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정치는 불가측(不可測)의 정치다. 중국 정치가 예측하기 어려운 이유는 한국 미국 프랑스 등과 같은 공개된 선출방식이 아니기 때문이다. 6000만 명이 넘는 중국 공산당원들도 서방의 선거제도와 비슷한 여론수렴체계가 없는 것은 아니다.
당 대회는 형식에 불과할 뿐, 중대 사안은 극소수 지도부에 의해 밀실(密室)에서 결정된다는데 불가측성의 비밀이 숨어있다. 중국의 역대 권력교체 과정에서 권력투쟁설과 노선갈등설이 난무했던 것도 이 때문이다.
중국은 인맥중심의 정치 문화(人治)를 가지고 있다. 고위 간부의 승진과 발탁이 최고지도자의 관계에 의해 결정되어지고, 공산당 간부는 능력보다 정치적 충성을 기준으로 선발하여 원로 간부와의 관계를 중요시 해왔다.
이러한 인치의 배경 및 문제점을 보면
1) 정치엘리트의 영향력은 “직책”의 제도화 정도에 반비례 하고 모든 정책과 공직에 대한 지침이 모호하게 되어 간부들이 재량권을 행사 하고,
2) 인간의 통치는 법의 통치를 대신 한다는 유교 전통의 영향이 크고,
3) 지도자에 대한 도전은 공산당과 국가에 대한 도전이라는 문화대혁명의 영향이 있으며,
4) 당과 국가의 역할의 구분이 불분명한 공산주의 사회의 영향이 있고,
5) 시장대신 간부가 구가 자원 및 재산 분배의 권한을 지니고 있으면서 공식적 권한을 쉽게 “사유화”하는 간부 종신제가 되고 있으며,
6) 간부의 역할은 효과적인 집행가 대신에 대중 동원을 하는 혁명가로 대변되어 개혁기 人治의 문제점으로 부정부패가 만연하게 되었다.
중국 정치가 ‘불가측의 정치’라고 해서 분석이나 예측이 아예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죽(竹)의 장막에 싸여있던 냉전시기와 달리, 개혁 개방 이후의 중국은 법과 제도가 인치(人治)를 대체하는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다.
이러한 문제점을 인식하고 법의 의한 통치(法治)의 필요성을 인식하고 인치에서 법치로의 변화를 추진했지만 政企분리/黨政분리의 미비, 지방보호주의, 법제도의 미비, 법 집행기관의 한계 등의 법에 의한 통치의 어려움이 발생하게 된다.
따라서 개혁기에 사회주의를 재해석하는
1) 마오쩌뚱의 “공유제”, “계획경제”, “평등주의”
2) 사회주의 시장경제론
3) 1중심(경재발전), 2기본점(개혁개방, 4항 견지)
4) 생산력 중심론 등이 등장하게 되고 약화된 사회주의 이념 대신 민족주의가 대두 하게 된다.
2. 중국의 정치 지도자와 정치 문화 이해
13억에 달하는 거대한 인구를 가지고 있는 중국은 연간 7%가 넘는 고도성장을 20년 이상 계속 유지 하면서, ‘한반도 운명의 중요한 변수’로 보여지기도 한다. 그리고 사마천(司馬遷)의 사기(史記) 열전(列傳)을 예로 들면, ‘역사는 사람들이 만드는 것’이란 시각에서 중국 지도자들에 접근이 필요하다고 본다.
장쩌민은 1989년 6월 당 중앙위원회에서 당 총서기로 선출되며 3세대 지도자의 첫발을 내디뎠지만 이는 한 달 전 덩샤오핑이 짜놓은 구도에 따른 요식절차에 불과했다. 16대가 아직 끝나지 않았는데도 세계 언론이 의심의 여지없이 후진타오를 4세대 지도자로 지목하는 것 역시 덩샤오핑이 생전에 그를 4세대의 핵심으로 점지한 데 근거하고 있다. 자신의 사후(死後) 리더십의 혼란을 우려한 덩샤오핑이 일찌감치 차차기 권력구도까지 짜놓은 것이다. 실제 중국의 미래를 좌우할 중요한 정치적 결정은 마오쩌둥, 덩샤오핑 등 몇몇 절대 권력자에 의해 막후에서 이뤄져 왔다는 것이 공공연한 비밀로 통한다.
겉으로 잘 드러나지 않는 중국의 정치문화와 비공식 인간관계를 좀 더 구체적으로 이해하려면, ‘파이시(派系)’에 해당하는 상하이방(上海幇)이나 칭화방(淸華幇), 태자당(太子黨) 등과 같은 비공식 네트워크를 이해하는 것이 중국의 정치 인물이 방대한 권력구도 속에서 어느 좌표에 위치해 있는지를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다. 상하이방과 칭화방을 비롯, 고급 간부 자녀 출신을 일컫는 ‘태자당(太子黨)’, 후진타오 계열인 ‘공청(공산주의 청년단)단’, 후견인 관계를 통해 성장한 ‘비서방’ 등이 대표적인 사례다. 4세대 지도자들도 이 같은 파이시와 콴시가 씨줄과 날줄로 얽힌 정치 지형 속에서 승진의 기회를 잡고 정치적 세력을 확장했으며 서로 간에 치열한 갈등도 빚고 있다. 주룽지(朱鎔基) 총리와 후진타오(胡錦濤) 부주석을 비롯해 3, 4세대 지도자 상당수가 칭화대를 나와 장쩌민(江澤民) 국가주석 측근들을 일컫는‘상하이방(上海幇)’에 빗대 ‘칭화방(淸華幇)’이란 별칭을 얻고 있다.
정치지도자들간의 갈등과 합의에 의해 정치권력의 변동이 이뤄지는 중국에서는 이들의 정치성향과 파이시(派系), 시(關係)를 분석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제4세대 지도자들을 연령, 성별, 민족 등 인구 통계적 특성이란 잣대로, 때로는 ‘칭화방(淸華邦)’ ‘태자당(太子黨)’ ‘상하이방’ 등 학연과 지연에서 나온 파벌의 잣대로 분류하면 중국 정치권력의 이동을 명쾌하게 분석할 수 있다.
2002년은 중국에 있어 또 하나의 거대한 역사적 전환기다. 중국 공산당 제16차 전국대표대회(16대)에서 21세기 중국을 짊어지고 나갈 새로운 지도자들이 세계무대에 정식 데뷔하게 된다. ‘대장정’을 함께 겪은 혁명 1세대의 주역 마오쩌둥(毛澤東)-항일전쟁을 치른 2세대의 덩샤오핑(鄧小平)-사회주의 전환기를 주도한 3세대의 장쩌민의 뒤를 이어 후진타오를 정점으로 한 4세대가 권력의 바통을 이어받게 된 것이다.
4세대는 이·공계 전공자로서의 기술 관료적 세계관, 문화대혁명 경험에 따른 현실·실용주의적 사고방식, 강한 민족주의 정서 등을 공유하고 있지만 정치적 동질성의 부족, 다양한 승진 패턴, 상이한 정책 선호 성향 등 이질적인 요소들도 겸비하고 있다. 이는 중국이 마오쩌둥이나 덩샤오핑 시대와 같은 절대 권력의 시대를 끝내고 집단적 리더십을 향해 걸어갈 것임을 암시하고 있다. 제4세대 지도자 중 약 40%가 중국 동부지역 출신으로 특히 장쑤 성(江蘇省)과 산둥 성(山東省) 사람이 많다. 이는 장쑤 성 출신의 장쩌민이 동향 동료들을 중용한 데 기인한다. 또 칭화대(淸華大) 출신인 칭화방의 약진이 두드러져 제4세대 지도자 중 후진타오와 우방궈 부총리 등 26명이 칭화대를 나왔다.
제4세대 지도자들의 미래는 다음과 같다.
1) 마오쩌둥, 덩샤오핑이 가졌던 독점적인 리더십은 더 이상 가능하지 않고 다극체제가 불가피하다.
2) 문화대혁명 시기 하방을 경험했던 테크노크라트(기술관료) 출신의 4세대는 더 강한 책임감으로 중국의 문제를 처리할 것이며,
3) 민주정치 체제를 정착시키는 데 기여할 것이다.
3. 중국 정치체제 개혁을 위해서는…….
1) 黨과 政의 분리
당과 정부직능이 분리되지 않은 것은 혁명전쟁 때 실시한 당의 일원화체제에 의한 것이다. 이로 인하여 권력이 과도하게 개인에게 집중되고 당과 국가권력기구간의 한계와 직책이 불분명하고 당이 정부를 대신하는 상황이 야기됨으로써 국가기능이 위축되었다. 당정의 분리는 정치체제개혁이 성공하느냐 못하느냐의 관건이다. 당의 영도방식과 활동방식을 전환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당의 조직형식과 공작 기구를 조정해야 한다. 이렇게 해야만 당, 정 분리의 효과를 달성시킬 수 있다.
2) 권력 하방
정치체제의 또 하나의 중요한 임무는 과도로 집중된 권력을 하부단위로 이양하는 것이다. 권력하방의 내용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그 하나는 중앙과 지방과의 관계를 조정하여 지방의 자주권을 강화시키는 것이다. 등소평의 주장에 의하면 정치체제개혁의 주요 내용의 하나는 권력하방으로 중앙과 지방관계를 해결하는 것이며 동시에 지방의 각급 기관도 더욱 하부기관으로 권력을 이양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중앙이 지방을 통제할 수 없을 정도로 권력을 이양하거나 지방이 적극성을 해치지 않는 범위 내에서 권력하방이 이루어져야 한다. 다음으로 권력을 기층조직, 특히 기업에 이양해주는 것이다. 즉 그들이 자주권을 누려 적극성과 효율성을 제고하기 위한 것이다.
3) 기구 개혁
기구와 체제는 긴밀한 상관관계가 있으므로 기구개혁은 체제개혁과 표리관계에 있다. 그리고 당, 정분리가 제대로 성공하는 가의 여부는 바로 기구개혁에 달려있다. 그래서 등소평은 '기구개혁을 체제에 대한 혁명'이라고 강조하였던 것이다. 즉 기구개혁은 기구들의 통폐합과 인원들의 감축으로 업무의 효율을 제고하려는 것이므로 당, 정 분리 심지어는 정치체제개혁의 초석이라고 할 수 있다.
4) 사회주의 민주정치제도의 건립
문화대혁명은 민주와 법제를 완전히 파괴하였다. 그래서 등소평은 집권이후 민주제도의 회복에 특히 주력하였다. 민주정치의 확립은 한편으로는 인민들의 권익을 보호하고 또 한편으로는 이렇게 함으로써 그들의 적극성을 유발시켜 경제발전에 유리한 조건을 이룩하려는 것을 나타내고 있다.
5) 사회주의 법제 건설
건국초기 중국은 비록 완비되지는 않았지만 법률은 있었다. 하지만 법치가 잘 실행되지 않고 인치가 실행되었다. 등소평은 인민들이 국가권력을 관리하고 그것을 제도와 법률의 형식으로 체계화, 규범화, 정형화하여 안정과 권위를 획득함으로써 정치발전을 가능하게 하는 것을 민주법제화라고 칭하였다. 요컨대, 사회주의민주는 사회주의법제의 내용이고 기초인 동시에 또 그것의 전제이며 사회주의 법제의 완비는 사회주의민주의 발전정도에 달려 있다. 즉 사회주의 민주와 법제는 하나의 변증법적 통일관계에 있는 것이다. 이상에서 간단하게 중국의 정치, 경제체제 개혁에 관하여 살펴보았다. 위의 분석에서 볼 때, 중국정치체제개혁은 주로 경제발전에 부응하기 위한 행정개혁의 차원에 머물고 있을 뿐이다.
첫댓글 좋은 게시물이네요. 스크랩 해갈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