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남미여행) 아바나(Havana)와 혁명광장(Plaza de la Revolucion)
-----모로요새에서 바라본 아바나 시가-----
쿠바 아바나는 유네스코에서 지정한 세계문화 유산도시의 하나다.
1982년 세계문화 유산으로 지정된 아바나는 전쟁과 혁명 등 쿠바의 파란만장한 역사에도 불구하고
큰 피해를 입지 않고 100년 전의 모습을 대부분 그대로 유지하고 있는 도시이다.
인구 2천만명이 넘는 주민이 사는 대도시로서 무계획적으로 성장해 가고 있지만 1519년
스페인이 건설한 옛 도시 중심부에는 바로크와 신고전적인 기념물들이 흥미롭게 혼합되어 있는 곳이다.
50~60년대식의 미국자동차가 거리를 질주하고 페인트칠이 벗겨진 퇴색된 건물들의 낡은 앙상한 골격이
흉물스럽게 여기저기에서 들어나 보이는 곳이 아바나의 골목풍광이다.
멕시코만과 아바나만을 연결하는 해협에 면해 있는 이 도시는 스페인 정복자들이 세운 가장 중요한
항구로서 멕시코와 페루에서 확보한 보물을 스페인으로 이송하는 함선의 결집지
역할을 했다.
식민제국의 정문 역할을 했던 아바나는 1519년에 건설하기 시작하여 17세기엔 선박건조로 카리브 해의
중심지가 되었고 1607년에는 쿠바의 수도가 되었는데 독립투쟁과 혁명역사를 거치면서 지금까지도
그 영향력은 발휘하고 있다.
시가(市街)는 도시 전체가 거대한 박물관이라고 하는 구시가지(올드 아바나)와 그 서쪽에
혁명 이후 현대적인 고층건물이 즐비하게 건설된 신시가지로 분류된다.
구시가지의 무역항과 어업기지는 계속 활기를 띠고 있는 반면 식민시대 좁은 거리에 낡은
상점들은 노후화되고 퇴색해져 옛 번성했던 화려한 흔적만이 있었는데 이는 1968년 모든 상점을
국영화 식혔기 때문이란다.
신시가지는 넓은 가로와 바둑판 모양으로 구획되어 고층건물은 물론 최신설비를 갖춘 고급호텔이
해안가에 늘어서 있어 그런대로 도시의 미관을 형성해주고 있다.
그리고 여기엔 아바나대학과 사회주의 냄새가 물신 풍기는 혁명광장이 있으며 행정부처 청사와
국립도서관 등이 있다.
-----호세 마르티 기념탑-----
-----멀리서 본 혁명광장-----
-----내무부 건물-----
-----정보 통신부 건물-----
-----국방부 건물-----
혁명광장은 원래 호세 마르티(Jose Marti) 기념탑이 있는 시민광장이었다.
그런데 역사적으로 유명하게된 것은 1959년 쿠바혁명이 일어난 후 지금의 혁명광장으로 바뀌면서
이곳에서 수많은 군중이 모여 시위와 투쟁과 퍼레이드를 벌렸기 때문이다.
특히 피텔 카스트로(Fidel Castro)가 매년 5월과 7월에 100만 명이 넘는 관중 앞에서 장시간 동안
연설하는 것은 너무나 세계적으로 유명하다.
면적이 72000m2 로 이 혁명광장은 세계적으로 매우 큰 광장중 하나다.
이 광장에는 호세 마르티 기념탑 이외에도 많은 행정 부처들이 밀집해 있는데 광장에서 보기에 왼쪽의
체 게바라(Che Guevara)의 얼굴 조각상이 있는 건물이 내무부(Ministerio del Interior)이고 오른쪽의
카밀로 시엔푸에고스(Camilo Cienfuegos) 얼굴 조각상이 있는 건물이
정보 통신부(Ministerio de Informatica y Comunicaciones)이다.
통신부 건물에는 카밀로 시엔푸에고스의 얼굴과 그 밑에 Vas bien Fidel(잘 하고 있어 피텔)이라는
글귀가 색여져 있고 내무부 건물에는 쿠바의 영웅인 체 게바라(Che Guevara)의 얼굴과 그의 표어인
“Hasta la Victoria Siempre(영원한 승리의 그날까지)”라는 표어가 커다랗게 새겨져 있어 강한 인상을
심어 주었다.
-----호세마르티 기념탑-----
우선 넓은 광장에 들어서면 호세마르티 기념탑(Memorial Jose Marti)이 거대하게 높게 솟구쳐 있다.
쿠바 독립을 기리기 위하여 호세 마르티 탄생 100주년을 맞아 건립된 탑이다.
호세 마르티를 기념하고 그와 관련된 행사를 진행하는 본부로 탄생과 삶. 그리고 그의 행적들을 박물관의
형태로 전시해 놓은 중요한 곳이다.
쿠바혁명의 아버지 민족해방의 국부로 절대적인 존경을 받는 호세 마르티의 기념탑은 피라미드 형식으로
하늘 높이 그 위엄을 자랑하고 있었는데 탑의 높이가 110m 로 아바나에서는 가장 높은 건물이라고 한다.
탑 앞에는 18m의 하얀 대리석으로 조각된 호세 마르티가 위엄 있게 당당히 앉아 있는 모습이 유난히
눈길을 끌었다.
둘레에는 6개의 나지막한 돌기둥이 호위 하듯 서 있었는데 이는 쿠바 발견 당시 6개의 옛 지방을
역사적으로 상징한 것이라고 한다.
-----호세 마르티 대리석상-----
호세 마르티는 쿠바혁명을 이끈 국민영웅이며 독립 운동가이자 문학가로 많은 쿠바인들의 추앙을
받는 인물이다.
1853년 쿠바 아바나에서 출생한 호세 마르티는 소년시절부터 독립운동을 하다 투옥된 이후
멕시코. 과데말라. 스페인등을 여행하였다.
10년 전쟁 이후 쿠바로 귀환한 그는 또다시 쿠바독립 운동에 가담하여 혁명을 시도하다 스페인 총독에
의해 추방당하여 사라고사(Zaragoza) 대학에서 법률과 문학을 공부했다.
그 후 미국으로 망명하여 뉴욕에서 기관지 “조국(La Nacion)"지(誌)를 창간하면서 적극적인 선전을
통하여 쿠바의 독립혁명을 가시화하고 남아메리카 국가들의 우호증진에 노력했다.
1895년 미국의 도움을 받아 42세 되는 해 뉴욕에서 쿠바혁명당을 조직한 뒤 당수가 되어
막시모 고메스(Maximo Gomez) 등과 무장독립군을 이끌고 쿠바에 상륙하였다.
그러나 에스파냐군과 결사 전쟁을 벌였으나 최초의 전투에서 고향땅인 아바나 시 동쪽에
위치한 “도스 리오스“에서 전사하였다.
그러나 그로 인해 쿠바인들의 독립의지는 더욱 뜨거워졌고 이 힘을 모아 독립전쟁에서
승리하게 되었다.
그는 “우리들의 아메리카”라는 글을 통해 혈통과 언어가 같은 라틴 아메리카인 들이 힘을
합쳐야 한다고 주장하였으며 특히 인간 감정이 넘치면서도 근대적 감각을 풍기는 시로
근대주의의 선구자로 일컬어진다.
이 기념관에는 호세 마르티의 업적과 수많은 “말”들이 전시되어 있다.
그중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칠레의 여류시인 가브리엘라 미스트랄(Gabriela Mistral)은
호세 마르티를 가리켜 사랑의 혁명가라고 하면서 “지구상의 그 어떤 인간보다 순수한" 인간
혹은 ”증오를 지워버린 투사“라고 평가했다.
즉. 호세 마르티의 투쟁의 저변에는 모든 인간에 대한 특히 부와 권력으로부터 소외된 약자에
대한 지고한 사랑만이 깔려있을 뿐. 미움과 증오의 마음이 끼어들 여지가 없다는 것이다.
-----카밀로 시엔푸에고스(Camilo Cienfuegos)-----
카밀로 시엔푸에고스(Camilo Cienfuegos)
친미부패 바티스타(Batista) 군사독재 정권을 몰아낸 쿠바혁명의 4영웅을 꼽는다면 피텔과 라울
카스트로 형제와 체 게바라 그리고 카밀로 시엔푸에고스를 떠올릴 것이다.
세계적으로 너무나 유명해진 체 게바라에 가려 나라 밖에선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쿠바 안에선
시엔푸에고스가 여전히 4명의 영웅으로 기억되고 있다.
날렵한 베레모를 쓴 채 언제나 심각한 표정인 게바라의 초상과는 달리 밀짚모자를 쓴 시엔푸에고스의
초상은 언제나 환하게 웃고 있어 정감이 가기 때문이다.
카밀로 시엔푸에고스는 1932년 에스파냐계 공화좌파 가정에서 태어났다.
1940년 국립 미술학교에 입학하였으나 궁핍한 가정 사정으로 중퇴하고 아바나시내 의상점의
견습생으로 잠시 일하다가 1948년 버스비 인상에 항의 하는 정치적인 운동을 하였다.
1953년 몬카타 병영습격이 일어나고 카스트로의 투옥과 국외추방의 도화선이 된 이듬해
바티스타 대통령의 독재에 항거하는 지하조직 “혁명군 제2대”를 이끌며 투쟁을 주도했다.
1955년 독립영웅 안토니오 마세오(Antonio Maceo)를 추모하는 집회 중에 총상을 입고
1956년 멕시코로 간 시엔푸에고스는 피텔 카스트로와 맞나 바디스타에 대항하는 82명의 혁명동지를
구성하여 1956년 그란마호로 전격 쿠바상륙을 감행했지만 바티스타 정부군에게 패하게 된다.
여기에서 생존자 12명은 1개월 후 카스트로와 재 합류하여 체 게바라가 지휘하는 군사와 함께
1959년 12월 31일 산타클라라(Santa clara)를 탈환하고 1959년 1월 1일 바티스타가 해외로 망명하게
되어 게릴라 작전은 큰 성공을 거두고 아바나에 입성하게 된다.
쿠바혁명의 성공으로 군사적 최고지위인 장성으로 복무하면서 농지개혁을 추진하며 관심을 보이던
시엔푸에고스는 그해 10월 28일 카마구에이에서 아바나로 야간 비행 중 실종되었다.
일부는 정치적 성향이 달라 사이가 틀어졌던 카스트로가 그의 살해를 지시한 것이라는 소문이
무성했지만 정황상 억측일 가능성이 높다고도 했다.
그렇지만 그가 스탈린식 교조주의에 대해 거부감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란 점에는 상당수
역사가들이 동의하고 있다.
한편 체 게바라는 시엔푸에고스가 숨졌을 때 “카밀로와 같은 인물은 숨을 거둔 뒤에도
영원히 사람들의 가슴에 남는다.”며
“그의 육신은 갔지만 그의 영혼은 영원히 그들 곁에 남아 있을것“이라고 헌사 했다.
그러면서 시엔푸에고스와 절친했던 게바라는 사후 태어난 자식의 아들 이름을 그를 추모하는
의미에서 “카밀로(Camilo)”라고 지었다고 한다.
-----에르네스툐 체 게바라(Ernesto Che Guevara)-----
에르네스툐 체 게바라(Ernesto Che Guevara)
쿠바에서의 혁명가 중 가장 열광하는 인물은 단연 체 게바라다.
별을 단 베레모에 덥수룩한 구레나루. 강렬하면서도 매혹적인 그의 눈빛은 쿠바에서는
영원히 변치 않는 스타적 지존의 위치를 지키고 있다.
중요거리엔 쿠바혁명을 성공시키고 남미해방을 위해 산화한 세기의 영웅 체게바라의 숨결이
여기저기에서 느껴져 그는 남미 최고의 문화의 아이콘(Icon)으로 자리 잡고 있다.
에르네스토 체 게바라는 1928년에 태어나 1967년 39세의 나이로 사망한 혁명가이다.
아르헨티나 로사리오에서 태어난 그는 본명은
에르네스토 라파엘 게바라 데 라 세르나(Ernesto Rafael Guevara de la Serna)로 바스크
아일랜드 혈통의 유복한 가정의 5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귀족 혈통을 이어받은 아버지는 큰 병원원장이었으며 종교에 얽매이지 않는 비교적
자유로운 환경 속에서 경제적 안정을 누린 진보적 사고를 가진 부르주아 집안이었다.
1948년 체 게바라는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의대를 졸업하고 의사로서의 안정된 삶이
보장되어 있었지만 우연히 의사친구인 알베르토 그라나도(Alberto Granado)와
모터사이클로 남미대륙을 여행 하게 된다.
남미대륙을 여행 하면서 중남미의 피폐한 현실에 대해 처음으로 눈을 뜨게 되는데 지금까지는
책으로 지식을 습득해 인텔리로서의 이상적인 혁명을 꿈꾸었다면 여행하면서 리얼리스트로서
실천하는 혁명가로 태어나게 되는 것이다.
여행하면서 현실에 좌절감을 느낀 체 게바라는 의사 가운을 벗어 던지고 혁명의 길에 뛰어 든다.
그 당시 진보정권을 이루어 비교적 민주적이고 자유롭게 살아가는 과테말라로 간 체 게바라는
민주선거로 이룬 하코보 아루벤스 구스만(Jacobo Arbenz Guzman) 진보정권이
미국자본의 지원을 받은 아르마스(Carlos Castillo Armas)의 쿠데타에 의해 무너지는 것을
목격하고 비폭력적 개혁은 한낮 꿈일 뿐. 남미 민중을 위한 진정한 혁명은 무력으로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을 바꾸게 된다.
-----체 게바라와 피델 카스트로-----
과테말라에서 아르마스 독재정권에 반기를 들고 혁명운동을 하다 핍박을 받게 되는
체 게바라는 페루에서 학생운동을 벌이다가 망명 온 3살 연상의 여성혁명가
“일다 가데아(Hilda Gadea)“와 이때 결혼을 한다.
그리고 일다 가데아와 함께 멕시코로 망명을 하게 되는데 여기에서 일다 가데아의 소개로
1955년 7월 쿠바의 망명정치가 피텔 카스트로와 운명적인 만남을 갖게 된다.
당시 피텔 카스트로는 1952년 쿠바의 대통령 선거에 나섰다가 바티스타의 쿠데타로 선거가 무산
된 뒤 바티스타 정권에 항거하다 체포. 2년간 복역 후 특사로 풀려나 멕시코로 망명한 상태였다.
1956년 피텔 카스트로와 체 게바라는 86명의 혁명군과 쿠바에 상륙하지만 실패하고
남은 생존자 12명과 동지들을 규합하여 시에라 마에스트라(Sierra maestra) 산맥을
중심으로 게릴라 투쟁을 재개했다.
처음에는 산간지역을 전전했지만 독재정권의 폭정에 시달려 왔던 농민들의 지지와 반
바티스타세력과 손을 잡으면서 게릴라의 세력은 급성장 하였다.
1958년 체 게바라는 카스트로로부터 코만단테(Comandante)에 임명되어 자신이 지휘하는
제 2군을 이끌고 산타 클라라(Santa Clara) 전투에 돌입하여 적들을 제압하고 아바나로
가는 길을 열었다.
마침내 1959년 1월 1일 독재자 바티스타가 도미니카 공화국으로 망명하자 반군들은
바티스타 정권을 무너뜨리고 아바나에 입성하여 쿠바혁명을 성공하였다.
피텔 카스트로는 총리가 되었고 체게바라는 헌신적인 투쟁업적을 인정받아 쿠바시민권을
부여받아 정부의 각료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이시기 체 게바라는 멕시코에 있던 일다 가데아(Hilda Gadea)와 이혼하고 반군활동 중
만난 전투동지 알레이다 마치(Aleida March)와 재혼 하였다.
1959년 혁명정국에서 체 게바라는 해외에 파견되어 “비동맹” 국가들의 여러 지도자들과
만나 외교활동을 벌였으며 UN총회 쿠바대표로도 참여했다.
심지어 북한의 김일성과도 만났는데 이때부터 검은 베레모와 구겨진 군복은 그의
트레이드마크가 됐다.
체 게바라는 5년 동안 쿠바 국립은행 총재 산업부 장관을 거치며 서방세계로부터 쿠바의 두뇌라는
별명을 얻어가며 일을 열성적으로 하였다.
그러나 혁명가로서의 투지와는 달리 산업화나 경제 살리기에는 이상가로서의 꿈과는 괴리가
생기어 발목을 잡히게 되었다.
1965년 4월 체 게바라는 피텔 카스트로에게 “쿠바에서 할 일은 다 끝났다” 는 편지를
남기고 사라졌다.
체 게바라가 쿠바에서 돌연히 사라진 것에는 그가 권력에 물들지 않고 자신의 신념대로
더 많은 민중을 혁명으로 해방시키기 위해서라는 말도 있지만 한편으로는 쿠바혁명 성공 후
피텔 카스트로와의 불화가 원인이라는 말도 있다.
체 게바라는 쿠바가 미국이나 소련으로부터 완전한 경제적 독립을 하기를 원했지만
카스트로는 강대국 소련의 지원을 받아 정권을 유지하는 쪽을 택해 체 게바라의 순수한
신념과는 한배를 탈 수 없는 것이었다.
체 게바라는 쿠바를 벗어나 볼리비아로 투쟁무대를 옮겨 리네 바리엔토스(Rene Barientos)
정권을 상대로 게릴라전을 벌였으나 1967년 10월 미국이 가세한 볼리비아 정부군에게
잡혀 총살당했다.
체 게바라는 사후에 전 세계적으로 “체 게바라 열풍”을 일으킬 정도로 인기를 끌었다.
귀족가문에서 태어나 경제적 안정을 느릴 수 있는 의사를 버리고 서민층을 착취하는 우익
독재정권의 쿠데타 정부를 타도하기 위해 혁명에 뛰어 들었으며 쿠바에서 최고의 자리에
오르고도 이를 박차고 또 다른 혁명을 위해 헌신하는 숭고한 모습이 사람들을 감동시켰기
때문이다.
-----피델 카스트로(Fidel Castro)-----
쿠바혁명과 피델 카스트로(Fidel Castro)
쿠바혁명은 피델 카스트로와 그를 도운 사회주의 혁명가들이 1953년부터 1959년에 걸쳐
부패한 친미독재 바티스타정권을 축출하고 권력을 장악한 혁명을 말한다.
콜럼버스가 1492년 쿠바에 상륙한 이후 스페인과 미국의 지배를 받아온 쿠바는 독립이후에도
독재정치가 계속되어 부의 불평등한 분배와 정치적 부패가 지속 되었었다.
1953년 카스트로와 그가 이끄는 156명의 무장청년들이 몬카타병영(Caserne de Moncada)을
공격하면서 혁명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습격작전이 독재정권과 미국의 개입으로 실패하고 카스트로는 생포되었는데 재판에서
4시간 가까이 자신을 변호하면서 “나를 벌하라. 그건 중요하지 않다. 다만 역사가 나를 용서할 것이다”
라는 말로 재판은 끝을 맺었다.
이 재판에서 카스트로는 15년형을 선고받았고 2년을 복역하다 1955년에 은사(恩赦)로 석방되게
되는데 이는 젊은 시절의 지인들과 예수회 선생님들의 노력으로 바티스타 정권을 설득하여 얻은
특별사면이었던 것이다.
이후 카스트로는 멕시코로 건너가 <7.26혁명운동>을 결성하고 독재정권에 대한 직접적인 공격
노선을 표방하고 체 게바라와 함께 1956년 “그란마(Granma)”호 함선을 타고 쿠바에 상륙 하여
투쟁을 하게 된다.
초기항쟁에서는 실패하고 후퇴를 하였으나 라울과 게바라등 조직원들의 지원을 받아 다시
결집하여 시에라 마에스트라(Sierra maestra) 산맥을 중심으로 사기저하와 장비부족. 지휘체계의
혼란 등에 직면해 있던 바티스타 정부군에 대항하여 게릴라전을 펼쳐 나갔다.
주위의 민중과 독재정권에 시달려 왔던 농민들도 이에 합세하고 1958년에는 다른 반 바티스타
세력과도 통일전선을 구축하여 결국 카스트로는 바티스타정권을 몰아내는데 성공을 하였다.
-----피델 카스트로와 후진타오-----
1959년부터 쿠바혁명을 완성하고 중남미 공산주의 통치자로 자리매김 된 카스트로는 쿠바 동쪽 끝
올긴(Holguin)주의 한 소도시에서 아버지 앙헬 카스트로와 어머니 리나 루즈곤잘레즈 사이에서
3번째로 1926년에 태어났다.
8살에 가톨릭교회에 입교 했지만 세례를 거부하고 가토릭 학교에 적응을 하지 못하여 산티아고에
있는 라살 기숙학교에 전학을 가게 된다.
모든 스포츠분야에서는 능했지만 학문적으로는 문제가 많았던 그는 1945년 아바나에서 유명한
예수회에서 운영하는 엘 콜레지오 드 벨렌로 학교로 전학을 가게 되는데 여기에서 법에 흥미를
갖고 변호사가 되겠다는 꿈을 갖는다.
벤렌로 학교에서 학업성적이 높아진 피델 카스트로는 아바나대학교(University of Havana)에 입학하여
법학을 전공하면서 1950년 변호사가 되고 노동자와 정치범들을 변호하였다.
조직화된 폭력집단이 정치적 목적과 개인적인 야망을 감상적으로 혼합시켜 반정부적 활동을 전개하고
있던 당시의 대학교에서 카스트로의 주요활동 역시 정치였다.
학생 운동권권의 대표자로 지목된 그는 정치적 탄압을 받게 되고 여기에 자극을 받은 피델 카스트로는
더욱 더 학생 운동을 반 부패적이고 청렴한 문화로 이끌면서 라몬 정부의 친미적 태도를 신랄하게 비판한다.
그는 쿠바에서 조직된 1947년 도미니카 공화국의 독재자 라파엘 트루히요(Rafael Truiillo) 정권을
타도하기 위한 침공계획과 1948년 콜롬비아의 보고타(Bogota)에서 시발된 도시폭동사건에도
참여하면서 국제적으로 거대한 학생운동의 조직망을 갖추게 된다.
그러면서 안으로는 라몬&라우의 정권의 부패와 폭력을 전국적으로 알리고 이에 정부에 실망했던
쿠바국민들의 큰 지지를 받으면서 제법 이름이 알려지게 된다.
학생운동가의 의장이었던 피델 카스트로는 이 힘을 이용하여 좌익 학생 운동가들을 무장시켜
본격적으로 폭력투쟁에 가담하게 된다.
-----피델 카스트로와 동생 라울 카스트로-----
1959년 바티스타 정권을 무너뜨리고 혁명을 완성 시킨 피델 카스트로는 총리에 취임하면서 토지개혁을
실시하고 미국을 비롯한 외국의 자본을 몰수하는 등 사회개혁을 단행하였다.
그리고 제1차 아바나선언을 발표하여 라틴아메리카 해방을 제창하고 1961년 쿠바가 사회주의국가라고
처음으로 선언했다.
카스트로가 사회주의국가라고 선언하자 다음날 미 중앙정보국(CIA)이 주축이 돼 쿠바망명자 1500명으로
“2506 공격여단” 이란 특수부대를 창설해 피그만(Bay of pigs)을 침공했다.
그러나 피그만 침공이 계획되는 과정에 소련에게 기밀이 유출되면서 미국의 피그만 침공은 실패로
돌아가고 미국은 국제적 큰 망신을 당하게 된다.
이로 인하여 많은 희생자가 났으며 미국은 쿠바군에 의해 생포된 1.200명의 석방을 위해 5.300만 달러의
배상금을 물게 되고 이때부터 대립은 본격화되어 외교가 단절되면서 지금까지 쿠바에 대한 무역제재를
하게 된 것이다.
미국이 위신을 잃고 경제봉쇄를 하자 자발적으로 민중의 혁명으로 공산주의 국가를 이룬 카스트로는
소련과 공조를 하며 정책을 펴게 된다.
1962년 소련이 쿠바에 탄도 미사일을 배치하여 세계의 핵전쟁 위기에 직면하게 되자
다급해진 미국은 더 이상 카스트로 정부의 전복을 기도하지 않겠다는 조건으로 소련의 쿠바에서의
핵무기를 철수하게 한다.
일촉즉발의 위기에서 문제는 종결되지만 카스트로를 제거하기 위한 미국 CIA의 활동은 한동안
계속되었고 양국 간의 갈등은 끝이지 않았다.
피델 카스트로는 다른 공산주의 국가의 지도자들과 다르게 개인숭배를 일체 하지 않았다.
풀렌시오 바티스타 정권 기간 개인숭배를 자행한 바티스타와 동일시되고 싶지 않았던 것으로 간주된다.
동구권 민주화 바람에도 불구하고 오로지 공산주의 정책을 추진해 나갔던 카스트로는 2006년 장출혈로
수술을 받기 위해 친동생인 라울 카스트로에게 권력을 이양하고 모든 권자에서 지금은 물러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