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도) Phnom Penh Post 2010-12-9 (번역) 크메르의 세계
[르뽀] 미스테리 : 잊혀진 캄보디아 왕족 전사의 최후
Cambodia’s prince of myste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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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SPENCER DALE 촬영) 노로돔 짠따라잉서이 왕자의 모습. |
기사작성 : Sebastian Strangio
제1부
민찐(Minh Chin) 씨는 35년 전 지직거리는 전화기를 붙잡고 남편과 마지막으로 나눈 대화의 순간을 회고했다. 크메르루즈(Khmer Rouge) 반군이 프놈펜을 함락시키기 바로 전날 밤, 그녀는 프놈펜에 머물고 있었고, 남편은 근교에 머물면서 공산반군에 대한 마지막 저항을 준비하고 있었다.
"남편은 우리가 정권을 잃게 됐다는 점과 조국의 평화가 찾아오면 다시 만나자는 이야길 하기 위해 전화를 건 것이었지요. 그이는 내게 크메르루즈 군인들이 시키는 일이면 무엇이든 복종하라고 일러주었어요." |
그녀의 회상이다. 결혼한지 25년이 되어 남편이 죽음의 직전에 해준 말로, 그것이 그녀가 남편의 목소리를 마지막으로 때이다.
"저는 그가 어떻게 죽었는지 모릅니다. 어디서 죽었는지도, 언제 죽었는지도 말이예요." |
그녀는 눈물을 훔쳤다.
당차면서도 노쇄한 노파인 민찐 씨는 이제 77세가 되었다. 그녀는 남편이 아직도 살아있다는 소문이나, 그가 캄보디아의 어느 곳에선가 조용히 살고 있다는 소문을 종종 듣는다고 말했다. 그 때문에 무의미한줄 알면서도, 그녀는 몇번인가 프놈펜을 방문했다. 하지만 그녀가 발견한 것은 전혀 생면부지의 사람이거나, 혹은 남편의 이름을 참칭하는 알 수 없는 사람들 뿐이었다. 그녀에 따르면, 그들은 대부분 남편의 이름을 사칭하여 "사람들을 기만하는 이들"이었다. 그들은 노로돔 짠따라잉서이(Norodom Chantaraingsey) 왕자의 이름을 사칭하여, 지역 주민들을 여전히 통솔하고 있는 지역 유지나 소문의 유포자들이었던 것이다.
이제 서구세계에서 잊혀져버린 인물인 노로돔 짠따라잉서이 왕자의 이름이, 캄보디아 시골지역에서는 아직도 여전히 신화적 힘을 갖고 있다. 캄보디아 독립운동의 주창자 중 한사람이었던 그는, 캄보디아 왕족들 중에서 론 놀(Lon Nol) 장군이 이끌던 "크메르 공화국"(Khmer Republic) 정권에 참여했던 극소수의 인물에 속했다. 1970년 노로돔 시하누크(Norodom Sihanouk) 공을 실각시킨 쿠테타를 통해 출범한 "크메르 공화국"은 1975년까지 캄보디아를 통치했다. 시하누크 공보다 연하의 숙부였던 짠따라잉서이 왕자는 쿠테타 직후 껌뽕 스쁘으(Kampong Speu) 도의 "제13여단" 여단장 겸 군구사령관을 맡았다.
1972년부터 론놀 정권이 붕괴할 때까지, 짠따라잉서이 왕자는 육군 준장으로서 사실상 자율권을 가진 자신의 영지를 통치했다. 그는 매우 재능있는 지휘관이었고, 지역 농민들로부터 존경받고 외국인 업저버들로부터는 칭송을 받았다. 심지어 크메르루즈가 정권을 장악한 뒤에도, 이미 처형당할 운명이었던 그는 끝까지 저항을 포기하지 않았던 소수의 세력에 포함되었다.
우리가 인터뷰를 하러 갔을 때, 민찐 씨는 곤색 바탕에 흰색 꽃 문양이 수놓인 드레스를 입고, 등을 꼿꼿이 세운 채 앉아 있었다. 우리는 그녀의 고향인 뜨라빠잉 몬(Trapaing Mon) 마을에 있는 수풀이 무성한 사찰(파고다)인 "왓 짠속 완나람"(Wat Chan Sok Vannaram)의 가파란 목조 지붕 아래에서 만났다. 그녀는 희미하나마 고귀한 품격을 자아내고 있었다. 그러한 분위기는 그녀가 과거 상류층 출신이어서 그런 것인지, 아니면 주변 분위기가 너무도 시골풍이어서 대조적으로 보였던 것인지는 확인할 길이 없다. 테이블 위에는 1960년대에 촬영된 시하누크 공의 사진이 빛바랜 상태로 나무걸이에 걸려 있었다.
민찐 씨는 과거 왕족의 아내로서, 시하누크 공이 캄보디아로 귀국하여 1993년 다시금 국왕에 복귀한 이후, 몇 차례 국왕을 방문하여 만났다고 말했다. 하지만 단지 혼인관계를 통해 왕실과 맺었던 인연은 점차로 희미해졌고, 이제는 그녀가 경험한 과거의 고통들로만 회고될 뿐이다. 그녀는 1994년부터 고향의 이 사찰로 노년의 은퇴생활을 선택했다. 뜨라빠잉 몬의 이 사찰에서, 그녀는 "크메르 전통의상"만을 걸친 채, 지난 15년간 승려들의 식사를 요리하고 기도를 하는 생활을 해왔다.
이제 그녀가 소유한 남편에 대한 마지막 기념품은 1970년대에 촬영된 한 장의 사진 뿐이다. 이 사진은 검은 테의 사진틀에 보관된 시하누크 공의 사진 옆에 금박 사진틀 안에 끼워져 걸려 있었다. 사진 속의 짠따라잉서이 왕자는 붉은 베레모와 군복을 착용하고 선글라스를 낀 채, 앙코르와트(Angkor Wat) 앞쪽의 넓다란 석상 앞에 서 있는 모습이었다.
"파고다에서 생활하는 것만으로도 저는 충분합니다. 제가 왕족으로서 생활했던 과거를 전혀 그리워하지도 않지요. 모든 걸 잊고 싶어서예요" |
대부분의 자료들은 짠따라잉서이 왕자가 1975년 4월 크메르루즈가 정권을 잡은 직후 어느 시점에서 살해당했다고 보고 있지만, 아직도 그가 생존해 있다는 소문은 끊이지 않고 있다. 태국의 영자지 <방콕포스트>(Bangkok Post)는, 왕자가 2천명의 병력을 이끌고 1975년 6월까지도 공산군대에 대한 저항을 계속했었다고 보도하기도 했다. 벨기에의 언론인 자크스 베캐르트(Jacques Bekaert)는, 껌뽕 솜(Kampong Som)의 정유소 폭파사건을 짠따라잉서이 왕자 휘하의 병력이 시도한 일이라면, 왕자의 병력이 1977년까지도 저항하고 있었을 가능성이 있다고 적었다.
"캄보디아 기록보존센터"(DC-Cam)의 요욱 창(Youk Chhang) 사무국장은, 짠따라잉서이 왕자가 왕족 출신이란 점과 주민들에게 인기가 있었던 점 때문에 신비적 분위기가 계속해서 재생산되고 있는 것이라 말했다. 그리고 이런 점에다 당시 왕자의 부하들 중 생존자들이 소문을 증폭시키면서 강화되었다고 한다. 짠따라잉서이 왕자의 "제13여단"은 당시에 표효하는 호랑이를 부대마크로 사용했고, 흰색 스카프를 둘러 다른 부대들과 차별성을 지니고 있었다.
요욱 창 사무국장은, 짠따라잉서이 왕자와 그 휘하의 병력이 "민주 캄푸치아"(Democratic Kampuchea: 크메르루즈 정권의 국명)와 무관한 사건들에 대한 통제 책임이 있었다고도 말했다. 그러한 행위에는 "짜오 쁘레이"(jao prey)라 하여 크메르루즈 정권의 영향력이 미치지 않던 정글 지역 거주자들이 저질렀을 법한 소소한 절도나 파괴활동도 포함된다.
1976년 경, 시엠립(Siem Reap)에는 비행기 1대가 나타났다. 당시 크메르루즈 정권의 전통문을 보면, 이 의문의 항공기 배후에는 짠따라잉서이 왕자가 있을 것이라 기록됐다. 요욱 창 사무국장은 "삽시간에 왕자와 관련된 소문이 확산됐다. 그가 그 비행기를 탔다는 것이다. [이후] 그는 거의 신화적인 존재로 변했다"고 말했다.
짠따라잉서이 왕자의 죽음에 관한 설은 실로 다양하다. <캄보디아 역사사전>(The Historical Dictionary of Cambodia)에서는, 왕자가 1975년 4월 이후에 밧덤벙(Battambang, 바탐방)에 있던 아내를 구출을 하려다 죽임을 당했다고 적고 있다. 그런가 하면, 미국에 본부를 둔 "크메르 불교센터"(Buddhist Khmer Centre) 소속의 하스 사워은(Hass Savoeun)은, 왕자와 그의 부하들이 껌뽕 스쁘으에 있던 진지가 포위당하자, 포위망을 뚫고 태국으로 탈출하는 과정에서 전사했다고 설명했다.
요욱 창 사무국장은 "왕자의 죽음을 증명할만한 어떠한 확증도 없는 상태이다. 그리고 그가 생존해서 프놈펜으로 귀환했다는 증거 또한 없다. 크메르루즈 정권기 당시의 자료들을 보면, 어떠한 확증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호주 출신의 탐험가 스펜서 대일(Spencer Dale)은 "캄보디아 내전" 중에 상당한 기간을 캄보디아에서 보냈다. 그가 보여주는 짠따라잉서이 왕자에 관한 일화들은 특별한 점이 있다. 1970년대 초반, 젊은 대일은 왕자를 만나 친구가 되었다. 당시 왕자는 수백 명의 순찰 및 전투병력을 대동했다고 한다. 대일은 크메르루즈가 프놈펜 함락을 위해 마지막 작전을 준비하던 1975년 3월에야 캄보디아를 떠났다. 그 역시 짠따라잉서이 왕자의 부인과 마찬가지로, 지난 수십년 간에 발생한 왕자에 대해 현혹시키는 이야기들에 대해서 의문을 표시했다.
이제 65세가 된 스펜서 대일은 작년에 캄보디아로 돌아와, 짠따라잉서이 왕자의 궤적을 찾는 작업에 착수했다. 그는 수십 명의 전직 크메르루즈 병사들 및 론놀 정권 병사들과 대화를 해나가면서, 왕자의 최후에 대한 궤적을 찾아내려 한다고 주장했다.
어찌보면 대일은 노로돔 짠따라잉서이 왕자와는 어울릴 법하지 않은 인물이다. 브리즈번(Brisbane) 교외에서 출생한 그는 당시 베트남 전쟁이 고조되는 것을 감지하고, 군대에 의한 징집을 피하기 위해 3년간 "민방위 예비군"(Citizen Military Force)에 지원했던 인물이다. 1970년 말에 3년간의 복무를 마친 그는, 전쟁을 좀더 가까이서 지켜보기 위해, "시언 플린(Sean Flynn)의 족적을 찾아" 신형 촬영장비를 소지한 채 캄보디아로 여행을 떠났다. 호주의 유명배우인 에롤 플린(Errol Flynn)의 아들이자 언론인이었던 시언 플린은, 또다른 언론인인 대이나 스톤(Dana Stone)과 함께 1970년 4월에 캄보디아에서 실종되어 국제 언론들의 헤드라인을 장식했다.
"나는 캄보디아로 가서 시언 플린이 무얼 했는지 알아보기로 결정했다. 하지만 군대에 들어갈 생각은 없었다...... 군인이 되고 싶진 않았다." |
스펜서 대일이 짠따라잉서이 왕자와 처음 만난 것은 바로 그 이듬해(1971)였다. 대일은 프놈펜의 한 호텔 바에 앉아 "크메르 국군"(FANK) 소속의 한 장교와 만났을 때를 회상했다. 대일이 자신을 소개하자, 그 장교는 껌뽕 스쁘으에 있는 한 파고다로 그를 초청하여 도열해있는 소년병들을 촬영해달라고 했다. 이 사찰은 짠따라잉서이 왕자의 본부가 있던 곳에 가까운 곳으로, 크메르루즈 군대에 대한 방어선 역할을 하고 있었다.
대일은 "그들(FANK 병사들)은 나를 미국인 자문관으로 여겼다"고 말했다. 그가 사찰을 방문했을 때, FANK 병사들 2명이 대일을 가로막고 안전한 곳으로 이동시키려 했다.
"한명은 M60 기관총을 들고 수백 발의 실탄을 몸통에 둘렀는데, 꼭 멕시코 산적 같았다. 두 사람은 각기 총구를 내 목의 좌우에 들이댔다. 그리고 말라깽이 장교 한사람이 달려오더니 '안심해라. 우리는 당신의 친구들이다'라고 하더군." |
당황해있던 대일에게, 그들은 프랑스 요리와 빵, 얇게 저민 냉동육, 와인과 파테(pâté)가 든 등나무 바구니를 내놓았다. 대일은 다음날 아침 근처에 있던 군부대로 안내되어, 이 기상천외한 환영식을 명령했던 사내를 만나게 되었다. 대일은 첫 만남부터 짠따라잉서이 왕자에게 충격을 받았다.
"믿을 수 없는 화합적 결합이었다고 밖에는 할 수 없다. 우리는 즉시로 끈끈한 관계가 되었고, 그러한 관계는 내가 그를 마지막으로 보았던 약 5년 후까지도 지속됐다." |
두 사람 사이가 가까와지면서, 대일은 짠따라잉서이 왕자의 사교계에서 정식 멤버가 되었다. 그는 왕자 및 그의 부인과 함께 만찬과 파티에 참석하기도 했고, 정부의 공식행사에 초청받기도 했다. 짠따라잉서이 왕자 휘하의 소대장 중 한사람은 대일에게 프놈펜에 있던 자신의 빌라에 머물게 하여, 소대장 가족들과 함께 기거하며 하숙을 할 수 있도록 했다.
대일은 특히 "제13여단" 소속 병력을 비롯하여 FANK 부대들을 따라서 수십 차례 종군하면서, 크메르공화국 군대와 크메르루즈 공산반군 사이의 격렬했던 전투들을 목격할 수도 있었다. 야전에서 촬영된 사진을 보면, 젊은 대일이 군용 자켓과 철모를 착용하고 무장까지 한 채, FANK 병사들에게 둘러싸여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대일은 캄보디아 내전기간 동안, 수천 장에 이르는 사진들과 3시간 이상 분량의 영화필름을 통해 자신이 체험한 바를 기록했다. 특히 그의 8 mm 컬러 영화는 크메르공화국 당시의 프놈펜의 일상적 모습이 생생히 담겨있는 귀중한 기록물이다. 초창기에 촬영된 한 필름을 보면, 프놈펜 시내는 론놀 정권의 선전용 포스터들로 도배되어 있다. 이 포스터들에는 붉은 별이 그려진 검은 삿갓을 쓴 베트남 공산주의자들이, 크메르(캄보디아) 농민들의 식량을 수탈하고 불교의 파고다를 파괴하는 모습이 담겨있다.
이 필름에는 내전 중의 혼돈적인 전투장면도 포착되어 있다. 1973년의 한 공격 장면은 FANK 소속의 한 대령이 타고있던 병력수송용 장갑차에서 촬영된 것이다. 당시 대일은 그 대령과 함께 점심식사를 하면서 코냑 한잔 씩을 마신 직후였다. 이 필름은 비좁은 아스팔트 도로를 내려가며 전진하던 장갑차 위에서, 그 대령이 머리에 총을 맞는 장면이 그대로 담겨있다. 이 장면에서부터 영화는 기분나쁜 침묵 속에서 진행된다. 대령의 부하들이 그의 철모를 벗기자 유혈이 낭자해진다. 장갑차가 멈춰서고 부하들이 그를 옮긴다. 대령의 손목에서는 금팔찌가 흐늘거리고, 곧이어 들것에 실려간다. 이후 영화는 장갑차에서 발견된 피묻은 코냑 잔을 비춰준다. 이 영화는 그러한 유혈낭자한 불쾌감과 함께 내전의 모습을 생생하게 담고 있다.
대일은 자신의 필름들이 언젠가는 캄보디아 내전에 관한 다큐멘타리로서 주목받게 되길 기대하면서, 지난 수년 간을 기다렸다고 밝혔다.
"이것은 충분히 한편의 영화가 될 수 있다. 아직 모를 뿐이지. [그러한 참상은] 실제로 일어났던 일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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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SPENCER DALE 소장) 식탁에서 스펜서 대일(좌)과 대화를 나누고 있는 짠따라잉서이 왕자(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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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SPENCER DALE 소장) 대일(중앙)은 짠따라잉서이 왕자(좌)를 따라 수십 차례 전장을 누볐고, 얼마 안 있어 캄보디아 내전은 곧 그의 전쟁이 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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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SPENCER DALE 소장) 짠따라잉서이 왕자(좌)와 대일(우). |
제2부
노로돔 짠따라잉서이 왕자는 1924년 프놈펜에서 노로돔 짠탈레카(Norodom Chanthalekha) 왕자의 아들로서 출생했고, 생애의 초창기부터 기존 관념을 파괴하는 개성을 보여준 인물이었다.
짠따라잉서이 왕자는 1940년대에 프랑스 세력 축출을 목적으로 일본이 지원했던 군사조직인 "그린셔츠 군"(green shirt militia)에 가담했고, 이후에는 태국에 근거지를 둔 무장 독립투쟁 조직 "크메르 이싸락"(Khmer Issarak)에 합류했다. 그는 1951년 무렵에 훗날 자신의 작전 반경이 될 껌뽕 스쁘으의 농촌지역에서 근거지를 확보했고, 역사학자 벤 키어난(Ben Kiernan)이 "매판적 군벌"(comprador warlord)이라 표현했던 형태로 발전하면서, 500명 규모의 무장병력을 휘하에 두고 유지시켰다.
이 시기의 짠따라잉서이 왕자의 행적에 대해서는 많은 것이 명확하지 않은 상태이다. 시하누크 공의 공식적인 전기 작가인 훌리오 헬드레스(Julio A. Jeldres)는, 왕실 기록을 보면 짠따라잉서이 왕자가 어느 시점에선가 시소왓 모니웡(Sisowath Monivong) 국왕의 딸이었던 시소왓 사만워라퐁(Sisowath Samanvoraphong) 공주와 결혼한 것으로 되어 있다고 한다. 헬드레스는 왕자의 부인이라고 주장하는 민찐 씨가 왕실의 기록에는 등장하지 않는다고 했다.
"왕자나 귀족들이 첩을 두는 것은 일상적인 일이었고, 그런 경우엔 왕실 족보에 반드시 기록되지도 않았다. 따라서 기록에서 누락됐을 수도 있다." |
하지만 헬드레스는 캄보디아에서는 왕족이라고 거짓으로 주장하거나 왕족과 결혼했었다고 주장하는 사례들이 많이 있다는 점도 지적하면서, 짠따라잉서이 왕자와 결혼했었다고 주장하는 민찐 씨에 대해서도 의문을 표시했다. 그는 사만워라퐁 공주의 생년월일에 관한 기록이 존재하지 않는다면서, 난민들의 증언에 따르면 짠따라잉서이 왕자와 사만워라퐁 공주가 크메르루즈에 대항하여 최후까지 저항했던 밧덤벙의 산 속에서 함께 사망한 것으로 전한다고 말했다.
노로돔 시하모니(Norodom Sihamoni) 국왕의 자문위원인 시소왓 토미쪼(Sisowath Thomico) 왕자는, 짠따라잉서이 왕자가 비밀리에 두번째 부인을 두었다 할지라도 "놀랄만한 일은 아니다"고 말했다. 토미쪼 왕자는 "그 분은 언제나 전사처럼 행동했고, 실제로도 그러했다. 그는 왕실과는 거리를 두고 생활해서, 그 분에 대한 진실을 아는 사람들은 거의 없다"고 말했다. 토미쪼 왕자는 과거 캄보디아에서는 왕족과 평민을 막론하고 일부다처제가 일상적이었다면서, 1976년에 크메르루즈 헌법이 제정되기 전까지는 불법도 아니었다고 말했다.
스펜서 대일은 민찐 씨에 대해 "짠따라잉서이 부인"으로 알고 있었는데, 그는 그녀를 왕자의 부대에서 "딱 한번 만났다"면서, 1970년대 초반에 한 만찬에서 두 부부가 함께 촬영한 사진들을 내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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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SEBASTIAN STRANGIO 촬영) 기자는 민찐 씨에게 짠따라잉서이 왕자와 스펜서 대일의 사진을 전해주었다. 사진들을 보고 있는 민찐 씨의 모습. |
민찐 씨는 1933년 껌뽕 스쁘으의 한 중산층 가문에서 태어났다. 그녀는 자신이 15세 되던 해에 "크메르 이싸락"의 선전활동을 위해 고향 마을에 온 짠따라잉서이 왕자와 결혼했다고 주장했다. 그녀는 처음에 왕자가 결혼했을 것이라 생각하고 마음내켜하지 않았다고 한다. 하지만 왕자는 나중에 자신이 결혼하지 않았다고 했다고 한다.
민찐 씨는 1950년대 초반에 많은 시간을 이싸락 부대들 속에서 보내면서, 무기를 다루는 법과 말타기를 익혔다. 1953년 11월 캄보디아가 프랑스로부터 독립을 쟁취하자, 짠따라잉서이 왕자는 시하누크 국왕 편에 서게 되었다. 그리하여 부부는 게릴라 생활의 어려움을 청산하고 보다 안락한 프놈펜 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다.
짠따라잉서이 왕자와 시하누크 공은 어린 아기를 닮은 외모와 심성좋은 천진난만한 웃음을 공유했지만, 두 사람의 정치적 관계는 극과 극을 오갔다. 짠따라잉서이 왕자는 1957년 프랑스의 사관학교에서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직후, 역모 죄로 고발되어 교도소에 수감됐다. 왕자는 일년 동안 수감되어 있으면서 일련의 시(詩)들을 창작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왕자는 석방된 후 시하누크 정부와 서서히 관계를 회복해갔다. 그는 "프놈펜 카지노"의 사장으로 임명되어 막대한 부를 축적했다.
민찐 씨에 따르면, 1970년 3월 론 놀 장군이 시하누크 공을 실각시킨 후, 짠따라잉서이 왕자는 공산반군과 싸울 수 있도록 여단장 자리를 제안받았고, 그 일에 매진하여 오합지졸의 크메르공화국 내에서 하나의 경향을 주도하는 능력을 보여줬다고 한다. 왕자가 껌뽕 스쁘으에서 "13여단"을 거의 완성시킬 무렵에는, 많은 병력이 과거 1950년대에 "크메르 이싸락" 투쟁 당시 거느렸던 부하들의 가족 출신들이 모여들었다고 한다. "제13여단"은 왕자가 태어난 해를 기념하여 포효하는 호랑이를 부대마크로 채택했다고 한다.
훌리오 헬드레스에 따르면, 1973-1974년 사이의 미국 외교관들의 보고서가 짠따라잉서이 왕자를 "크메르 공화국" 장교들 중 "가장 유능한" 장교로 표현했다고 한다. 또한 론 놀 대통령은 그를 잠재적인 경쟁자로 여겨 두려움을 느끼고 있었고, 따라서 왕자의 왕족칭호를 강압적으로 박탈하기도 했었다고 한다.
짠따라잉서이 왕자가 지휘하는 "제13여단"은 1970년부터 공산반군들의 수중에 놓였던 "끼리롬 고원지대"(Kirirom plateau)를 1973년에 수복했다. 헬드레스에 따르면, FANK의 합참의장(총사령관) 소테나 페르난데스(Sosthene Fernandez) 장군은 짠따라잉서이 왕자를 대단히 신뢰했고, 1974년 9월 초에 크메르루즈 반군 지도자들과 협상을 할 수 있는 전권을 부여하기도 했다고 한다.
1973년 4월, <뉴욕타임스>(New York Times)는 짠따라잉서이 왕자가 "제4번 국도"의 껌뽕 스쁘으 구간을 장악한 "사실상 독립적인 군벌"이라고 보도했다. 짠따라잉서이 왕자는 "제13여단"의 지휘관으로서, 200평방 마일에 달하는 면적을 통제하고 있었다. 여기에는 60곳의 마을들과 10만명 정도의 인구가 포함됐다.
<뉴욕타임스>의 특파원이었던 시드니 쉔버그(Sydney Schanberg)는, 짠따라잉서이 왕자가 외국의 외교관들과 언론인들을 위해 기획한 답사활동을 "공보전문가들의 모델"이 될만한 프로그램으로 묘사했다. 이러한 행사는 종종 야전에서 만취하는 오찬으로 끝맺음을 하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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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SPENCER DALE 촬영) 병영에서 진행된 한 파티에서 짠따라잉서이 왕자가 마이크를 잡았다. |
짠따라잉서이 왕자가 언론인 겸 시인인 제임스 펜톤(James Fenton)과 만났던 것도 바로 그러한 행사 중 하나였을 것이다. 펜톤은 훗날 자신의 시 <전사자들>(Dead Soldiers)에서 왕자를 불멸의 신화로 만들어주었다. 이 시의 제목인 "전사자들"이란 야전에서 펼쳐진 만찬에서, 테이블 밑으로 쌓여가던 술병들을 풍자한 것이다.
그들은 잘 살고 있나니, 미친 노로돔 왕가여,
그들은 스타일(노는 법)을 아는도다.
술과 소다 [병들]이 대바구니 속으로 도달하고,
얼음 조각들은 라피아 야자와 하나되어,
부관들의 팔자수염으로부터 떨어지는도다. |
They lived well, the mad Norodoms,
they had style. The brandy and the soda arrived in crates. Bricks of ice, tied around with raffia, Dripped from the orderlies’ handlebars |
펜톤에게 있어서, 혈족인 시하누크에 대항해 싸우고 있던 왕족의 한사람인 짠따라잉서이 왕자는 캄보디아 내전이 가진 동족상잔의 본성을 구체화시킨 존재로 보였다. 결국 이 내전은 여기에 참여했던 대부분의 왕자들과 혁명가들을 소진시켜 버렸다. 폴 포트(Pol Pot)의 큰 아우였던 살롯 차이(Saloth Chhay)도 당시 짠따라잉서이 왕자의 부관으로 근무하여, 이 전쟁이 가진 동족상잔적 관계를 더욱 더 형상화시키고 있었던 것이다.
"크메르 공화국"에 대한 압박이 가중되고, 짠따라잉서이 왕자에 대한 정권 내부 권력브로커들의 압력이 강화되자, 왕자는 자신의 사재를 털어 공화국 내 다른 장군들로부터 미제 무기들을 구매했다. 스펜서 대일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말기에 이르러, 그는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팔았다. 그는 현금을 다발로 담아서 다른 지휘관들에게 가서 무기와 실탄을 구입했다. 그리하여 그의 부하들은 최상의 장비들로 무장했다. 왕자는 바로 그런 사람이었다." |
대일이 짠따라잉서이 왕자와 함께 더 많은 시간을 전투의 엄중함을 경험하면서, 그가 지닌 관찰자로서의 입장과 개인적 개입 사이의 경계가 점차로 흐릿해져 갔다. 눈앞에서 펼쳐지는 전쟁의 참혹함과 "무고한 사람들이 폭사하는 것"을 보면서, 그는 자신이 짠따라잉서이 왕자의 부하로 변해간다는 것을 느꼈고,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이든 거들고 싶었다고 말했다. 그리하여 대일도 순회활동을 하기 전에는 스스로 무장을 하게 되었다. 상황이 악화될 경우 스스로를 방어하기 위한 것이었다. 대일은 다행히도 "M79 유탄발사기"에서 날아온 유탄에 소소한 부상을 2차례 당한 것 말고는 중상을 입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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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SPENCER DALE 소장) 캄보디아에 머물던 시기의 스펜서 대일의 모습. |
1971년 말, 미국 정부는 대일이 캄보디아 전쟁에 개입됐다는 것을 눈치챘다. 대일은 곧 "미국 중앙정보부"(CIA)에 정보를 건네주기 시작했다. 대일에 따르면, 하와이의 호놀룰루(Honolulu)에서는 정례적인 브리핑이 있었고, CIA 요원들은 "크메르 공화국"의 스파이성 음모와 관련된 모든 정보들에 굶주려 있었다고 한다.
대일이 미국과 관련을 맺으면서, 그는 곧 정치적 개입을 점점 더 자기 자신의 일로 만드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대일의 주장에 따르면, 그는 1973년 8월 미 공군 소속의 대사관 무관 로버트 크림(Robert Krim)의 승인을 받은 한 계획을 진행하기 위해, 무혈 쿠테타를 통해 론놀 장군을 축출하는 문제를 놓고 한밤중에 짠따라잉서이 왕자를 만났다고 한다. 대일의 회고에 따르면, "수라마릿 대로"(Suramarit Boulevard)에 있는 짠따라잉서이 왕자의 사망한 부친의 저택에서 왕자가 시트로엥 승용차에서 내리자, 부관이 얼음에 적신 오드콜로뉴(Cologne) 향의 물수건을 건넸다고 한다.
대일에 따르면, 그 계획은 당시 중국에 머물면서 공산반군의 명목 상의 수반 역할을 하고 있던 노로돔 시하누크 공을 국내로 귀국토록 하는 것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시하누크 공이 절대로 정치에는 개입하지 못하도록 하는 방안이었다. 당시 짠따라잉서이 왕자 역시 껌뽕 스쁘으 지역의 크메르루즈 소속 지휘관들 몇몇은 500만~1,000만 달러 정도의 뇌물을 정부 측에 "건넬" 의사가 있었음을 확신하고 있었다고 한다. 대일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는 전쟁의 전체적 구도를 변화시키길 바랬다. 그것만이 대량살육을 막기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방책이었다. 그리고 만일 미국이 이러한 생각을 적절하게 보고 빛을 발견하게 된다면, 유혈의 혼란은 피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아무도 모르는 일이다. 하지만 그 기회는 선택될 가망이 없는 것이었다." |
당시 프놈펜주재 미국대사는 이 계획을 최종적으로 거부했다. 대일에 따르면, 미 대사관은 짠따라잉서이 왕자가 대중적 인기를 더욱 크게 누리게 될 경우, 미국의 통제권을 벗어날까봐 우려했다고 한다. 왕자와 동일하게 론놀 정권에서 준장 계급을 달고 있었던 디엔 델(Dien Del) 장군 역시 언급을 통해, 비록 짠따라잉서이 왕자에게 별다른 영향을 미치기 전의 수준에서 멈추긴 했지만, 당시 왕자가 론놀 장군을 실각시킬 비밀계획을 모의하고 있다는 분위기는 풍기고 있었음을 확인한 바 있다.
"크메르공화국"이 붕괴하기 4주 전, 이 연립정권적 공화국이 종말을 향한 고통에 시달리게 되자, 대일은 캄보디아에서 출발한 가장 마지막 상업용 항공편 중 하나에 몸을 싣고 이 나라를 떠났다. 그는, 자신이 CIA와 접촉하면서 짠따라잉서이 왕자를 위해 보다 은밀한 지원을 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짠따라잉서이 왕자는 "크메르공화국"이 나락으로 빠져가던 판세를 역전시킬 수도 있었던 극소수의 인물 중 한사람이었다는 것이다. 대일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그들(미국)이 짠따라잉서이 왕자를 취하도록 하기 위해, 내 모든 노력을 경주했다. 아마도 [이렇게 끝난 것이 내게는] 최상의 결말이었는지도 모른다. 만일 내가 그곳에 있었더라면, 다시 되돌아올 수 없었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
1975년 4월 17일 크메르루즈가 프놈펜을 함락시키자, 민찐 씨도 프놈펜에서 강제소개를 당하는 거대한 행렬에 동참하여, 밧덤벙으로 떠나는 선박에 몸을 실어야만 했다. 그녀에 따르면, 그보다 불과 몇시간 전에 그녀는 의붓아들을 학교에 보냈고, 검은 옷을 입은 크메르루즈 병력들이 도시로 쏟아져 들어오자, 더 이상 학교 안으로 들어가 볼 수 없었다고 한다. 이후 그녀는 자신의 의붓아들을 두번 다시 만나지 못했다고 한다.
밧덤벙으로 향하는 배 안에서도, 선박을 통제하던 크메르루즈 당원들은 승객 중 몇사람을 처형했고, 그녀는 구 정권의 장성의 부인이자 상류층 출신임을 숨기기 위해 노력했다고 한다. 그녀는 집안의 하녀로 일했던 여인의 이름을 사용하면서, 크메르루즈 정권기 동안 밧덤벙 도의 프놈 스록(Phnom Srok) 군에 위치한 집단농장에서 살아야만 했다. 그녀는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전쟁 이전의 과거를 숨기려는 노력을 통해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다.
"그들은 날마다 저를 감시했어요. 제 남편이 농부였다는 것을 믿지 못했던 것이죠." |
그녀는 이싸락 운동 시절 일상적으로 다뤘던 총기류에 대해서조차, 의심을 받을 것을 우려하여 그것을 만지는 것조차 무서워하는 척 하기도 했다고 한다.
1979년 초 크메르루즈 정권이 붕괴한 후, 민찐 씨는 껌뽕 스쁘으로 귀향하기 전까지 일년 동안 시엠립에서 살면서 남편과 친인척들의 흔적을 찾아보았다고 한다.
"친척들을 단 한사람도 만나지 못했습니다. 이웃집 사람이 전하기를, 내 어머니 및 가족들 모두를 크메르루즈 군인들이 죽였다고 하더군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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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SPENCER DALE 촬영) 1974년 말에 촬영된 짠따라잉서이 왕자의 모습. 마치 자신의 운명을 예감이라도 한듯 수심에 차 있다. |
스펜서 대일은 "크메르공화국" 붕괴 직후 짠따라잉서이 왕자가 태국 국경에 당도하여 저항군 기지를 건설하길 바라는 마음에서, 정보 루트를 통해 추가적인 무기 조달을 위해 노력했다고 한다. 미국에서는 당시 <쿠퍼-처치 개정법안>(Cooper-Church Amendment)에 따라 캄보디아와 라오스에 대한 미국의 군사원조가 금지되고 있었으므로, 모든 형태의 무기 조달이 비밀리에 진행됐고, 태국 국경지대로의 이송도 태국 정보당국의 감시를 받아야만 했다. "크메르공화국"이 붕괴되기 직전, 고가의 "스텐(Sten) 경기관총" 수만 정이 유럽에서 당도했다. 하지만 짠따라잉서이 왕자가 두번 다시 모습을 나타내지 못함으로써, 이러한 노력은 수포로 돌아갔다. 대일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는 수만 명의 사람들을 모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런 생각은 지나치게 낙관적인 것이었다. '제13여단'은 두번 다시 만들 수가 없었다." |
대일은, 자신이 지난 수년 간 전직 크메르루즈 장교들 및 전직 FANK 장교들과의 인터뷰를 포함하여, 지속적인 조사를 진행하고 있었다고 주장했다. 그 조사에 따르면, 짠따라잉서이 왕자는 "크메르공화국"이 항복하던 순간에 프놈펜 근교에 있었다고 한다. 당시 왕자는 껌뽕 스쁘으 읍내에서 56 km 정도 남쪽에 위치한 "도 깐쩌"(Doh Kanchor) 지역에 FANK의 마지막 기지를 설치하려 했지만, 정권이 워낙 삽시간에 붕괴하는 바람에 계획이 수포로 돌아갔다고 한다. 즉 "크메르공화국" 붕괴 직후에, 크메르루즈 군대가 그곳을 공격했는데, 미처 방어할 준비가 갖춰지지 못했었다고 한다. 그리하여 공격 첫날에 벌써 백기를 들어야 했고, 짠따라잉서이 왕자는 태국으로 도망쳐야만 했다고 한다.
대일은 당시 빠일른(Pailin, 파일린)에 주둔했던 전직 크메르루즈 병사의 목격담을 인용하면서, 왕자를 호위하던 장갑차의 연료가 바닥나면서, 왕자는 현재의 "끼리롬 국립공원"(Kirirom National Park)에서 체포됐다고 말했다. 짠따라잉서이 왕자를 봤다고 주장한 그 전직 병사는, 왕자를 허리 둘레의 끄로마(krama)만 남긴 채 모두 벗도록 했으며, 당시 크메르루즈의 남서부구역(Southwest Zone) 지휘관이었던 따 목(Ta Mok) 휘하의 병력에게 신병을 인도한 것으로 증언했다고 한다. 대일은 밝히기를, 왕자의 신병인도가 이뤄진 곳은 "국도 제4호선" 주변에 있는 낡은 탄환 공장으로, 이곳은 끼리롬 고원에서 불과 몇 킬로미터 남쪽에 위치해있다고 말했다. 그는 이 날이 1975년 4월 20일에서 22일 사이의 어느 날이었을 것이라 말했다.
"그(전직 병사)는 짠따라잉서이 왕자가 군인들에게 끌려가는 것을 보았다고 한다...... 그리고 이후의 일은 아무도 모르는 상태이다." |
대일은 왕자가 그후 어느 시점에서 함께 붙잡힌 부하들과 함께 살해됐을 것으로 추정했다. 대일은 짠따라잉서이 왕자를 한마디로 "낭만적인" 사람이었다고 요약했다. "크메르공화국" 마지막 며칠 동안 왕자가 치명적인 우유부단 속에 빠짐으로써, 부하들과 함께 "도 깐쩌"에서 명예로운 저항지를 구축할 기회를 상실했다는 것이다.
"그것은 마치 [카드가 아니라] 카드 케이스 같은 종말이었다. 단순하게 붕괴해버렸다. 그러지 말았어야 했는데......." |
대일에 따르면, 당시 마지막 항전지에는 왕자의 부하 군인들과 그 처자식들을 포함하여 4,500명 정도가 있었다고 한다. 크메르루즈는 그들을 체계적으로 도살했고, 단 18명 만이 살아남았다고 한다.
현재로서는 짠따라잉서이 왕자의 최후에 대해 어떠한 결론도 내릴 수 없는 상태이다. 대일이 말했던 핵심적인 목격자가 본지와의 인터뷰를 원치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대일은 자신이 밝힌 이야기들이 "정직한 진실"일 것이라 믿고 있었다. 대일은 왕자의 궤적을 쫓기 위해 수천 달러의 비용과 무수한 시간을 사용한 후, 이제 호주로 돌아갈 것이라고 한다. 아마도 그는 자신이 캄보디아에서 보냈던 수년 간의 이야기를 저술할 것으로 보인다.
"내가 사용해버린 1달러 1달러는 모두 가치가 있었다...... 그것은 내게 주어진 이 세월 내내 나에게 출몰했던 악몽에서 진실을 발견하고, 그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아주 잘 사용됐던 것이다. 그 모든 것이 지옥 같은 이야기가 될 것이다." |
내용 보완 : MAY TITTHAR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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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SPENCER DALE 촬영) 론놀 정권 시대의 선전 포스터. 베트남 공산주의자들의 만행을 홍보하기 위해, "크메르공화국"이 프놈펜 시가지에 부착했던 벽보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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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SPENCER DALE 소장) 1974년 무렵 "뽀쩬똥 공항"(Pochentong Airport) 근처에서 촬영된 스펜서 대일의 모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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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SPENCER DALE 촬영) 크메르공화국 국군 소속의 한 소년병이 로켓 발사기를 조준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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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SPENCER DALE 촬영) 한 어린이가 무비 카메라를 향해 권총을 겨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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