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證道歌 무비스님 문수원 강의 8강
(25.道則心藏無價珍이라~29.誰能向外誇精進가)
道則心藏無價珍이라
(도즉심장무가진이라)
도의 입장으로는 마음에 무가보를 지니고 있네.
이 저 보배는 정말 마음의 보배야 말로 진짜 보배죠. 그리고 세상에 아무리 돈이 많다 하더라도 그것은 쓰면은 다할 때가 있어.
無價珍 用無盡하니
(무가진 용무진하니)
그 무가보를 아무리 써도 다 쓸 수 없으니
그런데 마음의 보배는 써도써도 다하지가 않는거야. 아무리 써도 다하지가 안해.
그래서 시방제불(十方諸佛)이 한량없는 세월을 지내면서 이것을 써도 다 쓰지 못하고, 서천(西天) 28조도 이것을 써가지고 다 쓰지 못하고, 당토(唐土) 당나라 그 육조까지 온갖 도인들이 이것을 써도 다 쓰지 못하고, 천하 노화상도 이것을 써도 다 못쓰고, 말하자면은 오늘의 영가스님도 이것을 써도 다 쓰지 못한다.
다 못쓰는 거예요. 그래 무가진용무진(無價珍用無盡)이라. 무가진(無價珍) 값으로 매길 수 있는 건 세상 보배고, 마음의 보배는 값으로 매길 수 없으니까 무가(無價)야. 무가, 무가보(無價寶)다 그러거든요 무가보.
아무리 그 다이아몬드가 크다고 해도 그걸 우리가 쉽게 무가보 무가보 해도 천만에, 그건 값이 있다고요, 아무리 많아도 값이 있어.
그런데 마음의 보배는 이거 값이 없어. 값으로 매길 수가 없어. 누가 뺏어갈 수도 없고, 도둑질 해 갈 수도 없고, 줄래야 줄 수도 없고. 제 혼자 한껏 쓰는 거죠.
무가진용무진(無價珍用無盡)하니 이물응기종불린(利物應機終不恡) 이라.
무가진(無價珍) 그 무가의 보배를 값으로 매길 수 없는 그 보배를 용무진(用無盡)이라. 쓰는데 다함이 없다. 끝이 없다. 한없이 쓴다 하는 것입니다 한없이 쓴다.
그러니까 중생들을 위해서 그 깨달음을 가지고 아무리 중생을 제도한다고 해도 그 깨달음의 그 법이 줄어들거나 뭐 이렇게 축이 나거나 하지 않는 거죠
利物應機終不恡이라
(이물응기종불린이라)
사람들을 이롭게 하고 근기를 따라 베푸는 일에 끝내 아끼지 않네.
그래 이물(利物) 물(物)은 중생이예요, 중생들을 이롭게 하고 또 근기에 응한다. 응기(應機) 근기들에 응한다. 그런데 마침내 아끼지를 않는다.
왜냐? 줄어들면은 아끼겠지만은 이게 줄어드는 게 아니기 때문에 아낄 필요가 없어. 아낄 필요가 없다 이거예요.
그래서 부처님이 49년 동안 정말 횡야설수야설(橫也說 竪也說) 그렇게 많은 중생들을 제도하기 위해서 몸을 아끼지 아니하면서 그렇게 사용을 했죠.
그게 만약에 도가, 깨달은 도가 뭐 열 명에게 예를 들어서 이렇게 설명하고 나눠준다면은 그것이 그만치 줄어들고 얼마 남았다 그래 되면은 그렇게 될 수가 없죠.
그런 도는 있으나마나한 도고.
그런데 어떻습니까? 세상의 보배, 세상의 어떤 부는요 꼭 그렇습니다. 누구 나눠주면 그만치 없어요. 일단 없어요. 그게 나중에 공덕이 되어서 돌아오는 건 그건 다음의 문제고. 사실은 나눠주면은 그만치 없어요. 왜냐하면 한이 있고, 양이 있으니까.
마음의 보배는 양이 없는 거지. 비근한 예로 친절도 말이지요, 사실은 그 친절 그거 아무리 우리가 친절하다고 해서 뭐 줄어드는 게 아니예요. 자꾸 친절하게 하고 해놓으면은 오히려 늘어나. 친절이 습관이 되어 가지고 훨씬 더 친절이 세련이 되어가지고 더 빛나지. 그게 줄어드는 게 아니라고. 그런데 그것을 우리가 안 써. 안 할라고 그래.
그게 말하자면은 마음의 보배야. 마음의 보배고, 그건 값으로 매길 수 없는 보배라고요.
깨달은 마음이야 더 말할 것도 없고, 비근한 예로 친절 하나만 가지고도 그렇다 하는 것입니다. 친절 하나.
친절하게 해주면 그게 무슨 줄어드느냐 하면은 절대 줄어드는 게 아니예요. 친절하게 했으니까 그다음엔 아유 친절이 이제 없다. 그럴 수가 있습니까? 친절하게 했다고 그다음부터 친절이 없는게 아니예요. 더 잘 나와 친절이.
좋은 일을 한 가장 빠른 그 효과는 뭐겠어요?
좋은 일을 더 쉽게 할 수 있는 거예요.
좋은 일을 더 쉽게 할 수 있는 거예요. 그게, 그게 제일 빠른 효과고 제일 빠른 공덕이라. 금방 돌아오는 공덕이라고요.
또 할 수 있는 거, 금방 쉽게 할 수 있는 거예요.
처음에는 좀 힘들지, 그런데 한 번 하고 그 다음에 두 번째 친절을 베풀라고 하고 공덕을 지으려고 하면 그때는 훨씬 마음에 부담이 적다고. 쉽게 해진다고요. 그게 금방 돌아오는 효과야.
이물응기종불린(利物應機終不恡)이라. 중생들을 이롭게 하고 근기에 응하는 일이 마침내 아끼지 않는다, 또 다하지도 않는다. 그래서
三身四智體中圓이요
(삼신사지체중원이요)
삼신과 사지가 내 마음 가운데 원만히 갖춰져 있고
삼신사지체중원(三身四智體中圓)이요 팔해육통심지인(八解六通心地印)이라. 삼신사지(三身四智)는 체중(體中)에 원만(圓滿)하고 꽉 차있다 이거예요 우리 마음속에.
삼신(三身)은 뭐겠어요? 법신(法身) 보신(報身) 화신(化神)이다, 그래 우리 마음이 제대로 열리면은, 열리면 근본자리는 법신이고, 또 그 어떤 수행공덕의 영향력은 보신, 과보의 몸이니까 보신이 되고, 또 중생을 제도하는데 있어서 필요한 그런 변화의 몸, 교화하는데 필요한 몸은 화신이 되는 것이고, 그런 능력이, 그런 능력이 그냥 우리의 심체(心體), 체중원(體中圓)이라는 것은 우리의 마음속에, 가득히 있다. 원만하게 있다 이거야.
사지(四智)는 뭐예요? 네가지 지혜, 예를 들어서 깨닫고 나면은 그것을 뭐 지혜가 뭐 네 가지다, 열가지다 얼마든지 말할 수가 있죠. 그러나 사실, 하나라고 해도 상관 없어요. 깨닫고 나면 지혜가 열리는 거는.
그러나 그걸 이제 대개 네 가지로 대원경지(大圓鏡智)다 또는 평등성지(平等性智)다 묘관찰지(妙觀察智)다 성소작지(成所作智)다 해가지고 네 가지 지혜를 또 이렇게 말하지. 그럼 훨씬 돋보이죠.
‘아 지혜가 충만하다’ 그 말보다는 ‘네 가지 지혜가 충만하다’ 그 다음에
八解六通心地印이라
(팔해육통심지인이라)
팔해탈과 육신통도 본래로 마음 땅에 모두 있네.
팔해육통심지인(八解六通心地印)이야. 팔해도 여덟가지 해탈이라고요. 뭐 내관색해탈 외관색해탈 해쌌는데 이것도 배제하면은 안이비설신의 육식이죠. 그다음에 칠식 말라식 그다음에 팔식까지 해가지고 그 팔식이 완전히 뒤바뀌어져 가지고 여덟 개의 그 인식 작용이 뒤바뀌어져 가지고 얻은 경지, 이게 여덟 가지 해탈이야.
여덟가지 해탈을 낱낱이 거기서 이제 이름을 들먹거리기는 합니다만 그 어쨌든 깨달은 사람이 누릴 수 있는 그런 해탈의 경지 이게 여덟 가지 해탈.
육통(六通)은 뭐겠어요. 육신통이야. 육신통이라구요. 이 육신통까지. 그러니까 삼신사지(三身四智) 팔해탈(八解脫) 육신통(六神通)
이것이 전부 체중(體中)에 가득하고 마음속에 도장으로 꽉 박혀있다. 심지(心地) 마음 땅의 도장이다.
마음 땅에 있는 거니까 얼마든지 그것은 꺼내서 활용하고 쓴다 하는 것입니다.
이 마음이라고 하는 것을 우리가 아직, 불교에 있어서 그저 입만 벌렸다 하면 마음 마음 마음 해쌌긴 하지만은 그러나 마음에 대한 이해가 그래도 불자들은 어느 정도 조금은 있지요, 마음에 대한 이해가 너무 부족해요 우리가.
이해가 첫째 풍부해야 되고, 마음에 대한 이해가, 이해가 풍부하면은 거기에 믿음이 가죠. 확신이 가진다고, 그리고 그걸 느끼게 돼, 어느 정도 느끼게 된다고요.
물론 본격적으로 수행을 해가지고 확 잡고, 또 견성(見性) 눈으로 사물을 보듯이 이렇게 확 성품을 보면은 더 말할 것도 없이 좋지.
그렇지만은 이런 그렇게 견성한 사람들의 어떤 정신세계를 이런 것을 통해서 자꾸 우리가 접함으로 해서 거기에 대한 이해가 넓어집니다.
첫째는 이해해야 되거든. 이해해야 되고, 확신이 서게 되고, 그 다음에 그걸 느끼게 되고, 결국은 보게 되는 거죠. 결국은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과정, 이것이 말하자면은 우리가 자꾸 반복함으로 해서 자꾸 듣더라도 자꾸 듣고, 자꾸 듣고 반복함으로 해서 그것이 이제 더욱 이해가 넓어지고 확신이 굳어지고 깊어지는 것입니다.
上士一決一切了하고
(상사일결일체요하고)
상근기는 한 가지를 해결하면 일체를 다 해결하고
상사(上士) 일결일체요(一決一切了)하고 중하(中下) 다문다불신(多聞多不信)이라
마음 이야기, 계속 여기 뭐 보면은 이 마음자리 떠나서 따로 없죠.
그러나 이제 마음자리를 제대로 깨닫고 그 깨닫는 과정이라든지 그리고 그 주변에 여러가지 여건들이라든지 이런 것들을 많이 이야기를 해오는데 상사(上士)라고 하는 말은 뭐 일등상사가 아니고 상근기(上根機) 이런 의미로 이제 보면 됩니다.
상근기들은 일결일체요(一決一切了)라, 한 번 결정하면은 일체가 다 거기에 깨달아져 요(了) 일체를 다 마친다 이거야. 그 뭐 한 번 긍정하고 아, 마음이 이렇다 하면 그러면 다 따라가 버리는 거야. 어떤 이야기도 다 그냥 오케이가 되는 거야. 그런데
中下多聞多不信이라
(중하다문다불신이라)
중근기 하근기는 그렇게 많이 들어도 믿지를 않네.
중하(中下)는 다문다불신(多聞多不信)이라 이제 우리가 여기 에 해당되는 거지. 중근기(中根機) 하근기(下根機)들은 다문다불신(多聞多不信)이라, 많이 들어도 또 안 믿어. 많이 믿지를 않는다. 많이 듣는데도 불구하고 도대체가 잘 믿지를 않는다. 그래도 우리가 할 일은 자꾸 들어야 돼. 자꾸 듣고 자꾸 보고 자꾸 생각하고 그것 밖에 없다고요.
문사수(聞思修)라, 듣고 많이 듣고, 많이 생각하고 자꾸 그것을 되뇌이고, 반복하고 이게 문사수거든, 듣고 생각하고 닦는다.
상근기는 그냥 척 들으면 아, 그거? 응 그럼 당연하지 당연하구말구 아 이렇게 돌아가는데 중근기 하근기들은 자꾸 들어도 잘 믿지를 않는다.
노자 『도덕경』에도 그런 말이 있어요.
상사문도(上士聞道)에 상근기가 도에 대한 이야기를 딱 들으면은 근이행지(勤而行之)라 아주 부지런히 행해.
아, 그 참, 그거야 말로 우리가 할 일이라고 이렇게 부지런히 행하는데 중사문도(中士聞道)에는 중근기가 이제 도에 대한 이야기 들으면은 여기 같이 이렇게 마음에 대한 원리를 들으면은 약존약망(若存若亡)이라 야 그런가, 저런가 그 참 그럴듯도 하고, 또 돌아서면 아닌 것 같고, 또 돌아서면 아닌 것 같은데 또 이렇게 들어보면 또 그럴 듯도 하고 그래서 반신반의 하는 거지. 반신반의.
그 다음에 하사문도(下士聞道)에 하근기가 뭐 들으면은 크게 웃어. 웃어버려. 그런 이치가 어딨느냐고, 그게 무슨 그런 이치가 어디 있냐고, 되도 않는 소리 하지 말라고 귀신 씨나락까먹는 소리 그만하라고 말야(웃음)
그런데 노자 말씀에 ‘소인불소(小人不笑)면 부족이위도(不足以爲道)니라’ 그 소근기들이 하근기들이 비웃지를 않으면은 족히 도가 되지 않는다.
비웃는 근기가 있어. 사람의 근기가 마음은 하나지만 근기는 각양각색이예요. 천차만별이거든 근기가. 천차만별이니까 그런 소리 듣고도 비웃는 근기가 있다 이말이야.
도대체 이 마음의 세계에 대해서는 먹혀들지 않는 사람들이 있어, 먹혀들지 않는 사람들이. 먹혀들지 않고 그 어찌 그런 이치가 있겠는가, 되도 않는 소리 하지 말라고.
그런데 그런 그 부정하는 것도 결국 마음이고, 긍정하는 것도 마음인데도 불구하고 끝까지 부정하거든요.
자기에게 납득이 안되니까 할 수 없지 부정할 수밖에 없지.
그러니까 하사문도(下士聞道)에 대소지(大笑之)야, 하근기들이 도에 대한 이야기 들으면은 크게 웃어버린다 크게 비웃어버린다. 그런 사람들은 그런 근기들은 웃을 수 밖에 없다, 웃을 수밖에 없다 그랬어요.
그러니까 사실은 뭐 ‘목격(目擊)이 도존(道存)이라’ 그랬어요.
상사들은 상근기들은 눈을 척 이렇게 서로 마주보는 그 순간에 벌써 척 알아차리는 거지. 알아차려.
뭐 경전, 이 부처님 말씀 많이 들을 것도 없어요. 그저 몇 마디 들으면은 ‘응’ 하고 그냥 수긍이 돼버려.
옛날에 그 대매스님이라고 그 스님은 백장스님 밑에서 공부했는가, ‘즉심시불(卽心是佛)이다’ 이 마음이 고대로 부처다. 그 소리 한마디 떡 듣고는 그냥 ‘아 그러면 됐다’고 그래 혼자가 가지고, 이제 대매산에 가가지고 공부를 했거든요.
그냥 거기 그냥 눌러앉아 있는 거라.
이 사람이 꽤 그릇이 괜찮은 사람인데 도대체 한 번 와서 중간점검도 안하고 공부가 어떻게 됐는지 이야기도 한 번 안하고 소식이 없거든.
그래서 시자를 보내가지고 그 사람이 어떻게 사는가 한 번 가서 알아보라고 그러니까, 혼자 그렇게 그냥 아무 일 없이 그렇게 살고 있거든.
그러니까 그 찾아간 사람이 말이지 ‘어째서 여기서 수행한다는 사람이 이렇게 혼자 이렇게 한번도 스승을 찾아오지도 않고 점검도 안하고 그렇게 있느냐’고 그러니까, ‘아 즉심시불(卽心是佛)이면 됐지, 내가 처음에 그 스님 찾아 갔을 때 이 마음이 곧 부처라 하더라고, 아 이 마음이 곧 부처면 됐지 다른게 뭐 있느냐’고.
그러니까 찾아간 시자가 그랬어요.
‘그 스님 요즘은 불법이 바뀌어져 가지고 요즘은 비심비불(非心非佛)이다.’ (웃음)
마음도 아니고 부처도 아닌데, 지금 그 즉심시불은 유행지나갔다 이랬어요.
그러니까 그 스님이 있다가 ‘자기는 비심비불 하든지 말든지 나는 즉심시불이다.’ 뭐 유행 지나갔든지 말든지 나는 즉심시불이야. 자기 마음에 딱 계합되면 끝이야.
상사문도는 그렇다고 했어요.
목격이도존(目擊而道存)이라. 척 한마디 들으면은 그냥 알아차리는 거지.
참 그래 되면 좀 좋겠습니까? 귀에 못이 박히도록 그렇게 듣는데도 제대로 이제 납득이 안되죠.
그러나 내가 늘 말씀드리지만, 그래도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은 반복해서 듣는 거예요. 자꾸 훈습하는 것, 그것밖에 없다 하는 것입니다.
그야말로 돌을 차돌을 물 속에 담궈놓으면은 그 물이 잘 안배어들지요. 그래도 물에 자꾸 담궈두면 나중에 오래가면 썩기라도 한다구요.
흙덩이에다 흙덩이를 가지고 물에다 넣으면은 물이 잘 스며들어, 그만치 정신이, 영혼이 잘 순화되어 있는 사람들은 그냥 이 법이 쭈욱 가슴에 빨려들어가지. 그게 흙덩이를 물에 담구는 이치고.
인연이 없는 사람들은 죽자고 들어도 이게 가슴속에 파고 들지 않는거라. 그건 차돌을 물에 담구는 격이다. 겉만 젖는거야 겉만.
닦아버리면은 말짱 또, 속에 1밀리도 안파고 들었어 물이. 차돌은 딴딴 차돌은 그건 물속에 백년을 넣어놔도 그냥 겉만 그냥 젖어있지 안에 물이 안들어가거든.
그래도, 그래도 물에 넣어놔야지 어떻게 해.
그래도 불법의 바다속에다 넣어놔야지, 결국은 그 길밖에 없다고요. 그거 물이 속에 안 들어간다고 속에 안스며든다고 또 건져가지고 햇빛에 말려버리면 그것마저 이제 날아가 버리는 거죠.
중하(中下)는 다문다불신(多聞多不信)이라.
말 할 사람과 말하지 못할 사람 그런 이야기를 하고 있어요 유교에서는 보면은.
말을 할 사람과 말을 못 할 사람이 있다. 말을 할 사람한테다가 말을 하지 않으면은 이 도(道), 도에 대한 이야기를 안하면은 사람을 잃어버린다 그래요. 분명히 더불어서 이야기 할만한 사람인데 이야기를 안하면 그건 그 사람을 잃는 거예요.
그런데 이야기가 안 통할 사람에게 말을 하면은 어떻게 해? 말을 잃어버린다 그랬어요. 말을 잃어버린다.
그러니까 말을 잃어버리는 일은 없으리라고 생각을 합니다.
但自懷中解垢衣언정
(단자회중해구의언정)
다만 스스로 마음 가운데서 때묻은 옷을 벗어 버릴지언정
단자회중(但自懷中)에 해구의(解垢衣)언정 수능향외과정진(誰能向外誇精進)가, 다만 자신의 그 가슴 속에 회중(懷中), 품을 회(懷)자니까 가슴이라는 뜻도 되요 회중(懷中)에. 또는 자기 속에 있는.
해구의(解垢衣)라, 때 묻은 옷을 풀 해(解) 벗어버리다 이말이야. 때묻은 옷을 벗어버린다, 구의(垢衣) 구의를 해(解)는 풀어버린다, 벗어버린다. 때가 뭐겠습니까? 번뇌 망상의 때가 묻은 옷, 그거야.
우리들 마음 속에 있는 그런 그, 때 묻은 옷을 벗어버릴지언정
誰能向外誇精進가
(수능향외과정진가)
누가 능히 밖을 향해서 정진을 자랑할 것인가.
수능향외과정진(誰能向外誇精進)인가, 위에 숱한 이런 이야기를 해 놨어요. 자기 경지를 이야기 하고, 깨달은 사람의 경지를, 일반적인 그런 경지를 이야기 해 놓았습니다.
이야기 해놓고는 결국은 내 때 묻은 옷 벗어버리면 됐지 수능향외과정진(誰能向外誇精進)가 누가 능히 밖을 향해서 딴사람한테 알아달라고 정진을 과시, 자랑할 것인가.
내 정진 자꾸 자랑해봐야 그게 무슨 소용이 있느냐? 아, 내 그 더러운 옷 그거 벗어버렸으면 됐지, 내 이 자랑하려고 하는게 아니다 하는 그런 이야기입니다.
수능향외(誰能向外) 누가 능히 밖을 향해서 정진(精進), 자기 의 정진을 과(誇) 과시, 자랑하겠는가.
그러니까 위에 뭐 상사(上士)는 일결일체요(一決一切了)하고 중하(中下) 다문다불신(多聞多不信)이라 이런 이야기들 하며 등등이 전부 결국은 자기 속에서 자기가 수용해.
도는 자기가 수용하는 거지 자랑한다고 그게 될 일이 아니예요. 자랑할 거리도 아니예요 이거는.
무슨 다른 유한한 물질 같으면 좋은 옷을 사입었다든지 좋은 보석을 가졌으면 그거는 자랑을 해야지.
그렇지만 이 도는요 자랑한다고 될 것도 아니고, 자기가 정진 몇 시간 했네 하고 아 나는 몇 시간 했다고, 처사가 자랑하는 걸 내가 분명히 들었으니까 하는 소리야.
서울에서 어느 불교서점에 앉아있는데 이야기 하는데 자기가 그동안 정진을 이천 몇 시간 했다든가? 어쨌대나 하여튼 그래 이야기를 해쌌드라고요, 많이도 했지 그래도 이천 몇 시간을. 앉아서 뭘 생각했는지 모르지만 어쨌든 앉았던 시간이 이천 몇시간이래. 그래 자랑해쌌드라고. 하하하 그런 사람도 있어요. 그래 도(道)하고는 아무 상관없는 이야기거든 그게.
그래 수능향외과정진(誰能向外誇精進)가, 누가 능히 밖을 향해서 자랑할 것인가?
상독행상독보(常獨行常獨步)라, 항상 홀로 다니고, 항상 홀로 거닌다. 그러니까 깨달은 사람하고는 같이 다니겠지만은 깨달은 사람이 그렇게 흔치 않다 보니까 이렇게 혼자 다니는데, 달자동유열반로(達者同遊涅槃路)라 통달한 사람들끼리는 항상 같이 열반의 길에서 노닌다 이런 이야기네요.
그러니까 소위 지음자들 끼리 통하는 거고 도가 같아야 대화가 되겠지요. 뭐 그렇다고 일상의 어떤 대화까지 안된다는 이야기가 아니고 궁극적인 진리의 이야기는 아무하고나 그렇게 다 이야기가 될 수 있는 게 아니다 라고 하는 그런 내용입니다.
열반의 길이라고 하는 것은 이건 뭐 교리적으로 이야기를 하면은 복잡해지지만은 말하자면 번뇌를 다 소멸한 깨달음의 길이다.
‘시방박가범(十方薄伽梵)이 일로열반문(一路涅槃門)이라’ 시방에 있는 모든 부처님이 하나의 길, 열반의 하나의 길에서 모두 노닌다 하는 그런 말도 있고 그렇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어떤 그 입지를 이야기 한다고나 할까요?
조고신청풍자고(調古神淸風自高)요 모췌골강인불고(貌悴骨剛人不顧)로다
자신의 처지를 조금 우리가 이런 거를 통해서 엿볼 수가 있는 것이 조고신청풍자고(調古神淸風自高)라, 조고(調古) 조 (調)라고 하는 것은 격조, 격조는 고(古)는 아주 옛스럽다 하는 말입니다. 이를테면 부처님이 걸어가신 길이니까 그러니까 격조는 옛스럽고 신청(神淸)이라 정신은, 정신은 아주 청량하다 맑다 그런 말이죠.
풍자고(風自高)라 이 풍(風)은 어떤 선풍이라고 할까, 가풍, 또는 도풍 그 분의 어떤 그 지닌 풍모 이런 것이죠. 그 분에게서 어떤 풍기는 분위기라고나 할까 그런 것은 저절로 높다.
이런 것이 자신의 다른 평범한 많은 사람들과의 어떤 다른 점, 차이점이라고 할까 이런 것을 스스로 표현한 대목이겠네요.
그야말로 전형적인 수행자, 교학을 아주 깊이 공부하고 그리고 또 선에 깊이 들어가서 깨달음에 까지 이르렀다, 그랬을 때 그 삶이야말로 인간적인 평범한 삶이 결코 아니었죠.
그 정도까지 이르려면은 얼마나 온갖 반연을 다 끊고 그야말로 고심하고 힘든 그런 그 삶을 살았겠습니까?
그런 나머지, 또 성격이 또 그럴 수 있어야 되는 거예요. 그냥 억지로는 안 되는거죠. 아무나 억지로 한다고 되는 거는 아닙니다. 그 나름의 어떤 그 노력은 누구나 다 하죠. 하면은 그 사람에게서 이르러 갈 수 있는 곳까지 이르러 가는 거죠.
이런 분은 소위 우리가 흔히 말하는 ‘종교적 천재다’ 그런 말을 합니다. 체질적으로 성격적으로 아주 이런 일에 아주 적합한 그런 성격을 타고났다. 그건 뭐 물론 저절로 타고난 거는 아니겠죠.
과거로부터 이런 데 마음을 많이 쓴 사람이 그런 분위기를 가지고 타고 나게 되는 거죠.
조고신청풍자고(調古神淸風自高)
그 말입니다. 격조는 아주 옛스럽다. 전통적으로 부처님으로부터 쭉 조사스님한테 밟아온 그런 그 격조를 그대로 가졌고, 그 정신은 아주 청신하고 아주 청량하고 또 청정한 그런 정신의 소유자, 그러면서 그 풍모, 또는 도풍이라고 할까요? 그것은 저절로 높다, 아주 높은 그런 경지의 소유자다.
그리고 모췌골강인불고(貌悴骨剛人不顧)라 모(貌)는 이제 외모죠, 상모죠 형상입니다. 그래서 이 형상은 아주 초췌하다.
그러니까 아주 뼈는 강강하다 야물다 하는 그런 의미가 되겠는데 뭔 말인고 하니 바싹 마른 사람이 아무래도 뼈가 튀어나오니까 야물어보이겠죠. 뼈는 굳세보이겠죠. 그러니까 그런 모습을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상모는 또는 얼굴은 아주 초췌하고 뼈만 아주 깐깐하게 그렇게 이제 볼품없이 뭐 부처님의 6년 고행상을 우리가 이렇게 더러 접할 수 있는데 그림 같은거 보면 그렇죠.
그래서 인불고(人不顧)라. 사람들이 돌아보지를 않는다. 그러니까 저 사람이 뭐가 있겠는가? 어떻게 사람이 저렇게 까지 깡마르고 참 몹쓸 모습으로 저렇게 되었는가, 그래서 뭐 영 볼품이 없이 보이겠죠. 그러니까 사람들이 눈여겨보지를 않는다는 말입니다.
아마 스스로 그런 걸 경험했겠지요.
그렇더라도 도풍만은 그런 것이 아닌 것을 여기서 이야기를 합니다.
궁석자구칭빈(窮釋子口稱貧)하나 실시신빈도불빈(實是身貧道不貧)이라.
궁석자(窮釋子) 궁한 석자, 석자(窮釋)라는 말은 부처님의 제자를 석자라 그래요.
석가모니(釋迦牟尼)라 석(釋)자를 쓰고 자(子)자는 제자(弟子) 또는 아들자(子)자인데 부처님의 제자들, 부처님의 제자들은 대개 궁하다 그런 말을 하죠.
그래서 출가한 스님들은 성(姓)을 전부 세속에서 쓰던 성을 다 버리고 요 석(釋)자 석가모니(釋迦牟尼)라는 석(釋)자 이 석(釋)자를 자기의 성(姓)으로 해야된다. 그게 이제 동진의 도안법사라고 옛날에 꽤 오래된 중국의 중국불교초기의 아주 뛰어난 그런 도인이 있었는데 그 분이 주장을 했습니다.
그래서 그 이후로 전부 석누구, 석무비, 뭐 석뭐라고 그렇게 하도록 되어 있어요. 이건 그렇다고 법적으로 효과가 있는거는 아닙니다 물론.
그러나 성을 굳이 쓰려면은 이 석자를 써야된다 그래요.
특히 중국같은 데서는 이 석자를 씁니다.
그래서 그 전에 불교대회 같은거 또 중국사람들하고 불자들끼리 교류할 때 그전에 청담스님이 그분은 늘 이청담 이청담 그랬어요. 성이 이씨니까. 그래서 명함에도 이청담이라고 찍은 것을 그렇게 우리 나라에서 아주 큰 스님이었죠.
그런데 이제 내주니까 처사, 이청담 처사라고 그랬어요 그 사람들이. 승려같으면 이가를 안쓴다 이거야. 이가를 안쓰는데 왜 이가를 쓰느냐, 그래 이청담거사로 이렇게 막 편지가 오고 그랬어요. 그만치 석가를 써야된다 하는 것이 상식화 되어있습니다.
속가의 성을 안쓰지요. 안쓰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이제 사무적으로는 또 사회에서는 성을 쓰긴 합니다만, 그래서 출가한 석자라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구칭빈, 말은, 입으로 일컫기는 가난하다 그러죠.
요즘 스님들이야 가난하지는 않습니다만 지금도 사회 사람들에 대면 이제 가난하죠. 비교를 하면, 그렇지 않은 이들도 물론 있지만, 옛날에는 크게 옛날이 아니고 우리나라도 얼마전까지만 해도 사실은 아주 그 어려웠죠. 참 가난했었습니다.
그게 본래 가난하게 살도록 되어있는 거예요. 탁발해서 먹고 말이죠, 그저 옷은 ‘송낙초의(松落草衣)로 차색신(遮色身)하라’ 그랬거든요.
저기 깊은 산중에 살면 송낙이라고, 고목 오래된 소나무에 열리는 송낙이라는 게 있어요. 그게 실처럼 생긴 게 있어요. 그걸 많이 뜯어가지고 얼기설기 엮으면은 몸을 가릴만한 옷을 만들 수가 있습니다. 그런 거라든지 아니면 옷이라도 누더기라든지 그런 것으로써 어떤 외적인 것은 가난하게 살도록 그렇게 되어 있는거죠.
궁할때 궁해야 말하자면 도심이 생긴다
가난하고 추워야 말하자면은 도심이 생긴다. ‘기한(飢寒)에 발도심(發道心)’이라, 주리고 추울 때 도심이 발한다 하는 그런 옛말도 있고 그렇습니다.
그런데 실시신빈도불빈(實是身貧道不貧)이야. 실로 몸이 가난하지 도가 가난한 것은 아니다 하는 것입니다.
이건 영가스님에게 해당되는 그런 이야기죠.
도가 가난한 것은 아니다. 도는 부자다 이거예요. 그래서 여기 그 설명입니다.
빈즉신상피루갈(貧則身常被縷褐)이요. 가난한 입장으로써는 몸에 항상 루갈을 걸쳤고, 루갈은 이제 누더기다 하는 그런 말입니다. 아주 다 떨어진 옷, 빈즉신상피루갈(貧則身常被縷褐) 다 떨어진 누더기를 걸쳤다.
도즉심장무가진(道則心藏無價珍)이라
도의 입장으로는 무가진보를 마음에 갈무리하고 있다. 마음에 딱 마음속에 가지고 있다. 그러니까 다른 것은 값을 매길 수 있지만, 마음을 깨달은 그런 도의 경지는 값을 매길 수가 없는 거죠. 그래서 무가진이라. 값을 매길 수 없는 그런 진보다. 그런 말이죠.
누가 뺏어갈 수도 없습니다. 뺏어 갈 수도 없고, 훔쳐갈 수도 없고, 또 남을 줄래야 줄 수도 없죠. 그걸 설명은 할 수가 있죠. 설명은 할 수 있지만은 줄 수는 없어요.
그러니까 이건 참 영원히 자기 거고 자기 재산이 되는 거죠.
그래서 무가진용무진(無價珍用無盡) 그 무가진을 무가진보를 쓰는데 다함이 없다. 이겁니다.
다함이 있는 것 같으면은 언젠가 끝날 날이 있어 가지고 그건 또 그래 되면 값을 매길 수가 있겠죠. 그래 되면 무가진(無價珍)이 안되지요.
그래서 무가진, 값으로 매길 수 없는 이 진보는 사용함에 있어서도 무진이다. 용무진(用無盡)이다. 한량함이 없으니까요.
이 마음이라고 하는 것, 자비심도 그렇습니다. 남에게 자꾸 베푼다고 해서 그 자비심이 그게 바닥이 나는가 하면 안그래요. 오히려 더 늘어나요. 보통 우리가 쓰는 친절한 마음도 사실은 사용하면 사용할수록 자꾸 더 친절해지고 싶고 그게 더 늘어요 사실은.
그런데 하물며 깨달은 마음, 마음의 저 근원자리를 꿰뚫은 그런 도인의 도력이야 쓴다고 다할리야 있겠습니까?
이 마음의 도리는 참 묘해요.
마음 작용은 일부러 우리가 계산을 한다 오래 신경을 쓰는 것은 피로하지만은 그렇다고 마음의 작용이 멈춰진 건 아니거든요. 자연스럽게 안에서 우러나오는 마음의 작용은 이건 피로하지도 않아.
아무리 많이 써도 그게 멈춰지지도 않고, 그렇게 많이 흘러나온다고 해서 그게 피로해하거나 뭐 닳거나 이제는 그쯤 이제 마음 작용이 됐으니까 그다음에는 뭐 작용이 좀 둔해졌다든지 그런 것도 아니예요. 마음의 도리가 참 오묘불가사의 한 거죠.
그래서 마음에 대한 그런 발견은 인류사에 있어서 최대의 발견이죠 사실은. 그걸 우리가 잘 사용할 줄 알아야 되는 게 과제죠.
첫댓글 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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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가진(無價珍)의 꽃물이 용무진(用無盡)하는 환희로움을 모두 다 누리시기를,,,
但自懷中解垢衣언정 誰能向外誇精進가... 다만 스스로 마음 가운데서 때묻은 옷을(번뇌 망상의 때가 묻은 옷) 벗어 버릴지언정 누가 능히 밖을 향해서 정진을 자랑할 것인가...꽃물들다님! 수고하셨습니다.._()()()_
道則心藏無價珍이라 (도즉심장무가진이라) 上士一決一切了하고 (상사일결일체요) 상근기는 한 가지를 해결하면 일체를 다 해결하고 -노자 『도덕경』 상사문도(上士聞道)에 상근기가 도에 대한 이야기를 딱 들으면은 근이행지(勤而行之)라 아주 부지런히 행해. -노자 말씀에 ‘소인불소(小人不笑)면 부족이위도(不足以爲道)니라’ 그 소근기들이 하근기들이 비웃지를 않으면은 족히 도가 되지 않는다.....물 들다님 감사드립니다 _()()()_
利物應機終不燐 수리수리마하수리수수리사바하 수리수리마하수리수수리사바하 수리수리마하수리수수리사바하...
목격(目擊)이 도존(道存)이라.ㅡ 척 한 마디 하면 알아차리는... 이렇게 될 것이라 믿고서 정진에 정진..._()()()_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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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는 자기가 수용하는 거지 자랑한다고 그게 될 일이 아니예요. ... 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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