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삼릉
조선시대 왕릉군이다. 희릉, 효릉, 예릉의 3릉이 서울 서쪽에 있다고 해서 서삼릉이라고 한다. 희릉은 조선조 제 11대 중종의 계비인 장경왕후 윤씨의 무덤이고, 효릉은 조선조 제 12대 인종과 그 비인 인성왕후 박씨의 무덤이며, 예릉은 조선조 제 25대 철종과 그 비인 철인왕후 김씨의 무덤이다. 또한 역대 3세자의 무덤인 의령원(사도세자의 맏아들인 의소세손), 효창원(정조의 맏아들인 문효세자), 소경원(인조의 맏아들인 소현세자)이 있고, 역대의 후궁, 왕자, 공주, 옹주 등의 무덤 51기와 역대 왕의 태가 안장되어 있는 태실이 있다.“조선 왕실의 생명 존중 사상이 담긴 태실”서삼릉 경내에는 태실 54기가 함께 모셔져 있다. 태실을 모실 곳은 풍수지리상의 길지로 신중하게 골랐으며, 태실을 모신 후에는 이를 보호하기 위하여 여러 명의 관리인을 두었다. 현재 서삼릉에 있는 태실들은 일제강점기에 한꺼번에 옮겨지면서 원래의 위엄을 잃고 태비만이 줄지어 선 모습이다. 태실이란 왕실에서 아기가 태어났을 때 그 태반과 탯줄을 묻는 석실을 말한다. 당시 사람들은 태가 다음 아이를 잉태하는 데 결정적인 영향을 준다고 믿었다. 또한 <태장경>의 기록에 따르면 귀인이 되는지의 여부가 태에 달려 있으며, 쇠하거나 성하는 것은 모두 태에 의해서 결정된다고 하였다. 조선시대 왕실에서 산모가 출산하면 탯줄과 태반은 길일을 택하여 깨끗하게 씻은 다음 미리 만들어둔 태항아리에 넣었다. 작은 항아리 바닥에는 동전을 놓은 후 그 위에 태를 놓고 항아리 입구를 기름종이로 덮은 다음, 태항아리를 큰 항아리에 넣어 태실까지 봉송했다. 어머니의 뱃속에서 아기에게 영양을 공급하고 안락하게 감싸주는 역할을 하던 탯줄과 태반을 정성껏 모셨던 조선 왕실의 태실에서 당시 조선 왕실의 생명 존중 사상을 엿볼 수 있다.
서오릉
조선시대의 왕릉군이다. 덕종과 소혜왕후의 무덤인 ‘경릉’, 예종과 계비 안순왕후의 무덤인 ‘창릉’, 숙종의 원비인 인경왕후의 무덤인 ‘익릉’, 숙종과 인현왕후, 인원왕후의 무덤인 ‘명릉’, 정성왕후의 무덤인 ‘홍릉’이 이곳에 모여 있어서 ‘서오릉’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5능 외에 명종의 맏아들 순회세자의 무덤인 순창원, 숙종의 후궁 장희빈의 무덤인 대빈묘, 영조의 후궁이자 사도세자의 어머니인 영빈 이씨의 무덤인 수경원도 경내에 있다.“갈처사가 골라준 명당”숙종과 인원왕후의 능이 이곳으로 정해진 이유에 관한 이야기가 다음과 같이 전한다. 어느 날, 숙종은 민심을 살피기 위해 평상복 차림으로 한 냇가를 지나가다 한 젊은이가 울고 있는 것을 본 후 그 연유를 물었다. 젊은이는 갈처사라는 유명한 지관이 이곳에 무덤을 쓰면 좋다고 해서 땅을 파는데, 아무리 파도 물이 고이니 어찌하면 좋을지 모르겠다고 하였다.
지관이 장난을 쳤다고 여긴 숙종은 젊은이를 불쌍히 여겨 관청에 가서 쌀 300석을 받을 수 있는 서신을 적어주었다. 그리고는 지관의 오두막집을 찾아가 청년의 일을 따져 물었다. 그러자 지관은 “모르면 잠자코 계시오. 저 땅은 무덤자리로 들어가기도 전에 쌀 300석을 받는 명당이라오!”라고 하며 숙종에게 오히려 핀잔을 주었다. 그의 신통함에 놀란 숙종은 자신이 국왕인 것을 밝히고 훗날 묻힐 자리를 골라달라고 부탁하였다. 신통한 지관 갈처사는 좋은 자리를 골라주었는데, 지금의 명릉 자리가 바로 그곳이라고 한다.
자운서원
율곡 이이(1536∼1584)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세운 서원이다. 율곡은 조선 중기 대학자이며 정치가로 성리학의 큰 줄기를 이루던 분으로 『격몽요결』 등 많은 저서를 남겼다. 광해군 7년(1615)에 세운 이 서원은 효종 1년(1650)에 국가로부터 인정받은 사액서원으로 ‘자운’이라는 이름을 받았다. 숙종 39년(1713)에 율곡의 뒤를 이은 학자인 김장생(1548∼1631)과 박세채(1632∼1695)를 추가로 모셨으나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고종 5년(1868)에 폐쇄되었다. 그 뒤 서원 터에서 제단을 세워 제사를 지내왔으나 한국전쟁으로 완전히 파괴되었고 지금 있는 건물은 새로 지은 것이다. 대문 격인 자운문을 들어서면 위패를 모신 사당이 모습을 드러낸다. 사당은 앞면 3칸·옆면 3칸 규모의 아담한 건물로,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이다. 앞면에는 각 칸마다 2짝 여닫이문을 달았는데 문 앞은 개방된 구조로 널찍하여 제사지내기에 적합하다. 사당 안쪽에는 이이의 영정을 중심으로 좌우에 김장생과 박세채의 위패를 모시고 있다. 이곳에서는 해마다 8월에 제사 의식을 거행하고 있다.
화석정
조선시대의 정자로 임진강가 벼랑에 위치하고 있다. 율곡 이이(1536~1584)가 시를 짓고 학문을 연구하던 곳이다. 율곡의 5대 조부인 이명신이 세종 25년(1443)에 처음 지었으며, 임진왜란 때 불에 타 없어진 후 현종 14년(1673)에 다시 지어졌다. 그 후 한국전쟁으로 다시 불에 탄 것을 파주의 유림들이 다시 세우고 1973년에 실시된 정부의 유적정화사업으로 지금의 모습이 완성되었다. 앞면 3칸 옆면 2칸 규모의 팔작지붕 건물로 안에는 이이가 8살 때 지었다는 ‘팔세부시(八歲賦詩)’라는 시가 걸려 있다.“여덟 살 소년의 뛰어난 감성, 이이의 팔세부시”율곡 이이는 어릴 때부터 화석정에서 자주 놀았는데, 8살 때 이곳에서 지은 시가 한 수 전해진다. 현재 화석정에도 걸려 있는 ‘팔세부시’라는 시이다. 숲 속 정자에 가을이 이미 깊으니 시인의 생각이 한이 없어라먼물은 하늘에 닿아 푸르고 서리 맞은 단풍은 햇빛 받아 붉구나산은 외로운 달을 토해내고 강은 만리 바람을 머금는다. 변방 기러기는 어디로 가는가 처량한 울음소리 저녁구름 속에 그치네
반구정
반구정은 조선 세종 때 유명한 정승이었던 황희(1363∼1452)가 관직에서 물러나 갈매기를 친구 삼아 여생을 보내시던 곳이다. 임진강 기슭에 세운 정자로 낙하진과 가깝게 있어 원래는 낙하정이라 불렀다. 반구정은 황희가 죽은 후 조상을 추모하는 전국의 선비들이 유적지로 보호하여 오다가 한국전쟁 때 모두 불타 버렸다. 그 뒤 이 근처의 후손들이 부분적으로 복구해 오다가 1967년 크게 고쳐지었다. 건물 규모는 앞면 2칸·옆면 2칸이며, 기둥 윗부분과 옆면 등에 꽃무늬 장식을 돌려 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