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답사의 주제는 역사의 라이벌 빅3이다.
포은 정몽주, 태종 그리고 삼봉 정도전.
눈이 하얗게 내린 올겨울중 가장 춥다는 12월 11일.
오전 9시에 대화에서 삼봉선생의 기념관으로 출발했다.
기념관에 도착하여 버스가 눈에 미끄러져 기사님과 백샘이 고생은 했지만, 암튼...
삼봉선생의 기념관이 평택 진위면에 있는 이유는 태종 이방원이 삼봉선생을 살해는 하였지만, 그를 존경하고 존중하는 마음은 컷다고 한다. 하여...삼봉의 큰아들은 살려두었다고 한다.
삼봉의 큰아들을 전라도에 위치한 군대에 보내놓고 삼봉의 정적 하륜으로부터 목숨을 부지하게 하였고, 세종대에 이르러 삼봉의 후손들이 벼슬을 할 수 있도록 벼슬길을 열어 주었다.
삼봉선생의 고향은 경상도 봉화이지만, 그의 자손대에 벼슬을 하면서 평택에 자리를 잡았고 그리하여 고종대에 이르러 삼봉선생의 모든 것을 복원시켜줬다고 한다. 그리고 평택에 사당을 세우고 사당의 편액까지도 직접 하사하셨다고 한다.
조선 왕조가 고려와 다른 성리학적 민본국가의 성격을 띠고 태어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삼봉선생의 노력과 지혜가 절대적이었다. 흔히 혁명은 목숨을 거는 일이라고 말하지만, 삼봉선생이야말로 목숨을 걸고 혁명을 주도하고 실제로 그 때문에 목숨을 잃었다. 삼봉선생의 육체적 생명은 60을 넘기지 못했으나, 그분의 정신적 생명은 왕조의 창업과 중흥, 왕조의 근대화 그리고 지금 우리가 사는 21세기에도 여전히 그 광채를 발휘하고 있다.
삼봉기념관 올라가는 길에 길게....처마 밑에 달리 고드름.
옛날에야 처마밑 고드름 보는것이 일상이었으나 도시에서 아파트에 살고부터는 고드름을 보기 어려웠는데...이곳에서...이런 고드름을...보았다.
삼봉기념관
기념관 안에 소장되어 있는 유물로는 삼봉 정도전의 진찬, 경숙택주 최씨 진찬(삼봉선생 부인), 서간문, 사물잠, 집목판등...많은 것들이 전시되어 있다.
집목판
삼봉선생은 태종시절에 역적이었기에 그의 글이나 모든것들을 접하는것은 대역죄에 해당되어 전수되지 못하고 있었는데, 정조때에 이르러 글 읽기를 좋아하는 정조가 삼봉의 글을 보고 그의 글이 종이책으로 낡아 사라지는 것을 염려하고 삼봉의 글을 많은 사람이 보기를 바라는 마음에 삼봉의 책들을 목판에 새겨서 보관하였다고 한다.
경상도 관찰사 정대용이 지휘.감독해서 제작한 목판은 경기도 유형문화제 제132호로 지정 되었으며, 당시 총258판을 제작하였다.
하지만 집목판의 중요성을 모르는 아이들이 썰매를 타다가 12개가 분실되어 새로 제작을 하였는데 유물을 함부로 다루면 안된다는 역사적 교훈을 주기 위하여 원본과 다르게 제작하여 경각심을 갖게 했다는 해설사님의 해설이 인상적이었다.
중간에 하얗고 큰 집목판이 새로 만든것이다.
삼봉선생의 친필이라고 하는데 무슨글자인지 알수가 없었다는...
삼봉선생이 부인에게 보낸편지
내용은 삼봉선생 부인이 가정일을 잘 돌보지 못하는 남편에게 신경을 써달라는 편지를 보냈는데 그에 대한 답장으로 남자가 나랏일을 하다보면 집안일은 소홀할 수 밖에 없으니 이해해달라는 내용이라고 함.
아무리 큰 재상이라도 집안일에는 소홀했나 보다.
민본제
삼봉선생의 정치적 성향은 민본이었다. 즉 백성이 중심인 정치를 해야한다는 것이다.
민본제의 현판은 도올선생이 썻다고 한다.
정도전선생의 사당 문헌사 올라가는 길
유종공종
삼봉 선생은 조선 건국 초기에 한양 도읍의 궁궐과 종묘 건축을 주도해서 와성한 후 경복궁 등 각 전당의 이름을 지었으며 인왕산 백안산 등 사산을 실측해서 도성의 범위를 확정하였다. 이와 같은 공적을 높이 평가한 태조께서 귀갑구와 아울러 유학에 관한 학문적 지식이 으뜸이요, 조선 개국 창업과 수도 한양 건설의 공로 또한 음뜸이라는 의미가 담긴 유종공종이라는 어필을 1395년에 삼봉 선생에게 하사한 것을 현액으로 제작한 것이다.
현재의 현판은 고종의 친필이라고 한다.
해설사님께서는 초등학생들이 오면 유종공종을 유짱공짱이라고 하여 공부도 짱 노는것도 짱이라고 말씀하신다고 한다.
삼봉 정도전 선생 영정
이 영정은 1994년 10월 권오창 화백에 의해 제작된 것으로 문헌사 사당내에 봉안되어 있다.
전사청
향리집안 출신으로 고조할아버지는 봉화호장 공미(公美)이고, 아버지는 중앙에서 벼슬하여 형부상서를 지낸 운경(云敬)이다. 어머니는 우연(禹延)의 딸로서 노비의 피가 섞여 있었다.
어려서 경상북도 영주에서 살다가, 아버지를 따라 개경에 와서 아버지의 친구인 이곡(李穀)의 아들 색(穡)의 문하에서 정몽주(鄭夢周)·이숭인(李崇仁)·이존오(李存吾)·김구용(金九容)·김제안(金齊顔)·박의중(朴宜中)·윤소종(尹紹宗) 등과 함께 유학을 배웠다.
1360년(공민왕 9) 성균시(成均試), 1362년 진사시에 합격하여 충주사록·전교주부·통례문지후 등을 지냈다. 1366년 아버지와 어머니가 연이어 죽자, 영주에 내려가 3년간 여묘(廬墓)하면서 지방 자제들과 동생들을 가르쳤다.
1370년 성균관이 중영(重營)되고 이색이 대사성이 되자, 성균박사가 되었다. 이듬해 태상박사가 되고, 이어 예의정랑이 되었다.
1374년 공민왕이 암살당하자 이 사실을 명나라에 고할 것을 주장하여 이인임(李仁任)의 미움을 받았다. 1375년(우왕 1) 성균사예·지제교가 되었으나, 이인임·경복흥(慶復興) 등이 친원정책(親元政策)으로 돌아가려 하고 원나라 사신이 명나라를 치기 위한 합동작전을 위해 오자, 이를 반대하고 관련되는 업무를 거부하다가 전라도 나주목 회진현 거평부곡(居平部曲)으로 귀양갔다.
1377년 고향으로 옮겨져 4년간 머물다가 유배가 완화되자 삼각산(三角山) 밑에 초려(草廬:三峰齋)를 지어 제자들에게 유학을 가르쳤다. 그러나 이곳 출신 재상(宰相)이 삼봉재를 헐어버려 제자들을 이끌고 부평부 남촌(南村)에 거주했으나 이곳에서도 재상 왕모(王某)가 별업(別業)을 만들기 위하여 헐어버려 다시 김포로 이사했다. 유배·유랑 기간에 그는 초라한 모옥(茅屋)에 살면서 향민(鄕民)과 사우(士友)에게 걸식하기도 하고 스스로 밭갈이도 했다.
1383년 함주(咸州) 막사로 동북면도지휘사 이성계(李成桂)를 찾아가 세상사를 논하고 그와 인연을 맺었다. 1384년 전교부령으로 있을 때 성절사 정몽주의 서장관으로 명나라에 가서 승습(承襲)과 시호(諡號)를 청했다. 이듬해 성균좨주(成均祭主)·지제교를 지내고, 1387년 남양부사로 나가 선정을 베풀고, 이성계의 천거로 성균관대사성이 되었다.
이듬해 이성계가 위화도회군을 일으켜 정권을 장악하자, 우왕을 폐하고 창왕을 세워 밀직부사가 되었다. 조준(趙浚)·윤소종 등과 함께 전제개혁을 추진했는데, 전국의 토지를 공가(公家)에 귀속시켜 민구(民口)수에 따라 토지를 지급하려는 철저한 개혁을 주장했다. 이 과정에서 스승인 이색과 친구인 정몽주와 의견이 달라 멀리하게 되었다.
1389년 11월 이성계·조준 등과 협의하여 우왕과 창왕 부자가 왕씨가 아니라는 이유로 폐위시키고 공양왕을 즉위시켰다. 이 공으로 봉화현 충의군(忠義君)과 윤충논도좌명공신(輪忠論道佐命功臣)에 봉해지고, 삼사좌사(三司左使)가 되었으며 공신전 100결과 노비 10명을 받았다.
1390년 성절사 겸 변무사(聖節使兼辨誣使)로 명나라에 가서 윤이(尹彛)·이초(李初)가 이성계가 명을 치려한다고 모함한 것을 변명하고 돌아와 동판도평의사사사 겸 성균관대사성이 되었다. 1391년 삼군도총제부가 설치되자 우군총제사가 되어 이성계·조준과 함께 병권을 장악했다. 이어 개혁반대세력을 제거하려는 일환으로 성균관 학생들과 함께 척불(斥佛) 상소를 올려 불교 배척의 기치를 들고, 이색과 우현보(禹玄寶) 등을 신우(辛禑)·신창(辛昌) 옹립의 죄를 물어 처형할 것을 상소했다.
그해 9월 평양윤에 임명되었으나 반대세력들이 "가풍(家風)이 부정(不正)하고, 파계(派系)가 불명함에도 큰 벼슬을 받아 조정을 어지럽히고 있다"라고 탄핵하여 봉화로 유배당하고, 이어 나주로 옮겨졌으며 두 아들은 서인(庶人)이 되었다. 이듬해 봄 귀양에서 풀려나 영주로 돌아왔다.
이성계가 해주에서 사냥하다가 낙마(落馬)하여 부상을 입자 이성계 세력을 제거하려는 정몽주 등에 의해 "천지(賤地)에서 기신(起身)하여 당사(堂司)의 자리를 도둑질했고, 천근(賤根)을 감추기 위해 본주(本主)를 제거하려고 모함했다"라는 탄핵을 받고 보주(甫州)의 감옥에 투옥되었으나 곧 풀려나 개경으로 소환되어 충의군에 봉해졌다.
조선개국과 개혁정치
1392년 4월 정몽주가 이방원(李芳遠)에게 살해되고 반대세력이 제거되자, 7월 조준·남은(南誾) 등과 함께 이성계를 새로운 왕으로 추대하여 조선왕조를 개창했다. 개국직후 17조목의 편민사목(便民事目)에 관한 태조의 교지(敎旨)를 지어 새 왕조의 국정방향을 제시했다.
이어 개국공신 1등으로 문하시랑찬성사·동판도평의사사사·판호조사·겸판상서사사·보문각대학사·지경연예문춘추관사·겸의흥친군위절제사를 겸직하여 정권과 병권을 장악했다. 같은 해 10월 사은사 겸 계품사로 명나라에 가서 조선 건국의 당위성을 알렸다. 1393년(태조 2) 7월 문하시랑찬성사로 동북면도안무사가 되어 여진족을 회유했으며, 〈문덕곡 文德曲〉·〈몽금척 夢金尺〉·〈수보록 受寶〉 등의 악사(樂詞) 3편을 지어 왕에게 창업의 쉽지 않음과 수성(守成)의 어려움을 반성하게 하는 자료로 삼게 했다.
1394년 1월 판의흥삼군부사로 병권을 장악하여 병제개혁에 대한 상소를 올리고, 3월 경상·전라·양광 삼도도총제사가 되었다. 조선왕조의 제도와 예악(禮樂)의 기본구조를 세운 〈조선경국전 朝鮮經國典〉부병제(府兵制)의 폐단을 논한 〈역대부병시위지제 歷代府兵侍衛之制〉를 찬진했다. 한편 태조가 세자로 책봉한 강비(康妃) 소생 방석(芳碩)의 세자이사(世子貳師)로 교육을 담당했다.
1394년 8월부터는 고려의 구신과 세족이 도사리고 있는 개경을 피해 새로운 도읍 건설을 추진하여, 서울의 궁궐과 문의 이름을 짓고 수도의 행정분할도 결정했다. 그해 〈심기리편 心氣理篇〉을 지어 불교·도교를 비판하고 유교가 실천 덕목을 중심으로 인간문제에 가장 충실하다는 점을 체계화했다. 1395년 1월 정총(鄭摠) 등과 함께 〈고려국사 高麗國史〉를, 6월에는 정치제도·재상·대관(臺官)·간관(諫官)·부병제도·감사(監司) 등의 임무와 실례를 논하고 방침을 제시한 〈경제문감 經濟文鑑〉을 찬진했다.
1396년 명나라에서 그가 추진하던 공료(攻遼)운동에 불안을 느껴 표전문(表箋文)을 트집 잡아 명나라에 입조(入朝)하라는 압력을 가했으나, 병을 이유로 거부했다. 1397년 사은사가 가지고 온 자문(咨文)에서 명나라는 그를 '화(禍)의 근원'이라고 했다. 그해 6월 요동정벌을 목적으로 진도(陣圖) 훈련을 하면서 왕에게 출병을 요청했으나 조준의 반대로 실행하지 못했다. 그
해 12월 동북면도선무순찰사가 되어 주군(州郡)의 구획을 확정하고 성보(城堡)를 수리했으며 호구와 군관(軍官)을 점검했다. 또한 〈경제문감별집 經濟文鑑別集〉을 저술하여 군주의 도리를 제시했으며, 〈불씨잡변 佛氏雜辨>을 저술하여 불교의 여러 이론을 비판했다. 1398년 진법 훈련을 강화하면서 요동정벌을 추진하고, 태조로 하여금 절제사를 혁파하여 관군(官軍)으로 합치고 왕자와 공신들이 나누어 맡고 있던 군사지휘권을 박탈하게 하고, 이방원을 전라도로, 이방번(李芳蕃)을 동북면으로 보내려 했으나, 8월 이방원 세력의 기습을 받아 방번·방석·남은·심효생(沈孝生) 등과 함께 살해되었다(→ 방원의 난). 이때 네 아들 가운데 유(游)가 살해되고, 담(湛)은 집에서 자살했다. 종친을 모해(謀害)했다는 죄명이 씌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