一松亭(일송정)
“일송정 푸른 솔은 늙어, 늙어 갔어도”로 시작하는 가곡 선구자는 조두남 선생이 1933년 21살 젊은 나이에 작곡한 노래다. 만주를 유랑하던 젊은 조두남이 용정에서 윤해영이란 사나이를 만났다. 밤에 조두남이 묵는 여관으로 찾아온 윤해영의 눈은 불이 타고 있었지만 얼굴은 수심이 가득 하였다. 말없이 한참 앉았다 나가면서 봉투 하나를 놓고 갔다. 그 봉투 속에는 하얀 종이에『용정의 노래』란 시가 적혀있었다. 조두남이 본 윤해영은 독립운동을 하려는 애국청년처럼 보였다. 그를 다시 만나지는 못했지만 윤해영의 시에서 애국청년의 혼을 느낀 조두남은 『용정의 노래』를 『선구자』란 제목으로 고쳐서 곡을 붙였다.
일송정 푸른 솔은 늙어 늙어 갔어도
한줄기 해란 강은 천년 두고 흐른다.
지난날 강가에서 말 달리던 선구자
지금은 어느 곳에 거친 꿈이 깊었나?
푸른 소나무(윤해영)는 늙어가도(변절) 해란강(민족의 역사)은 천년(천만년-영원)을 두고 변함없이 흐른다. 이 강가(민족 역사에)에 고대 조선에서 고구려와 발해의 영웅들이 달렸고, 일제와 싸우는 독립군의 말발굽이 지나갔다. 시인(윤해영)이 선구자들의 꿈을 찾아 절규하는 이 시에, 조두남은 곡을 붙여 웅장하고 씩씩한 노래를 만들었다.
용두레 우물가에 밤새소리 들릴 때
뜻 깊은 용문교에 달빛 고이 비친다.
이역하늘 바라보며 활을 쏘던 선구자
지금은 어느 곳에 거친 꿈이 깊었나?
용두레 우물(龍井)은 용정의 지명이 되었다. 조선 사람들이 물 깃는 이 우물가에서 밤새 소리(독립 운동가들의 신호) 들릴 때, 달빛 고요한 용문교 다리에서 자신도 조국을 떠나 만주 벌판을 헤매는 독립군을 따라 한 몸 던지겠다고 다짐했으나 여러 사정으로 실행하지 못한 사나이의 나약한 의지를 한하는 절규가 묻어나는 가사에서 현실을 극복하지 못하는 젊은 지성의 갈등이 느껴진다.
용주사 저녁종이 비암산에 울릴 때
사나이 굳은 마음 길이 새겨 두었네.
조국을 찾겠노라 맹세하던 선구자
지금은 어느 곳에 거친 꿈이 깊었나?
비암산 용주사에서 성불을 꿈꾸는 수도승이 울리는 저녁종소리를 군호로 만난 동지끼리 조국을 위해 싸워보자고 맹세하던 사나이의 붉은 의지를 저버리는 시인(윤해영)의 애처롭게 절규하는 비애가 오히려 젊은 꿈을 불타게 하는 마력이 있다.
윤해영이 쓴 시에 조두남이 곡을 붙이므로 『선구자』는 국민의 노래가 되고, 일송정은 하나의 고유명사가 되었다. 윤해영의 시에 담긴 일송정을 두고 구구한 전설들이 전해지고 있다. 심지어 용정에 사는 조선 사람들이 이 소나무를 자신과 일체 시켜 사랑하는 것을 보고 일본 군인들이 사격의 푯대로 삼아 총을 쏘아 죽였다고 한다. 이러한 전설은 사실이기보다 선구자 노래가 유명해지자 가사에 나오는 일송정을 미화시켰다고 여겨진다.
한중 수교 후 한국 관광객들이 찾아들자 중국 정부는 비암산에 어설픈 중국식 정자를 하나 지어놓았다. 용정시 당국은 “한겨레 사랑나누기” 회의 협조로 1991년 3월 12일 백두산에 있는 20년짜리 소나무를 비암산 정상에 옮겨 심었다고 한다. 오히려 이러한 인위적 노력이 윤해영의 시에 담은 일송정을 조잡스럽게 만들어 버렸다.
우리는 먼저 우리의 역사에 있어서 시대적 배경을 상상하고 진실을 규명해 내는 지혜가 필요하다. 비암산 기슭에는 조선 사람들이 밭을 일구어 농사를 지으며 아이들은 소와 염소를 먹이던 곳이다. 대부분의 산촌 마을들이 그랬듯이 밭에서 일하던 농부나 소먹이는 아이들이 산자락 여기저기에 있는 큰 소나무 그늘에서 쉬거나 놀았다. 우리민족은 그런 나무를 정자나무라 불렀다.
일제 강점기에 항일 운동을 하던 분들이 지방의 선비나 지주를 만나 용체를 얻어가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런 경우 집으로 찾아가서 만나는 것은 서로에게 위험 부담이 있었다. 그래서 겨울에는 들에서 보리밭을 밟거나 혹은 토지를 사고팔기 위해 땅을 둘러보는 것처럼 해서 만나고, 여름에는 냇가에서 목욕을 하거나 야산에서 소를 먹이면서 만나고 헤어졌다. 흔히 다른 사람의 눈에 띄지 않는 접선방법으로 이렇게 하였다. 아마 북간도의 애국지사들도 시야가 탁 트인 산자락에서 주위를 경계하며 만날 수 있었을 것이다. 비암산은 물론 여러 산기슭에서 소나무 혹은 정자가 될 만한 나무 아래서 애국지사와 지방 인사들이 서로 지나치며 용체를 건네주며 구국의 뜻을 나누었을 것이다.
일송정을 비암산에서 생각하는 것은 용주사 저녁종이 거기서 울렸다고 하였기 때문이다. 아마 비암산에서 지사들은 용주사 저녁 종소리가 들릴 즈음에 서로 만났을지도 모른다. 일송정은 구태여 비암산 꼭대기가 아니라 산자락에서 사람이 쉴 만한 정자나무였을 것이다. 윤해영은 우리 민족이 누대로 들어온 절간에서 들려오는 저녁 종소리를 민족의 숨소리로 표현했을 것이다. 일본군경을 피해 만나는 애국지사들은 이 민족의 숨소리 같은 절간의 종소리에 맞춰 약속 된 장소에 갔을 수도 있다. 밤새 소리로 서로의 위치를 알렸을 지도 모른다.
얄팍한 상술에 오염된 허름한 정자를 짓고, 그 옆에 요금소를 만들어 선구자 노랫말에서 들어온 일송정을 보겠다고 찾아오는 한국 관광객들의 소박한 민족혼에 입장료를 챙기는 중국식 정자는 윤해영이가 말하던 그 일송정은 아니다. 지금 비암산에 있는 중국식 일송정은 여러 형태로 변해버린 허위에 불과하다. 그러나 중국은 이런 허위를 통해 저들이 저지르는 동북공정의 부당성을 스스로 인정하고 있는 것이다. 고구려 발해의 역사를 중국의 역사라고 아무리 목청을 높여도 윤해영이 노래한 천년 두고 흐르는 해란 강처럼 유구한 우리의 역사는 멈추지 않고 도도하게 흐를 것이다.
첫댓글 선구자(일송정)에 담긴 깊은 뜻을 헤아리고 갑니다.
귀한 글에 머물다 가옵니다. 고맙습니다.
귀한 글, 귀한 모습 뵙게되니 너무 반가워 눈물이 나려합니다.
건강한 모습 언제나 뵐 수 있을런지요.
그런 깊은 뜻이 있군요.
대하드라마(?)는 쉬어가시는지요?
좋은 글 감사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