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 카톨릭의 종교재판 약사 (A Brief History of The Inquisition) [로마카톨릭] 로버트 존스
"저희가 성도들과 선지자들의 피를 흘렸으므로..."(계16:6)
서 론 "역사가에게 요구되고 그리스도인에게 허용되는 모든 사항을 고려하더라도 우리는 종교 재판을 우리 시대의 전쟁과 박해와 함께 어떤 짐승에게서도 볼 수 없는 포학성을 드러낸 인간이 기록한 가장 암울한 오점 가운데 분류하지 않을 수 없다." (윌 듀란트) 로마 카톨릭의 종교 재판은 예수 그리스도 교회 역사의 가장 큰 황폐 요인이었다. 교회 역사에서 어떤 다른 제도도 그처럼 공포스럽고 그처럼 부당하며 그처럼 비그리스도교적인 것은 없다. 종교 재판이 1834년에 마침내 중단되었을 때 수천만 명이 목숨을 잃었고, 수많은 성도들의 삶이 투옥과 재산 몰수로 인해 파멸되었다. 전체 거주자가 고향을 떠나기도 했으며, 로마 카톨릭 교회의 손상된 명성의 메아리가 지금도 울려 퍼지고 있다. 본 소책자는 "칭의(稱義)"라는 관점을 포함하여 종교재판, 방법, 희생자, 그리고 이 가장 공포스러운 조직의 600년 간의 지배의 결과를 개략적으로 제시하고자 한다.
종교 재판의 기초 역사적 기초
이단 (그리스어 하이레시스) ― "교회에서 용인되는 가르침과 일치하지 않는 주장이나 교리; 정통적 신념에 반대되는 것" (홀만의 성서 사전) 20세기의 미국은 교회와 국가가 극단적으로 분리되어 있기 때문에 이단이 교회의 범죄였을 뿐만 아니라 세속적인 범죄였다는 것은 상상조차 하기 어렵다. 그러나 중세에는 세속과 교회를 구분하기가 어려웠는데―카톨릭 주교가 황제와 왕을 즉위시켰으며; 그렇게 즉위한 황제와 왕들이 카톨릭 교회와 그 사제의 보호자가 되었다. 카톨릭 교회에 반대하는 것은 (그것이 신학적이든 조직의 위계에 관한 문제이든) 전체 사회, 정치, 경제, 그리고 (물론) 중세 사회의 종교적 구조에 의문을 제기하는 것이었다. 600년간 지속된 종교 재판은 카톨릭 교회와 국가 간의 확고한 (그리고 매우 성공적인) 야합의 산물이었다. 카톨릭 교회는 이단자를 색출하여 박해했으며 국가는 그들을 처벌했는데, 종종 기둥에 묶어 불태웠다.
이단이 카톨릭 교회 뿐만 아니라 세속적으로도 범죄라는 생각은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다. 예를 들어 로마는 이단을 사형에 해당하는 반역으로 간주했는데, 초기 순교자들 중 다수가 로마 황제를 일종의 신(god)으로 받아들이기를 거절했을 때 그와 같은 일이 일어났다. 로마의 재판관은 이단 혐의자에 대한 심문 (인퀴시티오)―이 명칭으로부터 "종교 재판(Inquisition)"이 유래됨―을 할 수 있었다.
후에, 유스티니아누스 (Justinian) 대법전은 이단을 반역과 동일시하는 조문(Da haereticis)을 성문화해서, 필요시 세속 법정에서 사형의 처벌이 가능하도록 했다. 유스티니아누스도 물론 그리스도인이었으며,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을 그들의 믿음 때문에 박해했던 초기 로마 법이 이제는 그리스도교를 신봉하지 않는 사람에게도 적용되었다.
중세 카톨릭의 종교 재판이 시작되기 전 (공식적으로 시작한 것은 기원 1227/31년이었음) 200년 동안 이단자에 대한 화형은 드문 일이 아니었다. 화형은 때때로 세속 당국이나 폭동에 의해 선동되었다. 잘 알려진 중세의 이단자 화형 중의 하나로서 기원 1022년에 프랑스 왕 로베르 비오가 회개하지 않는 이단자에게 가한 것이 있었다. 폭도에 의한 것은 1028년경의 밀라노 (Milan), 1114년의 쓰와쏭 (Soissons), 1143년의 콜로뉴 (Cologne)에서 성난 폭도들이 회개하지 않는 이단자를 카톨릭 교회 감옥으로부터 끌어내어 화형시키는 사태가 일어 났었다. 이와 같이 "이단자"를 화형시키는 것은 1227/31년의 종교 재판의 시작 당시 이미 깊은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
1184년에 카톨릭 교황 루시우스 (Lucius) 3세는 이단자에 대한 칙서를 내렸는데, 후에 종교 재판에 채택된 주요 법체계의 많은 부분의 근간이 되었다. 그와 같은 주요 법체계 중 하나는 이단자를 은닉하거나 지원한 사람은 누구나 이단자와 동일한 처벌을 받도록 한 것인데, 회개하지 않은 이단자는 세속 법정에 넘겨주고, "되돌아간" 이단자는 더욱 가혹한 처벌 (재산 몰수를 포함한)을 받도록 했다. 흥미 있는 점은 종교 재판의 두 개의 주된 목표가 40년 후에 "카타리파(Catharists)"〔와 "리용의 빈자들" (왈도파-Waldensians)〕라는 이름으로 식별되었다는 사실이다.
이단자에 대한 교황 루시우스 3세의 칙령 "최근 지구 대부분의 지역에서 다양하게 싹트고 있는 이단의 악을 제거하기 위해, 카톨릭 교회에게 위임된 힘을 일깨우는 동시에 황제권의 지원을 받아 거짓된 목적을 가진 이단의 오만과 후안무치를 박멸하고, 거룩한 교회에 밝게 비치는 카톨릭의 단순성의 진리를 이단의 거짓 교리의 가증스러움으로부터 순수하고 자유스럽게 발현하기 위함이다... 나아가서 특히 모든 카타리파, 빠터파 (Paterines), 그리고 자신을 "리용의 빈자들"이라고 부르는 자들, 파시파 (Passignes), 조셉파 (Josephists), 아널드파 (Arnoldists)에 대해서 영구적인 파문을 선언한다...
그리고 당해 이단을 받아들이거나 옹호하는 모든 자들과 그들에게 어떤 호의나 정신적 지지를 나타내어 위로하거나, 믿거나 완전하게 하는 등 그 명칭이 어떠하든지 이단을 강화시키는 자들, 혹은 어떤 미신적인 명칭으로든 자신을 위장하는 자들에게 동일한 처벌을 선언한다...
그리고 앞에서 말한 범죄에 대하여 개인적으로든 공적으로든 유죄로 판명된 평신도는 그 이단을 철회하고 즉시 정통 신앙으로 돌아오지 않으면 세속 재판관의 판결에 맡겨서 그 죄질에 상응하는 타당한 처벌을 받게 할 것을 선언한다. .그러나 그들의 이단을 철회하거나 카톨릭 주교 앞에서 조사를 받아 자신을 깨끗이 한 후에 자신이 철회한 이단으로 돌아간 자들은 어떤 심리도 하지 않고 세속 당국에 인도되며, 그들의 재산은 카톨릭 교회가 사용하기 위해 몰수한다는 것을 선언한다." (존스, 23쪽).
위에서 언급한 칙서의 사고 중 많은 부분은 역사적으로 가장 큰 카톨릭 교회 회의 (400명의 주교, 800명의 수도원장)―제4차 라테란 공의회(1215)에서 성문화되었다. 로마 카톨릭의 그 공의회는 회개하지 않은 이단자는 반드시 파문하며, 세속 당국에 넘겨서 처벌할 것을 선언했다. 처벌은 구체적으로 명시되지 않았지만 재산의 몰수는 분명하게 허용되었다. 이와 같이 장래의 종교 재판에서 가장 크게 남용된 분야 중 하나인 카톨릭 교회와 세속 당국에 의한 재산 몰수가 공식적으로 성문 법전에 명시되어 종교 재판을 위한 무대가 설치되었다.
종교 재판의 신학적 근거 종교 재판의 옹호자들은 (그리고 놀랍게도 종교 재판이 1834년에 끝난 후-현재도 간접 종교재판은 계속되고 있지만- 호교 교부들도) 종교 재판을 정당화하는 성서적 신학적 근원을 지적하고 있다. 초기 종교 재판관들에 의해 가장 자주 인용된 성구는 구약의 모세 율법이다. 물론 이것은 다소 의문스러운 신학 이론으로서, 말하자면 음식물의 제한에 관한 모세의 율법에 대해서는 1세기 이래 계속 완전히 무시해 오다가, 갑자기 (13세기에) 수천명의 사람들을 기둥에 묶어 화형시키는 것에 대해서는 그 법을 완벽하게 합리화 시키면서 정당하다고 본 것이다. 주요 성구는 아래에 인용되어 있다 (간략하게 편집했음):
(신명기 13장) "너희 중에 선지자나 꿈꾸는 자가 일어나서...네게 말하기를 '다른 신들을 우리가 좇아 섬기자'...그 선지자나 꿈꾸는 자는 죽이라 ...너는 이같이 하여 너희 중에서 악을 제할지니라 네 동복 형제나 네 자녀나 네 품의 아내나 너와 생명을 함께 하는 친구가 가만히 너를 꾀어 이르기를, '...다른 신들을 우리가 가서 섬기자' 할지라도 너는 그를 좇지 말며 듣지 말며 긍휼히 보지 말며 애석히 여기지 말며 덮어 숨기지 말고 너는 용서없이 그를 죽이되 죽일 때에 네가 먼저 그에게 손을 대고 후에 뭇 백성이 손을 대라...너는 돌로 쳐 죽이라 그리하면 온 이스라엘이 듣고 두려워하여 이 같은 악을 다시는 너희 중에서 행하지 못하리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어 거하게 하시는 한 성읍에 대하여 네게 소문이 들리기를 너희 중 어떤 잡류가 일어나서 그 성읍 거민을 유혹하여...너는 자세히 묻고 살펴보아서 이런 가증한 일이 참 사실로 너희 중에 있으면 너는 마땅히 그 성읍 거민을 칼날로 죽이고 그 성읍과 그 중에 거하는 모든 것과 그 생축을 칼날로 진멸하고 또 그 속에서 빼앗아 얻은 물건을 다 거리에 모아 놓고 그 성읍과 그 탈취물 전부를 불살라 네 하나님 여호와께 드릴지니 그 성읍은 영영히 무더기가 되어 다시는 건축됨이 없을 것이니라"
(출애굽기 22:18) "너는 무당(sorceress-여자 마법사)을 살려 두지 말지니라." 모세의 율법에서 발췌한 위에서 언급한 원리 중 다수는 후에 종교 재판에서 모방되었는데 그 중에는 다음의 것이 포함되었다: 예언자와 꿈을 꾸는 자의 "제거" (잔다르크의 죽음을 가져온 혐의) 종교 재판에서 가족 성원은 서로에 대해서 불리한 증언을 하도록 한 것 다른 사람에게 경고하기 위해 이단자를 죽이는 것 카톨릭 믿음에서 돌아 선 마을을 심문하고 살피고 조사하기 위한 지침이 후에 종교재판관의 직무 내용 설명서가 됨 이단을 척결하기 위해 전체 마을을 없애는 것
종교 재판 옹호자들이 신약성경에서 자신의 정당성을 확인하기는 훨씬 더 어려웠다. 신약에서 가장 자주 인용된 구절은 요한 복음 15장에서다:
(요한 복음 15:6) "사람이 내 안에 거하지 아니하면 가지처럼 밖에 버리워 말라지나니 사람들이 이것을 모아다가 불에 던져 사르느니라" 종교 재판의 방법은 당대의 가장 유명한 카톨릭 신학자들의 찬사를 받았는데, 성 토마스 아퀴나스 (기원 1225?∼1274)의 방대한 신학적 저술 신학 대전 (Summa Thelogica)의 다음과 같은 대경실색하게 하는 구절이 알려주는 바가 그러하다. 도미니크회(Dominican) 수도 신부였던 아퀴나스는 일반적으로 4/5세기의 아우구스티누스 이래 가장 영향력있는 카톨릭 신학자로 여겨지는데 그는 이단의 박멸을 언급하고 있다.
"화폐 위조자와 기타 행악자들이 세속 당국에 의해 즉시 사형의 형벌을 받는다면, 이단자에게는 더욱더 그렇게 할 이유가 있는데, 그들이 이단으로 유죄 판결을 받자마자 파문을 시키는 동시에 사형에 처해져야 한다. "
그러나 카톨릭 교회쪽에서는 이단에 빠진 사람의 회개를 바라는 자비 때문에 당장 처벌하지는 않지만 사도가 지시하는 것처럼 "일 이차 권고 후에" 아직도 그가 고집을 부린다면 카톨릭 교회는 더 이상 그의 회개를 바랄 수 없으며 다른 사람의 구원을 위해 그를 파문하고 카톨릭 교회로부터 분리시키며, 사형을 시켜 세상에서 없애기 위해 세속 법정에 인도한다...아리우스 (Arius)는 알랙산드리아에서 하나의 불꽃에 불과했으나 그 불꽃은 금방 꺼지지 않고, 전 지구가 그 불꽃에 의해 소모되었다." (신학 대전-3권- 토마스 아퀴나스에 의한 제2부(제1부) 중의 제 2부, 150쪽).
종교 재판의 재판관은 그들의 대의의 정당성에 대해 확고한 신념을 가지고 재판에 임했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으나, 20세기 후반의 그리스도인의 눈에 그 대의명분은 너무나 혐오스러운 것이다.
역사가들은 흔히 종교 재판에 관한 연구를 두 개의 중요 부분으로 나누는데 교황권에 의한 중세의 (혹은 교황의) 종교 재판과 카톨릭 교회와 밀접히 연관되어 있으나 주로 스페인 세속 정부의 도구였던 스페인의 종교 재판으로 나눈다. 편의를 위해 우리도 이와 같은 관례를 따르기로 한다.
중세의 로마 카톨릭 교황의 종교 재판 13세기까지는 성지의 영원한 십자군 왕국의 꿈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교황 이노센트(Innocent) 3세는 십자군에 대한 열의를 동료 카톨릭 그리스도인에게로 돌렸다. 1202년에 제4차 십자군 원정이 시작됐으며 후에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했다. 그 다음 1209년에 이노센트 3세는 프랑스 남부 (랑그도크 지역)의 카타리파 (다음 소제목 참조)에 대해 십자군을 보냈다. 역사에 알비장스 십자군으로 알려진 이 유혈 원정은 제1차 종교 재판의 직접적 원인이 되었다.
알비장스 십자군은 (그렇게 명명된 이유는 프랑스의 도시 알비가 카타리파의 요새였기 때문이다) 1209년부터 1229년까지 20년간 지속되었다. 교황에 의해서 공식적으로 허가되긴 했지만 실제적인 전쟁은 주로 세속 군대에 의해, 특히 시몽드몽포르(Simon de Montfort)의 지휘 하에 수행되었다. 카타리파 이단의 억압은 자신의 양 떼를 대하는데 로마 카톨릭 교회가 난폭해진 새로운 원형을 만들었다. 가장 유명한 사례는 1209년 7월 22일 베제 (Beziers)가 약탈 당했을 때인데 20,000명이 넘는 남녀 및 어린이가 십자군에 의해 살해되었다. 이 사건은 교황의 특사 아르노 (Arnaud)가 그 공격 중에 카톨릭 교인은 살려 두어야 하느냐는 질문을 받았을 때 "모두 죽이세요, 하느님은 자신의 백성을 아시니까요"라고 한 말 때문에 역사가 지속되는 한 계속 화염을 일으킬 것이다.
"모두 죽이세요, 하느님은 자신의 백성을 아시니까요"―교황 특사 아르노가 1209년의 베제 공격 중에 카톨릭 교인은 살려 두어야 하느냐는 질문을 받았을 때.
성경대로 믿는 카타리파의 집단 화형이 십자군 원정 중에 자행되어 1211년에 라보르 (Lavaur)가 함락되었을 때 400명의 성도들이 화형되었고, 같은 해에 카세 (Casses)가 함락되었을 때는 94명이 화형되었다. 이것은 교황 그레고리 9세가 1227/31년에 교황의 종교 재판을 설립한 배경과는 어긋나는 것이었다. 알비장스 십자군이 대부분의 카타리파 그리스도인 요새를 휩쓸었지만 아직도 잡아서 화형시켜야 할 이단자들이 있었는데 그들 중의 다수는 십자군 원정시 도피했던 사람들이었다. 십자군 원정 후의 화형에 의한 카타리파 살육의 예는 1239년에 몽비메르 (마르네)에서 183명, 그리고 1244년에 몽세귀르 (Montsegur) 산성에서 카타리파의 완전한 사람들 (페르펙티, perfecti) 215명이다 (때때로 몽세귀르의 학살이라고도 언급된다)
종교 재판의 최초의 목표가 카타리파이긴 했지만 (여러 해 동안 사실이 그러했는데 "카타리(정결하다)"라는 말은 "이단"의 동의어로 사용될 정도였다), 교황의 종교 재판 범위는 결국 카타리파보다 훨씬 광범위하게 오래 계속되었다. 마침내 종교 재판의 희생자에는 왈도파, 프라티첼리파(Fraticelli) (프란체스코 수도회의 분리 집단), 성전 기사단(십자군의 잔당들), 그리고 (아주 뒤에는) 프로테스탄트가 포함되게 되었다.
1233년까지는 도미니크 수도회 (1217년에 성 도미니크에 의해 창설된 수도회)에 종교 재판관으로 활동할 수 있는 특권을 주었으며, 그 뒤를 곧 이어 프란체스코 수도회 (1209/10년에 아시시의 성 프란시스에 의해 창설됨)가 합세했다. 흥미롭게도 교황의 종교 재판의 처음 100년은 수도승 신부 집단 간의 싸움이었다. 이와 같은 집단 구성원 중 다수는 구걸 수도승이라고 언급되는데 왜냐하면 그들이 기본적인 필수품을 구걸로 충당했기 때문이다.
12/13세기까지 로마 카톨릭 사제들 중 다수가 상당히 방탕한 생활을 하는 것으로 알려지게 되는데 여기에는 수도원 생활이 포함되었다. 이 기간에 로마 카톨릭 교회는 사도들이 세운 모범―교회는 재산이 없어야 한다는 것―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믿는 여러 집단이 일어났다. 나아가서 교직자는 세속적인 재산을 포기하고 복음을 전파하러 사람들 속으로 들어감으로써 존경을 받아야 한다고 그들은 믿고 있었다. (수도승과 기성 로마 카톨릭 교회와의 논쟁은 움베르토 에코(Umberto Eco)가 지은 장미의 이름 (The Name of the Rose) (과 그에 근거한 영화)에 잘 나타나 있다.
오늘날, 왜 어떤 수도승 신부 집단들 (도미니크 수도회와 프란체스코 수도회 같은)은 교회의 환영을 받고 (그래서 실제 초기 종교 재판관이 되고) 다른 참된 그리스도인 집단들 (왈도파, 카타리파, 프라티첼리파)은 붙잡혀서 화형되었는지를 단번에 이해하기란 쉽지 않다. 그러나 대답은 오히려 명확한데 전자는 로마 카톨릭 교회의 권위에 복종했고 후자는 궁극적으로 교황과 교직자의 권위를 배척했기 때문이다.
1227/31년에 교황의 종교 재판이 시작되기 이전에는, 지역 주교신부들이 지방의 로마 카톨릭 교회 재판소에서 이단을 심문하고 재판하는 권한을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은 주목할 만하다. 종교 재판을 유별나게 만든 것은 종교 재판관들이 신학적으로 교황에게만 책임을 졌다는 것―지역 주교나 심지어 교파의 수장에게도 책임을 지지 않음―이다. 이와 같은 자율권은 종교 재판이 독립된 재판소로 활동하여 지역의 세속 및 로마 카톨릭 교회 당국의 방해 없이 원하는 때에 원하는 사람에 대한 재판을 어디서든지 할 수 있게 했다. (종교 재판의 자율성을 침해하려는 사람들이 이단자로 낙인 찍혔음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이어지는 600년간(!) 지상의 여러 곳에서 지속된 종교 재판의 횡포로부터 피난하는 열차가 출발을 하게 되었다.
중세 종교 재판의 목표
카타리파(The Catharists) 그리스도인들 교황의 종교 재판의 (그리고 이어진 알비장스 십자군의) 초기 목표는 카타리파로 알려진 사람들의 집단이었는데, 그들의 이름은 "정결한"이라는 뜻의 그리스어 카타로이 (kathoroi)에서 유래했다. 카타리파는 랑그도크로 알려진 프랑스 남부 지역에 특히 많이 퍼져 있었는데 그들은 불가리 (발칸의 지방으로부터) 및 알비장스 (프랑스의 도시 알비로부터)로도 알려져 있었다.
종교 재판의 대상 중에서 다소 독특하다고 할 수 있는 것은 카타리파가 "로마 카톨릭 교회가 받아들인 가르침과 일치하지 않는 주장 및 교리"를 가졌다는 의미에서 그들에게는 진짜 "이단"이였다는 사실이다.
카타리파의 주요 성례는 콘솔라멘툼 (consolamentum) 혹은 위안이라고 하는 안수였다. 일단 카타리파가 이 성례를 받으면 금욕과 독신의 생활을 할 것이 기대되었으며, 세속적인 쾌락을 추구할 수 없었다. 이와 같은 엄격한 요구 조건 때문에 성례는 종종 임종시에 행해졌다. 콘솔라멘툼을 받기 전의 가타리파 신봉자들은 크레덴테스 (credentes) 혹은 "믿는 자"로 알려졌다. 성례를 받으면 완전한 사람들이 된다. 완전한 사람들 즉 카타리파 교회의 지도자들은 초기 교황 종교 재판의 주된 대상이었다.
카타리파는 어떤 커다란 비밀을 간직하고 있다는 소문이 있었는데 어떤 사람들은 그들이 성배 즉 최후의 만찬 잔을 간직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카타리파는 모든 의도와 목적이 14세기 초까지 (1463년에 터키에 의해 정복될 때까지 카타리파가 지속된 보스니아를 제외하고는) 무자비한 십자군과 가차없는 종교 재판의 희생물로서 소멸되었다.
왈도파(The Waldensians) 그리스도인들 왈도파는 리용의 부유한 상인 삐에르 왈도 (혹은 발데르)에 의해 창설되었다고 한다. 1173년경에 왈도는 그의 전 재산을 팔고 거지 생활을 시작했다. 그의 이와 같은 행동의 신학적 근거는 마가복음 10:21인 것처럼 보인다.(왈덴시스는 골짜기파라는 밸리(valley)에서 유래하였다는 학설도 있다-역자주)
(마가 10:21) "예수께서 그를 보시고 사랑하사 가라사대 네게 오히려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느니 가서 네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 하시니"
때가 되자 다른 사람들도 삐에르 왈도의 금욕적이며 영적인 생활 방식에 이끌리게 되어, "리용의 빈자들"이 결성되었다. 삐에르 왈도가 몇 가지 방언 (프랑스의 프로방스어)으로 성서를 번역하도록 한 것도 주목할 만하다. 왈도는 이 성경들을 주의 깊이 연구해서 예수님의 복음 전파에 사용했다.
처음에 왈도와 그의 추종자들은 상당히 정통적인 신학 이론을 유지했지만, 리용의 대주교에 의해 복음 전파 허락이 거절되었을 때 카톨릭 교회로부터 탈퇴했다. 1184년에 교황 루시우스 3세는 "리용의 빈자들"을 파문했다.
때가 되어 왈도의 추종자들은 로마 카톨릭의 교리들 중 다수를 배척했는데, 그 중에는 사제직, 면상(免償), 연옥, 성변화, 그리고 성인에 대한 기도가 포함되었다. 다수의 왈도파 그리스도인들은 보헤미아의 개혁자 존 허스 (John Hus) (1415년에 화형되었다)의 추종자가 되었다. 1532년에 왈도파는 프로테스탄트 신앙과 합류하기로 결정했다. 죤 칼빈(John Calvin)의 친구인 윌리엄 파렐 (William Farel)이 그 교류의 도구가 되었다.
수백 년 동안 종교 재판과 세속 당국에 의해 색출되어 살육을 당한 왈도파 만큼 오랫동안 그리고 끔찍하게 박해를 당한 그리스도인들은 없다. 왈도파에 대한 가장 악명 높은 박해는 "피드먼트 이스터 (Piedmont Easter)"로서 프랑스 군인들이 1,712명의 왈도파 그리스도인들 남녀와 어린이를 학살했다. 종교 재판의 목표가 된 다른 중세의 집단들과는 달리 그들은 파문된지 800년이 지난 오늘날도 여전히 세계 도처에 재침례교도로서 존재한다.
신전 기사단(The Knights Templar) 카톨릭 십자군 후예들(그리스도인들이 아닌 정치조직) 신전 기사단은 아마 교황의 종교 재판의 가장 잘 알려진 희생자이며, 종교 재판이 사적 정치적 이득을 위해 어떻게 조종될 수 있는가를 보여 주는 좋은 사례이기도 하다.
신전 기사단은 기원 1190년에 성지 순례 여행 길을 보호하기 위해 창설되었다. 여러 번 이와 같은 전사 수도승들은 십자군의 주요 인물 (한 자료는 20,000명 이상의 신전 기사단이 십자군에서 살해되었다고 추산한다)이 되었다. 신전 기사단이 교황에게만 책임을 지고 지방 교회 당국에 대해서는 책임을 지지 않았던 사실은 주목할 만하다.
때가 되자 신전 기사단은 지역 사무소 (신전이라고 부름)를 서구 그리스도교국 전체에 걸쳐 설치했다. 언제나 혁신적인 신전 기사단은 최초의 유럽 은행 체계라고 생각되는 것을 발족시켰는데, 그들의 몰락을 가져 온 것도 은행가로서의 그들의 관련성 때문이었다. 1300년대 초에 프랑스 왕 필립 4세는 파리 신전 조직에 큰 빚을 지게 되었다. 1307년에 그는 그 기사단에 이단 혐의를 씌웠다. 신전 기사단에 불리하게 작용한 혐의에는 신전 기사단 지원자에게 그리스도를 부인하고 십자가에 침을 뱉는 것을 요구한다는 것, 신전 기사단이 바호멧(Baphomet)이라는 이름의 신비에 싸인 우두머리를 숭배한다는 것이 포함되었다. 이와 같은 혐의는 종교 재판이라는 도구를 통해 고문을 가하여 얻어낸 자백이다.
프랑스의 종교 재판은 신전 기사단에게 공식적으로 혐의를 씌웠다. 그렇게 할 필요가 있었던 것은 앞에서 기술했듯이 신전 기사단이 지역 카톨릭 교회 당국의 관할에서 제외되었기 때문이다. 1312년의 비엔느 (Vienne) 종교 회의는 공식적으로 기사단을 해체하고 그들의 재산의 대부분을 유사 단체인 호스피털 기사단에에 주었다. 중세의 신전 기사단 역사의 마지막 사건은 1314년에 발생했는데, 그 때 기사단의 우두머리 쟈크 드 모레이 (Jacques de Molay)가 그의 이전의 자백을 철회한 후 산체로 화형되었다.
중세의 신전 기사단이 해체된 후 프랑스 왕은 기사단에게 진 모든 빚을 탕감 받고 아울러 그들의 금전적 부의 상당 부분도 취하게 되었다.(오늘날 유럽을 비롯 미국의 중요정치인들은 신전기사단이란 비밀 결사 회원으로 바티칸을 위해 일하고 있다 - 역자주)
잔다르크 (Joan of Arc 1412∼1431) 종교 재판의 가장 잘 알려진 희생자는 아마도 "오를레앙의 소녀" 잔다르크다. 잔다르크는 1412년에 프랑스의 동레미에서 태어났다. 13세 이후 줄곧 그녀는 일련의 환상을 천사장 미가엘과 성 캐서린 및 마가렛으로부터 받았다고 한다. 1429년에 프랑스를 영국으로부터 해방시키라는 지시를 받은 것으로 믿고 황태자 샤를 7세를 만나기 위해 적진을 통과하여 480㎞를 말을 타고 들어갔다. 마침내 샤를은 그녀의 힘이 진짜 하늘로부터 온 것이라는 확신을 갖게 되었고 군대를 그녀에게 맡겼다.
1429년에 잔다르크는 400명의 군대를 이끌고 포위된 도시 오를레앙을 구하는 가장 큰 승리를 얻었다. 오를레앙을 해방시킨 후 잔다르크는 영국을 몇 번의 전투에서 물리침으로써 몇 개의 프랑스 도시들을 해방시켰다.
1430년에 파리를 해방시키기 위한 공격 중에 잔다르크는 브루고뉴파 (Burgundians)에게 사로잡혀 영국에 넘겨졌다. 그녀는 프랑스의 종교 재판에 의해 마술과 이단으로 재판을 받고 1431년에 화형되었다. 1456년에 종교 재판의 판결 결과가 교황 칼릭투스 (Calixtus) 3세에 의해 번복되었는데, 이와 같은 교황에 의한 종교 재판의 무효화는 드문 사례였다. 교황 베네딕트 (Benedict) 15세는 1920년에 잔다르크를 시성(諡聖)했다.
존 허스 (John Hus, 1369경∼1415) 존 허스 (John Hus)는 1369년경에 보헤미아의 후시넥 (Husinec)에서 태어나서 로마 카톨릭 사제로 서임되었으나 곧 그의 신학적 견해 때문에 카톨릭 교회 당국과 문제가 생기게 되었는데, 그의 견해 중 다수는 100년 후 프로테스탄트 개신교회에 의해 반향되었다. 허스의 신념에는 연옥의 존재에 대한 의문, 성변화에 대한 의문, 고백의 배척이 포함되었다. 허스는 교회를 하늘과 지상에서 구원받은 사람들의 전체로 정의했으며 (칼빈과 비슷함), 교황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가 교회의 머리라고 믿었다. 그를 따른 루터처럼 그는 성경이 최종적인 영적 권위라고 믿었다. 허스는 결국 콘스탄스 (Constance) 종교 회의 (종교 재판의 법정 역할을 함)에 의해 이단으로 재판을 받았다. 그는 1415년에 콘스탄스시에서 화형되었다. 그가 설립한 모라비안 (Moravian) 그리스도인 교회는 살아 남아 오늘날까지 내려오고 있다. (모라비안 교회는 브라데린 교회의 시초였고 오늘날의 형제교회 창시자 존 다비와는 다르다. - 역자주)
프라티첼리파 (The Fraticelli) 청빈한 사람들로도 알려진 프라티첼리파는 카톨릭 프란체스코 수도회의 분리 집단이다. 그들은 가난하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인 완전성에 이르는 길이라고 믿었다. 결국 예수 그리스도와 사도들은 재산이 없었다는 그들의 주장 때문에 이단으로 고발되었다. 프라티첼리파에 대한 첫 번째 종교 재판은 1318년 마르세이유에서 4명이 화형됨으로써 일어났다. 그들은 1426년에 종교 재판 당국이 세속 당국의 지원을 받아 그들에게 동정적이라고 알려진 31개 마을을 황폐시킴으로써 완전히 일소되었다.
교황의 종교 재판의 재판관(The Inquisitors) 종교 재판관들은 탁발 수도승들로서, 특히 도미니크 수도회와 프란체스코 수도회가 종교 재판의 법정을 맡았다. 그 두 수도회 설립자인 도미니크 구즈만 (Dominic Guzman)과 아시시의 프란시스 (Francis)가 이와 같은 사실에 대해 어떤 책임을 져야 하는지에 관한 문제는 오늘날까지 논란이 되고 있다.
도미니크 수도회(The Dominicans) 소위 성 도미니크는 1170년에 카스티야 (Castile)의 칼라메가 (Calamega)의 도밍고 데 구즈만 (Domingo de Guzman)에서 태어났다. 그는 마침내 아우구스티누스 카톨릭 수도회 회원이 되었고 빈자의 생활을 시작했다. 도미니크는 그리스도인 이단을 로마 카톨릭의 우리 안으로 되돌아 오게 하는 길은 "열정적인 전파와 사도적 겸손, 엄격함, 거룩함에 의해서라고 믿었다" (듀란트, 믿음의 시대, 803쪽) 역사적 운명의 그와 같은 이상한 왜곡으로 도미니크는 1205년에 프랑스의 랑그도크 지역에서 전파를 하고 있었는데, 그때는 동일 지역의 카타리파에 대해 알비장스 십자군 종교재판이 시작되기 4년전이었다. 1217년에 교황 호노리우스 3세는 열정적인 전파를 통해 이단을 개종시키려는 도미니크의 노력에 깊은 인상을 받아서, 검은 수사들 (왜냐하면 그들이 흰옷과 검은 케이프를 입었기 때문이다) 및 "주님의 개들" (Domini canes) 로도 알려진 "전파자의 집단" 창설 허가를 했다. 후에 그들은 주로 도미니크 수도회로 알려졌다. 1221년에 도미니크가 죽을 당시 60 개의 도미니크회 수도원이 있었으며, 1327년까지는 300개 이상이 되었다.
1233년에 종교 재판의 법정 운영 임명이 도미니크 수도회에 주어졌는데, 그들은 그 임명을 이어지는 수 백년 동안 엄청난 포학성과 효율성을 가지고 수행했다. 그러면 성 도미니크 (1233년에 시성됨)가 첫 번째의 종교 재판관으로 고려되어야 하는가? 1960년대의 발랄한 히트 곡인 도미니크 (Dominique)가 작곡된 대상 인물인 그 남자가 종교 재판의 발족자가 될 수 있는가? 도미니크는 교황이 도미니크 수도회를 종교 재판관으로 임명하기 100년 이상 전에 사망했다. 그리고 도미니크가 이단을 화형시키는데 관여했다는 어떤 기록도 없다. 그러나 그의 추종자들은 후에 그를 이단의 박해자 (Persecutor haereticorum)로 언급했다. 어떻든 도미니크는 후에 교황과 스페인 종교 재판의 토대를 형성한 집단을 설립한 책임이 있음은 분명하다.
프란체스코 수도회(The Franciscans) 종교 재판 법정의 중추를 형성한 두 번째의 탁발 수도승 신부 집단은 프란체스코 카톨릭 수도회였다. 프란체스코 수도회는 부유한 상인의 아들인 아시시의 성 프란시스 (1181-1226)에 의해 설립되었다. 1206년에 프란시스는 그의 부를 포기하고 빈자의 생활과 빈자에게 봉사하는 생활을 받아들였다. 그는 1209/10년에 프란체스코 수도회를 설립했다. 프란시스의 내력은 삐에르 왈도의 내력과 비슷한데, 왜 한 사람은 시성되고 (프란시스, 1228년) 한 사람은 파문 (왈도, 1184년)되었는가? 탁발 수도승의 생활을 선택하긴 했으나 프란시스는 로마 카톨릭 교회의 권위를 언제나 받아들였다. 프란시스는 교황 그레고리 9세가 그 수도회를 종교 재판관으로 봉사하도록 밀어 붙이기 몇 년 전인 1226년에 사망했다.
교황의 종교 재판의 다른 유명한 종교 재판관 버나드 귀 (Bernard Gui) - 버나드 귀는 1324년까지 17년간 툴루즈에서 카톨릭 종교 재판관으로 일했다. 그는 흔히 프랑스의 카타리파 남은 자들을 일소한 공적을 인정받고 있다. 그가 종교 재판관으로 일하는 동안 930명의 그리스도인 이단자에 대해 유죄 판결을 내렸고 45명을 사형시켰다 (듀란트). 그는 1323년경에 종교 재판관 편람〔프락티카 인퀴지티오니스 하에레티카에 프라비타티스 (Practica inquisitionis haereticae pravitatis)〕을 저술한 것으로 유명하다. 이 편람에서 그는 가장 악랄한 이단에 카타리파, 왈도파, 베그하르트파 (Beghards), 유태인, 마녀, 그리고 천리안을 가진 자를 포함시켰다. 버나드 귀의 다소 가공된 공적은 움베르토 에코가 지은 훌륭한 책 (및 영화) 장미의 이름에서 볼 수 있다. 도미니크회의 로베르로서 불가르의 로베르 - 로베르는 카타리파에서 카톨릭으로 개종자였으며 1233년경에 프랑스 북동부의 종교 재판관으로 일했다. 그는 비밀 재판 대신에 이단과 공개적으로 대치하기를 선호한 것이 주목할 만하다. 1239년에 몽트아이메 (Mont-Aime)에서 183명의 카타리파를 유죄 판결하여 모두 화형시켰다. 그는 마지막에 교황에 의해 직위를 박탈당하고 도미니크 수도회에 의해 투옥되었다.
마르부르크의 콘라드 (독일) - 마르부르크의 콘라드는 1227년에 시작된 독일 종교 재판 관의 우두머리였다. 일반적으로 정신 이상자로 간주되는 그는 이단자를 검거하기 위해 폭 도를 부추겼다. 그는 독일에 대규모로 조직된 마귀 숭배자들이 있다고 믿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그는 마귀가 고양이의 모습으로 나타난다고 믿어서 - 불쌍한 고양이를 마법사의 영원한 도구로 보았다. 그는 결국 강력한 귀족을 이단으로 혐의를 씌운 후에 사직을 하지않을 수 없게 되었다. 그가 희생시킨 사람의 친구가 1233년에 그를 살해했다.
베로나의 페테르 (Peter)는 이탈리아에서 종교 재판을 시작한 도미니크 카톨릭 수도승이었다. 그는 1245년에 카타리파와 가두 전쟁을 하기 위해 종교 단체 (라 콤파그니아 델라 피데)를 설립했다. 그는 1252년에 밀라노에서 암살되었으며 1년 뒤 성 페테르 마르티르로 시성되었다.
재개된 교황의 종교 재판(제수이트 예수회에의해) 15세기 말엽에 원래의 교황의 종교 재판 (카타리파를 박멸하기 위해 만들어졌음을 기억하라)은 상당히 진척되었다 (화형시킬 더 이상의 사람이 없었다). 그러나 종교 재판의 불길은 16세기 중엽에 새로운 연료를 얻게 되었는데, 로마 카톨릭 교회의 새로운 적으로 인식된 프로테스탄트와 싸우기 위해 이그나티우스 로욜라가 설립한 예수회에 의하여 재개되었다. 1540년대까지 로마 카톨릭 교회는 유럽 전체에 걸쳐 프로테스탄트 종교개혁의 영향 때문에 동요하고 있었다. 한 때는 교황이 전체 서구 유럽제국을 지배했으나, 1540년까지는 전체 나라들을 프로테스탄트 종교개혁가들 즉 카톨릭이 말하는 프로테스탄트 찬탈자들에게 빼앗겼으며, 여기에는 영국 (헨리 8세), 독일 (루터) 그리고 스위스 (칼빈)가 포함되었다. 프랑스 역시 증가하는 칼빈개혁주의 사회가 그들의 권리를 주장함에 따라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생각지도 못한 것은) 프로테스탄트 개혁 주의는 심지어 이탈리아를 잠식하기 시작했다. 로마 카톨릭 교회는 파손의 물결을 저지하기 위해서 무엇인가를 해야 한다고 보았다. 그렇게 하기 위해 채택된 일련의 방법은 전체적으로 반종교 개혁으로 알려져 있다. 반종교 개혁은 로마 카톨릭 교회를 구하기 위한 시도에서 몇 가지 방법을 사용했다. 그 중 하나는 전체 종교 회의를 소집하는 것이었는데, 트리엔트 공의회(Council of Trent)가 1545년부터 1563년까지 열려서 여러 가지 개혁을 시행하고 카톨릭 신앙을 고쳤다. 다른 방법으로는 호전적인 새로운 종교 집단 (예수회-The Jesuits)을 설립한 것과 프로테스탄트 요새와의 전쟁 (독일의 30년 전쟁)을 개시한 것이 포함된다. 그리고 또 하나의 도구인 종교 재판이 아주 효과적으로 사용되었다.
(오늘날 예수회는 트렌트 공의회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세계 정부를 추진하고 있다 - 역자주)
1542년 6월 21일 교황 바오로 3세는 "종교 재판 의회" 혹은 "성성(聖省)" (상크툼 오피시움)으로서 교황의 종교 재판을 (리세트 아브 이니티오 칙서로) 재개했다. 교황은 종교 재판을 시행하도록 위원회를 임명하고 추기경 지오반니 카라파 (Giovanni Caraffa)를 최고 재판장으로 삼았다. 카라파는 다음과 같은 그의 성명으로서 자신의 의도를 분명히 드러냈다. "아무도 칼빈주의는 물론 어떤 종류의 이단에 대해서도 관용을 보임으로써 스스로를 더렵혀서는 안 된다."―추기경 카라파 (후에 바오로 4세), 1542년 1555년에 그 종교 재판의 최고 재판장은 교황 바오로 4세가 되었다. 바오로 4세는 이탈리아와 스페인에서 종교 재판의 힘을 증가시켰다. 1559년에 그는 금서 색인 (인덱스 아우크토레움 ? 리브로룸 프로히비토룸)을 처음으로 출판했다. 마침내 칼뱅, 쯔빙글리 (Zwingli), 루터 등 모든 주요 개혁자의 저술이 그 목록에 등장하게 되었다. 바오로 4세는 다음과 같은 어리둥절하게 하는 정서를 지녔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심지어 내 아버지가 이단이더라도, 나는 그를 화형시킬 나무를 모을 것이다."
1559년에 바오로 4세가 죽은 후 유럽은 몇 년간 종교 재판이 잠시 멈추게 되었다. 재판장 미셀 기슬리에리 (Michele Ghislieri) (바오로 4세에 의해 임명됨)는 교황 비오 5세 (1566∼1572)―종교 재판의 최고 재판장이 교황이 된지 10여년 후에 두 번째로 (1585년에, 이전의 종교 재판관이 다시 교황 식스투스 5세가 되었다)―교황이 되었다. 비오 5세 하에 고문이 다시 종교 재판의 일상 무기가 되었다. 1566년 6월 23일 비오 5세는 대중의 아우토 다 페스 ("믿음의 행위")가 된 여러 개 중 첫 번째 것을 로마 내에서 조직하였는데 참수와 화형이 일상사가 되었다.
재개된 교황의 종교 재판은 특히 이탈리아에서 성공적이 되어 거의 모든 초기 프로텐스탄트 주의의 자취가 16세 말까지는 일소되었다. 하지만 재개된 교황의 종교 재판의 가장 유명한 희생자는 17세기에 나타나는데 갈릴레오 갈릴레이는 1633년 2월에 종교 재판소로 행성의 운동에 관한 코페르니쿠스와 케플러의 견해 (즉, 지구가 태양 주위를 돈다는 것)를 지지하는 우주의 위대한 체계 (The Great Systems of the Universe)를 출판한 혐의로 소환되었다. 불행하게도 갈릴레오는 1616년에 추기경 벨라미네 (Bellamine)로부터 지구가 도는지 어떤지에 관한 논쟁에 관여하지 말라는 경고를 받았었다. 이렇게 되어 그가 1633년에 종교 재판정에 섰을 때 상습범으로 판결이 나서 종신 투옥형을 받게 되었다. 그 판결은 나중에 교황에 의해 가택 연금으로 완화되었다. 그에 앞선 잔다르크처럼 갈릴레오에 대한 종교 재판의 혐의와 판결은 결국 번복되었으나 너무 늦은 1992년 10월에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서 그렇게 되었다. 그러면 교황의 종교 재판은 언제 공식적으로 끝이 났는가? 성성의 의회는 1962/65년 제2 바티칸 공의회 중에 신앙 교리 위원회 (Congregation for the Doctrine of Faith)로 대체되었다.
연대기 - 교황의 종교 재판 313 북아프리카 도나티스 그리스도인 어거스틴 등에의해 박해받음 385 스페인의 이단인 프리실리안이 황제 막시무스에 의해 처형됨 529 이단을 금하는 유스티니아누스 법전 1022 프랑스 왕이 카톨릭으로 개종하지 않은 이단자를 유죄 판결하여 화형시킴 1028 밀란의 폭도들이 지방 주교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카톨릭으로 개종하지 않은 이 단자를 불태움 1143 콜로뉴에서 카타리파가 대중에 의해 화형됨 1170 도미니크 구즈만 출생 1173 경 삐에르 왈도가 왈도파 설립 1184 교황 루시우스 3세가 칙서로 이단인 삐에르 왈도의 추종자들과 카타리파를 파문시킴 1199 이노센트 3세가 칙서로 유죄 판결을 받은 이단자의 토지를 몰수하도록 규정 1209 이노센트 3세가 카타리파를 없애기 위해 랑그도크로 알비장스 십자군을 보냄, 베제가 십자군에 의해 멸망되고 20,000명의 남녀, 어린이들이 학살됨 1209/10 프란체스코 수도회 설립 1215 로마 카톨릭의 제 4차 라테란공의회에서 개종하지 않은 이단자를 파문하고 처벌하기 위해 세속 당국에 넘겨 주도록 선언. 재산이 몰수될 수 있도록 함 1217 호노리우스 3세가 후에 도미니크 수도회로 알려진 포교 집단을 허가함 1220 신성 로마 황제 프레데릭 2세가 이단자는 화형하든가 그 혀를 자르도록 한 이단을 금하는 유럽의 법전을 만듦 1227/31 그레고리 9세가 교황의 종교 재판을 시작함 1229 알비장스 십자군이 막을 내림 1229 툴루즈 종교 회의에서 라틴어로 쓰여진 시편과 성무 일과의 각 시간 과정을 제외한 성서 소유를 금함 1233 도미니크 구즈만이 시성됨 1200 년대 중반 도미니크 수도회 (1233) 및 프란체스코 수도회를 종교 재판 법정을 운영하도록 임명 1252 이노센트 4세가 칙서 (아드 엑스티르판다)로 고문을 공식적으로 허가 몽세귀르의 카타리파 요새가 세속 군대에 의해 함락됨 - 215명의 카타리파의 완전한 사람들이 화형됨 1262 우르반 5세가 추기경 오르시니를 종교 재판의 최고 재판장으로 임명 1307 신전 기사단이 이단으로 피소되어 종교 재판을 받음 1323 경 종교 재판관 버나드 귀가 종교 재판관 편람을 출간 1398 파리 대학교 신학 교수단은 마술을 이단으로 선언 - 마녀가 종교 재판의 관할에 들어 옴 1415 존 허스가 콘스탄스에서 화형됨 1426 프란체스코 수도회가 (세속 당국과 함께) 이끈 종교 재판에서 프라티첼리파로 알려진 이단자 집단을 근절시키기 위해 31개의 마을을 황폐시킴 1431 잔다르크가 프랑스의 종교 재판에서 이단의 판결을 받고 루앙 (Rouen)에서 화형됨 1498 사보나롤라 (Savonarola)가 화형됨 1516 제5차 라테란 공의회는 카톨릭교회의 승인 없이는 서적을 인쇄할 수 없도록 함 1532 종교 재판의 오랜 희생자인 왈도파가 프로테스탄트와 교류함 1542 교황 바오로 3세가 "종교 재판 의회" 혹은 "성성"으로서 교황의 종교 재판을 재개 1550 종교 재판은 반 프로테스탄트 전파를 하지 않는 카톨릭 사제를 재판하도록 명령 1559 첫 번째의 교황의 금서 색인 (인덱스 아우크토레움 ? 리브로룸 프로히비토룸)이 출간됨 1566 전 최고 종교 재판관 미셀 기슬리에리가 교황 비오 5세가 됨 1585 전 종교 재판관 펠리체 페레티 (Felice Peretti)가 교황 식스투스 5세가 됨 1633 갈릴레오 갈릴레이가 종교 재판정에 서게 됨 1655 부활제 주간에 1712명의 왈도파가 프랑스 군대에 의해 학살됨 1662 성성 의회가 신앙 교리 의회 (제2기 바티칸 공의회에서)로 대체됨 1992 10월 갈릴레오가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사면됨
스페인의 종교 재판 현대에 교황의 종교 재판이 끔찍하게 보이는 것처럼 (두 개의 종교 재판이 그 표현에 있어서) 스페인의 종교 재판은 과도함, 폭력, 종교 재판의 잔인성의 동의어가 되었다. 1478년에 교황 식스투스 4세는 페르디난드(Ferdinand) 왕과 이사벨라 (Isabella) 왕비에게 종교 재판 평의회 (1840년에 만들어짐)를 공식적으로 임명할 수 있게 한 칙서를 내렸다. 스페인 종교 재판의 특정 목적은 스페인에서 거짓 카톨릭교도들, 특히 카톨릭으로 개종했다고 주장하면서 여전히 그들의 고유신앙을 은밀히 실천하고 있었던 유태인과 회교도를 근절시키는 것이었다. 이 평의회 성원이 교황에 의해서 승인을 받긴 했지만, 스페인의 군주가 그들을 임명한다는 사실은 교황의 종교 재판의 관행으로부터 크게 벗어난 것이었다. 교황의 종교 재판에서는 수도승 신부 집단의 우두머리가 전형적으로 종교 재판관 (최고 재판관은 교황이 선택)을 선택했다. 교황의 종교 재판과 스페인 종교 재판의 또 다른 점은 스페인 정부가 경비를 부담하고 종교 재판의 순익을 취했다는 것이다. 놀랍게도 스페인의 종교 재판은 354년간이나 원래의 상태를 유지했다! 1834년까지는 효력을 유지했는데, 그때 황태후 크리스티나 (Cristina)가 "종교 재판소는 반드시 활동을 못하게 해야 한다"고 선언했다. (로스, 267쪽). 종교 재판에 의한 마지막 사망자는 가난한 교장 카예타노 리폴 (Cayetano Ripoll)로서 이신론자의 교리를 가르쳤다는 혐의로 1826년에 교수형에 처해졌다.
첫 번째 최고 종교 재판관 - 토르케마다(Torquemada) 1483년에 스페인의 페르디난드와 이사벨라는 가장 악명높은 종교 재판관이 된 토마스 토르케마다를 스페인 최고 종교 재판관으로 임명했다. 도미니크 수도회의 사제 수사인 토르케마다는 1420년에 발라돌리드 (Valladolid)에서 태어났다. 그는 한때 이사벨라 왕비의 고해 신부로 봉사하기도 했다. 최고 종교재판관으로서, 그는 십만 명이 넘는 사람들을 이단자로 처형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흐로흐(Hroch), p.47〕토르케마다는 그의 생애의 목표였던 스페인 내의 모든 미세례 유대인을 1492년 3월 30일에 추방하고 난 후인 1498년에 죽었다.
스페인 종교 재판의 희생자 유태인과 회교도 종교재판 전에도 스페인에서는 유태인을 박해한 긴 역사를 가지고 있다. 예를 들어 1391년에 오만 명이 넘는 유태인이 카톨릭 폭도에 의해 살해당했다. 1492년에 스페인에 살고 있던 유태인들은 영세받은 카톨릭교도가 되거나 혹은 스페인을 떠나거나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만 했다. 약 오만명의 사람들이 카톨릭 종교로 개종을 받아들이고, 십만 명에서 이십만 명은 스페인을 떠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강제 개종을 한 유태인들은 마라노스 (Marranos, "돼지"를 의미함), 콘베르소스 (conversos), 또는 "새로운 기독교인"으로 알려졌다. 종교 재판이 유태인들 (카톨릭교의 이단으로 낙인찍히지 않음)에게 영향력을 행사할 권리는 없었지만, 종교 재판은 여전히 비밀리에 유태인으로서 계속 숭배하고 있던 콘베르소스에게 큰 권위를 행사했다. 종교 재판은 유태인화 한 사람들 (유태교로 되돌아간 사람들)을 식별할 수 있는 정교하게 만든 목록의 "표"를 작성했으며, 그들 중 일부는 1519년 발렌시아 (Valencia)에서 공포된 다음의 "믿음의 칙령"에 포함되어 있다: "토요일에 깨끗한 개인적 아마 옷으로 갈아 입는 것, 그리고 다른 날보다 더 좋은 의복을 입는 것; 금요일에 토요일을 위한 음식을 준비하는 것, 조그마한 불에 냄비로 스튜 요리를 하는 것; 금요일 저녁과 토요일에 다른 날처럼 일을 하지 않는 자; 금요일 저녁에 새로운 심지를 끼운 깨끗한 등에 불을 밝히는 자; 깨끗한 아마 침대보와 깨끗한 식탁 냅킨을 까는 자; 무교병의 절기를 지키고, 무교병과 셀러리와 쓴 나물을 먹는...절인 돼지 고기, 토끼, 달팽이, 비늘이 없는 물고기를 먹기 원하지 않는 자; 시체를 목욕시키는 자...누구든 어떤 집에서라도 종교적 의식을 행할 목적으로 모이는 것 혹은 방언으로 성서를 낭독하거나 혹은 다른 유태인의 의식을 행하는 자를 알고 있다면...― 믿음의 칙령, 1519년에 종교 재판관 안드레스 데 팔라시오 (Andres de Palacio)에 의해 공포됨 (로스, 77/79쪽). 스페인의 회교도는 유태인과 비슷한 운명―카톨릭교로 개종 혹은 추방―을 겪었다. 카톨릭교로 개종한 회교도는 모리코스 (Moriscos)로 알려졌는데 종교 재판에 의해 크게 의심을 받았다. 개종하지 않은 회교도는 스페인에서 추방되었는데, 어떤 추산에 의하면 1502년에서 1615년 사이에 삼백만 명의 회교도가 스페인을 떠났다고 한다.
프로테스탄트 개신교들 프로테스탄트 개신교 그리스도인들도 빈번히 스페인 종교 재판의 대상이 되었다. 희생자 중에는 1540년 스페인에서 화형을 당한 최초의 프로테스탄트 그리스도인인 프란시스코 데 산 로만 (Francisco de San Roman)과 같은 스페인 본토 출신 프로테스탄트 (루터파 및 칼빈파) 그리스도교인들도 있었다. 더욱 논란이 되는 것은 상선에 근무하면서 스페인 항구에 들린 프로테스탄트 그리스도교인들이었다. 예를 들어 1565년에 26명의 영국인이 화형되었고 그 숫자의 열 배나 되는 사람들이 종교 재판 감옥에 수감되었다. 말할 필요도 없이, 이것은 스페인과 무역 상대국 간에 주요 대치 원인이 되었다. 1604년에 런던 조약이 서명되어 영국 국왕의 백성을 스페인 국왕의 영역에서 양심의 문제로 박해하는 것을 금지했다. 그러나 그 조약에는 경고 사항이 포함되어 있었는데, 스페인의 영국 국민은 공공연한 추문을 일으키지 않아야만 안전할 수 있었으며 그렇지 않으면 독자적 재판의 대상이 되었다. 16세기 이탈리아의 교황의 종교 재판과 같이 스페인의 종교 재판은 프로테스탄트 개신교회가 스페인에서 교두보를 확보하는 것을 저지하는데 매우 효과적이었다.
연대기 - 스페인의 종교 재판 1391 카톨릭 폭도들이 스페인 왕국 전역에서 50,000명 이상의 유태인을 살해함 1478 식스투스 4세가 칙서로 페르디난드와 이사벨라 카톨릭 여왕에게 종교 재판 위원을 임명할 권한을 부여 1480 페르디난드와 이사벨라가 최초의 종교 재판관 두 명을 세빌 지역에 임명 1481 첫 번째 아우토 다 페가 발생 - 세빌에서 6명을 화형. 그해 말에 298명이 화형 됨 (듀란트, 종교 개혁, 213쪽) 1482 토마스 토르케마다를 포함한 일곱 명의 종교 재판관이 추가로 지명됨 1483 종교 재판은 수프레마 (Suprema)라고 하는 정부 기관의 통제 하에 둠, 토마스 토르케마다를 전 스페인의 최고 종교 재판관으로 임명
1492. 4월 30일 모든 미영세 유태인을 스페인에서 추방 - 50,000명은 카톨릭으로 개종, 100,000-200,000명은 떠남 1502 회교도 추방 칙령 - 카톨릭 영세 혹은 추방 1519 스페인 종교 재판관이 미국 식민지를 종교재판 대상으로 처음 임명됨 1528 신세계 (멕시코 시티)에서 첫 번째 믿음의 행동(종교재판) 발생 1531 종교 재판이 포르투갈에서 시작됨 1540 스페인 종교 재판의 첫 번째 희생자 프란시스코 데 산 로만 화형됨 1559. 9월 24일 세빌에서 14명의 루터파 그리스도인들이 화형됨 1560 영국 국민이 종교 재판정에 처음으로 서게 됨 1565. 6월 17일 톨레도에서 22명의 루터파가 화형되고 11명은 살아남 1604 런던 조약으로 영국 국민이 스페인 국왕의 영역에서 공개적 추문을 일으키지 않는 한 양심상의 문제로 박해 받는 것을 금지
1615 회교도 국외 추방 완료 - 300,000명에서 3,000,000명으로 추산 1660 세빌에서 아우토 다 페가 3일간 열려 100,000명 참가 1680. 6월 30일 마드리드에서 아우토 다 페가 14시간 지속되어 50,000명이 참가한 가운데 51명이 세속 당국에 넘겨져 투옥되거나 초상화가 붙태움 당함 1721 96세의 여인 마리아 바르바라 카릴로가 마드리드에서 산체로 불태워짐 1815 경 유명한 화가 고야 (근대주의의 선구자)가 그의 그림 "나체의 마야"를 설명하도록 종교 재판정에 소환됨 1821 종교재판이 포르투갈에서 공식적으로 종료됨 1826 학교 교장 카예타노 리폴이 이신론자의 교리를 가르쳤다는 혐의로 교수됨 - 스페인 종교 재판의 마지막 희생자 1834. 7월 15일 교리성성이 스페인에서 황태후 크리스티나에 의해서 공식적으로 폐지됨: "종교 재판소는 반드시 활동을 못하게 해야 한다고 선언되다" 1860 스페인에서 신교도인과 구교도(카톨릭)의 구별이 공식적으로 폐지됨 1869 종교적 관용의 원칙이 스페인 헌법에 합체됨
종교 재판의 방법 "그들의 추진 형태는 종교 재판관이 원하는 자는 누구든지 죽이기 위한 결코 실패가 없는 방법이었다. 투옥된 자들은 고발자나 정보 제공자와 대면할 수 없었다. 듣지 않는 자에게는 정보 제공자나 증인도 없었다. 대중에 의해 유죄 판결을 받은 자, 악명 높은 범인, 파렴치범, 일반 창녀, 어린이는 믿을만한 고발자나 증인이 없이 교리성성에 소환되었다. 심지어 아들이 아버지에 대해 불리한 증언을 하고 아내가 남편에 대해 불리한 증언을 했다. (존스, 88쪽)
20세기 후반의 미국인들에게 종교 재판의 방법은 그 공포를 이해할 만한 것이다. 종교 재판은 이웃이나, 사업 동료, 심지어 가족들의 사실상의 혹은 상상의 죄를 고발하도록 부추겼다. 고발당한 사람은 거의 모든 권리를 상실하여 변호사에 대한 권리도, 없었고 고발자가 누구인지를 알 권리도 없었으며, 그에게 부과되는 혐의의 성격을 알 권리도 없었다. 자백을 끌어내기 위해 흔히 고문이 가해졌다. 종교 재판의 방법과 포학성은 20세기에 나치와 공산주의자가 나타날 때까지 인간 역사상 유일하게 현저한 것이었다. 본 소제목 하에서는 종교 재판관이 어떻게 그의 직무를 수행했는지 그리고 고발당한 자가 어떤 경험을 하게 되었는지를 검토하고자 한다.
믿음의 칙령 "시민들이여! 내 말을 들어 주십시오. 내게는 아내가 있습니다. 저는 그녀와 잠자리를 같이 하며, 그녀는 나에게 아들을 낳아 주었습니다. 저는 육류를 먹습니다. 나는 거짓말도 하고 맹세하기도 합니다 (그것은 카타리파의 완전한 사람들에게 금지된 행동입니다) 그리고 저는 착한 그리스도인입니다." ― 장 티셰레 (Jean Tisseyre), 툴루즈 〔올덴부르 (Oldenbourg), 288쪽〕 전형적으로 종교 재판의 주기는 종교 재판관과 그의 측근 (토마스 토르케마다는 50명의 기마 호위병 및 200명의 보병과 함께 이동했다)이 특정 도시나 교구를 방문함으로써 시작되었다. 종교 재판관은 종종 도시의 광장이나 카톨릭 성당에서 이단의 죄에 관해서 설교를 했다. 믿음의 칙령은 종교 재판관에 의해 종종 공포되어 이단자를 색출하는 방법 (타인에게서나 자신에게서)에 관한 세부 지시를 하는 것이었다. 전형적으로 1주에서 4주 사이의 자백을 하도록 하는 은혜의 기간(개종의 기간)이 따른다. 자진해서 고백을 하러 오는 자와 자신이 이단임을 인정하는 자들은 흔히 처벌이 완화된다. 또한 이 기간 중에 종교 재판관들은 다른 사람이 이단자라는 것을 고발하는 사람들로부터 정보를 모으기 시작한다. 물론 이것은 사업상 혹은 개인적 경쟁자를 제거하는 편리한 방법 (보호 수단이 하나 있긴 했는데, 그에 대해서는 나중에 설명하고자 한다)이었다. 때때로 종교 재판관은 전체 교구민 혹은 시민을 증언하도록 소환했다. 1245/6년에 툴루즈 지역의 종교 재판관들은 증언하도록 8,000∼10,000명을 소환했다! (헤밀턴, 42쪽) 은혜의 기간(개종의 기회) 뒤에 자백을 하지 않은 교구민 혹은 시민은 누구나 고발될 가능성이 있었다. 종교 재판의 기소에는 단지 두 사람의 증언이 필요했다. 그리고 본 항목의 서문에서 볼테르 (Voltaire)에 의해 지적되었듯이, 종교 재판관들은 누가 고발자가 될 수 있는가에 대해서는 가리지 않는 편이었다. 아내와 남편은 서로 불리한 증언을 할 수 있었다. 유죄 판결을 받은 이단자와 유죄 판결을 받은 죄수도 다른 사람을 고발할 수 있었다.
피의자의 경험 일단 고발이 되면 그는 종교 재판정에 공손히 소환된다. 이처럼 출두하는 것이 필수 요건은 아니었지만, 출두하지 않으면 혐의 사실을 인정하는 것으로 간주되었다. 종교 재판 중에, 몇몇 종교 재판관들이 초보 종교 재판관들을 위해 "편람"을 저술했다. 아래의 요약 내용은 피의자를 초기에 어떻게 심문하는지에 대해 종교 재판관들에게 조언을 하고 있다. "종교 재판관은 친근한 방법으로 행동해야 하고 마치 전체 사건을 이미 알고 있는 것처럼 행동해야 한다. 그는 문서를 보면서 말하기를: '피고인이 진실을 말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거의 틀림없군요' 혹은 문서를 집어 들고 놀란 듯이 바라보면서 말하기를: '피고인이 말하는 것과 반대되는 것이 여기 이렇게 기록되어 있는데 어떻게 내게 그와 같은 거짓말을 할 수 있는가?'라고 말해야 한다. 그리고 나서 계속하기를: '자백하라 ― 내가 이미 모든 것을 다 알고 있다는 것을 피고인도 알고 있으니까.'" ― 니콜라스 에이메릭 (Nicholas Eymeric), 디렉토리움 인퀴지토리움 (Directorium inquistorium) (흐로흐, 145쪽) 종교 재판은 비밀리에 진행되었다. 피의자에게는 누가 고발자인지 그 이름을 알려주지 않았다; 그러나 그들에게 악의를 가진 자들의 이름을 거명하도록 요구되었다. 만약 고발자의 이름이 목록에 들어 있으면, 피의자는 때때로 석방이 되기도 했다 (지혜로운 많은 피의자는 때때로 많은 사람들의 이름을 제시했다!) 피의자는 자신을 변호하기 위해 증인을 부르거나 (대부분의 종교 재판에서) 변호사를 선임할 수도 없었다. (어떤 지역에서 피의자에게 변호사가 허용되기도 했지만, 만약 피의자가 유죄 판결을 받으면, 변호사도 그를 변호하였기 때문에 동일한 혐의가 지워졌다!) 피의자는 체포된 후 판결을 받을 때까지 종교 재판 감옥에 투옥되었다. 스페인에서, 이 기간은 때때로 3∼4년 지속되었다. 투옥 중에 피의자는 자신의 비용을 지불해야 했다. 이 사실과 이단자로 유되 판결을 받으면 재산을 몰수당했다는 사실은 때때로 종교 재판이 가난한 자들보다는 부자들을 목표로 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투옥 기간 중에 피의자는 종교 재판관 이외의 누구와도 이야기할 수 없었다. 종교 재판의 공식적 주요 목표는 카톨릭으로 개종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피의자는 계속해서 그들의 이단을 고백하도록 강요되었다. 자신이 "유죄"임을 인정한 사람들과 종교 재판에서 다른 잠재적 이단자의 이름을 자진해서 밝혔던 사람들은 흔히 고해성사함으로써 석방되었다. 고해에는 다음 사항이 포함되었다: 지역 성지나 로마, 콤포스텔라 (Compostella), 켄터베리 (Canterbury) 등을 순례하는 것. 강제로 옷에 커다란 황색 십자가를 넣어 입게 하는 것. 스페인에서는 이것을 산베니토 (sanbenito)라고 했다. 종교 재판 감옥에 투옥되는 것. 매나 채찍으로 때리는 것 (스페인) 가장 가혹한 형벌 (재산의 몰수나 화형과 같은)은 두 유형의 죄인들에게 가해졌는데 이단의 철회를 거부하는 자 (예를 들면 카타리파의 완전한 사람들에게 흔한 경우임) 및 "되돌아간" 이단자들이었다. 되돌아간 이단자들은 이전에 종교 재판에 의해서 판결을 받은 후 이단을 철회하였던 자들 혹은 스페인에서 카톨릭 영세받은 유태인이나 회교도가 자신의 고유 종교를 비밀리에 실천하는 경우 자동적으로 "되돌아간" 이단자로 간주되었다. 일단 되돌아간 이단자나 개종하지 않은 이단자가 유죄로 판명되면 처벌하도록 세속 당국에 넘겼다. 이렇게 넘기는 것은 사법적 문제 때문만은 아니었다. 카톨릭 교회는 좌우명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것은 "카톨릭 교회는 피 흘리는 일을 해서는 안 된다." (에클레시아 아브호렉트 아 상구이네)는 것이었다. 이와 같은 좌우명에 바탕을 두고서 카톨릭 교회는 직접적으로 사형을 집행하지 않았던 것이다. 오히려 세속 당국이 이 일을 하도록 했다. 사형 집행을 위해 화형을 하는 것은 피를 흘리지 않는 방법이기 때문이기도 했다! 화형당한 이단자(그리스도인, 유대인 또는 회교도들)의 가족의 재산은 세속 당국이 몰수하는 것이 다반사였다. 스페인에서 이단자의 후손은 공직을 가질 수 없었고, 카톨릭 교회 수도원에 들어가거나 의사가 되거나 청소년의 가정 교사 혹은 중재자 (변호사)가 될 수 없었다.
고 문 고문은 1252년에 교황 이노센트 4세에 의해 공식적으로 허가되었으며, 1/3의 경우에 고문이 사용된 것으로 추산된다. (흐로흐, 146쪽) 고문의 목적은 자백을 받아내기 위해서였다. 혐의가 있는 사람들은 고문 하에서 자백을 한 것도 정당한 것으로 간주되었기 때문에 혐의자는 고문 하에서 인정했던 것을 입증하도록 몇 시간 후에 심문을 받았다. 자신의 자백의 정당성을 부인하면 한층 더한 고문을 받아야 했다. 흔히 사용된 고문 수단은 채찍으로 때리는 것, 불에 달군 쇠붙이로 피부를 지지는 것, 고문대, 불타는 숯 위에 벌거벗긴 발을 태우는 것이 포함되었다. 스페인과 이탈리아에서는 가루차 (garrucha)가 유행했는데, 피의자의 손을 등 뒤로 묶어서 손목에 밧줄을 묶어 공중에 다는 것이었다. 스페인에서는 또다른 고문 수단이 사용되었는데 그것은 물 고문 (토르투라 델라구아)이었다. 이 고문에서 피의자는 고문대에 묶여져 머리를 그의 신체의 나머지 부분보다 낮추고, 입을 강제로 (때때로 천을 사용해서) 벌려 물을 먹였다. 피의자가 "자백"하지 않으면 질식할 가능성이 있었다.
믿음의 행동 종교 재판 절차의 마지막 국면은 믿음의 행동이었다〔스페인과 16세기 이탈리아의 아우토 다 페, 교황의 종교 재판 초기의 세르모 제네랄리스 (sermo generalis)〕종종 피의자는 아우토 날까지 자신의 형에 대한 선고를 들을 수 없었다 (사형 선고를 받은 사람은 죽기 전날 밤에 알려줬다.) 믿음의 행동은 공개적으로 개최되었는데, 전형적으로 도시의 광장 혹은 (이탈리아에서) 지방 성당 내에서 행해졌다. 1660년 세빌에서 하나의 아우토 다 페가 3일간 지속되어 100,000명이 참가했다. 1680년 6월 30일에 마드리드에서 개최된 하나의 아우토 다 페는 14시간 지속되었으며 50,000명의 관중이 있었다. 아우토 다 페 중의 가장 긴 부분은 형의 선고를 낭독하는 부분이었다. 흔히 수백명의 유죄 판결을 받은 죄수들이 있기 때문에 선고는 여러 시간 계속될 수 밖에 없었다. 일단 선고가 낭독되고 나면, 사형 선고를 받은 사람들은 화형장〔스페인어로 케마데로 (quemadero)〕으로 끌려갔다. 사형 선고 후에 개종한 사람들은 화형되기 전에 교수형 처벌되는 호의가 베풀어졌다. 철회하기를 거절하는 사람들 (흔히 카타리파의 완전한 사람들과 이탈리아 및 스페인 등의 루터파 및 칼빈파와 재침례그리스도인들)은 산체로 화형되었다. 화형되는 사람들은 흔히 유령 동반자가 있었다. 이미 죽은 자에게도 재판을 열어 화형 선고를 내리는 일이 흔했다. 시체를 의무적으로 파내어 아직 살아 있는 죄수 옆에 두었다. 이 광경이 너무나 끔찍하게 보이는 만큼, 이처럼 죽은 자에게 혐의를 씌우고, 선고를 하고, 파내어, 화형시키는 데는 실제적인 이유가 있었는데, 그것은 그 살아 있는 가족의 재산을 몰수하기 위해서였다. 일단 죄수가 화형장에 가면, 기둥에 묶어 큰 장작 개비 더미의 불로 태웠다. 그래서 후에 남아 있는 것이라고는 흔히 몇 개의 뼈뿐이었다.
결 론 본 서의 다른 부분에서 지적되었듯이 종교 재판은 그 특정 목적을 달성하는데는 아주 효과적이었다. 카타리파는 14세기까지는 거의 완전히 박멸되었으며; 17세기까지는 스페인에서 추방될 그리스도인들이 표면상으로는 더 이상 없었고; 프로테스탄트 종교개혁운동은 이탈리아와 스페인에서 교두보를 확보할 수 없었다. 그러나 넓은 의미에서는 종교 재판은 그다지 성공했다고 할 수 없는데, 종교 재판에 의해 초래된 분노가 로마 카톨릭 교회의 엄격한 지배를 받지 않는 지역에서는 프로테스탄트 개신교회의 성장을 촉진했기 때문이다. 종교 재판을 도덕적으로는 어떻게 판단해야 하는가? 카톨릭 옹호론자들은 종교 재판이 중세에 이단자를 화형시킨 유일한 사회 구조는 아니라는 점을 재빨리 지적할 것이다. 영국, 프랑스, 독일 및 다른 나라들의 세속 당국은 종교 재판의 도움 없이도 스스로 이단자를 정기적으로 화형시켰다. 영국의 프로테스탄트 군주는 카톨릭 교인을 사형시키도록 지시했다. 그리고 프로테스탄트 주의의 큰 보루인 칼빈의 제네바에서는 카톨릭교인, 간음자, 신성 모독자, 우상 숭배자 및 마술을 행하는 자를 모두 사형시킬 수 있었다 (그리고 칼빈의 국가교회 통치 중에 그와 같은 혐의로 58명이 처형되었다.) 그러나 하나의 제도로서 로마 카톨릭 종교 재판은 지속 기간 (약 1500년), 희생자 수, 방법의 무자비함, 그리고 그것이 조장한 편협성에 있어서 역사에 필적할 만한 상대가 없다. "또 내가 보매 그 여자가 성도들의 피와 예수님의 순교자들의 피에 취하였으므로 내가 그 여자를 보고 심히 놀라 이상이 여기니라"(계17:6 KJVB) | |
첫댓글 매우 중요한 역사를 한글로 읽을 수 있어서 참 유익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카타리파는 프랑스 청교도, 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카타리조가 헬라어로 청결, 청정, 깨끗함을 뜻하기 때문이지요. 이 부분에 관해서는 영미권에서는 종교 재판에서의 심문 기록들이 공개되어 있는데 그 재판과정에서 질의 응답은 매우 생생한 광경을 상상하게 해줍니다. 위에 언급된 도미니크 수도원이 그리스도인들을 탄압하기도 하였습니다. 유대인들은 이러한 종교재판에서의 가장 큰 희생자들이 되었습니다.
알비파, 왈덴지언들 또한 엄청난 살육을 당해야 했습니다. 바티칸은 인간도축센터 본부라 할 수 있고 그 CEO 가 바로 교황들이었습니다.
그렇군요..카톨릭이 종교재판한 사람들은 정말 광대한것 같습니다. 존후스 뿐만 아니라..잔다르크와 사보나롤라등등도 있었네요..
엄청 길군요..나중에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잔다르크의 신앙 자체는 검증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다고 생각됩니다. 그렇지만 그녀가 억울한 죽음을 당한 것은 분명합니다. 고대에는 죽어야할 이유가 없는데도 죽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오늘날도 소리없이 억울하게 죽어가는 사람들도 많습니다만.
이 교회사는 한국의 교과서에 넣어서 학생들로 하여금 선택하도록 하여야 한다고 저는 믿습니다. 진화론에 반대하는 창조과학과 이 대안 교회사는 선택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오늘날은 로마 카톨릭 위주의 교회사와 니골라당 양성소에서 가르치는 기독교만이 교육계에 알려져 있을 뿐입니다. 학생들로 선택하게한다면 어떤 신앙을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자유 선택에 의한 믿음이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