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설> 이 시는 삶에 대한 달관과 죽음에 대한 체관을 주제로 하고 있는 시이다. 독백적 어조를 통해 세상에 대한 미련과 집착을 버린 채 이 세상을 떠날 수 있는 진정한 자유인의 정신을 세속을 초월한 달관의 세계와 조화시킴으로써 우리는 여기서 순진무구와 무욕을 읽을 수 있다. 또한 불교의 윤회사상을 읽을 수 있으며, 시인으로서 세속적 명리를 떨쳐버리고 온몸으로 자신의 시를 지킨 진정한 의미의 순수시인의 면모를 볼수 있다. <핵심 정리> 형식 : 자유시, 서정시 운율 : 3음보의 반복과 변조 주제 : 삶에 대한 달관과 죽음에 대한 체관 성격 : 시각적, 서술적 어조 : 내면적 독백적 어조 제재 : 귀천(하늘로 돌아감) 표현 : 감정이입, 반복법, 상징법 특징: 미련과 집착을 버리고 하늘로 돌아갈 수 있는 진정한 자유인의 정신을 세속을 초월한 달관의 세계와 조화시킴 구성 : 1연[기] : 이슬과 함께 하늘로 돌아가리라. 2연[서] : 노을빛과 함께 하늘로 돌아가리라. 3연[결] : 하늘로 돌아가 이 세상 아름다웠다고 말하리라. <시구 연구> 1)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 반복을 통해서 화자가 바라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죽는다는 말 대신에 하늘로 돌아간다고 하는 것은 시인의 미련도 집착도 없는 무욕의 경지를 느끼게 해준다. 2) 하늘 ⇒ 우리가 살고 있는 지상의 고통스러운 현실에 떠나서 자유로운 정신과 그 초월적 존재를 획득한 세계이다. 3) 새벽 빛 와 닿으면 스러지는/이슬 더불어 손에 손을 잡고 ⇒ 노을 빛은 소멸, 아름다움의 이미지를 나타내며 깨끗하고 아름다운 이미지로 죽음을 보고 있다. 또한 이 어구를 통해 이 세상의 모든 집착에서 자유로운 자의 달관을 보게 된다. 4) 노을빛 함께 단 둘이서 ⇒ 위의 이슬과 함께 그와 동반하는 것으로서 노을빛을 통해서도 자유로운 자의 달관을 보게 된다. 5)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 이승에서의 삶과 저승에서의 삶을 구별짓지 않고 있는 것으로 보아 불교적 사상을 엿볼 수 있으며 아름다움의 여행으로 삶을 보고 있다. 또 죽음을 수용하고 있다. 6) 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리라...... ⇒ 이 말은 역설로서 이해를 해야 한다. 즉 마지막에 놓은 말없음표가 의미하는 것을 생각해보면 아름다웠다는 것은 괴로웠다는 말의 역설처럼 보인다. 결국 괴롭다는 말을 글자 그대로 괴로웠다고 말하지 않는데 이 시인의 미덕이 있다. <감상> 제목의 '하늘로 돌아감'이란 말은 하늘에서 왔으니 하늘로 다시 돌아간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시인은 이 세상의 삶을 하늘에서 잠시 지상으로 떠난 아름다웠던 소풍의 여정이라 여기는데 이는 인간과 하늘을 절대적으로 파악하지 않고 인간을 우주의 한 존재로 파악하고 있는 데서 비롯된 것이다. 마치 그가 신선처럼 느껴지지만 이 시를 신선 같은 삶을 산 자의 노래로 읽는 것은 잘못이다.그의 삶은 표면적으로 드러난 것과는 달리 어지간히 괴로웠을 것이다. 하지만 괴로웠다고 직접적으로 말로 드러내지 않는 데 이 시인의 미덕이 있다. 그는 이러한 관조의 힘을 바탕으로 짙은 우수 속에서도 절제된 목소리로 삶의 아름다움을 노래할 수 있었다. 이 작품은 아무런 기교 없이 자신의 심중을 있는 대로 드러낸 독백과도 같은 시다. 천상병(1930-1993) 1930년 경상남도 창원 출생 1955년 서울대학교 상과대 수학 1952년 『문예』에 시 <강물>, <갈매기>가 추천되어 등단 1952년 『현대문학』에 평론 추천 1993년 사망 <시집>『새』(1971), 『주막(酒幕)에서』(1979), 『저승 가는데도 여비가 든다면』(1987) 등 <작품 세계> 우리는 지상에서의 그의 순진무구와 무욕을 읽을 수 있다. 그는 현란하거나 난해하지 않으면서도 사물을 맑고 투명하게 인식하고 담백하게 제시한다. 죽음을 말하면서도 결코 허무나 슬픔에 빠지지 않고 가난을 말하면서 구차스러워지지 않는다. 예를 들어 귀천이라는 시에서 보이는 그의 삶의 달관적 모습은 마치 하늘에서 잠시 귀양살러온 신선과 같은 사람임을 증명해주고 있다. 그의 시들은 어떻게 보면 우리 시사에서 매우 이단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시인이라는 세속적 명리를 떨쳐 버리고 온몸으로 자신의 시를 지킨 진정한 의미의 순수 시인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그의 시가 설명적 서술이나 넋두리 조, 단순한 시각 그리고 동어 반복적인 요소들의 단점을 내포하고 있으며 전체적인 면에서 스케일이 크고 깊지 못하다는 아쉬움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천상병의 삶> 맨 손바닥 하나 내보이며 다정한 친구들에게 천원, 이천원씩 술값 적선은 받았어도 늘 재벌 못지않게 여유를 갖고 호기를 부렸던 시인, 천상병. 새처럼 날개를 달고 하늘을 훨훨 날고 싶던 그에게도 두가지 간절한 소원은 있었던 것 같다. 그 하나는 밤이 되면 찾아들어가 눈을 붙일 방 하나요, 또하나는 사랑스런 자식을 가져보는 것이었다. 종로에서 탄생한 천재 시인 이상이 명동에서 깡패들과 맞서 호통을 쳤듯 천상병도 한번은 깡패들을 건드렸다가 큰 소란에 휘말릴 뻔했다. 제주도 출신의 쌍과부가 운영하는 술집 '추자네 집'에서였다. 어깨가 떡 벌어진 주먹패가 천상병에게 시비를 걸자 조금도 물러서지 않고 "꺼져, 이 자식아!" 하고 소리쳤던 것, 그렇게 호기를 부리면서도 의연할 수 있었던 천상병이 어느날 이 쌍과부집 아들 비룡이를 보고 수작을 건넸다. 마침 손님 한명 없이 어린 비룡이 혼자 아이스크림을 빨고 있는 장면을 대하자 그는 이 아이에게 아이스크림을 사줘가며 세뇌를 시켰던 것이다. "자, 내 말을 따라서 해 봐. 나의 아버지는 천상병이다. 나는 천상병씨의 아들이다." 아이스크림 맛에 홀린 이 아이가 어느정도 세뇌되어 있는 꼴을 뒤늦게 들어온 과부가 보고 질겁을 했다. 그 뒤로 아이에게 어떻게 새뇌를 했는지 다음에 천상병이 들어섰을 땐 비룡이가 그 얼굴에다 대고 냅다 소리를 질렀다. "천상병은 X새키다." 그렇게 X새키 소리를 들어가면서도 한 아이의 아버지이기를 소망했던 그는 동베를린 간첩단 사건에 연루되었을 때 당시 정보기관인 중앙정보부에 끌려들어가 호된 고문을 받았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나중에 무혐의로 풀려나긴 했지만 그 길로 그는 종로구 관철동 등 그의 주무대에서 자취를 감춰버렸다. 아무리 수소문해도 종적이 묘연해지자 주위 친지들은 그가 추운 날 어느 길목에서 쓰러져 행려병자로 취급되어 이미 저세상 사람이 되어버린 것으로 간주했다. 시인 민영, 성춘복, 송영택 등이 힘을 모아 1971년 12월 그의 유고시집 <새>를 펴냈다. 이 시집이 세상에 알려지자 출판사 측에 갑자기 전화가 걸려왔다. 죽었다던 천상병이 살아 있다는 것이었다. 그것도 정상적인 상태가 아니라 대소변도 제대로 못가려 기저귀를 차고 지내야 될 만큼 폐인이 되어 정신병원에 입원해 있다는 것이었다. 주위 친구들이 예상했던 대로 추운 겨울 날 그는 길거리에 쓰러져 얼어죽어가고 있었는데 경찰이 그를 보호하여 행려병자로 취급, 정신병원에까지 보냈던 것이다. 하나님은 이 어린애처럼 순수한 시인을 살리고자 하셨던 걸까. 마침 이 병원에 근무하던 의사 김종해 박사가 천상병을 알아봤다. 문인들을 좋아하여서 두루 가깝게 사귀고 자신의 문집도 한권 펴낸 적이 있는 김박사는 천상병을 보호하여 묵묵히 치료하고 있다가 그의 유고시집 발간 소식을 듣고 놀라서 연락을 취했던 것이다. 천상병에게 있어 수호천사와 같은 사람이 된 목순옥과의 인연은 이 병원에서 깊어졌다. 천상병의 친구 여동생이기도 했던 목순옥은 반년이 넘도록 소식이 끊겨 죽은 사람으로까지 인정했던 그가 살아 있다는 소식을 듣고 통조림 몇 통을 사들고 응암동 시립정신병원으로 달려갔다. 김박사는 그녀의 오빠 순복이 큰형님으로 불렀던 박종우 선생의 부산고교 제자였고 또 천상병, 목순옥과 친했던 화가 하인두의 고교동창이기도 해서 전에부터 두 사람은 친히 알고 지냈던 사이였다. 이때 나온 천상병의 병명은 '신경황폐증', 기계에 기름을 치지 않아 기계가 멈춰 서듯 정신마저 황폐해진 상태라고 했다. 그에게 병문안을 다니는 횟수가 늘자 천상병은 유난히 목순옥의 말을 고분고분 잘 들으면서 그녀에게 의지하는 태도를 보였다. "미스 목, 언제 또 올래? 팥빵이 먹고 싶다." 이렇게 의지하는 그를 내칠 수 없어 마침내 두 사람은 서울 변두리 수락산 기슭에 사글세 방을 하나 얻고 김동리 선생 주례로 72년 5월 14일 결혼식도 올렸다. 그때가 천상병은 43살의 노총각이었고, 목순옥은 36살의 노처녀였다. <결혼 후 남편을 대하는 내 마음은 남편이라기보다는 어린아이를 보살피는 심정이었다. 병원에서 나가기는 했으나 건강이 나빠지지 않도록 조심해야 했고 그런 가운데에서도 무엇보다 어려운 것은 생활 대책을 마련하는 일이었다.> 아내 덕분에 천상병은 천원권 적선을 구하러 다니지 않아도 됐으나 그런 만큼 아내의 두 어깨는 더욱더 무거웠다. 결혼 초에는 몸이 불편한 남편을 곁에서 돌보기 위해 병풍 자수를 집에서 놓아 번 돈으로 쌀 한말 연탄 열장씩을 사서 살아갔다. 그러다가 친구 언니의 지원으로 1977년 청계천 8가에서 친구와 함께 고가구점을 경영했으나 계속되는 경영난과 비싼 이자 부담 때문에 결국 고생만 하고 문을 닫았다. 그 3년동안 쌀 한되를 살 돈이 없어 눈물을 삼킨 적도 많았으나 그들은 행복했다. 그런 때 출판사를 경영하고 있던 시인 강태열이 "천 형, 막걸리 값이나 하면서 돈은 천천히 갚으라"고 선뜻 3백만원을 빌려주며 지금의 가게 '귀천'을 추천했다. 그 온정 덕분에 목순옥은 천상병의 '수호 천사'로 의연히 일어설 수 있었다. 20여년을 같이 살았으면서도 아내가 무엇을 어떻게 해서 돈을 벌고 쌀을 사는지 도통 관심조차 없이 태평했던 천상병. 막걸리 한병, 담배 한갑이면 천하에 부러울게 없었던 그는 의지할 아내와 눈을 부칠 방까지 해결되고나자 자신이 가장 행복한 사람이라고 믿었다. < 60먹은 노인과 마주 앉았다. / 걱정할 거 없네 / 그러면 어쩌지요? / 될대로 될걸세. 보지도 못한 내 간이 / 괘씸하게도 쿠데타를 일으켰다. / 그 조무래기가 무얼 알까마는 / 아직도 살고픈 목숨 가까이 다가온다. > <간의 반란>이란 시를 통해 이미 그 자신이 계속된 음주로 해서 간이 점점 망가져 가는 것을 알면서도 술을 끊지 못해 마침내 그는 1993년 4월 28일 이 세상을 떠나갔다. 늦게서야 결혼했지만 22년의 결혼 생활 동안 한번도 떨어져 지낸 적 없이 날마다 머리를 매만져주고 발을 씻어주었던 아내 목순옥. 예쁜 여자만 보면 어린애처럼 "내 애인"이라는 데도 질투 한번 하지 않았던 그녀. 급성 간경화증으로 죽음 직전까지 갔던 그를 친구가 후원해 주는 춘천의료원에 입원시킨 뒤 춘천에서 서울로 5개월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오르내리며 간병에 매달렸던 그녀는 이제 천상병 기념관을 가꾸고 지키는걸 자신에게 부여된 하나님의 사명으로 알고 살아간다. 천상병 시인 추모행사는 크게 두개가 있는데 하나는 한국시사랑문협과 산청문협이 주관하는 지리산 천상병문학제와 의정부 지자체에서 주관하는 문학제가 그것이다 귀천한 시인과 가장 가까운 천왕봉에서 열리는 추모행사는 벌써 5회를 맞이했다 한편 의정부는 송산시립묘지까지 가서 추모 행사를 벌이고, 다양한 문화행사와 함께 종로 인사동 골목의 '천상병기념관'에서 해마다 추모 세미나도 연다. ------------------------------------------ [[ 아래는 신문기사 내용 ]]
천상병(千祥炳·1930~1993) 시인이 1980년대 초반에 직접 쓴 일기 일부와 편지가 발견됐다.
편지는 1981년 국회의원 고(故) 정상구씨에게 2만원을 꾸어달라고 부탁하는 것과 형님에게 안부를 묻는 내용. 그러나 이 편지들은 보내지지는 않았다. 일기는 1983년 2~3월 쓴 것으로, 3·1절에 집에서 만세를 세 번 불렀으며 연동교회 김형국 목사의 설교에 감명을 받았다는 등의 내용이 담겨있다.
부인 목 여사는 “천상병 시인이 돌아가신 직후에 유고들을 정리했는데 그때 누락된 것 같다”고 말했다. 새로 발견된 유고에 대해 천 시인의 친구였던 학술원 회원이자 극작가인 신봉승씨는 “천상병 시인의 생활상과 사상 등을 연구하는 데 귀중한 자료”라고 평가했다. 역시 친구였던 강민 시인도 “처음 보는 것들로 중요한 자료가 될 것”이라고 평했다.
천상병은 사후에 날이 갈수록 애독자가 늘고 있는 시인이다. ‘천상병 문학제’에 참여하는 사람도 점점 더 많아지고 있다. 대표작인 ‘귀천(歸天)’은 도처에 시비(詩碑)가 세워졌고 교과서에도 실렸다. 대중가요로도 여러 가수가 불렀다. 문단에서는 “의정부에 있는 천 시인의 묘소에는 떡이 굳는 날이 없고 꽃이 시드는 날이 없다”는 말들을 한다. 그만큼 천 시인을 좋아하는 사람이 자주 찾는다는 말이다. 새로 발견된 유고를 소개한다.
◎ 편지
정상구 의원에게 보내는 편지는 200자 원고지 3매로 돼 있다. 그 중 주요 내용은 안경값 2만원만 꾸어달라는 내용.
“…아내가 몇 달 전에 실직(失職)을 해서 요새는 밥도 못 해먹고 근처의 처가집에서 얻어먹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밥문제는 아니고 내가 수일 전에 돋보기 안경을 잘못 취급해서 못쓰게 되었는데 돋보기가 없으면 적은 활자는 읽을 수가 없어서 요새 가을인데 책을 못 읽어서 답답하기 그지 없어서 선생님께 편지를 씁니다. 아내에게 물으니 한 2만원이면 살 수 있다는데 좀 봐주십시오, 내년 4월이나 5월이면 본인의 책이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글도 못 쓸 지경이니 어찌합니까. 책이 나오면 그 인세로 2만원 기어코 갚겠습니다. 선생님 딱 한번만 봐 주십시오.”
천상병 시인은 원래 가난을 즐겼다. 그리고 아무리 어려워도 부자에게 손을 내밀어본 적이 없는 사람이다. 단지 오며가며 만나는 가까운 친구에게 장난삼아 손바닥을 내밀고 500원, 1000원을 얻어 막걸리를 마셨다. 돈을 적게 주던 사람이 갑자기 많이 주면 거스름돈을 주기도 할 정도였다. 1980년대 초반에 쓴 그의 시 ‘나의 가난함’을 보자.
나는 볼품없이 가난하지만 / 인간의 삶에는 부족하지 않다. / 내 형제들 셋은 부산에서 잘 살지만 / 형제들 신세는 딱 질색이다. / 각 문학사에서는 날 돌봐주고/ 몇몇 문인들이 날 도와주고 / 그러니 나는 불편함을 모른다. / 다만 하늘에 감사할 뿐이다. / 이렇게 가난해도 / 나는 가장 행복을 맛본다. / 돈과 행복은 상관없다. / 부자는 바늘귀를 통과해야 한다. /
부자는 바늘귀를 통과해야 한다.
이처럼 ‘가난이 행복’이라고 노래한 시인이 권력 가진 정치인에게 단돈 2만원만 빌려달라고 한 사정을 이해하려면 약간의 설명이 필요하다. 우선 ‘아내의 실직’에 대해.
천 시인의 부인인 목순옥 여사는 1977년 황학동 벼룩시장에서 친구와 함께 12평짜리 고가구점을 열었다. 워낙 가난한 부부였지만 친구들의 도움으로 문화인이 즐겨찾는 민화나 고가구 등을 파는 가게를 열었던 것. 목 여사는 1년 후에 가게를 독립했다. 그런데 돈이 없어 고리채를 쓰다보니 빚만 늘어갔다. 게다가 당시 금당(金堂)사건으로 알려진, 골동품 가게 주인이 살해되는 사건이 터진 다음부터는 골동품 거래가 되지 않았다. 그리고 아는 사람에게 꾸어준 돈을 떼였다. 천 시인이 어쩌다 쓰는 시의 원고료는 편당 3000~5000원에 불과했다. 한 달에 2만5000원 하는 방세도 세 달씩 밀리게 됐다. 목 여사는 마침내 1981년 가게를 정리했다. 그러자 빚쟁이들이 몰려들었다. 빚쟁이들은 목 여사에게 “돈 내놓으라”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기도 했고, 부부가 자는 방에서 자고 가기도 했다. 그런데 살림에 대해 전혀 관심이 없는 천 시인은 “마누라를 경찰서로 데리고 가라”고 야단이었다고 목 여사는 말했다. 목 여사는 “이때가 경제적으로 생활이 가장 힘들었던 시기였다”고 회상했다. 바로 이때 천 시인은 돋보기 안경을 깨뜨렸다.
천 시인은 누워있을 때 안경을 꼭 어깨 밑에다 놓았다고 한다. 잠이라도 자다가 몸을 뒤척이면 안경이 깨지기 십상이다. 몇 번이나 “다른 곳에 안경을 놓고 자라”고 해도 듣지 않았다는 것. 이렇게 해서 테가 부러지면 테이프로 붙이고, 또 붙이고 해서 잠시 쓰지만 끝내 쓸 수 없는 상태가 된 것이 부지기수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때는 “안경을 살 돈조차 없었기 때문에 결국은 돈이 있을 것으로 생각되는 정상구 의원에게 2만원이라도 꾸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 같다”고 목 여사는 추측했다.
목순옥 여사는 1982년 친지가 운영하는 인사동의 한 찻집에서 목기 코너를 열어 쌀과 연탄을 들여놓을 수 있게 됐다. 천 시인도 새로 돋보기 안경을 갖게 돼 다시 책을 볼 수 있게 됐음은 물론이다.
비슷한 시기에 형님에게 쓴 편지에서 천상병 시인은 핵가족제에 대한 불만을 터뜨린다.
“요새 세상은 핵가족이라고 하여 장남이 장가들면 딴 집에 살게 하는 것이 보통인데, 나는요 이 핵가족제가 영 싫어 죽겠습니다. 키운 보람이 무엇이겠습니까? 장남이 돈을 벌어서 부모를 봉양하는 것이 원칙입니다. 형님은 핵가족이다 하지 말고 같은 집에 살도록 하시기 바랍니다.”
요즘 보면 보수주의자로서의 면모가 드러나는 대목이다. 신봉승씨는 “천상병 시인이 보수주의자”라고 단언하며 가족과 관련된 두 가지 에피소드를 소개했다.
천 시인은 1960년대에 신혼이던 신씨의 전셋집에서 더부살이를 하고 있었다. 통금이 있던 당시 천 시인은 매일 밤 11시59분에 집을 찾았다. 그래서 신씨가 “야, 집주인한테 미안하다. 좀 일찍 들어와라”고 하면 천 시인은 “너 같으면 일찍 들어올 수 있겠냐”고 반문하더라는 것. 남에게 더부살이하는 주제에 일찍 들어와 집안차지를 할 수는 없다는 의미이다.
또 한번은 천 시인이 밤에 술을 마신다고 마신 것이 알고 보니 스킨로션을 반 병이나 마셨다. 그래서 신씨가 하루 종일 걱정했는데 그날은 밤 10시30분에 나타나더니 동네 동장집에 문상을 갔다오는 길이라고 하더라는 것. 천 시인은 걱정하는 신씨에게 “동네에서 흉사(凶事)가 있으면 문상을 가야지 혼자 살려고 하냐”고 말하더라는 것. 신씨는 이러한 시인의 언동이 다소 우습긴하지만 보수적인 면모를 보여주는 대목이라고 설명했다.
◎ 일기
이번에 발견된 일기는 1983년 2~3월 씌어진 것이다. 이전에 발견된 일기는 1989년 8월에 쓴 것이었다. 그런데 당시 일기 서두에 “오늘 비로소 아내한테서 일기책을 구했다”고 돼 있다. 천 시인은 이때부터 처음으로 일기를 쓰는 것처럼 쓰고 있다. 그런데 이번에 발견된 일기는 그보다 6년 전에 쓴 것들이다.
이번에 발견된 일기를 쓸 때는 부인 목 여사가 인사동에서 친지의 권유로 천 시인의 대표시 이름을 딴 카페 ‘귀천’을 운영하기 시작해 생활이 비교적 안정되기 시작한 시기이다. 이 일기에는 천 시인의 크리스천으로서의 면모가 드러나 있다.
2월 21일 천상병 시인은 아치방(당시 카페 이름)에 가서 이호종이라는 사람으로부터 “크리스처니즘도 샤머니즘의 영향을 받은 것”이라는 말을 듣고 일리가 있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말이 “너무나 놀라운 해석이지만 원시인에게도 하나님은 성령을 베푸셨지 않을까. 일단은 수긍이 갈 만한 말로 들었다”고 한다. 목 여사에 따르면 이호종이라는 사람은 나중에 불승(佛僧)이 됐다.
2월 27일 일요일에 천 시인은 교회에서 김형태 목사의 설교를 듣고 감동했다. 천 시인이 찾은 교회는 연동교회다. 천 시인은 원래는 가톨릭이다. 그런데 1981년 기독교 방송을 통해 김형태 목사의 설교를 듣고 감동해 연동교회를 나가게 됐다는 것. 처음 나가는 날 천 시인은 김 목사를 찾아가 큰 소리로 “목사님, 저는 가톨릭입니다. 저는 배신자가 아닙니다. 그렇지만 목사님 설교가 좋아서 들으러 왔습니다”라고 말했다. 그리고 그는 일찍이 이러한 입장을 ‘연동교회’라는 시로 썼다.
나는 지금까지 약 30년 동안은/ 명동 천주성당에 다녔는데 / 그러니까 어엿한 천주신도인데도/ 81년부터는 / 기독교 연동교회로 나갑니다. / 주임목사 김형태 목사님도 / 대단히 훌륭하신 목사님으로 / 그리고 기독교 방송에서 / 그동안 두번 설교를 하셔서 / 나는 드디어 그분의 연동교회엘 / 나갈 것을 결심하고 나갑니다. / 교회당 구조도 아주 교회당답고 / 조용하고 아늑하여 기뻐집니다. / 아내는 미리 연동교회였으나 / 그동안 가톨릭에 구애되어 나 혼자 / 명동 천주 성당에 나갔으나 / 그런데 81년부터는 다릅니다. / 한번밖에 안 나갔어도 그렇게 좋으니 / 이제는 연동교회에만 나가겠습니다. / 물론 개종은 않고 말입니다. / 배신자라는 말 듣기는 아주 싫습니다 /
천 시인이 김 목사의 설교를 좋아하게 된 데 대해 목 여사는 “김 목사님의 설교가 당시 다른 목사님들과는 달리 매우 조리있고 차분했었기 때문에 천 시인이 좋아했던 것 같다”고 말했다. 김 목사는 최근 “내 신학이 가톨릭과 전혀 이질감을 느끼지 못하며 신부들과의 교제도 스스럼없이 한다”고 설명했다. 그는 “당시에는 군사독재 시대라서 민주화와 인간화에 대한 설교를 많이 했다”고 말했다.
천 시인은 “부활 예수님은 반드시 한국에서 나실 것”이라는 김 목사의 설교에 충격을 받는다. 천 시인은 일기에서 “3월 1일 아침에 3·1절 만세를 세 번 불렀다”고 썼다. 그리고 감동적인 마음으로 한국일보의 3·1절 특집기사를 죄다 읽었다.
천 시인 부부는 연동교회에서 늘 예배당 내부가 가장 잘 내려다 보이는 교회 3층 제일 앞줄 한가운데 좌석에서 예배를 드렸다. 그리고 예배를 보는 동안에는 울기도 하고 웃기도 하며 예배를 본다. 그리고 기도를 할 때는 자주 “하나님 용서해주이소. 용서하이소”라고 말했다고 목 여사는 전했다. 천 시인은 예배 마지막 순서인 축도가 시작되면 재빨리 1층으로 내려간다. 김 목사와 먼저 인사를 나누기 위해서였다.
김 목사는 당시의 천 시인에 대해 “교회에 잘 나왔으며 만나면 늘 인사하는 정상인이며 밖에서 말하는 것 같은 이상한 사람이 전혀 아니다”고 말했다. 그는 천 시인이 “존귀한 인물”이라고 평했다.
천 시인은 3월 7일 ‘막걸리’라는 시를 썼다. 천상병의 시 중에는 ‘막걸리’라는 제목의 시가 모두 3편이 있다. 이 중 두 편은 1984년에 발표된 것이다. 목 여사는 당시 문학지에 발표되지 않은 다음의 시가 1983년에 지은 것 같다고 말했다.
나는 술을 좋아하되 / 막걸리와 맥주밖에 못 마신다. / 막걸리는 / 아침에 한 병(한 되) 사면 / 한홉짜리 적은 잔으로 / 생각날 때만 마시니 / 거의 하루 종일이 간다. / 맥주는 / 어쩌다 원고료를 받으면 / 오백 원짜리 한 잔만 하는데 / 마누라는 / 몇달에 한번 마시는 이것도 마다한다. / 세상은 그런 것이 아니다. / 음식으로 / 내가 즐거움을 느끼는 때는 / 다만 이것뿐인데 / 어찌 내 한가지 뿐인 이 즐거움을 / 마다하려고 하는가 말이다. / 우주도 그런 것이 아니고 / 세계도 그런 것이 아니고 / 인생도 그런 것이 아니다. / 목적은 다만 즐거움인 것이다. / 즐거움은 인생의 최대 목표이다. / 막걸리는 술이 아니고 / 밥이나 마찬가지다. / 밥일 뿐 아니라 / 즐거움을 더해주는 / 하느님의 은총인 것이다. /
우태영 조선일보 출판국 기획위원(tywoo@chosun.com) - Copyrights ⓒ 조선일보
첫댓글 천사 같은 목순옥 여사, 그 부드러운 목소리와 태도까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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