의식도 없이 조용한 곳에서 한가하게 지내는 것이 ‘무사’라고 착각한다거나, ‘일일시호일(日日是好日)’을 착각하여 날마다 빈둥빈둥 세월만 죽인다면 이야말로 무식의 성찬이 아닐 수 없다.


참선수행에서 교학적 이론적 바탕은 필수이다. 선(禪) 역시 ‘화엄경’, ‘유마경’, ‘금강경’, ‘열반경’, ‘대승기신론’ 등 대승경전과 논서를 바탕으로 이론과 수행체계가 정립되어 있다. 그리고 그 이론적 체계를 바탕으로 법문을 하고 납자들을 교육시키는데, 경전을 보지 말라고 한다면 그것은 모순으로 혜안을 갖춘 선승이라고 할 수 없다.


좌선당에서만 보지 말라는 것이고, 또 경전을 보되 거기에 매달려 진실을 보지 못한다거나 실참을 게을리 해서는 안 된다는 것만 깊이 각인시켜 주면 되는데, 애시당초 보지 말라고 한다면 무지한 선지식이다. 수행자들을 망치고 있는데 이것을 일맹인중맹(一盲引衆盲, 한 명의 맹인이 많은 맹인을 이끌고 구렁으로 간다)이라고 한다.


선 수행 역시 참선에 대한 지식과 교학적 이해가 없으면 무엇이 옳은 것인지, 정(正)과 사(邪)를 구분하지 못한다. 자신은 분명히 정도(正道)를 걷는다고 생각하지만 의외로 사도(邪道)를 걷는 이가 적지 않다. 상당한 수행자가 도교적인 기공이나 단전호흡, 또는 타심통 같은 것을 기대하는데, 모두 무지하기 때문이다.


예컨대 한국에서 간화선의 교과서라고 한다면 무엇보다도 대혜종고의 ‘서장(書狀)’과 무문혜개의 ‘무문관’이다. 그런데 이 두 선서(禪書) 중 하나라도 읽고 화두를 참구하는 납자는 3할도 안 된다.


뱀이 물을 마시면 독이 되고 소가 물을 마시면 우유가 된다는 경전의 말씀과 같이, 수행은 하지 않고 문자나 익혀서 지식이나 자랑하고자 하는 사람, 아는 척, 깨달은 척 하는 사람에겐 독이 되지만, 지혜로운 이가 쓰면 더없는 양약이 된다. 정견을 갖추자면 경전과 선어록을 읽지 않으면 안 된다.

 

무엇이든 역기능과 순기능이 있다. 그러므로 장점을 활용만 하면 되는 것이다. 문자를 보지 말라고 극구 비판했던 선승치고 경전에 통달하지 않은 선승이 없다는 것이다.

 

 

 

9. 치선(癡禪)

 

썩은 고목처럼 마음 개발하지 못하는 것

지식만 동원해 禪 해석하는 광선도 병통

 

어리석으면 심적·육체적 고생이 끊이질 않는다. 지혜롭지 못하면 노력해도 성사되는 것이 없다. 치(癡)·치선(癡禪)은 탐욕(貪)·증오(嗔)·어리석음(癡) 가운데 하나로서, 만사를 패착(敗着)으로 귀결시킨다. 때문에 부처님께서도 인성(人性) 가운데 어리석음(무지)을 퇴출 대상 1호로 지목하셨다.


‘치선(癡禪)’이란 ‘어리석은 선’ ‘어리석은 선수행자’를 가리킨다. 아무런 교리적 바탕도 없이 무턱대고 그냥 앉아만 있을 뿐 지혜작용이 없는 선(禪), 썩은 고목처럼 앉아서 심지(心地, 마음)를 개발하지 못하는 선, 깨달음이 없는 선이 치선이다. 무엇이 올바른 수행이고 삿된 수행인지 모르는 무지몽매한 선객, 교학적 바탕이나 안목, 지견이 없는 선객을 치선자라고 한다.


보조국사 지눌(1158∼1210)은 ‘정혜결사문’에서 당시 참선자들의 유형을 두 가지로 나누어 논하고 있는데, 그것이 치선자(癡禪者)와 광선자(狂禪者)이다.


“만약 이와 같이 정과 혜를 함께 닦아나간다면(정혜쌍수) 만 가지 행이 깨끗하게 닦아질 것이다. 어찌 쓸데없이 묵(?)을 지키는 치선과 그저 다만 글자나 찾는 광혜자와 비교할 수 있겠는가?(若能如是, 定慧雙運, 萬行齊修, 豈比夫空守默之癡禪, 但尋文之狂慧者也).”


무지한 채 앉아서 졸기만 하는 것은 치선자이고, 유식한 척 지식이나 자랑하는 것은 광혜자(狂慧者=狂禪者)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치선과 광선에서 벗어나 올바른 수행을 하자면 정과 혜를 함께 닦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보조지눌이 주장하는 정혜쌍수(定慧雙修)인데, 치선도 문제지만 지식을 동원하여 선을 해석하는 광선(狂禪)도 큰 병통이라는 것이다. 또 ‘선림보훈음의’에서는 “치선이란 그저 선을 탐미하기만 할 뿐, 지혜가 개발되지 않는 것을 말한다. 예컨대 수주대토 등과 같은 유이다(癡禪, 耽味禪而未發慧曰癡禪. 如守株待?等)”라고 말하고 있다.


수주대토(守株待?)란 ‘한비자’에 나오는 우화적인 고사로서, 어리석은 사람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다. 중국 송나라 때 어떤 농부가 우연히 나무그루터기에 토끼가 부딪혀 죽은 것을 잡게 되었는데, 농부는 그 후에도 또 그와 같이 토끼를 잡을까 하여 일도 하지 않고 매일같이 그루터기만 지키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는 사이에 밭은 풀이 무성하여 황폐하고 말았다는 이야기이다.


치(癡)와 합성된 단어 가운데 좋은 말은 별로 없다. 치골(癡骨)은 어리석은 사람을 가리키고, 치행(癡行)은 어리석고 못난 행동을 뜻하고, 치정(癡情)은 어리석은 사랑으로 무지의 극치이다. 노래를 못 부르는 사람을 음치(音癡)라고 하고, 지능지수가 모자라는 바보를 천치(天癡), 백치(白痴)라고 하고, 책에 미친 사람, 책벌레를 서치(書癡)라고 하는데 때론 독서가의 애칭으로 쓰기도 한다. 정상적이던 지능이 대뇌의 질환으로 저하된 상태를 치매(癡)라고 하는데, 치병(痴病) 중에서도 가장 몹쓸 병이다.


선어록에는 ‘치인면전 부득설몽(痴人面前 不得說夢)’이라는 말이 자주 나온다. 어리석은 사람 앞에서는 가능한 꿈 이야기를 하지 말라는 것이다. 꿈은 사실이 아니지만 어리석은 사람은 찰떡처럼 믿기 때문이다.


임제선사는 자신의 법어집인 ‘임제록’에서 어리석은 수행자를 가리켜 ‘할려변(?驢邊)’ ‘할루생(?屢生)’ 등으로 표현하고 있다. 할려(?驢)는 눈먼 나귀로 정법의 안목이 없는 바보 같은 선승, 어리석은 선승을 비유하고, 할루생은 눈먼 사람으로 역시 안목이 없는 선승을 가리킨다. 임제선사가 임종 직전에 말했다.

 

“나의 정법안장이 저 눈먼 나귀(수행자)에게서 사라지게 될 줄 누가 알았겠는가? 말을 마치자 단정히 앉아 입적하셨다

(師云, 誰知吾正法眼藏, 向這?驢邊滅却, 言訖, 端然示寂. ‘임제록’21단).

 

치선의 치료법은 반야지혜이다. 반야지혜를 갖추자면 경전과 어록, 그리고 교학과 문자를 알아야 한다. 다음에는 그것을 사유하여 자기화 해야 한다. 그런데 요즘 어리석은 선승은 무조건 경전은 보지 말라고 하니 치선에서 벗어나기란 금생에는 불가능할 것이다.

 

 

 

10. 구두선(口頭禪)

 

입으로 선 참구하고 말로만 선 공부하는 것

말이 많은 사람치고 실천하는 경우 드물어

 

 

‘구두선(口頭禪)’이란 입으로만 선을 참구하는 것, 말로만 선(禪) 공부를 하는 것을 말한다.  일반에서도 ‘구두선’이라는 말은 자주 쓴다.


간혹 신문에 보면 ‘법적인 장치도 마련하지 않고 사회정의를 실현하겠다는 것은 구두선에 지나지 않는다’, 혹은 ‘사퇴는 구두선에만 그치지 말고 제발 실행하길 바란다’, ‘동반성장위가 아무리 동반성장을 목 아프게 외친들 대기업들이 동참하지 않는다면 구두선일 뿐이다’ 등등.


이처럼 구두선은 흔하게 접할 수 있는 말이다.


‘구두(口頭)’란 말·언어를 뜻하고, ‘두(頭)’는 어조사로 앞 글자를 명사화시키는 역할을 한다. 염두(念頭, 생각), 몰두(沒頭)처럼 동사에 붙어서 추상명사를 만들기도 한다.


구두선이란 실제적인 수행, 실제적인 참구는 하지 않고 단지 입으로만 공부한 척하는 것, 말로만 깨달은 양 “선이 어쩌니 도(道)가 어쩌니” 하고 떠드는 것을 말한다. 또는 그런 납자를 꾸짖는 말이 구두선인데, 다른 말로는 ‘구두삼매(口頭三昧, 입으로만 삼매)’라고도 하고 또는 상양호호지(商量浩浩地)라고 한다.


호호(浩浩)는 물이 넘치는 모양을 가리키는 형용사인데 주고받는 선문답이나 법담, 법거량이 매우 화려한 것, 부처나 조사 선지식도 혀를 내두를 언어의 성찬을 말한다.


그 밖에 현란한 수식어를 동원하여 선시(禪詩) 등 선과 관련된 글을 쓰는 것, 화려한 문학적 수사로 선을 논하는 것, 혹은 옛 선승들의 말을 그대로 복창하는 것도 모두 구두선이다. 신심(信心) 없이 입으로만 염불하는 것을 ‘공염불(空念佛)’이라고 하는데, 같은 뜻이다.


중국에서는 교우(交友)가 두텁지 않은 것을 가리켜 ‘구두교(口頭交)’라고 하는데, 립서비스로만 교우한다는 뜻이다.


황벽선사는 구두선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혹평한다.

“평소에 다만 구두선만 익혀서 선(禪)을 설하고 도를 말하며 부처를 꾸짖고 조사를 꾸짖는다. 그러나 여기(本分事)에 이르러서는 아무 쓸모가 없게 될 것이다

(平日, 只學口頭三昧, 說禪說道, 呵佛罵祖, 到這裏, 都用不著. ‘선관책진’)”


‘백장청규증의기(百丈淸規證義記)’ 7권 ‘공주규약(共住規約, 공동생활 규약)’ 항목에는 추방에 대하여 여러 가지 조목을 열거하고 있는데, 그 속에는 선원에서 구두선을 일삼는 자도 들어가 있다.

 


‘근본 대계(살생, 도둑질, 음행, 망어, 음주)를 범하는 자는 선원에서 추방하라.

선은 진실한 참구와 진실한 깨달음을 가장 중시한다. 그러므로 입으로 선을 희롱하는 자(弄口頭禪者)는 추방하라.

삼삼오오 모여서 산문 밖에 나가서 떠들면서 노는 자, 한가하게 앉아 있기만 하는 자도 벌을 주되 불복하면 추방하라

(犯根本大戒者, 出院.

禪貴?參實悟, 弄口頭禪者, 出院.

三五成群, 山門外遊?雜話, ?閑坐者罰, 不服者, 出院)’


여기에서 입으로 선을 희롱하는 자란 진실한 수행은 하지 않고 입으로만 말로만 ‘선에 대하여 어쩌니 저쩌니 하고 떠드는 자, 깨달은 척 떠들고 다니는 자를 뜻한다.


또 ‘경률계상포살궤의(經律戒相布薩軌儀)’ 1권에서는 수행자들에게 ‘도(道)를 배우는 자가 구두선을 배워 가지고 함부로 망령되게 반야를 말하여 그 결과 스스로 허물을 자초해서는 안 된다(學道, 莫學口頭禪, 妄談般若, 自招愆)’라고 주의를 주고 있다.


말이 많은 사람치고 실천하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언행일치는 성인이라야 가능하다. 그러나 우리는 얼 비슷 동행은 해야 하는데 요즘은 그런 경우도 드물다. 그러므로 말 수는 가능한 적어야 한다. 말이 많으면 허튼 말, 실언이 있게 마련이다.

 

두 번째 실언은 더욱 인격을 손상시킨다. 수행자라면 더욱 더 조심해야 한다. 수행의 척도는 말 한마디로도 알 수 있다. 

 

 

▲윤창화

 

/ 법보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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