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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10월 말에
모촌 마을 친구들하고 충남 서천에 나들이를 한 적이 있습니다.
그 때와 그 때 이후 몇 자 적어놓은 글이 있어 올려봅니다.
가을 여행기
차 례
제1장 : 옹진상회의 영감님과 따님
제2장 : 오서산 억새풀
제3장 : 한산 소곡주와 문헌서원 옆 늙은 아재 이야기
제4장 : 깨복쟁이 친구들(竹馬古友)
3. 한산 소곡주와 문헌서원 옆 늙은 아재 이야기
서천에서 군산 방면으로 10km 쯤 가면 한산면이 있는데, 이 곳은 한산 모시로 잘 알려져 있지만, 소곡주라는 술로도 상당한 명성이 있는 곳이다. 작년 이맘 때 우연히 이 곳을 지나가다가 소곡주 담그는 행사에 참여해 본 적이 있어 올 해에도 참여하기로 하고, 오서산 하산길이 바쁘게 이동하였다. 서천읍에서 한산면으로 이동하는 길은 적당히 자란 은행나무 가로수들이 많았는데, 수확 마친 들녘과 한창 노란 물이 든 단풍들이 어울려 한가로운 시골 정취를 물씬 물씬 풍겼고, 눈은 마냥 즐거웠다.
소곡주 담그기 행사장에 도착하니 4시경, 너무 늦게 도착했는지 행사에 참가한 사람들은 모두 돌아간 것 같고, 관계자들만 술을 담그느라고 여념이 없었지만, 작년에 담갔던 항아리도 가져왔는데 당연히 담가야지.
미주가 행사용 소곡주는 쌀 한 말(8kg)이 밑천인 고두밥, 누룩, 약초 등을 물에 잘 섞어 항아리에 넣고 60일 정도 숙성하면 완성되는데, 숙성 후 지름 20cm 길이 40cm 정도의 원통형 대나무 얼개인 용수를 박아놓고 국자로 퍼 올려 마시는 술이다.
총량은 1.8리터들이 됫병으로 4되 정도 나오는데, 제일 먼저 퍼 올린 상급 술은 부모님 기일에 제주(祭酒)로 쓰고 나서 7형제간에 나누어 마실 것이니 가화주(家和酒)가 될 것이요. 두 번째로 퍼 올린 것은 딸 주신 장모님 드려 의성김씨 조상님에 대한 제주로 쓰시도록 할 일이니 술 좋아하는 사위의 효도주(孝道酒)라 이름하고, 그러고도 남는 것은 동지섣달 긴긴 밤에 시시로 수시로 생각날 때마다 퍼 마셔 몸보신을 해야 할 것이니 약주(藥酒)라 하면 될 것 같고, 마시고 퍼마시어 더 이상 국물이 나오지 않을 때는 정갈한 물 한 되 부어 잘 비벼 걸러 낸 것은 또한 등산 후에 마실 탁주(濁酒)가 될 것이니 소곡주 한 말 담그는 명분과 용처가 분명하고, 술지게미 찌꺼기는 내년 농사 거름으로 써야겠으니 지게미 먹고 자랄 상추가 취하지나 않을지?....,
즐거운 상상으로 부지런히 한 말 술 담가놓고, 참가자들을 위한 접대용 테이블에 앉아 서천의 해산명물(海産名物)이라는 전어구이, 아나고구이 안주에 소곡주를 연거푸 털어 넣으니 빈속인지 머릿속인지 어리어리하다.
그리고, 작년 이맘 때, 이곳에 왔다가 주변 팻말을 보니 ‘문헌서원’이라 안내되어 있어 한 번 가보자 하고, 한산 어느 마을 뒷산 배경 좋은 곳에 위치한 ‘문헌서원’을 찾아갔었다. 문헌서원(文獻書院)은 고려 말 학자였던 목은 이색 및 이색의 아버지 이곡 등을 배향하기 위해 선조 때 세운 사액서원(賜額書院-임금이 현판을 하사한 서원, 경제적 자립기반을 위해 노비와 전답까지 정부에서 하사함)이라는데, 서원은 군청 등과 함께 대대적인 개보수 작업 중이어서 자세히 살펴볼 수 없었고, 관리인 등이 없어 이색의 묘도 한 번 보고 싶었지만 정확한 위치를 몰라 돌아왔었다. 관련 자료를 찾아보니, 이색은 고려 말 가전체 문학으로 이름 있었던 이곡(죽부인전 저자)의 아들이요. 본관이 한산이라는데, 이들의 후손으로서 이름 있는 분들은 조선 명종 연간의 토정 이지함, 선조~광해 연간의 토정 조카인 이산해, 이조 말 망국기의 월남 이상재 등을 들 수 있는데 인물로 본다면 명문이라 할 수 있겠다.
서원에 하릴없으니 나의 고향 풍경과 다를 바 없는 이웃 풍경을 살펴보자. 길가 집 마당에서는 촌로 1명이 펼쳐놓은 콩 무더기에 도리깨 타작을 하고 있었다. 그래 옛날 생각도 나고, 이제는 사라지고 있는 농구이니 아이들 교육도 생각하여 나도 한 번 해보고 아이들도 한 번씩 해보도록 하였다. 흔쾌히 응대하고 흐뭇하게 바라보시는 노인네와 함께 도리깨 타작을 한 후 연해 있는 이웃집을 보니, 늦가을 황국을 대표격으로 갖가지 화초들로 정갈하게 잘 꾸민 집이 있었다. 마침 가을 감 수확을 하고 있는지 손수레에 말감(장두감, 대봉)이 가득 채워져 있어 주인 아짐씨에게 판매도 하는지 물어보니, 당근 O․K. 반접을 사니 한 접을 사느니 흥정을 하다가 주인 아저씨는 취미가 고상하여 쉬는 날은 거의 낚시질을 하느니 어쩌니 하는 이야기를 흘려들으면서 우수 홍시 몇 개를 더 하여 장두감 한 상자를 구입하여 돌아왔다. 그 중 20여 개는 곶감을 만들어 익기가 무섭게 누가 빼 먹는지 모르게 빼먹고, 나머지는 말랑거리기도 전에 골라 먹느라고 작년 가을 이맘 때 한참을 재미있게 보냈던 기억이 있기에.
올해는 이색의 문헌서원보다는 순전히 장두감을 사러 해질녘 어스름한 때 그 마을을 찾았다. 혼자행이라 간신히 찾아간 곳의 서원 공사는 아직도 진행 중이고, 감집을 다시 찾아 몇 번을 불렀으나 인기척은 없고 개×끼만 요란스레 짖어댄다. 다소간 실망감으로 걸음을 되돌리려 할 때, 마빡 시원하게 벗어진 감집 주인아저씨가 언덕배기에서 내려오면서, 감을 따다가 개가 자꾸 짖어 내려왔다면서 말을 건넨다. 아주머니가 없어 그 때까지도 얼마간 실망감을 안고, 감 팔 뜻을 물어보니, 아짐씨는 누구누구 결혼식에 오늘 서울에 갔고, 본인이 판매할 수 있단다. 작년과 달리 올해는 감 농사가 부실하여 크기가 작다면서...,
나는 이 마빡 아저씨 기억은 없는데, 마빡은 작년 이맘 때 우리 식구 5명이 이곳에 와서 감 사갔던 일을 개수까지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올 해도 작년처럼 주시오. 주문하고, 우수는 안 줄 것 같아 장독대 위에 있는 홍시 1개를 집으니, 그 때야 생각난 듯이 창고에 보관하고 있던 홍시 몇 개를 아이들 갖다 주라며 더 얹는다. 대화중에 (흥정할 때도 어디 낚시터에 있는 작자한테서 전화 받는 것을 보면) 주인장 취미는 낚시광임이 분명하고, 직업도 완전 농사꾼은 아닌 농촌지도소인가에 다니는 한량패임을 알았다.(문헌서원 재조성공사가 완료되면, 서원 앞에 있는 과원을 아이들 체험장을 마련해서 노후생활 어쩌고 하는 점 등을 보면) 어쨌든 내년에도 가능하다면 감을 사라면서 이별을 고하고.....,
감을 샀으니 돌아가야지, 마빡을 작별하고 차를 돌리려 하니, 길가에서 말린 나락을 덮던 촌로 1명이 감을 얼마에 샀느냐며 무언가 정보를 캐려하는 몸짓 말짓을 보였다. 그래 나도 나락 몇 알을 집어 깨물며, 마른 정도를 음미하며 응대를 하면서 보니 작년에 도리깨질을 시험했었던 할아버지였다. 반가운 마음에 작년 이야기를 하니 노인네 기억을 잘 하지 못하신다.
감은 한 접에 5만원인데 3만원어치를 샀다고 하자 “한 접에 5만원씩이나 받아?” 라는 다소 비싸게 받는다는 뉘앙스를 풍기면서, 올해는 날씨가 좋지 않아 동네에서 공동으로 재배하는 감나무에는 거의 열리지 않았고, 내가 감 산 집만 농약을 두어 번 해서 수확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또한,올 해는 큰 흉년이어서, 작년에 107가마 나온 나락 수확량이 올해는 일흔 몇 가마만(40kg들이일 것이다) 나왔다며 이미 깊숙이 패인 주름살에 한숨을 더 한다. 나는 나락 수확량에 대한 것은 잘 모르나, 어쨌든 작년보다 30%정도 덜 나왔으니 흉년은 맞겠다 싶고, 덧붙이자면 쌀의 재고량이 넘쳐 수확량도 문제려니와 판매가가 형편없음을 어느 정도 인지하고 있는지라 조금 농촌이며 쌀값 등에 대한 배려는 거의 없는 듯한 정부 당국자들을 씹으면서 맞장구를 쳐주었다.
감산 객은 보조를 맞추고, 촌로는 나락을 덮으며 이러니저러니 이야기배가 조금 맞아 들어가니, 감판 집 대머리는 자기의 조카인데 “신씨는 독혀!!”라며 은근히 조카의 처(질부)를 겨누는 듯한 언사를 한다. 왜 그러시냐니까. 또다시 “신가는 독혀!”라며 허리를 펴며 먼 산을 바라보는 눈빛이며 몸짓이 힘겹다. 영감님은 올해 칠십 몇을 먹었는데, 몇 년 전에 할머니는 여의고 혼자서 얼마간의 농사일을 하면서 살아오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바로 이웃한 조카며느리(질부) 마음씀이 가난하여, 반찬 한 그릇 갖다주지 않고 산다는 것이다. 그 노인네 표현으로는 “늙은이 혼자 먹는 것이 얼마나 된다고, 한 그릇이면 될 것을, 바로 옆에 혼자 살고 있는 늙은 작은 애비 반찬 한 종지 갖다 주지 않는다고”, “신씨 독혀!!!”를 연신 내뱉는다. 듣기가 미안하여 조카의 잘 못 아니냐고 대꾸해보니, “남자들이야 다 여자 따라 가는 게지”라며 쓴웃음을 짓는다.
70대 중반의 홀아비이자 홀할아비의 독백이며 하소연을 듣자하니, 희미한 기억 속으로는 후덕하고 깔끔했던 것으로 생각나는 감집 마나님의 행실이 안타깝고, 낚시질에 서원 고치면 군청이랑 연결하여 한탕 해먹으려는 대머리 심보가 화가 나서 견딜 수가 없고, 작년 이맘 때 인자하게 도리깨질을 가르쳐 주던 영감님의 신세가 안쓰럽기 짝이 없다.
흔히들 삭막한 도회에 비해 농촌에는 인심이 좋다고 한다. 농촌도 사회이니 어찌 인심이 넘쳐나기만 하겠는가마는, 사람의 도리가 이렇게 무너져도 되는 걸까? 노인네와 조카(질부), 숙질간 어떤 사연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바로 이웃에 살면서도 숙질간에 반찬 한 그릇 나눠먹지 못하고 살면서, 집안에는 온간 기화요초를 가꾸고, 낚시 풍류를 즐기면 뭐하는가?
“이 인정머리라고는 없는 이 대머리 놈! 내년에도 연결해보자고?, 어림없다 이놈아!, 너 나한테는 감 다 팔아먹었다!” 속으로 씨부렁거리며 노인네의 나락 덮기를 한 손 거든 후 발걸음을 되돌렸으나 저게 나의 부모며 아재뻘 시골 영감 또는 망구씨들 신세이지 싶어 영 기분이 개운치 않다.
지금으로부터 20여 년 전, 나의 모친도 70대에 들어서면서부터 8년 전 돌아가시기까지 주로 혼자 시골에서 사시다가 돌아가셨다. 자식들이 간간이 들렀기로서니 어찌 외롭고 힘든 시절이 없었으리. 냇가 하나 건너 지금은 문헌서원 영감님과 비슷한 연배가 된 장조카와 거의 평생을 같이 하였고, 사촌형님의 작은 어매 대접이 남달랐음을 새삼 고맙게 여기지 않을 수 없다.
나는 도무지 사람은 무엇으로, 무엇을 위하여 사는지 모르겠다. 대부분이 농부의 자식으로 태어나, 시절유행인지 객지로 나와 말 탄 사람처럼 앞뒤를 살피지 못하고 앞으로만, 앞으로만 달려 나가고 있다. 빈한하다 하더라도, 등 따스운 방에서 자며, 허연 쌀밥으로 배를 채운다. 가끔 돈육이며 한육, 갈치며 생선회라도 맛보면서...,
희미한 기억을 더듬어보건대 불과 삼십 수년 전만 하더라도, 배는 곯지 않았을지언정 끼니마다 허연 이밥은 부잣집 밥상에서나 있을 법 했고, 한육, 돈육은 명절, 잔칫날에나 맛보는 별미였었다. 그래도 인정은 넘쳐, 부족한 음식이나마 항상 집안이며 주위 어르신을 먼저 대접했었다. 그런데 어찌하여 숙질사이에 반찬 한 그릇 나눠먹을 수 없도록 인심이 사나워졌을까? 이집 저집 모두 저기 문헌서원에 봉사해 마지않는 명문 한산 이씨며 삼한갑족의 후손일진대..., 저 영감님을 비롯하여 우리 부모 세대들은 못 먹고 못 입으면서도 정력의 90% 이상은 자식들과 그들의 부모에게 바쳤을 것이다. 그런데 이제 늙은 그들에 대한 대접은? 사회적인 대접은 언급조차 하기 싫고, 90% 바친 자제들에게도 대접을 못 받는다. 어떤 미친놈들은 사십 이상 쳐 먹었어도 70객 노인들의 고래심줄까지 파먹으려 든다. 나도 그런 놈의 아류였겠고 아니 본류였을 수 있다. 서산으로 함몰하는 햇빛은 빨랫줄처럼 날아와 깊게 패인 영감님의 주름살에 깊이를 더하고, 감산 나그네의 마음은 무겁기만 하다.
2010. 12. 3. 박종헌
첫댓글 그 머시냐.....긍게그것이 한삼소곡주가 유명허다던 멍청도땅 양반님네 동리아니던가.....유명세뒤에 남모를 사연이 하기사 하두많겟지만서두......쬠 거시기허네그려~~~그나저나 겁나게 기다렸는데 이제사 올렸는감....절필헌줄알고서 많이서운 혔네....소곡주는 잘있겄제 젯밥에 관심하는 주태백이를 이해허게나......술명은 내가지을려네........일명<지기를위한 "지게미술"어떤가> 이쯤돼면 혼자목에 다 넘기진 못할걸세~~~~~~~ㅎㅎㅎ
ㅎㅎㅎ 재밌게 잘 읽었네. 그 술이 유명한 "앉은뱅이 술"-맛이 순해서 한잔 두잔 마시다 보면 그 자리에 주져앉고 만다는 술- 아닌가?!. 글쓰는 솜씨가 시골스럽고 정감이 있는 것이 충남 보령 출신으로 "관촌수필", "매월당 김시습"등을 쓰고 몇년 전에 타계하신 이문구 선생 스타일 이구먼 그려. 다음 장이 기대되는 구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