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와 인연을 맺고 살아가다 보니 “공(空)이란 것이 도대체 무엇이냐?”라는 질문을 받을 때가 종종 있습니다. (…)
어느 날 저는 <금강경삼가해 강설을 논강하다> 작업을 맡게 되었습니다. <금강경>은 공(空)에 대해 설명하는 대표적인 경전이지요. 오래전에 처음으로 <금강경>을 읽던 당시, 저는 거기에 나오는 수수께끼 같은 언설들에 무척 당황했습니다. 그리고 그게 다 공을 설명하는 방식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 패닉에 빠졌습니다. 공과 저의 그렇고 그런 관계는 그때의 당황스러움과 패닉에서 시작되었던 것이 아닐까 합니다. 그리고 이제는 그 <금강경>을, 그리고 거기에 펼쳐지는 공을 일로서 다시 만나게 되었습니다.
저는 이 책의 원고를 읽으며 인상적인 경험을 했습니다. 불교 책을 만드는 사람들은 재수 없지 않으면서 허무주의라는 오해도 사지 않는 방식으로 불교의 가르침을 전달할 수 있는 방법에 대해 고민합니다. 강설과 논강을 통해 <금강경>의 가르침을 쉽게 풀어낸 이 책의 원고를 읽으며 저는 그런 방법의 한 모델을 보았습니다. 불교계의 여러 숙수들이 한데 모여 종잡기 어려운 공(空)의 개념을 이리저리 곱씹고 주물럭주물럭 해 놓은 결과물이 여기 있었기 때문입니다.
공부하는 사람은 바쁘면 바쁜 대로 그게 공부인줄 알고, 아무 일 없으면 없는 대로 공부인 줄 알아야 합니다. 사람들은 바쁘면 바쁘다고 힘들어하고, 아무 일 없으면 없다고 괴로워하지요. 공부하는 사람은 이 낱낱의 일을 공부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205쪽)
불교에서는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을 보지 말고 달을 보라고 늘 이야기합니다. 이 책은 종종 공이라는 손가락을, 연기나 무상이나 무아라는 손가락을 훌쩍 뛰어넘습니다. 그러면 이 책에는 도대체 뭐가 있냐구요? 다만 그 손가락들이 가리키는 빛나는 달이 여여(如如)하게 책 구석구석에서 빛나고 있습니다. 이 책에서 그 달은 너무도 평범한 언어로 그려져 있어서 그것이 달인지 뭔지도 잘 느껴지지 않습니다. 하지만 “여래는 참다운 말을 하는 자며 실다운 말을 하는 자며 여법한 말을 하는 자며 속이는 말을 하지 않는 자며 다른 말을 하지 않는 자(如來 是眞語者 實語者 如語者 不誑語者 不異語者)”입니다. 실답고 여법하게 말하는 법은 오직 그런 평범함뿐인지도 모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