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산대성께서 백의군왕(白衣君王)·백의장상(白衣將相) 공사(公事)를 행하실 때, 대부분의 친자종도(親炙從徒)들은 큰 복(福)을 얻을 것이라 기대하였으나, 오히려 감옥에 갇히는 등 큰 화(禍)를 당하게 되어 증산대성을 떠났다. 믿음을 저버리지 않은 종도들 역시 증산대성의 화천(化天) 이후에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당황하였으나, 증산대성께서 이미 예정하신 천지공사(天地公事)의 뜻대로 결국 각자 포교(布敎)의 길로 나아갔다. 수석종도(首席從徒)인 태운(太雲)은 미륵불교(彌勒佛敎)를 창설하여 증산대성의 도(道)를 널리 전하였다.
증산대성(甑山大聖)의 화천(化天) 후 종도(從徒)들도 크게 낙심하여 각기 흩어져 돌아가서 어찌할 바를 모르더니 다음달 7월 그믐께 차경석(車京石)과 김광찬(金光贊)이 김태운을 방문하고 장래 일을 의논할 새 차경석이 말하기를 “대성(大聖)께서 당신이 곧 미륵불이라고 말씀하셨고 또 화천하실 때 금산사(金山寺)로 들어가리라 하셨으니 우리가 이제 미륵전(彌勒殿)에 참배하여 당신을 대한 듯이 정성을 들여 취할 길을 생각하면 반드시 당신의 감화를 받아 깨달음이 있으리라“하니 모두 옳게 여겨 치성물(致誠物)을 준비하여 금산사에 들어가니 한 늙은 여승[1]이 돌문 밖에서 기다리다가 환영하며 말하기를 “어젯밤에 금산사 여러 불타(佛陀)와 오백나한(五百羅漢)과 호위신장(護衛神將)들이 일제히 돌문 밖에 나와서 어느 거룩한 행차(行次)를 맞아들이는데 그 행차 뒤에 그대들이 따라오는 꿈을 꾸었으므로 이제 여기 나와서 기다리더니 그대들의 이름을 보게 되니 어찌 기이한 일이 아니리요“하였다. 일행(一行)이 미륵전에 들어가 참배하고 종이에 옥황상제지위(玉皇上帝之位)라고 써서 미륵불 몸에 붙이고 치성을 올린 뒤에 그 위패(位牌) 종이를 떼어 안고 사실(私室)에 가서 벽에 붙여 모시고 각기 정심(正心)하여 대성(大聖)을 사모하더니 태운이 문득 신안(神眼)이 열리거늘 대장전(大藏殿)에 들어가서 석가불(釋迦佛)에게 장래 일을 물으니 석가불이 책을 들고 입을 열어 가르치려 할 즈음에 미륵불(彌勒佛)이 들어와서 책을 빼앗고 입을 막는지라 태운이 물러나와 일행에게 사유(事由)를 말한 후 공부를 파하고 돌아오니 이 날이 실로 8월 1일[2]인 것을 깨달았었다. (甑山敎史 41~42쪽)
태운(太雲)이 언제, 어떤 방식으로 포교를 시작하였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증산교사(甑山敎史)』에 의하면, 계축(癸丑, 1913)년 봄, 태운이 대흥리(大興里)에 가서 고수부(高首婦)를 뵙고 『현무경(玄武經)』을 등본(謄本)하여 돌아온 뒤, 그 오묘한 이치를 잠심추구(潛心追求)하였다고 한다. 이해(1913) 가을에는 장기동(張基東)과 장기준(張基準)이 찾아와, 두 사람을 데리고 본소(本所)에 가서 고수부를 뵈었으며, 이로부터 교단 일에 협력하기로 마음을 정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증산교사』 64쪽).
그러나 이는 당시의 정황을 고려할 때 현실성이 떨어진다. 당시는 증산대성께서 곧 재생신(再生身) 하실 것이며, 재생신(再生身)후 증산대성께서 믿음을 유지했던 사람들에게 부귀영화(富貴榮華)를 내릴 것이라며 포교를 했었다. 여러 친자종도(親炙從徒)들이 증산대성의 재생신 후 자신이 증산대성의 바로 밑 자리에 오르며, 자신 교파의 사람들은 영원한 복록을 누릴 것이라며 포교를 하였는데, 이러한 포교방식에 고수부(高首婦)가 중심에 설 여지가 없다. [3]
태운은 임인(壬寅, 1902)년부터 증산대성(甑山大聖)을 가장 오랜 기간 모신 수석종도(首席從徒)였으며, 임술(壬戌, 1862)년 생(生)이다. 반면, 고수부는 경진(庚辰, 1880)년생으로 조혼(早婚, 결혼을 일찍 하는 풍습)이 일반적이던 당시 사회적 관습을 감안하면, 태운은 고수부의 아버지뻘 되는 나이였다. 더욱이 남존여비(男尊女卑)가 심하였던 시대상황에서, 태운이 고수부를 모시고 포교했다는 것은 사회적 관념상 받아들이기 어려운 설정이다.
고수부가 신해(辛亥, 1911)년 성령(聖靈)의 접응(接應)을 받아 큰 신력(神力)을 얻었다고 전하나, 그보다 1년 전인 경술(庚戌, 1910)년, 김경학(金京學)이 태을주(太乙呪)를 읽어 죽은 어머니를 되살렸다는 일화가 널리 알려지며, 태을주를 읽으면 큰 신력이 생긴다는 인식이 이미 퍼져 있었다. 태운은 증산대성 생존(生存)시 이미 신명(神明)의 회산(會散)을 볼 수 있었고, 잠시나마 증산대성께서 도통(道通)을 열어 주었다.[4] 이런 수석종도(首席從徒) 태운(太雲)이 고수부를 중심으로 포교(布敎)를 했다는 것은 극히 현실성이 낮다. 더욱이 당시 일제의 기록과 동시대를 살았던 이능화(李能和)의 저술에, 고수부가 종도들을 소집하여 교단을 창설하고 포교 활동을 전개하였다는 기록은 존재하지 않는다.
증산대성 화천(化天) 후, 믿음을 유지하였던 친자종도(親炙從徒)들이 힘을 합쳐서 정읍(井邑)에 교당(敎堂)을 세워 포교(布敎)를 했으며, 당시 고수부(高首婦)의 신력(神力)이 큰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태운(太雲) 및 친자종도들이 고수부를 중심(中心)으로 모시고 포교(布敎)를 한 것은 아니다.
당시 상황을 기록한 일제(日帝)의 일부 기록은 다음과 같다.
태을교(太乙敎) 포교에 관한 건[1]
이번 태을교 포교에 관하여 柳必憲 외 10명은 동교 사무소를 경성부 笠井町 20번지 유필언의 집에 설치하고 다음과 같은 취지서를 발표했다. 동 교는 지금으로부터 20여년전 姜一淳(호 증산)이라는 자가 전라북도에서 일종의 미신교인 훔치교(吽哆敎)라는 것을 창설하여 포교를 개시한 데에서 기원한다. 그 후 명치42년(1909) 강일순의 고제(高弟) 김형렬(金亨烈)이라는 자가 동교의 교의를 계승하여 태을교(太乙敎)라 칭하는 일파를 일으켜 여전히 미신을 설파하고 민심을 유혹하여 우민의 재화를 편취하는 등 행위를 하므로 그동안 발견할 때마다 엄중 처분해왔다. 이번에 그 잔당 10여 명은 종래의 미신을 버리고 널리 세도인심(世道人心)을 융성하게 하겠다고 하여 그 재흥을 기도하기에 이른것이다. 또한 참고로 훔치교(吽哆敎), 태을교 및 선도교(仙道敎)의 유래를 첨부한다.
태을교(太乙敎)와 선도교(仙道敎)의 유래
강일순은 1909년 음 1월 전기한 김형렬(金亨烈)에게 와서 훔치교(吽哆敎)의 포교에 주력했는데 동년 음 6월24일 병을 얻어 객사하자 그동안에 고제(高弟)가 된 김형렬(金亨烈)은 일순(一淳)의 명을 받들어 그 유지를 계승하여 다른 고제(高弟)와 함께 “훔치(吽哆)의 교리는 심원하고 그 근원을 유불선의 3교에 소급하여 그 장점을 취한 것이다. 이 점은 실로 본교가 다른 종교보다 우월하여 단연 다른 종교의 추종, 능가를 허락하지 않는 바이다.”라고 하여 오로지 포교를 힘써 했다. 대정원년(1912) 김형렬(金亨烈)과 차경석 두 명은 세력항쟁의 관계에서 서로 의견을 달리한 결과, 김형렬(金亨烈)은 결국 주문의 모두인 두 글자를 택하여 이름을 태을교(태을이란 불교에서 공중에 태을궁이라는 것이 있는 것을 말한다.)로 고치고 이래 점점 교세를 부식하기에 노력한 결과, 충청남북도, 전라남북도 및 경상남북도 각 도에 걸쳐 다수의 신도를 증가하기에 이르렀지만 일시 교세가 쇠퇴하여 오늘에 이르렀다. 차경석(車京石)은 김형렬(金亨烈)에 대항하여 선도교(仙道教)라는 일 분파를 창설하고 각지에 전전하여 신도를 모집했다.
당시 생존했던 역사학자 이능화(李能和)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강일순(姜一淳)에게 고제(高弟) 세 사람이 있었는데 차경석(車京石: 정읍 사람), 김형렬(金亨烈: 전주 사람), 이치복(李致福: 부안 사람)등이 었다. 강일순(姜一淳)이 죽은 뒤에 이 세 사람들이 교(敎)의 취지를 전파하더니 갑인(甲寅 1914)년에 이르러서는 신도 수가 수천명이 되었는데 서로 분쟁이 생겨 김형렬(金亨烈)이 제일 먼저 분립(分立)하였고 병진(丙辰 1916)년간에 와서는 이치복(李致福)이 채사윤(蔡士允)등과 함께 다시 분리하여 별파를 세웠다 - 조선도교사. 이능화 339~340쪽. 1992.1,10 보성문화사
조선(朝鮮)의 유사종교(類似宗敎) 일부[2]
이와 전후하여 김형렬(金亨烈)도 또한 강일순(姜一淳)을 교조(敎祖)로 하는 일파를 세워 이를 태을교(太乙敎)라 했으므로, 경석(京石)은 이에 대해 자파를 선도교(仙道敎)라 이름짓고 1916년 자택에서 교무를 분장하는 24방위의 임직을 두어 내부 조직을 굳히고 이듬해 1917년 이후 스스로 각지를 순회하며 비밀리에 포교하였다
[1] 연구논문 “법정사 항일운동 주동세력의 성격에 관한 재검토” 윤소영 저 에 기록된 “태을교 포교에 관한 건(1920년 6월 1일 高警 제17263호)”에 기록된 내용이다. 일제의 보고서 내용이라 세세한 부분에서는 사실과 다를 수 있다. 그러나 일제(日帝)의 시각이라 증산계열 내부의 종통(宗統) 문제로 부터는 자유로운 객관적인 시각일 수 있다.
[2] 조선(朝鮮)의 유사종교(類似宗敎) 249쪽 계명대학교 출판부 1991년 3월 5일 발행
[1] 이 여승은 김경학(金京學) 성도(聖徒)의 삼종수(三從嫂: 팔촌 형제의 아내)이다.
[2] 증산대성께서 화천하시기 4일 전인 기유(己酉 1909)년 6월 20일 종도들에게 말씀하시기를 “8월 1일에 환궁(還宮)하리라“(甑山敎史 40쪽) 하셨다
[3] 태을교를 열심히 신앙하고 또 다액의 금전을 기부한 자는 갑자년(甲子 1924)년 훔치교[본교는 태을교의 전신임]의 개조 강일순 선생이 재탄(再誕: 재생신)하여 동양의 맹주로 되어 고위 고관을 받을 수 있으며, 또 그 때 태을교도 이외의 자는 재산 전부를 몰수하여 태을교도들은 그 분배를 받을 수 있다. 금년(1919년) 11월 6일(음력 9월 14일) 전주포교당에서 김형렬은 30여명의 신도에 대하여 훔치교(吘哆敎) 교조 강일순 선생이 재생(再生)하여 동양의 맹주가 되면 조선은 독립하고 자기는 재상(宰相)이 된다. – 대정 8년(1919년) 12월 26일자 고경 36610호. 태을교도 검거에 관한 건. 공훈전자사료관
증산대성의 갑자(甲子 1924)년 재생신(再生身)을 믿고 포교를 한 것은 당시 보천교(普天敎) 및 조정산(趙鼎山)의 무극도(无極道) 등의 기록에서도 확인된다.
[4] 어느 날 말씀하시기를 형렬아 네가 여러 번 도통주기를 소청하였으니, 오늘 너에게 도통 주는 것을 허락하노라. 말씀이 떨어지자 삼계(三界)가 밝게 빛나고 삼생(三生)이 밝게 보이며, 일원세계(一元世界)가 눈 안에 있고 사해중생이 마음에 떠오르며, 모든 이치가 아득히 깊고, 만상(萬象)이 오묘하게 빽빽이 들어섰으며 서쪽 나라를 떠서 가보고, 천제(天際)를 새와 같이 날아보고 풍운조화(風雲造化)가 마음대로 이루워지고 둔갑(遁甲)이 마음대로 이루어져서, 몸을 감추기도 하며 천지가 한 마음이고 유불선(儒佛仙) 삼교(三敎)를 사용하여 알지 못한 것이 없고, 능하지 못한 것이 없느니라. 형렬이 기뻐서 어찌 할 바를 모르더니, 며칠 되지 아니하여 명을 거두시니, 말씀이 떨어지자 밝음이 없어지고 겨우 신명이 나가고 들어옴을 보고, 약간의 문답을 할 수 있더라 – 이중성(李重盛) 천지개벽경(天地開闢經) 계묘편(癸卯篇) 구장(九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