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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60 강 - 機緣品- 14
無上大涅槃이 圓明常寂照어늘
凡愚는 謂之死하고 外道는 執爲斷하며
諸求二乘人은 目以爲無作하나니
盡屬情所計라 六十二見本이니라
妄立虛假名이어니 何爲眞實義리요
惟有過量人이 通達無取捨하야
以知五蘊法과 及以蘊中我와
外現衆色相과 一一音聲相이
平等如夢幻하야 不起凡聖見하고
不作涅槃解하며 二邊三際斷하야
常應諸根用하되 而不起用想하며
分別一切法하되 不起分別想하나니
劫火燒海底하고 風鼓山相擊이라도
眞常寂滅樂은 涅槃相如是니라
吾今强言說하야 令汝捨邪見하노니
汝勿隨言解하면 許汝知少分하리라
志道- 聞偈하고 大悟하야 踊躍作禮而退하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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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림회가 아주 발전이 잘 되는 것 같습니다. 우리나라의 불교에 있어서 최고 知性人(지성인)들만 모인 신행단체가 될 것 같은 그런 예감이드네요. 우리가 부처님께 귀의 하면서 부처님의 대중이 되고, 부처님의 제자로서의 어떤 한 단체가 된다는 이것은 어떻게 보면 평생에 제일 영광스러운 일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합니다. 물론 뭐 저야 부처님의 嫡子(적자)니까 더 말할 나위가 없지만, ㅎㅎㅎㅎㅎㅎ 신도님들도 또 일반 불자들도 스님들 못지않게 요즘은 공부도 아주 깊이 많이 하시고, 수행도 스님들보다도 오히려 더 많이 하시는 분들도 적지가 않습니다.
이 대승불교라는 것은 다른 말로 하면 대중 불교 입니다. 모든 대중이 다 공유하는 불교. 그것이 가장 바람직한 불교거든요. 부처님이 열반하시기 까지는 아무 탈이 없었는데, 열반하고 한참 세월이 흐르면서 부파불교라는 각자 자기의 좁은 소견을 가지고, 자기주장만 내세우는 파벌들이 상당히 많이 형성이 됐었는데, 그러면서 부정적인 불교의 색체를 띤 시간이 상당히 흐르다가,
한 5~600년쯤 지난 뒤에는 다시 “부처님의 근본정신으로 돌아가야 된다.”고 하는 운동을 일으킨 것이 소위 “대중 불교운동”이고 그것은 곧 “대승불교운동” 인데 그런 운동은 스님들이 한 것이 아니고, 일반 신자들이 한 걸로 그렇게 볼 수가 있습니다.
설사 스님들이. 출가인이 했다 하더라도 똑 같은 정신을 소유한 사람들이, 뜻을 같이 한 이들이 승속을 떠나서 정말 “부처님의 근본정신으로 돌아가야 된다.”고 하는 그런 뜻을 같이 한 분들이 일으킨 운동이 “대승불교운동”이고, 그것은 곧 “대중 불교운동”이고, “대중 불교운동”은 출가한 사람만의 전유물이 아닌, 모든 사람들이 “공유해야 된다.”고 하는 또 공유할 수 있는 그런 교리가 본래 부처님의 가르침인데, 그런 것이 다소 배제된 세월이 한 3~400년 쯤 흘러 왔다는 바탕 하에서 일어났던 것이지요.
그래서 저는 법화경이라든지 유마경 같은 경전은 그야말로 “대승불교운동 선언서다.” 이렇게 표현을 하는데 유마경은 아시는 대로 유마거사가 주인이 돼서 설해진 경전이거든요. 거기에 보면 처음부터 유마거사가 병이 났는데요.
병문안을 부처님이 제자들에게 보내려는데 소위 그 10대 제자라는 기라성 같은 부처님의 제자 중에 최고의 제자라고 할 만한 사람들이 전부 유마거사에게 훈시를 받고, 가르침을 받고, 또 어떤 의미에선 혼이 났던 그런 경험들 때문에 뒤에 따라갔으면 갔지, “저로서는 도저히 대표자가 돼서 대중들을 이끌고 가서 문안을 드릴 자신은 없습니다.” 하고 전부 꼬리를 빼는 장면이 유마경에 나오지요.
그러다가 최후에 문수보살이 어쩔 수 없이 선두에 서서 부처님의 제자들을 거느리고 문안을 가게 되는데요. 그 내용은, 거사 한분에게 출가한 부처님 제자들이 한 사람도 거기에 대적할 법력이 되지를 못 했고, 모두 그야말로 법력이 유마거사보다도 못한 것으로 이야기가 됐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천하에 아주 유명한 경전입니다. 아주 많이 읽히는 경전이고, 불자라면 필독서처럼 그렇게 되어있고, 만고에 아주 큰 칭찬을 받는 그런 경전이라고요. 아주 인기 있는 경전입니다.
8만 대장경 중에서도 아주 인기 있는 경전으로 내려오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것을 “대승불교운동의 선언서다.” 그러지요. 출가집단의 그 고집. 편협한 그런 생각들을 깡그리 무너뜨려 버리고, 정말 모든 사람들이 부처님의 올바른 가르침을 공유할 수 있는 그런 세상이. 그런 불교 세상이 와야 된다는 그런 뜻에서 설해진. 결집된 경전이 아닌가? 그런 생각을 합니다. 제 소신은 그래요.
법화경 · 유마경은 최소한도 이것은 “대승불교운동”을 펼치기 위한 아주 의도적으로 결집된 그런 경전이라는 생각을 합니다. 이 시대에 와서야 더 말할 나위가 없지요. 그 때도 하물며 그랬는데... 지금이야 뭐 더 말할 나위가 없습니다. 늘 주인 의식을 가지고 바르고... 불교주인이야 스님들이 알아서 어디로 가든지, 산으로 가든지 바다로 가든지 뭐, ‘저희가 알아서 할 일이지’ 이런 생각을 하면 안 되는 것이지요.
불자 모두가 주인이지, 누가 특별히 주인이 따로 있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을 해야 됩니다. 잘못이 있으면 그냥 스님들에게만 책임을 전가해 버리고, 물론 일차적인 책임이 있기는 있지만, 그런 것들도 이제는 달리 생각해야 할 그런 때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합니다.
오늘은 志道(지도)라는, 機緣品(기연품)에서 여러 스님들이 소개가 되는데, 제자들이 많이 소개가 되는데요. 지도스님이라는 제자가 육조스님에게 와서, 이런저런 가르침을 받고, 최후로 육조스님께서 아주 유명한 게송을 들려드리는데 이것은 육조단경 중에 최고의 게송으로 그렇게 알려져 있습니다.
또 이 게송이 설해진 이후 많은 조사스님들이 이 게송을 인용을 해서 설법을 하시고, 또 어떤 불교 저술에도 많이 인용이 되고 그렇습니다. 육조단경 에서 최고 좋은 게송이에요. 아주 “유명한 게송이다.” 고 이해하시면 되겠습니다. 앞에 쭉 이야기 되어온 것은 놔두고요. 그것 하고 관계없이 들어도 들을만한 내용입니다.
게송→[無上大涅槃(무상대열반)이 圓明常寂照(원명상적조)어늘→ 소위 涅槃이라는 것에 대해서 어떤 사전적인 해석을 떠올리면 안 돼요.
육조스님의 안목. 육조스님의 견해대로 해석을 한 것으로 그렇게 이해 해야 됩니다. 대개 사전적인 해석은 사전 쓰는 사람들이, 대개 불교 학자들이 쓰고, 그러다 보면 교리 중심으로, 교리에 근거해서 쓴다고요. “육조스님은 열반에 대해서 이렇게 말했다.” ←이렇게 인용을 하지를 않습니다.
涅槃이라고 하면 뭐냐? 니르바나라고 하고, 또 유여열반 무여열반. 이렇게 나누고 또 그것은 “불을 불어서 끄다.”라고 하는 뜻인데, 그것은 “불이 타 오르고 있는 것을 불어서 꺼서 불이 식고, 싸늘한 재가 되고, 그 재까지 마저 날아가 버렸을 때, 그와 같이 우리의 마음속에 일어나던 번뇌의 불길이 완전히 꺼져서 식고, 식은 재마저 날아가 버렸을 때, 마음의 어떤 상태가 싸늘한 재처럼 응고 됐다고 할까? 굳어 졌다고나 할까? 어떤 마음의 작용이 멈추어진 그런 상태. 멈추어 졌어도 한참 오랫동안 멈추어져서, 그야말로 목석과 다를 바 없는 그런 상태를 일단은 “涅槃이라고 한다.”이런 식으로 사전적인 해석은 그렇거든요.
그런데 그런 해석이 과연 “涅槃”을 제대로 해석 했느냐? 부처님의 설법에 있어서의 “열반이라는 것이 과연 그런 뜻이냐?” 라고 했을 때는 또 “문제가 많다.”이렇게 봅니다. 그래서 여기서 육조스님이 단언하시기를,
圓明常寂照(원명상적조)라 그랬어요. 무여열반이다. · 유여열반이다. · 대승열반이다. · 소승열반이다. 그런 것을 깡그리 무시하고,
無上大涅槃(무상대열반)이다 그랬습니다. 최상의 열반. 최상의 큰 열반이라고... 그러면 열반을 최고의 경지로 보는데, 圓明常寂照라. 아주 뚜렷이 밝고 항상 고요하면서도 항상 비치는 작용을 한다. “圓明”은 뭐겠습니까? 뭔가 있어서, 뭔가 있어서 밝는데 이것은 “완전무결하게 밝다.”는 것을 “圓明”이라고 합니다.
그냥 어디든 그림자가 있으면 “圓明”이 못되지요.
보통 밝은 햇빛은 “圓明”이 아닙니다. 왜냐? 그림자가 있으니까요.
마음의 밝음은 그림자가 없기 때문에 그래서 “圓明”입니다.
“원만하게 밝다.”이것이지요. 그림자가 있는 밝음은 원만한 밝음이 못되지요. 그런 것이 있는데,
그것은 “心意識(심의식)” 우리가 잠들었다고 해서 쉬는 것이 아니고, 또 깨어있다고 해서 활발하게 작용하는 것이 아니고, 이것은 잠드나 깨나 우리가 죽었다고 하나 우리가 살아 있다고 하나, 어느 때나 또 우리가 마음에 어떤 무엇을 집중하고 있다거나, 그것하고 관계없이 常(상)이지요.
“寂照”라. 이 적조라는 말이 아주 뜻이 깊 은 데요. “寂하고 照한다” 그래야 됩니다. 고요하면서 비친다. 고요하다는 것은, 우리가 지금 照(조)자부터 이해하면 照= 밝음을. 빛을 가지고 이야기했기 때문에 우리 마음 작용하는 것을 “照”라고 그럽니다.
말하는 것을 다 잘 살피지요. 잘 듣지요. 이것을 “照”라고 그래요. 비출 조 자. 사물을 잘 보죠? 그리고 사물을 보고 그냥 있지 않습니다. 막 분별을 합니다. 뭘 보면 저건 값으론 얼마가 될까? 저것은 누구 것인가? 내 것으로 만들면 어떻게 할까? 나는 모르는 사이에 마음에 드는 어떤 사물을 보면 끊임없이 생각이 돌아가거든요. 그런 작용을 “照”라고 합니다.
그런 활발한 작용을 하지만 사실은, 그 활발한 작용이 어디에서 일어나는가? 를 근본을 찾아 보면 텅 비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고요하다.”고 하는 것이에요. “寂하면서 고요하다. 적한데도 항상 고요한. 고요하면서도 항상 비춘다.” 이겁니다. 또 “항상 비추면서도 항상 고요하다.” 활발하게... 그냥 화가 날 것 같으면 세상을 다 삼킬 듯이 큰 화를 낸다 하더라도, 그러나 그 큰 화가 어디서 나는가? 그 근거를 찾아 들어가면 일어난 자리가 없어요. 그 근본은 적한 것입니다.
정말 고요한 자리지요. 우리 선 가운데 “看話禪(간화선)이 있고, 默照禪(묵조선)이 있다.” 이런 말을 아마 들으셨을 거예요. 寂照나 默照나 같습니다. “默照”라는 말이 아주 이상적인 말입니다. 선의 사상이라고 할까? 선의 정신. 선의 핵심을 나타낸 말 중에서 “默照”라는 말같이 이상적인 것이 없습니다. 왜냐? 묵묵하면서 좋아하고, 좋아하면서 묵묵하니까요. 默이나 寂이나 같은 뜻입니다. 이럴 때는...
고요하다든지 묵묵하다든지 이것은 어쨌든 텅 비어서 흔적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 흔적이 없으면서도 부단히 작용을 일으키는 것이 “照” 거든요. 늘 좋아하면서 비추면서 작용을 일으키면서 또 고요하고, 고요하면서도 작용을 일으키고, 그 고요하고 텅 빈 자리니까 우리가 자면서도 정신작용은 있었어요. 꿈도 꾸고 있었지만, 저 밑에 8식이나 7식에서는 어떤 작용을 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차치하고라도, 눈을 뜨면서부터 이 시간 까지 얼마나 많은 분별을 합니까? 얼마나 많은 분별을 해왔습니까? 우리가 차를 타고 빨리 지나가면서도 간판 어지간히 다 읽지요? 차가 지나가는지 사람이 있는지 없는지 상황이 어떤지 날씨가 어떤지 전화 오는 것 다 받고 그러면서도 온갖 생각 다 하고요. 그렇게 부단히 작용을 합니다.
그것이 만약에 모양이 있다면, 우리가 작용하는 정신세계가 하루에 금정산만 하는 크기가 될지도 몰라요. 그렇지만 그것이 흔적이 없는 것이지요. 그것참, 마음의 세계는 묘해서 늘 그렇습니다. 그것이 열반의 진정한 뜻이지요. 그 마음의 본 상태. 정말 고요하면서도 너무나 작용하고 작용하되 그 근본은 항상 고요한 것. 이것이 중도지요 사실은...
고요하다고만 생각해도 안 되고, 활동한다고만 생각해도 안 되고, 그 두 가지가 동시에 마음이라고 하는 “圓明한” 마음자리에는 동시에 그것이 “갖추어져 있다.”고 양면성을 우리가 동시에 이해하는 것. 그것이 “중도적인 견해다.”라고 볼 수가 있는 것이지요.
그런데 이것이 가장 이상적인 표현이고, 또 이상적인 모습인데 그 “열반”이라는 것을 凡愚(범우)는→ 어리석은 범부들은 그것을
謂之死(위지사)하고→ 죽음 이라고 부른다. “아 열반 하셨다.” 그러지요. “아 큰 스님 열반 하셨다.”고 하거든요. “죽음” 이라고 불러요. “죽음”을 간혹 “열반”이라고 부릅니다. 어떤 경전에 보면 부처님이 돌아가신 것을 부처님 죽음을 갖다가 “열반”이라고 표현을 많이 했어요. 그렇게도 쓰이니까요. 그리고 외도들은 뭐냐?
外道(외도)는 執爲斷(집위단)하며→ 외도들은 그것을 집착해서 “단멸”이라고 한다. 이 斷. 끊어질 단 자. “그 걸로 끝이다.”이겁니다. 열반에 들면 아무 사량 분별. 어떤 思考(사고)나 이런 것들이 일어나지 않는 그런... 이것은, 소위 斷 자는 길을 가다가 낭떠러지처럼 딱 끊어져서 더 이상 나아갈 수 없는 천길 만길 낭떠러지처럼 딱 끊어진 상태를 “斷”이라고 그럽니다. 더 이상 없다는 것이지요.
외도들은 “우리의 어떤 정신세계가 딱 끊어진 상태가 되면, 더 이상은 아무 것도 없다.” 이렇게 보는 것이지요. “외도”라는 말을 설명 하려면 많은데, “불법 밖에 주장하는 종교” 어떤 철학. 이런 이들을 불교에서는 통칭 “외도”라 그럽니다. 外 자는 “불법 밖에 어떤 주장하는 道(도)”
諸求二乘人(제구이승인)은 目以爲無作(목이위무작)이라→ 二乘을 구하는 사람들. 그러니까 성문이나 연각. 불교 안에서도 소견이 제대로 들어가지 않는 수행자를 “二乘人이다.” 이렇게 보면 되겠습니다. 그런 이들은 그것을 지목해서 “아무 것도 하지 않는 상태다.” 그것을 “열반”이라고 한다. 아무 것도 하지 않는 상태를 “열반”이라고 한다. 그래서 그것은 한 마디로 말하자면,
盡屬情所計(진속정소계)라→ 모두들 여기에 속해있다. 어디에? 情으로. 자기의 알량한 마음으로 전부 계산한 바에 속해있다. 그냥 자기 나름대로 생각을 해서, 그 생각에 전부 속해있는 것이 “斷” “죽음” “無作” 이것이 전부 그들의 사량 분별로. 제대로 꿰뚫어 본 것이 아니고, 대개 그냥 보통 사람들의 사량 분별로. 사변으로 이리 궁리하고 저리 궁리해서 만들어낸 소견이라는 것이지요.
그것이 좀 더 크게 나눠지면 六十二見本(육십이견본)이니라→ 인도의 “62견”이라고 하는 주의주장이, 그 당시에 62가지나 되는 주의주장이 있었답니다. “육사외도” 라고 해서 크게는 여섯 가지. 그 여섯 가지에서 좀 더 또 나눠지면 각 여섯 가지에서 나눠지면 62가지로 나눠진다는 겁니다. 그것이 근본이 된다. 그래봤자 그것이 전부 가짜. 사량 분별로. 자기 소견대로 이야기한다 이것이지요.
우리 어릴 때, 기독교나 천주교에 다녀보면 하나님에 대해서 꼭 외워야 되는 것이 있어요. 100가지 교리문답. 60가지 교리문답. 영세 받을 때 그것을 몇 조항 까지 외워야 영세 받을 자격이 있거든요. 그러니까 하나님에 대해서 물어보면 그 사람들은 천편일율 적으로 똑 같이 대답한다고요. 왜냐? 처음에 신자가 될 때 외워야 하는 것이 있었기 때문에 외운 대로 대답하는 것이지요.
불자들은 어떻게 된 심판인지 100명에게 물으면 100명이 다 달리 대답하는 겁니다. 거 왜 그러냐? 盡屬情所計(진속정소계)예요. 자기가 아는 대로, 자기 깜량 대로 대답하니까 그래요. 그것이 사전적으로 “부처님은 이런 분이다.”라고 꼭 외워야 “신자가 되고. 5계를 주고 10계를 준다.” 그런 법이 없어요.
요즘 스님들은 또 그런 것을 만들어 놨지요. 엉터리 스님들이 하도 많으니까요. 법을 만들어서 기본적인 것은 외우게 하고 시험 치게 하고 그러지만, 본래는 그런 것이 없어요. 자기 깜량 대로, 자기가 아는 만치만 대답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부처님에 대해서 설명하라면 진지하게 설명하면요.
전부 다 다릅니다. 100명이 아니라 만 명에게 물으면 만 가지 답이 나오지요.
그것이 다 자기 깜량 대로 해석을 하고, 이해를 하고 있기 때문에 그렇지요. 盡屬情所計(진속정소계)지요. 그야말로 모두들 자기 情으로. 計巧(계교)한바다. 어떤 분은 “부처님은 어떤 분이냐?” 그러면, “아이고, 우리 동네 누구 같은 사람이다.”라고 그렇게 대답할 수도 있지요. 동네에 봉사활동 아주 잘 하는 사람이 있으면 아! 정말 살아있는 부처님처럼 여겨질 때가 있을 거거든요. 그 정도의 답은 아주 준수하지요 그래도... 그 정도의 답은 준수한데 그 외에 뭐 별별 답이 다 있을 수가 있습니다. “六十二見” 하는 것은 자세히 알려면 불교사전 찾아보면 낱낱이 다 나와 있습니다.
妄立虛假名(망립허가명)이어니→ 망령되이 헛되고 거짓된 이름만 자꾸 세워놔. 예를 들어서 “열반은 죽음이다.” “다 끊어진 것이다.” “지음이 없는 것이다.” “목석과 같은 것이다.” 별별 소견이 다 나올 수가 있겠지요.
그러나 그것은 다 헛되고 거짓된 이름이다.
何爲眞實義(하위진실의)리요→ 어찌 진실한 뜻이 있겠는가? 진실한 뜻이 되겠는가? 진실한 뜻은 아니다 이것이지요. 圓明常寂照(원명상적조)라고 했지만, 그것도 마지못해서 이름을 그렇게 붙였지, 그래도 가장 가까우니까 그렇게 표현을 했지 그것이 꼭 맞는 것은 아니겠지요. 그런데 대개 사람들은 凡愚(범우)나 外道(외도)나 二乘人(이승인)이나 보통 중생이나 하는 사람들은 그러는데,
惟有過量人(유유과량인)이 通達無取捨(통달무취사)하야→ 정말 오직 過量人. “그 사람의 그릇이 얼마 만치다.” 라고... 이것은 법의 그릇이지요. 사람 됨됨이도 중요하겠지만, 진리를 이해하는 그릇. “그 그릇이 얼마다.” 라고 헤아릴 수 없는 사람을 “過量人” 그래요. 量을 지나가는 사람.
禪家(선가)의 표현들이 아주 재미있어요. 量을 지나가는 사람. 도대체 그 사람은 지혜가 어느 정도인지 도대체 가름이 안 되는 오직 過量人.
通達無取捨(통달무취사)하야→ 取捨가 없는 도리를 通達해. 알고 보면 취할 것도 없고 버릴 것도 없는데, 우리는 그저 늘 취하고 버리고, 이건 버리고 이건 취하고, 너는 좋으니까 내 곁에 있고, 너는 나쁘니까 가고, 전부 취하고 버릴 것뿐입니다. 그저 매일 하루 종일 우리의 삶이 어쩌면 取捨 하다가 볼일 다 보는 것이지요. 학생들 놓고도 대답을 잘했다 못했다. 착하다 안 착하다. 전부가 取捨 선택입니다. 그저 取捨 선택으로 하루를, 그리고 일생을 보내는 것이지요.
그런데 過量人은 알고 보면 취사 할 것이 하등에 없다는 그런 도리를 통달한 사람들이지요. 過量人을 가지고 설명 하려면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여기서는 通達無取捨(통달무취사). 일단 그거 한 가지. 取捨가 없는 도리만 제대로 通達 해도, 취할 것과 버릴 것이 없는 도리만 通達 해도 그것은 대단한 것이지요.
以知五蘊法(이지오온법)과 及以蘊中我(급이온중아)와
外現衆色相(외현중색상)과 一一音聲相(일일음성상)이
平等如夢幻(평등여몽환)하야→ 五蘊法. 色(색) · 受(수) · 想(상) · 行(행) · 識(식). 우리 몸뚱이와 또 우리 마음의 여러 가지 작용들. 그런 가운데 내가 있다. 五蘊가운데 내가 있다고 하는 것.
外現衆色相(외현중색상)→ 그리고 내가 사물을 보니까 사물들이 저렇게 산과 바다와 강과 하늘과 온갖 사람과 자동차와 온갖 사물들이 펼쳐져 있지요. 밖으로 나타난 온갖 색상들. 그리고
一一音聲相(일일음성상)→ 사람의 소리. 차 소리. 바람 소리. 개 소리. 물소리. 온갖 소리들이 있지요.
이런 것들이 平等如夢幻(평등여몽환)이예요→ 똑 같이. 이거 空(공)한 것만 평등해요. 공한 것 외에는 평등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텅 비어서” 平等을 이렇게 해석해도 좋아요. 텅 비어서 꿈과 같고 환과 같은 줄을 다 알아... 그런 속에 있어요. 온갖 “색수상행식” 이 있지요. 그 속에 내가 있다고 나를 내 세우지요. 걸핏하면 “나” “나” 그 “나” “나” “나”하면 “남” “남” “남” “나너” “나너” 주관과 객관. 계속 그 속에 파묻혀 살지 않습니까?
그리고 밖에 나타나는 현상들. 그리고 맞는 소리 틀리는 소리. 온갖 소리들. 신문지상에 오르는 것도 전부 소리예요. TV 뉴스나 라디오 뉴스가 전부 소리고요. 이런 것들이 텅 비어서 하룻밤의 꿈이요. 幻.= 환상. 환영. 없는 것이지요. 없는데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 “幻”입니다. “夢幻”과 같아서 그런 것을 다 알아가지고,
不起凡聖見(불기범성견)하고→ 범부다. 聖人(성인)이다 하는 그런 견해도 일으키지 아니해. 나는 성인이다. 또 너는 범부다. 중생이다. 부처다하는 그런 소견도 일으키지 아니하고,
不作涅槃解(부작열반해)하며→ 涅槃을 증득 했느니 涅槃의 경지에 오르느니 涅槃은 어떤 것이느니 하는 그런 견해도 짓지를 아니해요.
惟有過量人(유유과량인)이 그래요. 그러니까 量을 초월한 사람은 涅槃의 견해도 짓지를 아니하며,
二邊三際斷(이변삼제단)이예요→ 주관과 객관. 남자와 여자. 나와 너. 옳다 그르다. 선과 악. 이것이 전부 “二邊”입니다. 이쪽과 저쪽. 전부 세상은 상대적으로 되어 있지요? 세상은 전부 상대적으로 되어 있는데, 여기는 그것마저 끊어졌다 이겁니다. 상대적으로 된 것 마저도 끊어졌다. 이 사람의 경지가 그렇다는 것입니다. 過量人의 경지가...
상대도 과거 · 현재 · 미래지요? 또는 이것을 다른 것으로 우리가 생각을 하더라도 어쨌건 상대적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과거 · 현재 · 미래도 끊어지고, 시간적인 것도 끊어지고, 공간적인 상대적인 것도 다 끊어졌다. 이 사람의 정신세계. 過量人의 정신세계가 그렇게 되어서
常應諸根用(상응제근용)하되→ 여기서 “過量人”이 누구겠습니까?
육조스님은 자기 자신의 이야기예요. 자기 자신의 이야기이면서 불교의 理想人(이상인). 불교에서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道(도)의 경지에. 완벽한 도의 경지에 이른 사람을 여러 가지로 표현할 수 있겠으나 이렇게 표현해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 표현 중에는 육조스님의 독특하면서도 정말 멋있는 표현이라고도 볼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어려운 것이
常應諸根用(상응제근용)호되 而不起用想(이불기용상)이라→ 이 사람은 항상 諸根에 應해서 쓰되, 眼(안) · 耳(이) · 鼻(비) · 舌(설) · 身(신) · 意(의). 눈으로 볼 일이 있으면 보고, 귀로 들을 일이 있으면 듣고, 코로 냄새 맡을 일이 있으면 맡고, 혀로 맛 볼 일이 있으면 맛보고, 이렇게 하지요?
맛볼 때 뭔가 따라 다니면서, 뭔가 있어가지고 그 맛을 분별 합니다.
그래서 맛있는 것은 얼른 자기 앞에 갖다 놓지요? 그런 능력 까지 발휘 한다고요. 좋은 소리 듣지요? 좋은 소리 들으면, 더 들으려고 해요. 또 나중에도 그 소리 더 듣고 싶어 하고... 그것이 음악이 됐든 자기를 추켜 주는 소리가 됐든, 무슨 소리든지 자기 귀에 달콤한 소리는 자꾸 더 들으려는 생각까지도 일으킵니다. 그것이 常應諸根用(상응제근용)이지요. 맛있는 음식이라든지 눈에 보이는 것. 귀에 들리는 것. 보기 싫은 것은 안 보려고 하고, 듣기 싫은 것은 안 들으려고 하고, 이것이 常應諸根用 입니다. 그러면서
而不起用想(이불기용상)이라→ 쓴다는 생각. 사용하고 있는 생각을 일으키지 아니해요. 이것이 우리하고 한 경계 넘은 “過量人”하고 차이점입니다. 물론 그 외에도 不作涅槃解(부작열반해)라든지 二邊三際斷(이변삼제단). 또 平等如夢幻(평등여몽환). 不起凡聖相(불기범성상). 이것이 다 어려운 일이긴 하지마는, 우리 일상에 있어서 바로 와 닿을 수 있으면서 또 그것이 잘 안 되는 것이, 常應諸根用(상응제근용)호되 而不起用想(이불기용상)입니다.
이것을 대개 그러면 우리 중생들이 그런 상태를 비유로 좀 쉽게 이해할 수 있는 길이 없을까? 이렇게 했을 때, 거울을 비유로 잘 들어요. 거울을...
거울이 있다면 그 거울에 어떤 사물을 갖다 대면 잘 비칩니다. 아주 정확하게 비춰줘요. 소위 胡來胡現(호래호현). 漢來漢現(한래한현). 중국 사람은 그런 표현을 해요. 오랑캐가 오면 오랑캐를 비추고, 한나라 사람이 오면 한나라 사람을 비춘다. 그것은 미운 사람이나 고운 사람이나. 추한 사람이나 미인이나 할 것 없이 거울 앞에는, 정직하게 그대로 공평하게 다 잘 비추지만, 거울은. 거울은 너 이쁘니까 좀 더 있으라고 붙들어 주지를 않고, 또 미운 얼굴이라고 해서 너는 못 생겼으니까 여기에 비치면 안 된다고 해서 닫아 버리지 않습니다. 우리 마음은 닫아 버리지요.
우리 마음은 보기 싫은 사람. 미운 사람이 오면 그냥 닫아 버리고, 고개도 돌려 버립니다. 마음도 닫아 버리고... 그런데 거울은 안 그래요. 거울은 오는 대로 다 비춰줘요. 우리는 마음에 든 사람은 저 멀리서 비치기만 해도 벌써 가슴을 활짝 열고, 얼른 와서 더 많이 비춰주기를 바라는데 거울은 그렇지 않지요. 거울은 자기가 비출 어떤 상태가 되어야 비로소 비추고, 가 버리면 그걸로 미련이 없어요.
아무리 이쁜 사람이 와서 비췄다 하더라도, 조금도 미련 없이 사라져 버리고 그렇습니다. 그것이 不起用想(불기용상)입니다. 사용 한다는 생각을 일으키지 아니해요. 그렇다고 목석처럼 굳어 있느냐 하면 전혀 그렇지가 아니해요. 환히 다 비춰요. 그러니까 도인은 분별이 없다고 생각하면 그건 잘못이지요.
흔히 우리가 誤導(오도)돼 가지고, 분별없으면 “아 그 사람 도인이다.”라고 선가에서도 흔히 그런 말을 쓰거든요. 내 신[靴(화)]이나 네 신이나 그냥 아무 신이나 신어서 분별없이 막 무질서하게 신어 놓으면 “아 그 사람 도인이야, 그냥 놔둬” 이런 이야기가 흔 하거든요. 그것은 크게 잘못된 것이지요. 진짜 도인일수록 정말 거울 같이 정확하게 자기 신 분별하고, 예의 잘 지키고 세상사 밝고, 그러니까 理(이)에 밝으면 事(사)에 어둡다. 그러거든요? 사에 밝아야 돼요. 도인일수록 사에 밝아야 돼요.
도인일수록 살림살이도 잘 하고, 세상 돌아가는 것도 밝아야 되고, 남의 심정 잘 알아줘야 되고, 이것이 도인이지. 무심해가지고 목석처럼 그렇게 되면 그것이 도인이라고 대개 그렇게 하는데, 그것이 도인이 아닌 줄 알면서도 그냥 그렇게 쓰는 말 이지요 사실은... 그냥 그렇게 밀쳐두는 소리지 그것이 꼭 도인이라고 인정이 되어서 그렇게 도인이라고 하는 것은 아닙니다마는,
그러나 그걸 너무 잘 쓰니까 무심하고 목석처럼 분별없고, 이러면 그만 도인이라고 한다고요. 그런 것이 절대 아니라는 것입니다. 常應諸根用(상응제근용)호되. 항상 모든 “根”에. 6근에 맞추어서 사용하되, 6근에 맞추어서 사용하되 사용한다는 생각을 일으키지 아니해요. 거울 같이... 그래서 희로애락의 문제에 대해서도 그런 말을 하지요. “樂而不淫哀而不傷(낙이불음애이불상)”이라고...
즐거움이. 좋은 일이 있으면 그럼 그런 도인이 있으면 어떤 상태가 되느냐? 이 육조스님 같은 이는 이런 소리를 했는데요. 常應諸根用(상응제근용)호되 而不起用想(이불기용상)이라.” 그럼 아주 즐거운. 아주 처음 본 신기한 그런 것을 만났다 이겁니다.
그러면 이 육조스님 같은 이는 어떻게 되느냐? “樂而不淫(낙이불음)”이라. 즐긴다. 이겁니다. 좋은 것은 충분히 즐기되 빠지지 않는다. 그랬어요. 그럼 슬픈 일은? 도인도 부모가 돌아가실 수 있고, 친한 도반이 돌아가실 수도 있고, 얼마든지 스승이 돌아가실 수도 있고, 상좌가 돌아가실 수도 있고, 그런 상황이. 그런 아주 슬픈 상황에서는 어떻게 하느냐? “哀而不傷(애이불상)”이라. 누구 못지않게 아주 슬퍼 하지마는, 누구보다도 더 슬퍼하지마는, “상하지 않는다.” 이겁니다. “傷(상)하지 않는다.” 우리는 상하지요. 대개 슬픈 일을 당하면 바로 사람이 상하고 이성을 잃어버리거나 상해버린다고요.
옛날에 백운선년이라고 아주 사주에, 역학에, 천하에 대가라고 하는데요. 탄허스님한테 늘 자주 와요. 음성이 쉬었더라고요. 음성이... 평생 음성이 쉬어가지고... 저는 처음에 음성이 쉬었기에 그냥 ‘어쩌다가 음성이 쉬었는가?’ 했더니 그 다음에 왔는데 또 쉬었고 또 쉬었고 그래서, 탄허스님한테 물었어요. “저 분은 왜 음성이 쉬었냐?”고 물었더니 30대인가? 40대인가? 어쨌든, 자식을 잃어서 한 달을 울다가 보니까 그만 목이 가 버렸는데 그 후로 회복이 안됐다 그래요. 그것이 상하는 것이거든요 그것이... 그것이 상하는 일이라고요. 그런데 “哀而不傷”이라. 슬퍼하되 “傷하지 않는다.” 상할 정도로 그렇게 슬퍼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슬픔의 강도가 약하냐? 하면 그게 아니라는 것이지요. 도인일수록, 깨달은 사람일수록 더 슬퍼하고, 즐길 일이 있으면 더 즐기지요. 즐기더라도 빠지지 않는다. “낙이불음이다.” 참 좋은 표현이지요.
동양에 있어서의 어떤 “聖人(성인)”이라고 하는 것이, 인간의 “理想(이상)” 아니겠습니까? 좀 그런데에 뜻있는 사람들은 어쨌건 “성인”이 되고 싶고, “성인”이 되었을 때 그런 감정의 문제는 어떨까? 이런 것을 우리가... 그런 데에 관심이 있었던 수많은 이들이 평생을 그렇게 고심 하면서, 또 노력 하면서 정진 하면서 그렇게 살아오다 보니까, 육조단경 뿐만 아니라 별별 그런 데에 대한 그런 연구결과. 경험. 이런 것들이 많이 있습니다.
常應諸根用(상응제근용)호되 而不起用想(이불기용상)하며
分別一切法(분별일체법)하되 不起分別想(불기분별상)하나니→ 이것도 같은 말이지요. 모든 것을 다 分別해요. 환히 분별해요. 그러니까 공부만 잘하고 세상사에는 어둡다, 그러면 그거는 엉터리예요. 반쪽 이예요.
一切法을 분별하되, 분별한다는 생각을 일으키지 않는다. 그러니까 이건 “내 것”이니까, 팔이 안으로 굽는다는 그런 식이 아니지요. 도를 제대로 통한 사람은. 정말 진리를 제대로 깨달은 사람은 그렇게 아전인수 격으로 모든 것을 해석하고 일 처리를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지요.
일 처리 하는 것을 보면 도인인지 아닌지 알 수가 있는 것이지요 사실은... “도인이라야 도인을 알아본다.” 흔히 그런 말을 하기는 하지마는, 그래도 일 처리 하는 것을 보면, 전혀 도인이 아닌 사람도 알 수 있어요. 꼭 금을 감별하는 사람이 되어야 금을 아는 것이 아니잖아요? 보통 사람도 이것이 어느 정도 금인지 안다고요 대강은... 그 다음에 제가 아주 참 좋아하는 구절인데요.
劫火燒海底(겁화소해저)하고 風鼓山相擊(풍고산상격)이라도
眞常寂滅樂(진상적멸락)은 涅槃相如是(열반상여시)이다. 아주 이 구절이 참 다이나믹하고 힘이 넘치는 구절입니다.
劫火燒海底(겁화소해저)라→ 劫의 불길이 바다 밑까지 태워 버린다.
이것은 “劫火”라고 하는 것은 경전에도 잘 나오는 소린데요. 예를 들어서 이 지구의 연령이 다 해서 최후의 순간을 맞을 때, 불교에서는 지구가 부서질 때는 불이 일어난다고 했어요. 그것이 “劫火”입니다. 그러니까 이것이 언제일지 경전상에 아함부 경전 같은 데는 그런 이야기도 있지만, 수많은 세월이거든요? 수많은 어마어마한 세월이라고요. 몇 백 만년의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가 지금 지구가 언제 형성이 되었는가? 하는 것도 수억만 년 아닙니까? 앞으로도 수억만 년의 세월이 남아있기 때문에, 그런 많은 세월이 지난 뒤에 일어나는 불 “劫火” 지구가 소멸할 때 그것을 “劫火”라고 그래요. 그럴 때는 바다 까지 다 태운다는 겁니다. 바다가 어딨어요. 지구가 통째로 불길에 휩싸이는데 바다가 더 잘 타지요 그 때는... 바다 밑까지 다 태우는 상황이 벌어지고,
風鼓山相擊(풍고산상격)이라→ 바람이 그냥. 지금 뭐, “루사” 태풍이 문제가 아니에요. 정말 거대한 바람이, 정말 세찬 바람이, 지구가 무너질 때 불어 닥치는 바람이라면 한 번 상상해 보세요. 지구가 부서질 때 불어 닥치는 그런 바람이 불면, 산과 산이 맞부딪친다는 겁니다. 아직 까지는 그런 태풍은 없었잖아요? 산과 산이 맞부딪치는 겁니다. 風鼓山相擊(풍고산상격)이라. 참. 힘이 넘치지요? 이 두 구절이...
그런 일이 있으면 안 되겠지만 어쨌든 그런 상황이라 하더라도, 산과 산이 맞부딪쳐서 부서지는 그런 상황이라 하더라도,
眞常寂滅樂(진상적멸락)은 涅槃相如是(열반상여시)라→ 항상 늘 진실하고, 참답고 영원하고, “常”= 영원하고. 참되고 그리고 고요한 그 자리. 고요한 그 즐거움. 그거는 우리의 근본 마음자리지요.
그 즐거움은 涅槃相如是(열반상여시)라→ 열반의 모습 바로 그러한 것이다. 최소한도 이 네 구절은 외워놔야 돼요.
劫火燒海底(겁화소해저)하고 風鼓山相擊(풍고산상격)이라도
眞常寂滅樂(진상적멸락)은 涅槃相如是(열반상여시)일새. 이것이 우리 마음의 진실이. 우리 일심의 진실은 이와 같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다 그 밑을 꿰뚫어 본 사람이 한 소리예요. 우리가 육신이 죽으면 우리 마음도 따라서 없어지지 뭐 있겠나 하지마는, 천만의 말씀 이예요.
劫火燒海底(겁화소해저)하고 風鼓山相擊(풍고산상격)이라 하더라도, 우리의 마음자리는 眞常寂滅樂(진상적멸락)은 涅槃相如是(열반상여시)다. “如如(여여)하다.”이겁니다. 몸 그대로, 그냥 그대로 있다 이것인데, 어찌 이 육신의 죽음으로 그걸로 끝날 수 있겠어요? 말도 안 되는 소리예요. 凡愚(범우)가 謂之死(위지사). 라고 했잖아요? 凡愚.
어리석은 범부가 그것을 “죽음”이라고 했지, 진짜 우리의 영원한 생명. 그 생명은 如如不動(여여부동)하다는 것입니다. “涅槃相如是” 라고 하는 것은 열반의 모습. 늘 이러하다. 劫火燒海底(겁화소해저)하고 風鼓山相擊(풍고산상격)이라도 眞常寂滅樂(진상적멸락)은 涅槃相如是(열반상여시)라.
제가 어릴 때. 육조단경을 읽다가 이 구절이 하도 좋아가지고, 야~! 이 구절 보면 뭔지 몰라도 그냥 힘이 괜히 솟아요 힘이... 그냥 힘이 나오게 돼 있잖아요? 劫火燒海底(겁화소해저)하고 겁의 불길이 바다 밑까지 태워버려. 風鼓山相擊(풍고산상격)이라도 바람이 휘몰아 쳐서 산과 산이 맞부딪치는 그런 상황이라 하더라도 眞常寂滅樂(진상적멸락)은 涅槃相如是(열반상여시)라. 어떤 불행을 이겨내고 어쩌고 하는 그런 표현... 이거는 그런 거 백배 천배 더 능가하는 강력한 표현입니다.
이런 맛을 보지 아니하면 도대체 이런 표현이 나올 수가 없다고 하는 것. 이것을 믿어야 돼요. 우리는... 이런 맛을 못 본 사람이 그냥 문학적으로 쓴 것이 아니에요. 그냥 그 대로 마음에서 우러나고 자기가 맛 본 것을 그대로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육조스님이 그 불쌍한 노모를 그냥 동네에 맡겨 놓고 출가해서 중생제도를 위해서 그렇게... 그것도 사냥꾼들 밑에서 15년이란 세월을 그렇게 끌려 다니면서 마음에도 없는 생활을 한 사람이 뭐 이런 거짓말 하려고 그런 생활을 했겠어요?
그 댓가를 도대체 어디서 받겠습니까? 그런 삶의 댓가를 어디서 못 받아요. 이렇게 정말 자기 그 피를 토하는 그런 진실한 표현. 진실한 법문으로서 밖에 달리 다른 데서 댓가를 받을 수가 없습니다. 이것은 수 억만금을 준다고 한들 그런 삶을 어떻게 보상 하겠습니까? 보상 못해요. 이런 표현으로서 당신 자기인생을 보상받는 것이지요.
그런 이들의 심성이라고 하는 것은요? 좀 남 다른 데가 있습니다.
그런 분들로서 그렇게 희생을 치루면서 수행 생활을 해서 천하의 “육조대사”라고 그렇게 이름났는데, 무슨 문학적으로 미화하기 위해서 경험도 하지 않은 소리를... 그 분은 또 그렇게 소질이 없는 분이라서 이런 것을 꾸며내지도 못해요. 자기 경험한 이야기가 아니면, 꾸며내지도 못해요 원래... 자기가 경험하지 못한 이야기는 꾸며내지도 못한다고요.
20세가 넘도록 낫 놓고 기역자도 모른 사람이 겨우 절에 와서 사냥꾼들 밑에서 겨우 글자 몇 자를 배우고, 그 다음에 절에 와서 선지식노릇 하면서 그 때야 경을 보기 시작한 것이지요. 우리는 아주 후대에 살아서, 다행히 육조스님의 이런 참으로 생명력 넘치는 법문을 접하고 있습니다.
吾今强言說(오금강언설)하야→ 내가 억지로 이것도 사실은 말로 표현한 것도 억지로 표현한 것이지, 사실은 내 마음에 쏙 드는 그런 표현은 아니다 이것이지요. 그러나 어떻해요? 말로 이렇게 표현을 해야 그래도 100분의 1이라도 의사 전달이 서로 될 텐데... 그러니까 이렇게 “强言說” 이지요.
억지로 말을 해서, 令汝捨邪見(영여사사견)하노니→ 그대로 하여금 삿된 소견을 버리게 한다. 잘못된 소견 버리고 인간의 진실이 참으로 무엇인지 제대로 좀 알라는 겁니다. 인간의 實相(실상)이... 사람의 실상이 과연 무엇인지... 여기서 “無上大涅槃(무상대열반)”이라는 것은 사람의 실상을 말하는 것입니다. 사람의 진실을 말하는 것이지요. 그 실상이 그렇다는 것을 좀 제대로 알아라 이겁니다. 잘 못 알지 말고... 인간에 대해서 너무 잘 모르고 있다 이것이지요.
汝勿隨言解(여물수언해)하면 許汝知少分(허여지소분)하리라→ 그대는 내가 억지로 표현해서 이렇게 그래도 엇비슷하게 그림으로 그렸으니까, 그렇다고 그 말 따라서 가지 말라 이겁니다. 勿隨言解→ 말을 따라서 이해를 내지 말라. 말을 따라서 이해를 내지 아니할 것 같으면, 말을 쫓아가지 않고 그 속뜻을 이해한다면,
許汝知少分(허여지소분)하리라→ 내가 그대에게 조금 알았다고 허락하겠다. 말 안 쫓아가고 그 속뜻을 잘 의미하면 조금 그저 알았다고 내가 허락하겠다. 이 육조단경에서 최고가는 게송입니다 이것이...
無上大涅槃(무상대열반) 圓明常寂照(원명상적조)
凡愚謂之死(범우위지사) 外道執爲斷(외도집위단)
諸求二乘人(제구이승인)은 目以爲無作(목이위무작)
盡屬情所計(진속정소계)라 六十二見本(육십이견본)이로다
妄立虛假名(망립허가명)이어니 何爲眞實義(하위진실의)리요
惟有過量人(유유과량인)이 通達無取捨(통달무취사)하야
以知五蘊法(이지오온법)과 及以蘊中我(급이온중아)와
外現衆色相(외현중색상)과 一一音聲相(일일음성상)이
平等如夢幻(평등여몽환)함을 알아서, 知자. 以知하는 知자를 거기다 새겨야 돼요. 平等如夢幻 함을 알아서,
不起凡聖見(불기범성견)하고 不作涅槃解(부작열반해)하며
二邊三際斷(이변삼제단)하야 常應諸根用(상응제근용)호되
而不起用想(이불기용상)하며 分別一切法(분별일체법)하되
不起分別想(불기분별상)하나니 劫火燒海底(겁화소해저)하고
風鼓山相擊(풍고산상격)이라도 眞常寂滅樂(진상적멸락)은
涅槃相如是(열반상여시)다. 죽어도 좋다 이겁니다. 진짜 나는 이 죽음하고 관계없다 이겁니다.
吾今强言說(오금강언설)하야 令汝捨邪見(영여사사견)하노니
汝勿隨言解(여물수언해)하면 許汝知少分(허여지소분)하리라
그대에게 조금 알았다고, 내가 허락하리라.]
志道 聞偈(지도 문게)하고 大悟(대오)하야
踊躍作禮而退(용약작례이퇴)하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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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마하반야바라밀, 마하반야바라밀, 마하반야바라밀, _()_()_()_
제가 어릴 때. 육조단경을 읽다가 이 구절이 하도 좋아가지고, 야~! 이 구절 보며는 뭔지 몰라도 그냥 힘이 괜히 솟아요 힘이... 그냥 힘이 나오게 돼 있잖아요? 劫火燒海底(겁화소해저)하고 겁의 불길이 바다 밑까지 태워버려. 風鼓山相擊(풍고산상격)이라도 바람이 휘몰아 쳐서 산과 산이 맞부딪치는 그런 상황이라 하더라도 眞常寂滅樂(진상적멸락)은 涅槃相如是(열반상여시)라. 뭐 어떤 그 불행을 이겨내고 어쩌고 하는 그런 표현.. 이거는 그런 거 백배 천배 더 능가하는 그런 강력한 표현입니다. 이런 맛을 보지 아니하면 도대체 이런 표현이 나올 수가 없다고 하는 것. 이것을 믿어야 돼요. 우리는...큰스님 법문 중에서...감사합니다.
대원성님 감사 드립니다 _()()()_
육조대사의 최고 게송,,, 무비스님의 최고 설법,,, 감사합니다 _()()()_
육조대사의 최고 게송,,, 무비스님의 최고 설법,,, 대원성님의 최고 녹취 ... _()()()_
육조대사만의 최고 게송,,, 무비스님만의 최고 설법,,, 녹취는 汝도 我도... _()_
劫火燒海底하고 風鼓山相擊이라도 眞常寂滅樂은 涅槃相如是라... 대원성님! 감사드립니다... _()()()_
마하반야바라밀 마하반야바라밀 마하반야바라밀 _()()()_
劫火燒海底(겁화소해저)하고 風鼓山相擊(풍고산상격)이라도 眞常寂滅樂(진상적멸락)은 涅槃相如是(열반상여시)라.....고맙습니다. 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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劫火燒海底(겁화소해저)하고 風鼓山相擊(풍고산상격)이라도 眞常寂滅樂(진상적멸락)은 涅槃相如是(열반상여시)이다...고맙습니다._()()()_
劫火燒海底하고 風鼓山相擊이라도 眞常寂滅樂은 涅槃相如是라....대원성님 감사드립니다.._()()()_
마하반야바라밀, 마하반야바라밀, 마하반야바라밀, 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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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하반야바라밀()()()마하반야바라밀()()()마하반야바라밀()()()
마하반야바라밀 _()()()_
모든 대중이 공유하는 불교~ 그것이 바람직한 불교다._()()()_
삼배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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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인일수록 살림살이도 잘 하고, 세상 돌아가는 것도 밝아야 되고, 남의 심정 잘 알아줘야 되고, 이것이 도인이지. 무심해가지고 목석처럼 그렇게 되면 그것이 도인이라고 대개 그렇게 하는데, 그것이 도인이 아닌 줄 알면서도 그냥 그렇게 쓰는 말 이지요 사실은...나무마하반야바라밀 마하반야바라밀 마하반야바라밀
마하반야바라밀 마하반야바라밀 마하반야바라밀 _()()()_
圓明常寂照......고맙습니다.
常應諸根用 而不起用想 分別一切法 不起分別想
劫火燒海底 風鼓山相擊 眞常寂滅樂 涅槃相如是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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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常應諸根用 而不起用想 ... _()_
고맙습니다 _()()()_
고맙습니다 _()()()_
감사합니다.()
劫火燒海底(겁화소해저)하고 風鼓山相擊(풍고산상격)이라도
眞常寂滅樂(진상적멸락)은 涅槃相如是(열반상여시)일새라 .... _()_ _()_ _()_
그런 삶의 댓가를 어디서 못 받아요.
이렇게 정말 자기 그 피를 토하는 그런 진실한 표현.
진실한 법문으로서 밖에 달리 다른 것으로 댓가를 받을 수가 없습니다.
이것은 수 억만금을 준다고 한들 그런 삶을 어떻게 보상 하겠습니까?
보상 못해요. 이런 표현으로서 당신 자기인생을 보상받는 것이지요.
겁의 불길이 바다 밑까지 다 태워버리고,
바람이 휘몰아쳐서 산과 산이 맞부딪쳐서 가루가 된다해도,
항상 진실하고, 참답고, 영원하고, 고요한 즐거움, 바로 우리들의 근본 마음자리이다.
열반의 모습 또한 그러하다.
우리가 육신이 죽으면 우리 마음도 따라서 없어지지 뭐 있겠나 하지마는, 천만의 말씀 이예요.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_()_ _()_ _()_
마하반야바라밀 마하반야바라밀 마하반야바라밀 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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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_()_
마하반야바라밀 마하반야바라밀 마하반야바라밀 _()()()_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