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의 느림보들
창평, 엿 고는 마을 풍경
“한정 없이 느린 것 같애도
딱딱 제 때를 못 맞추면 맛난 엿이 안 되지라”
사진-김태성(전라도 닷컴)
엿을 곤다.
엿 고느라 구들목부터 윗목까지 온방이 설설 끓는다.
아궁이에 장작을 가득 물고 부엌은 김으로 가득하다. 장작에서 솟는 매운 연기에 연신 눈물을 훔치며 시어머니는 엿기름에 삭아진 밥을 베자루에 넣고 짜낸다. 다시 가마솥에서 졸이는 시간이 길다.
긴 나무 주걱으로 잘 저어 주다가도 바가지로 얼마나 잘 고아 졌나 퍼 올려 본다.
구들목 장판이 누굴누굴 해지고 탄다 탄다 하게 졸여지도록 불 보랴 솥 보랴하며 시간을 보낸다.
엿을 만들기 위해서는 이렇게 달이고 졸이는 시간에 앞서 해야 하는 일도 만만치가 않다.
먼저 쌀을 잘 씻어서 물에 충분히 불려서 시루에 앉혀서 쪄야 한다. 더운 아랫목에 항아리를 놓고 항아리 속에 엿기름가루를 놓고 뜨거운 꼬두 밥을 그 위에 넣는다. 손 담그기에 알 맞는 정도의 더운물을 붓고 엿기름가루 남은 것은 축축하게 물을 뿌려놓았다가 저어서 덮어 둔다. 이것을 아홉시간을 잘 삭혀야 엿을 만드는 식혜가 된다.
전남 담양 창평 삼지내 마을의 어르신들의 겨울은 이 지역뿐만 아니라 전국적으로 이름이 난 엿들과 함께 추운 줄도 모르고 넘어간다.
쉬이 볼일은 세상 어디에도, 단 하나도 없단다.
직접 손으로 해야 할 일이 산 넘어 산이다.
엿기름 만드는 것이 그 까탈스런 일의 시작이다. 이 엿기름을 만들기 위해서는 지난해 가을 겉보리를 심어 놓아야 하니 일이 꼬리에 꼬리를 물어 돌고 도는 셈이다.
그렇게 저렇게 하다 보니 한 세월 다 갔단다.
조청이 된 것을 달이고 달여서 갱엿이 되면 시어머니 며느리가 마주하고, 이웃 댁들이 마주앉아 앞뒷질을 하고 시기는 일을 한다. 이 일에 가장 많은 공이 들어간다. 가마솥에 불 때서 만든 소나무 숯을 화로에다 넣고 그 위에 축축한 수건을 놓고 김을 잘 쏘여 넣어야 한다. 그래야 파삭파삭하고 맛난 엿이 된다.
삼지내 엿의 생명은 구멍이다. 이빨에 잘 붙지 않는 엿이 최고다. 이런 맛을 내기 위해서는 엿의 온도를 잘 맞춰서 문을 열어 찬바람을 쐬어주는 것이 중요하다. 문 앞에 앉은 세상 물정 이미 다 알아버린 할머니는 엿을 늘이다가 딱 맞은 그 순간에 문을 열어 엿에 찬바람을 쐬어 주곤 한다.
빨리, 빨리에 주눅이 든 시대를 우리는 살아가고 있다.
그러나 이 삼지내 마을에 오면 그 말이 참 멀기만 하다.
온 과정 중 하나만 빼먹어도, 그 ‘때’를 조금만 비껴가도 엿은 그 맛을 거두어 가버리는 것을 아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이 겨울 한철을 위하여 일 년을 보내는 느림보들이 사는 마을 삼지내.
느린 듯 하지만 딱딱 제 때에 맞춰 세상의 참맛을 낼 줄 아는 사람들이 사는 곳. 맑은 주름살에 고이는 햇살만큼이나 그네들의 여생이 환하기만 해 보인 것은 나의 착각이기만 한 것일까?
김경일(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