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일본어와 한국어
660년 여름, 나당연합군에 의해 백제는 멸망했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일본의 제명천왕(齊明)은 구원군 파병을 결정했고 야마토조정은 663년 백제에 2만7천의 구원군을 파견했지만 백강전투에서 당의 수군에게 대패하고 말았다. 당시 일본은 천지천황(天智)의 치세였는데 이 천지천황은 백제 의자왕의 이복동생 교기왕자라는 설이 있으며, 이 설은 정황상 상당히 설득력이 있다. 또 그의 부친(齊明의 남편)은 한반도계라는 설도 있다. 또 다른 설은 제명천황의 부친은 백제의 호족 진씨라는 것이다. 이 두 가지 설은 모두 일본서기에 근거한 것이다. 한편 제명천황은 의자왕의 누이동생이라는 설도 있다. 하여튼 멸망한 백제를 구원하기 위하여 야마토조정은 대군을 파견했으며, 패배하여 철수하는 왜군을 따라 다수의 백제인이 일본으로 이주를 했다. 그리고 야마토조정은 식량과 토지를 제공해주는 등 이들을 따뜻하게 맞이했다고 일본서기는 기술하고 있다.
당시 일본의 수도 오미(近江)에는 백제의 고관들도 다수 망명해있었는데 천지천황의 정부는 이들 50여명에게 고위 벼슬을 내렸다. 그리고 사택소명을 法官大輔(법무차관), 귀실집사를 學職頭(대학총장)에 임명했다. 또 천지천황의 아들 대우환태자(大友)는 자주 백제의 문인들을 초대하여 시연(詩宴)을 베풀었으며, 그로 인하여 일본에서 한문학이 융성하게 되었다고 한다. 한편 시가현(近江)에는 귀실집사의 사당이 있으며 지금도 매년 그의 기일에 제사를 지낸다고 한다. 일본서기에는 이런 노래가 실려 있다. “귤은 서로 다른 가지에 달려있어도 실에 꿰면 하나가 된다네” (天智 10년조)
이와 같이 오미의 야마토조정은 백제색이 짙었으며, 멸망한 백제가 일본열도에서 부활한 느낌을 들게까지 한다. 그런데 한 가지 의문점은 망명 백제 귀족들이 과연 일본어로 의사소통을 했을까 하는 점이다. 의사소통이 원활하지 않는 한, 그들이 고관으로 임명되어 일본의 정치에 참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렇지만 망명한지 2, 3년 만에 일본어를 마스터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래서 당시 야마토조정의 공식 언어는 백제어였다고 주장하는 학자도 있다.
일본어는 한국어와 어순이 꼭 같은 유일한 언어이다. 그러면서도 기초어휘나 기본어휘에 공통되는 단어가 별로 없다는 것이 또 특징이다. 한국에 고대어에 관한 자료가 별로 남아 있지 않기 때문에 그렇게 생각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런데 현대일본어는 백제어를 이은 것이고 한국어는 신라어를 이은 것이기 때문에 그렇다고 주장하는 학자도 있다. 하지만 고대어에 관한 자료가 한국 측에는 별로 남아있지 않기 때문에 이것도 가설에 머물고 있다.
일본어의 계통에 관하여 일본에서는 명치(明治) 이후 갖가지 설이 주창되었다. 한국어 또는 알타이어, 혹은 폴리네시시아어 등 남방의 언어와 관계가 있다고 하는 설이다. 일본어의 원 기반은 남방어인데 그 위에 북방의 언어가 들어온 것이라고 일반적으로 말해진다. 일본학자들은 이 가운데 가장 관계가 있는 것은 한국어라고 보고 있지만, 단언은 하지 못하고 있다. 일본의 야요이시대(BC3세기~AD3세기) 이래 수많은 한반도 사람들이 일본열도로 이주를 했다. 이주민들은 처음에는 모국어를 썼겠지만 원주민과 의사소통 과정에서 차차 원주민의 단어를 익히게 되었으며, 결국 어순은 한국어이지만 어휘는 모두 원주민의 것으로 바뀐 일본어가 탄생한 것이라고 본다.
한국어의 발음은 복잡한데 비하여 일본어의 발음은 간단 명확하다. 그것은 그 말을 알파벳으로 표기해보면 확실하게 알 수 있다. 한국어를 알파벳으로 써놓고 외국인보고 정확하게 발음하라는 것은 무리한 주문이다. '여의도'는 알파벳을 어떻게 쓰든, 발음기호를 어떻게 붙이든, 그 알파벳만 보고 외국인이 '여의도'라고 발음할 수 없다. '서울'도 마찬가지이다. seu를 '서'라고 발음하지 못하여 소울, 세울이라고 한다. 포항 인근에 '오어사'라는 절이 있다. 한적한 절로, 절 이름이 마음에 들었지만 알파벳으로는 어떻게 표기할까 근심스러웠다. '오'나 '어'는 외국인에게는 같은 발음으로 여겨질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본어는 명확하다. 그것은 일본어에는 a, i, u, e, o의 다섯으로 모음이 한정되어있고 이 모음들의 발음이 서로 확실히 구분되기 때문이다.
일본어는 모음 수가 적은 대신 단어 음의 장단, 고저 등을 확실히 구분함으로써 이를 보완한다. 우리말에도 음의 장단이 있다고는 하지만 잘 구분되지 않는다. 배(腹)와 배(船), 배(梨)를 사람들은 구분하지 못한다. 반면 일본사람들은 동경(東京)을 도쿄라고 하면 잘 못 알아듣는다. 동경의 발음은 도-쿄- 인 것이다. 반대로 경도(京都)는 교-토이다. 교토 또는 교-토-라고 하면 잘 알아듣지 못한다.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시가집은『万葉集』으로 8세기 후반에 편찬되었으며, 약 4500수의 시가(詩歌)가 실려 있다. 한자의 음과 훈을 빌어 표기한 것으로, 이것을 ‘망요가나(万葉)’라고 한다. 일본 국문학자 橋本進吉는 고사기, 일본서기, 만엽집 등을 통하여 고대일본어를 연구하던 중 고대에는 일본어에 8모음이 있었고 알타이어의 특징인 모음조화현상이 있었음을 알아냈다. 즉 i, e, o는 각각 2가지로 발음되었으며, 이것은 엄격하게 구분되었다는 것이다. 예컨대 망요가나에서 go는 古. 故, 故, 孤와 許, 己, 去, 巨 등으로 표기했는데 가령 고도모(어린이)라고 할 때의 ‘고’는 반드시 앞의 古群에 속하는 한자를 쓰지 뒤의 許群에 속하는 한자는 결코 쓰지 않았던 것이다. 이것은 이 두 群 사이의 발음이 달랐기 때문이라고 그는 해석했다.
당시 일본의 수도권은 기내(畿內)지방이었고 지금의 동경지방은 변경이었다. 그런데 동경사람들은 위와 같은 8모음을 서로 구별하지 못했으므로 수도권사람들은 그들을 촌놈이라고 비웃었다고 한다. 하지만 평안(平安)시대(800~1200년경)로 접어들면 수도권사람들도 그 발음을 구별하지 못하게 되어 일본어의 모음은 다시 5개로 축소되는 것이다.
고대 일본어에서 모음이 8개가 되었던 것은 한반도이주민들의 영향 때문이었다고 나는 본다. 그것이 7, 8세기의 현상이었는지 그 이전부터 그랬는지 알 수 없지만 한반도사람들이 기내지방으로 진출한 5세기 응신천황(應神)이후 서서히 시작되었다고 생각한다. 기내지방은 5세기에 한반도사람들에 의하여 개발된 곳이기 때문이다. 한반도사람들은 일본의 야요이시대부터 일본열도에 진출했지만 당시는 주로 북규슈였고, 기내로 진출하는 것은 5세기 이후의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