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9년도에 부산에서 부목사로 목회하고 있던 때의 일입니다. 하루는 심방을 마치고 교회 사무실로 들어가기 위해서 큰 길에서 벗어나 골목길을 들어서고 있는데, 길에서 놀던 아이들이 길가에 모여서 웅성거리며 겁에 잔뜩 질려 당황해 하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차를 세우고 내려서 아이들이 있는 곳에 가 보았습니다. 동네 골목길에서 TUBE TYPE의 자동차 폐타이어를 가지고 놀다가 4, 5살 정도 되어 보이는 한 아이가 타이어에 넘어지면서 정강이 골절이 된듯했습니다. 갑작스런 사고로 그 타이어를 가지고 같이 놀던 아이들과 형이 겁에 질려 어쩔 줄을 모르고 있었습니다.
상황이 너무 급한 나머지, 다친 아이를 제 차에 태우고 어디로 갈까 고민하다가 마침, 교회에서 멀지 않는 곳에서 신경외과병원을 하시는 안수집사님이 계셔서 그 병원으로 아이를 데리고 갔습니다. 병원에 도착해서, 그 집사님을 찾아서 아이 치료를 부탁드렸습니다. 그 때, 집사님이 놀라면서 저를 보자 말자 “목사님, 교통사고입니까?”하고 물으시는 겁니다. 그래서 제가, “집사님 교통사고가 아닙니다.” 하면서 아이를 병원까지 데리고 온 상황을 말씀드렸습니다. 제 말씀을 다 듣고, “예, 목사님 그러셨군요. 걱정하지 마십시오”하면서 치료해 주실 줄 알았는데, 급한 치료는 하지 않고, 아파서 울고 있는 아이를 옆에 두고, 한숨을 쉬시면서 큰 걱정부터 하셨습니다.
“목사님, 교통사고도 아닌데 왜 아이를 목사님 차에 태우고 오셨습니까? 큰 일 났습니다.” 하시는 겁니다. 그래서 “왜 그러십니까? 어서 치료해 주시지 않고요?” …. “이 아이 부모가 이 사실을 압니까?” 그러시는 겁니다. “골목에서 놀다가 다친 아이를 급하게 데려왔는데, 부모님들이 알 일이 있습니까? 아직, 모릅니다. 그러나 현장에서 같이 놀던 아이들과 다친 아이의 형이 있어서, 그 상황을 잘 알고 있습니다.” 했지만, 여전히 걱정하시는 겁니다. 어쨌든, 제가 그 아이의 보호자 신분이 되어서 우선 치료하기로 했습니다.
그리고는 제 일을 보기 위해서 교회 사무실로 갔습니다. 가서 길에서 있었던, 사건을 교회 사무실 직원과 다른 목사님들께도 이야기해 드렸습니다. 그 때, 교회 버스를 운전하시는 기사 집사님이, 목사님 큰일 났다는 겁니다. 병원에서 들었던 똑같은 이야기를 하시는 겁니다. “집사님, 설마 그러겠습니까? 제가 아이를 위해서 한 일인데….” 그러면서, 그 집사님이 제게 한 가지 충고를 해 주셨습니다. 저는 집사님의 그 충고가, 목사의 한 사람이기 이전에, 한 인간으로서 저를 참 고민스럽게 하는 말이었습니다. 집사님이 무슨 충고를 하셨는가 하면, “목사님 앞으로는 운전하시다, 길에 사람이 쓰러져 죽어가는 사람을 보더라도 못 본체 하고 가십시오. 그 사람을 병원에 데려가면 다 뒤집어씁니다….” 저는, 집사님의 그 말에 동의할 수가 없었습니다. “사람이 죽어가는 데, 어떻게 못 본체하고 그냥 지나갈 수 있습니까? 그건 잘못된 생각입니다”하고 반론을 제기했지만, 집사님은 여전히 그렇게 하면 안 된다는 당신의 생각을 꺾지 않았습니다.
저녁이 되어 낮의 그 아이가 걱정이 되어서 병원에 가 보았습니다. 노동일 하시는 아빠와 파출부하시는 엄마, 친지들이 와 있었습니다. 경제적인 형편이 참 어려운 집이었습니다. 위로차 병원에 들렀다가, 그날 저녁 저는 사전에 가족들에 의해서 짜여진 각본에 따라 어이없는 교통사고가해자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 부모가 하는 말이, “당신이 교통사고를 내지 않았으면 왜, 이 아이를 병원에 데리고 왔겠느냐?”논리였습니다. 막무가내였습니다. 속으로는 참 불쌍한 사람들이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너무 섭섭했습니다. 결국, 제가 아이를 제 차에 태우고 병원에 데려다 준 도의적인 책임 때문에, 그 때 당시 돈으로 50만원을 주고 그 오해의 문제를 해결했습니다. 그 일 이후에, 한 가지 배운 것이 있습니다. 선한 일도 지혜롭게 할 필요가 있구나 하는 겁니다. 제가 지혜롭지 못하였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여러분 중에 혹 이와 비슷한 일을 당하신 분은 없습니까? 본의 아니게 오해받고, 손해 본 적은 없습니까? 아니면, 그런 상황을 만났을 때, 그 現場을 外面하신 적은 없습니까? 외면하셨다면,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오늘 비유 말씀은 우리가 너무 잘 아는 말씀입니다.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 만나 거의 죽게 되어 버려진 사람을 도와 준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이야기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비유 末尾에서, 묻고 대답하십니다. “네 생각에는 이 세 사람 중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 그 때 예수님은 이렇게 명령하십니다.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이 비유를 보면서 많은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어려움 당한 강도 만난 자와 같은 자에게 선을 행하라는 윤리적인 교훈을 가르치기 위한 말씀이라고 생각합니다. 만일 그렇다면, 저와 여러분은 선을 행하는 윤리적인 삶을 살고 있습니까? 그렇지 않습니까? 개인적인 차이는 있겠지만, 상대적인 면에서 우리는 누구나 예외 없이 나름대로의 윤리적인 삶을 사는 자들이다 저는 생각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강도 만난 자에게 자비를 베푼 사마리아 사람의 행동과 같이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ꡕ고 명령하시는 의도는, 우리에게 윤리적인 삶을 사는 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명령하기 위함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보다 더 깊은 관심은, 강도 만난 자에게 자비를 베푼 사마리아 사람의 그 행위 속에서 드러나고 있는 복음 을 말씀하는데 있습니다. 우리는 이 비유 속에서 드러나고 있는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복음을 발견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고 명령하시는 그 명령 속에서 말씀하시는 복음이 무엇일까요?
이 비유에 나타난 예수님의 복음을 발견하려면, 우리는 먼저 한 가지 문제를 점검해 보아야 합니다. 여러분 각자가 고민하면서 생각해 보시기를 바랍니다. 비유에 나오는 이야기처럼,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났습니다. 강도들이 그 사람의 옷을 벗기고 때려 거의 죽은 것을 버리고 도망갔습니다. 마침 한 제사장이 그 길로 내려가다가 강도 만난 자를 보고는, 피하여 지나갔습니다. 또 이와 같이 한 레위인도 그곳을 지나게 되었는데, 그도 역시 강도 만난 자를 보고는 피하여 지나가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어떤 사마리아 사람은, 여행하는 중 그곳에 이르러 강도 만난 자를 보고는 불쌍히 여겨/ 가까이 가서/ 자기가 가지고 있는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 싸매고/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었습니다/ 그 이튿날 사마리아 사람이 주막 주인에게 ’데나리온 둘’을 주며 말합니다/ 이 사람을 돌보아 주십시오/ 비용이 더 들면, 내가 돌아올 때에 갚으리이다.
우리는, 여기서 매우 중요한 한 가지 질문을 해야 합니다. 강도 만난 자를 본 세 사람–제사장과 레위인, 사마리아인 모두가 강도 만난 자를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있었는가? 없었는가? 아니면 사마리아 사람 외에 ‘제사장’과 ‘레위인’에게는 아무런 마음에 부딪힘도 없었는가? 하는 점입니다. 강도 만난 사람을 보고도, 피하여 급히 그 현장을 도망치듯 사라지는 제사장과 레위인에게는 정말 아무런 마음의 동요가 일어나지 않았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들 역시 사마리아 사람과 같이 동일한 마음이 있었을 겁니다. 부득이하게 그 사건 현장에서 급히 도망쳐 가곤 있지만, 그 발걸음이 무거웠을 겁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그들은 그 현장을 피하여 강도 만난 자를 버리고 그냥 갔느냐는 겁니다. 바로 여기에, 예수님께서 이 사건과 비유를 통해서 우리에게 말씀하고자 하시는 복음이 드러나고 있습니다.
제사장과 레위인이, 강도 만나 맞아서 죽어가고 있는 것을 보고도 그를 돌보아 주지 않고, 도망갈 수밖에 없었던 그들의 ‘그 행위 이유’에 대하여 말씀하고자 하시는 겁니다. 다시 말하면, 그들이 강도만난 자를 버리고 도망갈 수밖에 없는 그 이유理由를 넘어서는 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the Gospel of Jesus Christ"이라고 말씀하시려는 겁니다.
제사장과 레위인이 강도 만난 자를 보는 그들의 아픈 마음과는 달리/ 그를 버리고 죽게 내버려둔 채 도망가는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구약 레위기에서 말하는 제사장과 레위인이 지켜야 하는 제의적 정결/ 성결의 문제/입니다(레 21, 1-2과 11). 구약의 정결법에 따르면, 제사장과 레위인은 죽어가는 사람이나 죽은 사람의 시체를 만질 수가 없습니다. 접촉하면, 부정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백성 앞에서 제사장의 직무, 레위인의 직무를 감당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 문제 때문에, 제사장과 레위인은 강도 만난 자 앞에서 고민하게 된 것입니다. “그를 도울 것인가? 아니면, 못 본 척하고 지나칠 것인가?” 이것은 그들에게 있어서 매우 중요한 실존적인 문제였습니다. 율법을 지킬 것인가, 사람의 생명을 구할 것인가의 문제 앞에 직면한 것입니다.
그냥 지나치자니, 양심의 방망이가 가슴을 두드리고, 그를 돕자니 그 지엄한 정결의 규례를 파기하는 꼴이었습니다. 죽어가는 그 사람을 살리려면 당분간 성직자의 신분과 길을 포기해야만 했기 때문입니다. 결국, 그들은 강도 만난 사람을 피하여 도망치는 쪽을 선택했습니다. 이 비유는, 선한 사마리아인의 자비를 베푼 단순한 그 행위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이와 같은 비복음적인 제사장과 레위인의 삶의 방식을 꾸짖는 말씀입니다.
나아가, 역사적인 상황에서는 도저히 사마리아 사람이 유대인을 도와줄 수 없는 원수 같은 관계에 있지만, 그것을 넘어서서 강도만나 죽어가는 그를 불쌍히 여기고, 가까이 가서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 싸매고,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주는 그 자비慈悲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라는 겁니다. 다시 말하면, 사마리아 사람을 통해서 인간가치, 생명가치를 귀히 여기는 바로 그 자비로운 마음이,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복음이라는 겁니다. 이것은 단순한 행위 그 자체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복음은, 생명가치와 인간가치에 있다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나라는, 정해진 직무와 역할을 하고 있는 사람들 속에서/ 잘 짜여진 체제와 틀과 이념과 교리와 구조 안에서/ 사람들이 보이지 않게/ 소중한 생명과 인간됨이 죽어가는 그런 나라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사람을 가장 귀히 여기는 바로 거기에서, 이루어지는 생명가치를 가진 나라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인간가치人間價値이고, 생명가치生命價値입니다. 예수님은 지금 바로 이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말씀하고 있는 겁니다.
지금 생각하면, 참 철이 없었구나 생각되어 부끄럽습니다만, 목사 안수 받을 때, 하나님께 나름대로 약속하면서 기도한 것 몇 가지가 있었습니다. 그 중 한 가지 기도는, “하나님, 제가 목사 안수 받으면 목회하면서, 결혼 전에 동거하거나 혹은 아이를 낳고 산 사람들의 결혼식은 주례하지 않겠습니다”하고 약속기도를 했습니다. 저는, 그것이 하나님 기뻐하시는 바른 목사상 (牧師像)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저의 첫 번 결혼주례를 제가 결혼주례하지 않겠다고 하던 그런 경우의 부부가정을 주례하게 하셨습니다.
양가가 다 예수 믿는 가정이었지만, 부모님의 허락과 축복을 받지 못하고 두 사람이 동거하며 살다가 아이도 낳고, 늦었지만 부모님의 허락을 받아 결혼하게 된 가정이었습니다. 그 가정의 결혼주례 요청이 교회에 왔는데, 교역자 회의 시간에 그 결혼 주례 건에 대한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그 때 몇 가지 이야기가 나왔는데, 결혼식도 하기 전에 동거하고 살면서 아이까지 낳은 부부의 결혼식을 ‘거룩한 본당’에서 할 수 있느냐? 는 부정적인 안이 나왔습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는, 그런 가정의 주례를 체면이 있지 어떻게 담임목사가 주례할 수 있느냐는 이야기였습니다. 그리고는 한 참 동안 침묵만 흘렀습니다.
그 때, 제 가슴을 쿡쿡 찌르는 하나님의 음성이 있었습니다. ㅁㅁ야, 박 목사 네가 그 결혼주례 해주면 안 되겠니? 하나님 제가 목사 안수 받을 때, 뭐라고 기도했습니까? 바로 이런 가정 주례 안 해주는 목사되겠다고 약속하지 않았습니까? 저는 못합니다. 그래도, 자꾸 제 안에 그 도전이 끊이질 않았습니다. 침묵이 흐르는 그 분위기 속에서, 제가 조용하게 그 가정의 주례를 하겠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결혼예식 장소는 본당이 아니라, 당연히 교육관이었습니다. 참 마음이 아팠습니다. 본당에서 하도록 했으면 더 좋았을 텐데….
그 때, 저는 31살 나이에 저보다 나이 많은 33살 신랑과 신부의 첫 결혼주례를 했습니다. 저는 그 가정 결혼주례를 맡으면서, 하나님 앞에서 무릎을 꿇고 회개의 기도를 드렸습니다. “하나님 제가 잘 못했습니다. 하나님 마음도 모르는 철없는 목사였습니다. 용서해주십시오….” 그 때, 하나님께서 제게 깨닫게 해 주신 복음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남이 알지 못하는 인생의 아픔과 눈물이 있는 그런 가정, 그런 부부라 할지라도, 예수 안에서 행복하게 아름다운 인생을 살 권리가 있다는 거였습니다. 그들도 예수 안에서 행복하고 아름다운 가정을 가꾸고 살 권리와 특권이 있다는 거였습니다. 그래서 그 때 이후로 저는 기도제목을 바꾸었습니다. “하나님, 배가 불러 만삭된 부부도 기쁨으로 주례해 주겠습니다.” 그렇다고 오해하는 분은 없으시겠지요? 결혼 전에 얼마든지 동거해도 좋고, 아이 낳고 살아도 좋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자비를 베푼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 결론에서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명령하시는 그 말씀에서 예수님은 우리에게 두 가지 측면의 복음을 말씀합니다. 첫째는,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ꡕ는 말씀은, 너도 가서 선행을 행하라는 단순한 윤리명령으로 이해하면 안 됩니다. 이것은, 인간가치와 생명가치를 앞에 두고도 내가 그것보다 더 귀하게 여기는 것 때문에, 그 사람의 고귀한 인간가치와 생명이 죽어가는 것을 그대로 내버려둘 수밖에 없는 너의 그 삶의 그 이유를 포기하라는 말씀입니다. 변화되라는 말씀입니다. 제사장과 레위인이 정결규례를 지키기 위해서 강도 만난 그 죽어가는 자를 내 버려두고 피하여 도망가는 것은 복음이 아니라는 겁니다. 오히려 사마리아 사람처럼, 그 사람의 생명을 구하기 위하여, 원수관계까지도 허물고, 죽어가는 강도만난 자의 생명을 구하는 그것이 복음이라는 겁니다.
또 하나는, 복음은 머리와 지식으로 정리된 '사고방식思考方式'이 아니라 인간존재와 인간의 생명가치를 존중하는 삶의 방식이요, 생활방식生活方式 이라는 겁니다. 인간의 생명을 귀히 여기고, 존중하는 지금 여기의 삶의 방식이요, 생활방식이 복음입니다. 그러기에 야고보 사도는 “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 만일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 너희 중에 누구든지 그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덥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하며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약 3, 14-16).
오늘 이 비유 말씀을 통하여, 저는 우리 교회가 앞으로 무슨 일을 하든지 그 사역의 중심과 정신이 바로 이 복음 위에 기초해야 한다고 믿습니다. 인간가치를 회복하는 사역이어야 합니다. 인간의 생명을 귀히 여기는 사역이어야 합니다. 죽어가는 사람 앞에서, 정결규례를 지키기 위하여, 강도 만난 자를 피해 간 제사장과 레위인의 삶의 방식이 아니라, 사마리아 사람의 삶의 방식이 우리의 사역과 삶의 기초가 되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우리 교회는, 성전에 기도하러 올라갔던 바리새인처럼, “서서 따로 기도하면서,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세리와도 같지 않고,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는 것과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는 것”으로 감사하는 교회가 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그것보다는, 가슴을 치며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입니다 겸손하게 자신을 낮추고, 나아가 삭개오처럼 자신의 재산의 절반이라도 가난한 자에게 나눠주고, 토색한 것 있으면 네 갑절이나 갚는 변화된 삶으로, 주님의 기쁨이 되는 하나님의 자녀가 많은 교회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인간의 가치와 생명 가치 때문에 고민하면서, 소자 하나라도 귀하게 여기고, 살리기 위해서 내게 생명처럼 귀하게 여겼던 삶의 방식과 교리, 가치관들까지도 버릴 수 있는 사마리아 사람과 같은 사람들 때문에, 이 땅에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감격과 기쁨 가득한 감사가 넘치는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아멘.
첫댓글 구세군 사관으로서의 사역을 위해 꼭 한 번 생각해 볼 필요가 있는 말씀이라고 여겨졌습니다. 복음과 구제의 양 날개를 펴고 날개치며 올라가기 위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