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루한 장마, 무덥던 여름이 언제 있었는지 모르게 아침저녁으로 제법 서늘한 기운마저 느껴지는 것이 요즘 날씨이니 가을의 문턱에 들어섰음을 실감할 수 있다. 그 동안 계절에 대한 무감각과 장마나 더위 속에 시장을 돌다 보니 등잔 밑이 어둡다는 속담처럼 내 가장 가까이에 있는 하양시장을 등한시했음에 다소의 자괴감을 가지면서 하양시장을 들러보기로 하였다. 하양시장은 대구근교에서는 농산물이 싸다고 소문이 나 지인들도 자주 들러 시장보기를 즐겨 하는 곳이다.

하양은 48,65km2의 면적에 28개 리로 이루어진 경산시에 속하는 읍이다. 북쪽 및 북동쪽은 와촌면, 남동쪽은 진량읍, 남쪽은 압량면, 서쪽은 대구에 접해있고, 읍의 중앙에 조산천이 동서로 흘러 금호강에 유입되고 금락리, 동서리 등이 모여 곡구에 시가지와 시장이 형성되어 있으며 금호강을 따라 대구선과 대구영천국도가, 읍의 남부론 경부고속도로가 통과하는 곳이다. 그리고 교육의 도시답게 대구카톨릭대학교, 경일대학교, 경동정보대학 등이 있어 늘 학생들이 북적거리는 곳이기도 하다.

하양에 대한 자세한 정보를 얻기 위해 하양읍 사무소를 찾았더니 총무계 이덕배 계장님과 이영학 부읍장님이 필요한 정보는 물론이고 시장에 대한 내력도 자상하게 말씀해 주셔서 참된 공무원의 자세가 이런 것이구나 하며 더욱 감사함과 모든 공무원들이 주민을 대할 때 이런 친절함이 몸에 배어 있다면 나라의 발전을 물론 살기 좋은 내 고장 만들기에 기대를 걸어도 된다는 안도의 마음을 가져보는 것이다.

하양이란 명칭의 유래는 청동천, 조산천, 금호강이 합류하는 곳이라 하여 물 하(河)자를 따고 비가 적고 항상 따뜻한 고장이라 볕 양(陽)자를 따서 하양(河陽)이라 이름 붙였다고 하며 1933년에 간행된 <화성지>에 의하면 하양은 고구려에 속해 있다가 신라가 이를 취하여 하양 혹은 화성이라 불려졌다 하나 고구려의 지리적 경계로 미루어 신빙성이 없는 것이라 보며 <경상도 지리지>에 고려 때 하양현이라 불렀다고 전하고 있다. <고려사>에서 고려 성종14년(995년)에 하주라 하다가 현종 9년(1018년)에 하양현이 되고 뒤에 경주에 소속되어 감무를 두고 조선시대에 와서 현감을 두고 선조 34년(1601년)에 경산과 함께 대구부에 이속되고 숙종 때 다시 현이 되고 영조 때 화성현이 되고 고종32년(1892년)에 하양군이 되었으나 1914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경산군에 편입되어 하양면이 되었다가 1973년 읍으로 승격하여 오늘에 이르게 되었다 한다.

하양의 문화재로는 환성사 대웅전(보물562호), 경산의 삽살개(천연기념물368), 환성사 심검당(경북유형문화재84호), 하양향교(경북 문화재자료107) 등이 있으며, 하양시장은 금락동에 위치하고 원래는 금호강변에 위치하여 금호동으로 불려지다가 북쪽 무학산의 형상이 학이 춤추는 모습과 같다 하여 금무동으로 부르다가 음이 변하여 금락동으로 부르게 되었고 남쪽은 금호강, 북쪽은 조산천이 있었고, 1980년대까지는 조산천의 물이 맑아 목욕을 즐기기도 했다고 한다.

시장 형성은 1931년부터 5일장이 개설되었으며 1958년 목조건물이 건립되었고, 1980년 초부터는 상설시장이 되었으나 기존의 시장은 현대화의 물결에 밀려 쓸쓸한 시장이 되었고, 오히려 5일장이 서는 날이면 조산천 제방 둑 쪽 약 1에 이르는 곳에 천막이 즐비하게 늘어서 인근에서 모여온 장사꾼들과 트럭들이 함께 어울려 시장다운 분위기가 연출된다고 한다. 장은 4, 9, 14일에 선다고 하며 농산품은 다른 시장보다 가격이 저렴하다 하여 대구를 비롯한 영천, 금호, 와촌, 질량 쪽에서도 장보러 많이 온다고 한다.

부읍장님은 어려서부터 이곳에서 자라 현재까지 고향을 지키는 분이라서 하양장의 옛 모습이 눈에 선하다고 하시며 하양장은 영천장과 함께 전국에서 알아주는 큰 장이고 특히 나무시장은 100여 평에 넓은 곳에 나뭇짐을 진 지게가 즐비하게 서있는 모습은 장관을 이룬다고, 그리고 싸전과 어물전, 포목전, 우시장, 채소전이 유명했단다. 그러면서 현대의 큰 대형 마트에 모든 상권이 빼앗기고 있는 현실에 아쉬움을 토로하였다.

읍사무소를 나와 재래시장 맛을 내는 천변 둑 쪽부터 둘러보기로 하고 천변 둑을 찾았더니 주변은 주차시설이 잘 되어 있고 이미 장사꾼들의 트럭들이 가득 채워져 있어 달구지나 리어카 등이 판을 치던 과거의 시장의 모습이 아님을 실감할 수 있었다. 그러면서도 시장을 둘러보니 1km넘게 둑을 따라 펼쳐진 야시장 같은 천막들의 늘어선 모습은 그대로 재래시장의 옛 모습 그대로의 파노라마였다. 장보러 온 햇빛에 거슬린 거무스름한 촌노와 아낙들의 모습이 눈에 많이 띄었고, 할아버지나 할머니를 따라온 꼬맹이들이 투정하는 모습도 간간이 보이고, 난전에 앉아 손수 집에서 가꾼 채소, 과일 등을 모둠해 놓고 손님과 흥정을 하는 할머니와 아주머니들의 모습, 시장 구석구석을 다니며 소리 높여 물건을 사라고 외치는 장꾼들의 모습들은 예나 다름없는 시장의 넉넉함을 보여주는 흥겨운 풍경이었다.
우연히 시장 한가운데서 퇴직한 옛 직장 동료를 만났고 그분도 대구에서 여기까지 시장 보러 왔다고 반가워하며 환담을 잠시 나누다가 헤어지고 천변 둑 쪽이 아닌 낡은 목조건물의 즐비한 기존 시장 안으로 들어가니 정말 부읍장의 말처럼 설렁한 기운이 감돌고 손님을 기다리는 상인들의 눈빛만이 반짝이고 있었다. 점점 이곳부터 재래시장의 온화하고 풍성한 정이 사라지고 있다는 아쉬움을 지울 수가 없었다. 점심때가 되어 반찬이 서른 가지 이상이 나온다고 이름이 꽤나 알려진 길가 음식집에 들러 식사를 하고 시장 구석구석을 살피다가 개인 사정으로 잠시 시장을 나왔다. 저녁나절 파장 구경을 하고파 다시 시장에 들러 저녁식사도 할 겸 시장 상인들의 구수한 입담도 듣고 싶어 선지국집에 들어갔더니 아낙과 장사꾼들의 구수한 시장바닥의 농 썩인 대화가 한결 깊어지고 있었고, 경상도 억샌 사투리가 많아지고. 소주 몇 잔에 거나해진 장꾼의 불그레한 얼굴에서 세월 탓의 한숨소리가 흘러나와 메밀꽃 필 무렵에 나오는 허생원과 여러 장돌뱅이들의 애환을 잠시 그려보았다. 시장 곳곳에는 아직도 난전 할머니와 아주머니들이 앞에 애호박, 가지, 부추, 상추, 감자, 복숭아 포도, 사과 배 등을 모둠 지어놓고 저녁 손님을 기다리는 모습이 남아 있었고, 많은 장돌뱅이들이 파장의 물건들을 정리하는 모습들이 처량해 보이고, 선지국집 아줌마에게 파장이 언제쯤 이루어지느냐 물으니 대충 어두컴컴해질 때까지라는 말을 듣고 이곳 하양장은 그래도 아직 골목골목에는 숫한 사연이 이루지리라는 나름의 생각을 하며 피식 웃음도 지어 보았다. 그러면서도 점차 사라지고 있는 재래시장의 모습들을 이곳 하양장만은 오래 간직하여 먼 훗날 장돌뱅이 허생원의 애환과 낭만이 남겨지기를 소망하며 시장을 떠나 대구를 향해 차를 달렸다.
류영구 시인, 낙동강문학회 회장 | |
첫댓글 하양 이야기.... 좋은 자료 감사합니다
우리네 재래시장은 언제봐도 정겹고 옛추억거리가 묻어난는 곳이기도 합니다. 꼬맹이때 아빠 엄마가 시장갔다 오실때면 항상 기다림에 고기반찬이랑 옷가지랑 시장 보따리가 푸짐해서 항상 행복했던 추억이 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