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濟제 度도
9. 침묵 1
정화가 입원해 있는 스테튼 아일랜드의 정신병원 현관 앞에 링컨 타운카가 한 대 와서 멈추었다. 뒷좌석에서 혜원 스님과 경세 스님이 내렸다. 운전대를 잡고 온 사람은 영찬이었다. 타운카는 그레이스가 안락한 승차감과 안전도를 면밀히 검토한 다음 선정하여 선물한 것이었다.
영찬은 혜원 스님을 정화의 주치의(主治醫)에게 안내했다. 주치의는 한국인 닥터 리였다. 그가 설명을 했다.
“환자는 그레이스 그라비우스라는 여자의 요청으로 특실로 옮긴 다음, 세 명의 전문의가 팀을 이루어 합동으로 치료를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다각도에서 치료를 했는데, 환자의 상태가 매우 호전되었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아직도 환자가 사람을 알아보지 못한다는 사실입니다.”
혜원 스님은 그레이스가 정화를 위해 특별히 신경을 썼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레이스는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영리하고 마음이 따뜻한 여자로 여겨졌다.
“내가 보살을 한 번 보고 싶은데 괜찮겠습니까?”
“환자는 난폭하지 않습니다. 만나시는데 아무 애로 사항이 없습니다. 제가 모셔다 드리지요.”
일행은 닥터 리를 따라 정화가 입원해 있는 병실로 향했다. 복도에 마련된 간이 휴게실에 응접세트가 갖추어져 있었다. 다른 사람들은 그곳에 있고, 혜원 스님이 혼자 병실로 들어갔다.
스님은 정화를 보았다.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쳤을 때 스님의 눈에서는 연민을 담은 봄볕보다 더 따뜻한 빛이 흘러 나왔다. 그것이 정화의 응고(凝固) 되었던 가슴 속의 한을 녹였음인가. 정화의 눈에서는 순간 미처 제어할 사이도 없이 뜨거운 눈물이 솟구쳤다. 혜원 스님은 정화가 청룡사에서 만났을 때와 다르지 않은 정상을 회복했다는 것을 단번에 알아보았다.
정화는 더 이상 연극을 할 수가 없었다. 그녀는 축축함이 배어 있는 목소리로 말했다.
“스님, 절 받으세요?”
스님은 병실 바닥에 척 가부좌를 틀고 앉은 다음 말했다.
“나는 절을 한 번 이상 받지않겠다고 선언한 바 있다. 삼 배 말고 일 배만 하여라.”
“네, 스님.”
정화는 한 번이었지만 부처님께 하는 것이나 다름없이 공손하게 절을 올렸다. 복도 쪽에서 그런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사람들은 눈을 휘둥그레 떴다.
혜원 스님이 말했다.
“겨우 이런 곳에 있으려고 미국엘 왔는고?”
“제가 갈 곳이 없었어요.”
“네가 청룡사에 왔을 때 내가 미국에 가지 않는 것이 좋겠다고 했던 내 말을 기억하느냐?”
“네, 스님.”
“한국에서 그냥 기다리고 있었다면 섭이는 미국일이 마무리 되는대로 한국으로, 너에게로 돌아왔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그 길이 막혔다. 그래서 섭이와 같이 살아가는 것은 더 이상 생각지 말아야 한다.”
“그럼 저는 어떻게 해야 돼요?”
“걱정할 필요 없다. 모든 것은 마음에 달렸느니라. 마음만 돌리면 되는 것이야.”
“어떻게 마음을 돌려요, 큰스님?”
“내가 도와 줄 것이다. 우선 죽어야 겠다는 생각부터 돌리도록 해라.”
“제가 죽을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것을 어떻게 아셨어요?”
“너의 입장에서 할 수 있는 생각이 그것밖에 더 있겠느냐. 그러나 죽는 다는 것은 섭이를 절대 용서하지 않는다는 뜻이고, 그런 마음을 가지고 죽으면 정토(淨土)에 나지 못하기 때문에 지옥고를 받는다. 마음을 돌리고 용서하고 업을 닦은 후에 열반을 해야 윤회고를 멈추게 되는 것이니라. 죽는다는 생각은 잘못된 것이니 돌려라.”
“그이는 어떻게 됐어요, 스님?”
“섭이는 죽지 않았으니까 염려 말아라. 너는 네 일만 생각하면 된다. 더 이상 치료를 받을 필요가 없다고 생각되니 지금 나와 함께 같이 가자. 내가 너를 인도해 줄 것이다.”
“말씀대로 하겠어요, 스님.”
스님은 먼저 밖으로 나왔다. 그는 닥터 리에게 정화를 데려 가겠다는 뜻을 밝혔다. 닥터 리가 물었다.
“환자가 정상으로 돌아왔단 말씀입니까?”
“보살은 진작 의식을 회복했어요. 갈 곳이 없어서 그냥 머물고 있었던 것뿐입니다.”
몇 명의 의사가 온 심혈을 다 기우렸어도 알아내지 못한 것을 스님은 별 힘도 드리지 않고 단번에 간파해낸 것이었다. 닥터 리는 그 사실을 믿을 수 없어했지만 혜원 스님의 법력을 익히 알고 있는 영찬은 아무 의구심을 표명하지 않았다. 닥터 리가 말했다.
“퇴원을 하더라도 마지막으로 진료를 해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러나 거기에 대하여 당사자인 정화가 말했다.
“죄송해요, 의사 선생님. 그럴 필요 없어요. 저는 사실 진작 정상으로 돌아 와 있었어요. 저는 스님을 따라 갈 거에요.”
그러니 더 할 말이 없었다.
환자복을 벗고 입원할 당시의 옷으로 바꾸어 입자 정화는 어디 한군데 의혹이 가지 않는 정상인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레이스가 예치해 놓았던 첵크에 그 동안 발생한 입원비 총액을 적어넣는 것으로 퇴원 수속은 마무리 되었다. 사람들은 타운카를 타고 병원을 떠났다. 그 직후 닥터 리는 잠시 무력감에 빠졌다. 정신과 진료란 환자가 속일 때 치료의 진척 상황을 그 방면에 몇 십 년씩 종사한 전문가로서도 알 길이 없었다. 육체적인 병은 회복되면 금세 알 수 있는 것에 비해 정신세계는 그 만큼 복잡하고 오묘한 것이었다.
차가 뉴욕 쪽으로 진입했을 때 영찬이 의견을 내놓았다.
“어디 가서 옷을 한 벌 사 입어야 될 것 같습니다.”
그 의견을 혜원 스님이 반대했다.
“그냥 남처사 집으로 가 주시오.”
그러니 아무도 거기에 대하여 이론을 제기하지 않았다.
윤상의 집에는 그 시간에 아무도 없었다. 부부는 일을 나갔고, 아이들은 학교를 간 때문이었다. 혜원 스님은 영찬과 경세 스님을 밖으로 나가 있도록 한 다음 정화와 독대(獨對) 하였다.
“지금부터 내가 이야기를 하나 해 줄 테니 그 말을 듣고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하도록 해라.”
“알겠습니다, 스님.”
옛날 어떤 사람이 산길을 가다가 곰을 만나게 되었다. 굶주렸던 곰은 사람을 발견하게 되자 잡아먹으려고 하였다. 사람은 급한 김에 커다란 고목을 방패로 삼아 뒤로 숨었다. 곰은 나무 뒤쪽으로 돌아와서 사람을 잡으면 될 텐데, 미련하여 그냥 나무를 껴안으며 발을 들어 올려 사람을 잡으려고 하였다. 사람은 들어 올린 곰다리를 움켜잡았다.
곰은 다리를 잡힌 채 오도 가도 못하게 되었다. 사람을 먹으려고 해도 입이 닫지를 않고, 포기하고 가려해도 잡혀 먹을 것을 두려워한 사람이 놓아주지를 않으니 갈 수가 없었다. 사람의 입장에서 보면 다리를 놓는다는 것은 곧 죽음이니 생명선을 놓아줄 수가 없는 것이었다.
그렇게 대치해 있기를 며칠이 흘렀다. 이때 한 나무꾼이 그 옆을 지나가게 되었다. 나무꾼에게 곰다리를 잡고 있는 사람이 말했다.
--여보시오, 우리 힘을 합해서 이 곰을 잡읍시다. 웅담과 모피를 팔면 한밑천 단단히 마련할 수 있습니다.
나무꾼이 솔깃해졌다. 지게에 꽂아 두었던 도끼를 빼들고 가까이 다가왔다. 그에게 다시 말한다.
--내가 곰을 잡을 테니 당신이 나 대신 이 곰다리를 좀 잡고 있으시오. 나는 곰을 많이 잡아 보았어요. 단 한방에 정수리를 내려 갈겨야지 설 때려놓으면 나도 죽고 당신도 죽는 낭패를 당하는 수가 있어요.
나무꾼은 그 말이 옳다고 생각했다. 나무꾼이 대신 곰다리를 잡게 되었다. 겨우 풀려 난 사람이 숨을 내 쉰 다음 말했다.
--실은 나도 곰을 잡아본 적은 없어요. 그러니 내가 섣불리 곰의 정수리를 쳤다가는 당신도 죽고 나도 죽을 수 있어요. 그러니 그러고 있다가 누구를 만나거든 내가 했던 것처럼 그 사람에게 말하고 곰다리를 물려준 다음 위험에서 벗어나도록 하시오.
말을 마친 사람은 돌아서서 휘적휘적 걸어가기 시작했다. 나무꾼은 멀어져 가는 사람을 보며 이를 갈았다. 그가 얄미워 곰다리를 놓아 주었다가는 자기가 먼저 잡혀 먹을 것 같아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꼼짝없이 곰다리를 잡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혜원 스님이 말했다.
“네가 지금까지 잡고 있었던 것이 바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곰다리였다. 남녀 간의 사랑이 숭고한 정신적 가치라는 것은 순전히 거짓말이다. 그것에 홀려 곰다리를 잡고 나면 평생을 헤어나지 못하는 것이다. 그래도 그것을 움켜쥐고 있겠느냐, 놓겠느냐? 지금 그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
정화는 스님이 출가(出家)를 권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녀는 선뜻 대답할 수가 없었다. 혜원 스님의 말씀이 계속 되었다.
“죽을 것 같아서 못 놓고 잡고 있으면 자식이 생기고, 그래서 또 얽히게 되고, 그러다가보면 평생을 곰다리를 잡고 살아야 한다. 그것을 놓으면 마음의 여유를 되찾을 수 있으며, 물질에서도 초월하게 되며, 남에게 자비를 베풀 수 있는 위치를 확보하게 되는 것이다. 왜 그것을 꼭 잡고 늘어져서 고의 바다에 빠져 허우적거리다가 일생을 마치려 하느냐. 착을 버리면 초월한다.”
정화는 스님의 말씀을 듣고, 있어도 보지 못했던 눈이 떠지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정화는 그 동안 병실에 머물면서 내내 죽음을 생각했었다. 재섭만 한 번 보게 되면 더는 미련을 두지 말고 떠나리라 작정했었다. 달리 택할 수 있는 길이 없다고 여겼던 때문이었다.
자신의 목숨보다도 더 사랑한 사람을 다른 여자에게 빼앗기고 어찌 살아간단 말인가. 몸이 더렵혀진 자신으로서는 재섭에게 돌아와 달라고 애원할 수도 없었다. 그렇다고 다른 남자를 만나 다시 사랑을 하면서 살아갈 수는 더더욱 없었다. 차라리 죽음을 택하는 것으로 더 이상 오욕스러운 삶을 연장하지 않으리라 작정했었다. 그러나 혜원 스님의 말씀을 듣자 자살로만 밀어 부친 외길 옆에 마음을 돌리면 새로운 길이 있다는 것을 비로소 알게 되었다.
정화는 잠시 자신의 몸은 재섭이 어디를 만져 주어도 불덩이처럼 달아올랐던 화약고라는 것을 상기했다. 색기를 떨쳐내고 부모미생전의 본래진면목(本來眞面目)으로 돌아갈 수 있을지 우려되었다. 그러나 그것도 결국은 착이 만들어낸 지독한 곰다리일 것이 분명했다. 그것을 잡고 있으면 자유란 있을 수 없다고 여겨졌다. 그녀는 마음을 굳혔다.
“스님, 머리를 깎는 쪽을 택하겠습니다.”
“잘 생각했다. 너는 나의 마지막 제자가 될 것이다. 나를 은사로 삼으면 길 가기가 그리 힘들지 않을 것이다.”
“제자로 거두어 주신다니 감사합니다.”
“머리털은 온갖 망상을 키우는 무명초(無名草)다. 우선 그것부터 깎아 버리고 몇 달 동안 경세와 함께 내 곁에 있으면서 나를 시봉토록 하여라. 행자 기간이 지나면 적당한 기회에 수계식을 거행하여 줄 것이다.”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그럼 지금 당장 머리를 깎아도 후회 없겠느냐?”
“네, 스님.”
혜원 스님은 자신의 옷 한 벌을 내주며 말했다.
“스님네는 남녀 구별 없이 옷을 입는 법이다. 비구니도 머리를 깎는 순간부터는 옷을 비구와 같은 것으로 입고, 고무신도 남자 것을 싣는다. 여기가 미국이니 새로 납의(衲衣)를 작만하기 어렵구나. 우선 내 옷을 입도록 하여라. 중옷은 좀 작아도 되고 커도 상관이 없느니라. 소매가 길면 접고, 바짓가랑이는 행전을 치면 길고 작은 것이 없어진다.”
혜원 스님은 장화가 옷을 갈아입을 수 있도록 밖으로 나왔다. 경세 스님에게 가위와 면도칼을 준비토록 시켰다. 잠시 후 정화는 영찬과 경세 스님이 지켜보는 가운데 삭발을 했다. 혜원 스님은 먼저 가위로 긴 머리털을 대충 잘라냈다. 머리털이 잘려져 나갈 때 정화는 눈물을 한 방울 흘렸다. 그것을 질책 하듯이 혜원 스님이 말했다.
“머리를 깎았다고 다 중이 아니다. 범인(凡人)으로 살아왔던 시절의 생각을 버려야 한다. 지난날에 대한 미련도 후회도 애착도 다 끊어라. 범부의 생각만 비우면 된다.”
“네, 스님.”
다음으로 비누칠을 한 다음 면도를 하듯 깨끗이 머리털을 밀어 냈다. 스님은 삭발식을 마쳤을 때 말했다.
“네 법명은 도연(道然)으로 해라.”
“알겠습니다, 스님.”
영찬은 머리를 깎았어도 정화의 얼굴이 너무나 아름답고 젊어서 가슴이 쏴아 아려왔다. 재섭이 임신을 한 그레이스에게 등을 돌린 다음 정화에게로 돌아오기는 현실적으로 어려워 보였다. 정화는 재섭을 포기하고 다른 남자를 만나 다시 사랑을 하여 가정을 이루며 살아갈 수 있는 여자가 아니었다. 그렇다면 정화는 절망할 수밖에 없을 것이고, 이런 상태에서는 죽음밖에 택할 것이 없어 보였다. 죽음 대신 머리를 깎은 것이었다. 착을 끊기 위해서 머리를 깎는다지만 출가의 이면(裏面)에는 정화의 재섭에 대한 포기할 수 없는 보다 큰사랑이 들어 있는 것만 같아 안타까움을 금할 수 없었다.
그 날 저녁 윤상 내외가 집으로 돌아 왔을 때 혜원 스님이 도연을 그들에게 소개한 다음 말했다.
“식객이 한 명 더 늘었소이다.”
“별 말씀을 다하십니다.”
“그리 오랫동안 신세를 지지는 않을 것이요.”
“계시는 날까지 모쪼록 조금도 부담감을 느끼지 마시고 편히 지내시기 바랍니다.”
“고맙소. 일전에 남처사께서 황명선이라는 자의 사업하는 장소를 알고 있다고 했었지요?”
“그렇습니다.”
“내일은 내가 그곳을 가봐야 겠어요.”
“그럼 제가 모셔다 드리겠습니다.”
“장사를 하는데 시간을 빼앗고 싶지 않아요. 주소만 알려주면 우리가 찾아갈 수 있어요.”
“맨해튼 브로드웨이 27가 코너에 있는 6층 건물이 그 사람 것입니다. 상호는 황스 트레딩 컴퍼니 앤 홀세일 스토아입니다.”
재섭은 경찰에 의해 구조된 후 거리로 나섰을 때 어디로 가야 할지 마음을 정할 수가 없었다. 아내 때문에 그레이스에게 가고 싶지 않았으며, 그레이스 때문에 아내를 찾아갈 수도 없었다. 그는 지향 없이 맨해튼 거리를 헤매다가 호텔에서 잠을 잤다.
재섭은 영민이 그의 아내와 정부를 함께 살해한 다음 본인도 목숨을 끊었다는 것을 텔레비전 뉴스를 통해 자세히 알게 되었다. 차이나타운에 본거지를 두고 있는 범죄 조직의 사주를 받아 영민이 한국에서 밀반입해 온 필로폰은 경찰 추산 5천만 달러에 이르는 막대한 양이었다. 전대미문(前代未聞)의 마약 밀수입 사건을 저지른 범죄자와 룸메이트를 했었다는 것을 생각하면 온 몸에 소름이 돋는다. 그러나 그는 죽었다. 복수를 하기 위해 더 이상 그를 찾을 필요는 없게 되었다.
황명선 건만 해결하면 된다고 여겨졌다. 재섭이 뉴욕에 머물게 되고, 그레이스와의 만남이 이루어지고, 아내가 밀입국을 하다가 불행을 겪게 된, 그 모든 것도 따지고 보면 황명선에게 원인이 있었다. 그는 동생을 죽게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가정이 파괴되는 결과까지 초래하게 만든 원수였다.
그는 언젠가 처럼 차를 한 대 렌트했다. 그런 다음 황명선의 건물 앞 주차장에 차를 세워놓고 그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기 시작했다. 그와 그의 아들을 살해한 다음 영민처럼 자살을 하는 식의 복수를 감행할 수는 없었지만, 그에 대한 복수를 늦추고 싶지도 않았다. 그를 감시하면서 복수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게 되기를 재섭은 바랬다.
황명선의 건물 앞에 타운카가 멈추는 것이 재섭에 의해 목격되었다. 거기서 사부인 혜원 스님이 내렸다. 재섭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비구와 비구니 스님이 같이 내렸다. 그들은 건물 안으로 들어가고 타운카는 자신이 있는 주차장을 향해 오고 있었다. 운전대를 잡은 사람이 영찬이라는 것을 알게 된 재섭은 그의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영찬은 재섭을 발견하자 놀라움과 반가움을 동시에 표현했다. 혜원 스님의 예언대로 그는 무사했던 것이다.
“아니, 하형. 어떻게 된 겁니까?”
“죽지 않고 살아 있었습니다. 사부님께서는 언제 뉴욕에 오셨습니까?”
“꽤 여러 날 됩니다. 그 옆에 있던 사람이 누군지 알겠습니까?”
“글쎄요. 비구는 경세 스님 같던데, 비구니는 얼굴을 보지 못했기 때문에 누군지 모르겠습니다.”
정신병동에 갇혀있는 아내가 퇴원하여 출가했을 것이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기 때문에 눈에는 익지만 정화를 알아 볼 수 없었던 것이다.
“그 비구니 스님이 하형의 부인인 정화씨입니다.”
.”뭐라고요!”
영찬은 재섭에게 정화가 의식을 회복했으며, 혜원 스님의 권유로 머리를 깍게 되었다는 것을 설명해 주었다. 혜원 스님이 그레이스를 만났으며, 그레이스가 타운카를 사서 선물했다는 것도 이야기해 주었다. 그런 다음 덧붙였다.
“혜원 스님은 정화씨를 출가케 하는 것으로 하형과 그레이스씨가 같이 살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신 겁니다. 아직도 트럼프 타워에는 안가셨죠?”
“그렇습니다.”
“그레이스씨는 하형을 진실로 사랑합니다. 더 이상 가슴 조이게 해서는 안돼요. 그녀가 기다리는 곳으로 가십시오. 한 사람만이라도 책임을 져야 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출가를 하려던 사람은 자신이었다. 그런데 엉뚱하게도 아내가 머리를 깎은 것이었다. 아내가 정상으로 돌아 왔다는 것은 축하할 일이지만 출가를 했다는 것은 정신 이상이 되었다는 것보다 더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결국 자신의 배신으로 인하여 한 여자의 일생이 완전히 굴절(屈折)된 셈이었다. 재섭은 가슴이 아려오는 것을 느꼈다. 그러나 이제는 모든 것을 돌이킬 수 없을 것 같았다. 한 사람만이라도 책임을 지라는 영찬의 말은 적절한 충고였다.
“알겠습니다. 트럼프 타워로 가죠. 그런데 스님은 왜 저 건물 안으로 들어가신 겁니까?”
“나도 스님의 뜻은 모릅니다.”
“여기서 기다렸다가 만나 뵙고 가겠습니다.”
“정화씨를 생각해서 그렇게 하지 않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정화 씨가 없는 자리에서 스님만 뵈올 수 있도록 내가 중간에서 연락을 취해 줄 테니 트럼프 타워에 가서 기다리고 계십시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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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정화 보살이 도연 스님으로 다시 태어나는 순간이군요.그 동안 잡고 있었던 곰다리를 놓고 성불의 사다리를 걸어 올라갈 수 있기를 기원할 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