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작성일 : 2016. 10. 01
▲고종 황제의 가족사진
좌측으로부터 이초남씨의 할아버지인 의왕, 순종황제, 고종의 외동딸 덕혜옹주, 이번에 세상을 떠난 황세손 이구(李玖,1931,12,29~
205.07.16,일본에서 사망)씨의 아버지인 영친왕, 고종황제, 순종황제의 왕비인 윤대비, 의친왕(義親王)의 왕비 김비, 의친왕의 큰아들 이건(李鍵)공이다.
▲조선황실 가족들(1915년) /좌측에서부터 황태자(영친왕) 19歲, 순종효황제 42歲, 고종황제 64歲, 순정효황후 22세,덕혜옹주 4세 때
의 모습들임.
조선이 대한제국황실이 되면서 왕은 황제로 대군이나 군등 왕자는 왕으로 봉작된다.
영친왕, 의친왕 등의 일본식 왕 직위 표현이 있지만 영왕, 의왕 등 대한제국시기에 고종이 명명한 명칭을 적었다.
이왕이란 직위는 한일합방후 조선국왕에게 형식적으로 봉하는 일본의 직위였다.
합방후 일본은 대한제국을 조선으로 격하시키고 고종은 이태왕 순종은 이왕으로 봉해졌고, 순종의 승하 후 이왕직은
영왕 이은(李垠,1897~1970)이 물려받았다.
[1] 고종의 가계도(1852 ~ 1919)
고종(高宗)
명성황후 민씨(明成皇后,1851~1895) ---- 순종(純宗,1874년~1926년)
귀인 장씨(貴人張氏,1838~1887) ---- 의왕[이강(李堈)] / 1877년(고종 14)~1955년
귀비 엄씨(貴妃嚴氏,1854~1911) ---- 영왕[이은(李垠)] / 1897년(고종 34)~1970년
영보당 귀인 이씨(永保堂 貴人李氏,1843~1928) ---- 완왕(完王,병사함)
소의 이씨(昭儀李氏,생졸년 미상)
귀인 정씨 (貴人鄭氏,1882~1943) / 본관>海州 ---- 당호: 보현당(寶賢堂) / 장남 - 이우(李堣, 1915 ~ 1916)
귀인 양씨(貴人 梁氏,1882~1929) / 본명: 양춘기(梁春基) / 당호>복녕당(福寧堂) ---- 자녀 덕혜옹주
고종은 완왕을 비롯하여 어린 나이에 잃은 자식이 많으며, 황태자인 순종. 의왕 이강, 영왕 이은, 늙은 나이에 얻은 덕혜옹주가 있다.
1. 고종[광무황제]
조선의 26대 국왕이자 대한제국 초대황제로 흥선 대원군 이하응의 둘째 아들이다.
25대 철종이 아들없이 죽자 왕위에 올랐고 대원군의 섭정 정치를 겪었다.
1876년 강화도조약 이후 조선은 개항되었고, 수많은 고초와 조선왕실의 번영을 위해 수십년간 노력을 기울였다.
1894년 갑오개혁을 단행하였으나 1895년 일본에 의해 명성황후가 시해 당하는 참변을 겪고, 러시아 공사관에 피신하는 수모를 겪게 된다.(아관파천)
1897년 독립협회에 의해 덕수궁으로 환궁한 후 대한제국을 성립시키고, 독립국가임을 선포하고 광무개혁을 추진하였으나 1905년 일본과 친일관료(을사오적) 사이에 외교협정이 맺어짐으로 해서 대한제국의 외교권이 일본에게 박탈당하였다.(을사늑약)
고종황제는 외교권을 되찾고 일본을 물리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고, 결국 헤이그특사를 1907년 파견하게 되나 일본에 의해 발각되어 황제의 자리에서 강제퇴위 당한다. 순종에게 황제의 자리를 물려준 후 일본에 의한 감시와 함께 덕수궁에서 유패되어 세월을 보내게 된다.
독립을 위해 망명을 준비하기도 하였으나 실패로 돌아갔고, 1919년 제1차세계대전이 끝나자 파리강화회의에 한국독립을 위한 밀사를 파견하려고 하는 중 의문사 당하였다. 일본에 의해 독살된 것으로 추정되며, 고종황제의 승하가 전국에 알려지자 전국민의 분노를 사게되었고 결국 고종황제의 인산일(因山日: 왕족의 장례일)을 기해 전국적으로 3.1운동이 일어나게 된다.
▲고종황제 모습
▲좌로부터 명성황후, 고종, 대원군 모습 / ⓒ강원도민일보 제공 / 노컷뉴스 제휴사
2. 명성황후 민씨[명성 태황후]
우아한 여성의 이미지와 함께 강건한 여걸의 성격 또한 간직한 분으로 알려져있다.
순종의 어머니이자 고종의 정실부인으로서 시아버지인 대원군으로 부터 왕권을 찾아
고종에게 전해 주었으며, 일본에 대항하여 친 러시아정책을 펴다가 미우라공사가 이끈
일본의 낭인에 의해 시해되었다. 이 을미사변이 전 조선에 알려지면서 을미의병운동이
전국적으로 일어났다.
3. 귀비 엄씨(貴妃嚴氏, 엄황귀비,1854~1911 / 향년 57세)
1861년 8세 때 대궐에 입궐 , 소생 : 1남(황태자 은), 황귀비(1품)로 책봉(1903년)되고, 1885년 32세 때 고종의 승은을 입었으나 명성황후에 의해 대궐 밖으로 쫓겨났다가 1896년 고종의 명으로 대궐로 다시 입궐하였다. 시호는 순헌, 궁호는 망덕, 원호는 영휘이다.
영왕 이은(李垠, 1897년 10월 20일 ~ 1970년 5월 1일)의 생모로 고종의 상궁으로 명성황후 시해 후 고종의 총애를 받아 영왕을 생산했으며, 거의 왕비로써의 역할을 수행하였으나 출신상의 문제로 왕실에서 천대받았다. 고종의 재가를 얻어 숙명, 진명, 양정학교를 세우기도 한 인물이다. 그러나 아들 영왕이 일본에 볼모로 끌려가자 애를 태우다가 결국 1911년 장티푸스로 별세하였다.
▲영친왕 어릴적 모습(좌), 고종황제(가운데), 순종황제(우)
▲예복을 착용한 영친왕의 모습
(1897년 10월 20일~1970년 5월 1일 / 수(壽) 73세
▲고종의 후궁으로 덕혜옹주의 생모 양귀인 모습이다.
4. 덕혜옹주
▲소녀시절의 덕혜옹주 모습
▲일본에서 생활할때의 덕혜옹주 모습
고종과 상궁 양씨에 태어난 고종의 고명딸. 1912년 5월 25일 출생. 13세때 볼모로 일본에 끌려간 뒤 외로움과 향수병으로 정신질환을 앓았다. 19세때 일본인 소다케시 백작과 강제 결혼하여 결혼의 충격으로 병이 악화돼 이혼당하고 정신병원에서 생활하다가 1952년 38년 만에 귀국하였으나. 귀국후에도 백치(白痴>뇌에 장애나 질환이 있어 지능이 아주 낮고 정신이 정상적인 상태에 미치지 못하는 사람)로 낙선재에서 생활하다 1989년 4월 21일 수(壽) 77세로 별세했다.
▲덕혜옹주와 소다케시 백작(좌)
[2] 순종의 가계도
순종 : 1874 년 ~ 1926년 / 향년 52세
순종의 초배 왕비는 순명효황후 민씨인데 어린나이에 일찍 돌아가셨고,
재취 황후 순정효황후 윤씨는 1966년까지 창덕궁 낙선재에서 기거하셨다.
그러나 두분 모두 아들이 없었다.
1. 순종[융희황제]
조선 27대 왕이자 대한제국 마지막 황제로 명성황후 민씨사이에 태어 났다. 고종이강제 퇴위되자 황제의 자리에 올랐으나 이미 국가의 운명은 기울어 바람앞의 등불 상태였고 결국 1910년 한일합방[을사늑약]에 의해 일본에 의해 이왕이라고 불리우며 창덕궁에서 유폐생활을 하였다.
어린시절 누군가에 의해 아편을 탄 커피를 다량 마신 후 치아를 대부분 잃었고, 남성 능력을 상실하였으며, 결국 승하할때 까지 슬하에 자식없이 쓸쓸히 살았다. 일본의 감시에 의해 고통받았으며, 망국의 한을 품은채 1926년 승하하셨다. 따라서 순종황제의 인산일(因山日: 장례일)을 기해 6.10만세운동이 일어나게 된다.
2. 윤대비[순정효황후 윤씨]
순종의 황후이자 해풍부원군(海豊府院君) 윤택영(尹澤榮)의 장녀이다. 순종의 첫째 황후가 세상을 떠난 후 두번째 정실부인으로 맞이하였다. 33세(1926년)에 순종이 승하하고, 영왕이 이왕의 자리에 오르자(1926년) 대비가 되었고, 왕실의 최고 어른으서 마지막 조선왕실을 지탱해 나갔다.
6.25전쟁 때 피난을 못가 북한을 피해 창덕궁에서 극비에 탈출 운현궁으로 들어가야 했으며, 전쟁후 다시 창덕궁으로 들어가려 하자 이승만 대통령의 거부로 인해 창덕궁 낙선재에서 쫓겨나 정릉 산속에서 어려운 생활을 하였다. 4.19 혁명후 이승만 정권이 무너지자 낙선재로 환궁 등 곡절 많은 생을 살다가 1966년 73세로 별세 하였다.
슬하의 자식도 없이 외로운 생을 산것으로 알려지며, 팔만대장경을 많이 읽었다고 한다.
1966년 윤대비가 돌아가실때 당시 주변의 10여명도 안되는 궁녀들이 남은 왕실의 몰락상황과 한국정부의 무관심한 처우는 윤대비의 한 많은 삶의 단면을 느낄 수 있게 했다.
▲순정효황후 윤비 13세 때의 모습(1893 ~ 1989) |
▲1960년대 초 작고하기 수년전의 윤비 모습
황후시절의 차림과 똑같은 황원삼 대례복(黃圓衫 大禮服)에 3개의 떨잠을 장식한 큰 머리를했다.
당시 엄청난 시대의 변화를 겪고도 황후로서의 품위를 잃지않고있다.
▲부산 피난시절/왼쪽이 순정효황후 윤씨의 모습이고,
오른쪽은 흥왕비(고종황제의 형님이신 이재면 즉, "흥친왕"의 비)입니다.
▲왕실 사진. 좌로부터 옹주, 방자, 윤왕비, 순종, 영친왕, 영친왕 아들 진(瑨)과 고희경
(高羲敬) 사무관
▲영친왕과 영왕비/촬영 연도는 나와있지 않습니다. | |
영친왕비 방자(方子, 마사코)
영친왕(英親王) 이은(李垠)은 원래 민갑완이라는 약혼녀가 있었으나 영친왕은 일본의 조선왕족 결혼법 제정에 의해 강제로 일본왕족과 결혼하였다. 일본이 제정한 조선왕족결혼법은 다음과 같은데 "조선왕족은 선일융화를 위해 무조건 일본왕족과 결혼해야 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1. 영친왕 이은(英親王 李垠)
고종과 귀비엄씨 사이에서 태어났으며, 이름은 이은(李垠 . 4세때 영친왕으로 명명되어 조선의 마지막 황태자가 되었다. 11세에 일본의 통감 이토 이로부미에 의해 유학이라는 명목으로 볼모로 일본에 끌려가 일본에서 교육받았다. 성격이 온화하고 총명하여 일본육군사관학교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 것으로 알려진다.
그는 1920년 일본황족의 딸 방자(方子)와 일본의 강요에 의해 정략 결혼하였으며, 1923년 관동대지진 때는 일본인의 조선학살로 큰 충격을 받았던 것으로 알려진다. 1926년 형식상 이왕(조선국왕)에 책봉되어 조선에 돌아가기를 원하였지만 일본정부에 의해 거부당하였으며, 한국독립을 구심점을 마련하기 위해 벌여졌던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영친왕 망명 사건이 실패로 돌아감에 의해 단속이 더 강화되었고, 산책이나 쇼핑 등 단순한 일상생활까지 제지 받았다.
1945년 일본이 패망하고 왕족의 신분을 상실하였으며, 그 후 어려운 생활을 하게 되었다. 그 당시 영친왕은 일본의 감시가 풀리자 조국이었던 한국으로 환국하고자 하였으나 왕실복위가 벌어지는 상황을 우려한 이승만 대통령의 적극적인 반대로 저지 당했다. 게다가 이승만 대통령에 의해서 일본에 있던 영친왕 및 조선에 남아있던 왕족들의 왕실재산 뿐만 아니라 개인 물품 하나하나까지도 한국정부에 의해 강제 회수 당하였고, 왕궁에서 쫓아내는 일이 벌어졌다.
그당시 영친왕 주변의 사람들은 정부가 국보급 문화재를 회수해 갈 수는 있지만 개인 물품까지 압수해 가는 법은 없다며, 한국정부를 상대로 소송을 하라고 권유하였으나 영친왕은 조국인 한국을 상대로한 재판은 결코 있을 수 없다고 했다고 하며, 전재산이 거의 국유화되는 것을 인정했다고 한다.
또 이승만정권은 일본에 있는 영친왕일가에게 여권을 발급해주지 않았기때문에 아들 이구(1931년 12월 29일 일본생~2005년 7월 16일 / 수(壽) 73세 씨의 미국여행 또한 상당히 어려움을 겪었다고 한다. 어쨌든 군인생활 및 왕족으로서의 생활 밖에 해보지 못했던 영왕으로써 일본에서의 생활은 매우 힘들었고, 결국 생활은 일부 아는 사람들에 의해 도움을 받아 생활하였다.
▲이구(李玖)선생 모습
게다가 일본에서 오랜기간 볼모생활 동안 애타게 그리워했던 조국 한국의 그러한 대접에 큰 충격을 받은 채 오랜기간 동안 고독한 생활을 보내게 되었고, 건강 또한 매우 악화되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조선왕실을 싫어했던 이승만 정권이 붕괴된후 한국사회에서는 영왕 귀국을 위한 활동을 추진하게되었고 결국, 1963년 박정희 대통령의 호의로 볼모생활 55년 만에 부인인 이방자 여사랑 귀국하였는데 그 당시 영
친왕의 건강은 매우 악화되어 있는 상태였다.
영친왕은 뇌혈전증에 의한 실어증에 시달리면서, 거의 의식불명 상태에서 병원생활을 하였다. 결국 영친왕은 윤대비와 친족들을 만나지도 못한체, 또 귀국후 한국의 땅 한번 걸어보지도 못한 상태에서, 1970년 5월 1일 73세를 일기로 한 많은 생을 마쳤다.
2. 이방자 여사[영왕비]
영친왕 이은의 아내. 일본황족 모리마사왕 나시모토의 장녀로 태어났다. 한때 일본 황태자비의 물망에 오른 인물이었으나 한일융화 초석이 되어라는 일본천황의 명에 의해 영왕과 강제결혼, 조선왕자의 아내로 인고의 세월을 보냈다. 외부적으로는 한일융화가 목적이었으나 방자가 임신능력이 없다는 의사의 보고에 의해 조선왕실의 대를 끊으려고 결혼시킨 일본의 야심이 깔려진 정략결혼이었다.
나중에 알려진 일이지만 방자가 아기를 임신하자 그 당시 방자가 임신할 수 없다고 보고했던 의사들은 사형 당했다고 한다. 어쨌든 방자도 이러한 일본의 계략에 이용당한 비운의 여인이었고, 왕실의 희생양이라는 비슷한 상황속에 만났던 두사람은 서로의 처지를 이해하게 되었고, 부부사이 또한 좋았던 것으로 알려진다.
망국의 왕으로써 남편 영친왕 이은이 고통받는 일들때문에 이방자 여사도 마음의 고통이 심했으며, 진왕자의 의문의 죽음이후 정신적 고통
이 더 심해졌다. 1964년 영친왕과 함께 한국으로 귀국하게되자 언론들과 사회에서 이방자여사에 대해 일본왕족이라는 이유로 시각이 좋지 못하였다.
그러나 이방자여사는 스스로 낙선재 근처에서 물건을 만들어 팔고, 일본과 한국에서 장애인을 위한 모금회를 여는 등의 활동을 하며, 정박아와 신체부자유자를 위한 명휘원, 자행회 등을 설립하였다 그녀의 이러한 활동은 한국사회에 심신부자유자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심어주었다.
1960년대 말 영친왕의 건강이 악화되자 성심을 다하여 보살폈으며, 남편 사망후에는 고종의 딸인 덕혜옹주를 친형제처럼 돌봐주었다. 때때로 일본에 돌아가 이구씨를 다시 귀국시키려고 노력도 기울였다. 하지만 그녀는 1989년 4월 갑자기 건강이 나빠져 덕혜옹주가 사망한 후 몇일 후인 4월 30일 낙선재에서 별세했다.
이방자 여사는 최근까지 궁궐에 기거한 마지막 왕실의 일원이었다. 1991년 까지 이방자여사의 3년상이 끝나자 결국 정부에 의해 왕실 최후의 모습이 담긴 창덕궁 낙선재가 일반인들에게 공개되게 되었다.
3. 민갑완[영친왕의 약혼자]
주영공사를 지낸 민영표씨의 장녀로 11세때 영친왕비로 간택되었으나 영친왕이 방자와 강제 결혼함으로 비운의 일생을 보냈다.
원래 왕실에 의해 파혼당하면 그 가문은 역적가문으로 취급되기 일수 였고, 평생 재가가 금지 되었기 때문이다.
민갑완은 왕실의 체통을 위해 일본의 결혼 주선에도 아랑곳 하지 않고, 끝까지 절개를 지켰다.
일본에 의한 강제 파혼 소식으로 아버지가 급사하고 집안이 파산했다. 결국 상해로 망명하여 고독과 고통의 세월을 보내다.
1945년 해방후 귀국. 일생을 독신으로 살다가 1967년 동래에서 곤궁 속에 생을 마쳤다.
4. 진왕자(유아시기 사망)
영친왕과 영친왕비 방자 사이에 태어난 장남으로 유아시기에 사망했다. 조선방문시 사망하였으며, 검은 물체를 계속 토해낸 것으로 보아 독살일 것으로 추정된다.
5. 구왕자[황세손 이구(李玖,1931. 12. 29~2005. 7. 16) / 壽 73세
▲황세손 이구(李玖, 2004년 종묘대제)
영친왕의 자식이자 현재 조선왕실의 최고 직계 황손이라고 할 수 있다. 이구는 영친왕이 이왕직(조선국왕)에 책봉되었기 때문에 왕세자로 일컬어졌다. 사춘기에 불행한 부모의 운명과 혼혈왕자인 자신의 처지를 알고 충격을 받았으며, 결국 스스로의 길을 개척 하겠다고 17세에 미국으로 떠나 MIT 공과대학을 졸업한 수재였다.
그러다가 미국여인 줄리아를 사랑하여 결혼하였다. 1963년 32세때 부모를 따라 조국에 왔고 한때 서울대 공대 및 연세대 공대강의를 하기도 했다. 그러나 직계 황손으로써 의무를 강요하는 종친회와의 갈등과 '신한공항'등의 사업실패의 좌절, 단지 왕손이라는 이유로 이용하려는 주변의 시각들에 의해 1979년 일본으로 건너가게 되었고, 1982년에는 종친회의 강요 및 이구씨의 개인사정에 의해 줄리아와 이혼하게 되었다.
그 후 일본여인 아리다랑 동거하면서, 도쿄에서 살면서 사업활동을 하였다.1984년 사기혐의로 고소 당하는 등, 1989년 어머니 이방자 여사의 사망등의 파란을 겪기도 했다. 이방자여사가 타계한 뒤 수차례에 걸친 종친회의 귀국 종용을 거부하던 이씨는 환갑을 넘기면서 심경 변화를 보여, 귀국을 결심했고, 1996년 귀국후 전주이씨 대동종약원에서는 종친회장자리를 이구씨에게 기증하였고, 부영주택 이중근 회장이 마련해준 장충동 호텔 영빈관에서 생활하며, 왕실제사인 종묘대제 등의 초헌관 참여, 종친회 사무를 보는 등의 활동을하고 있었으며, 2005년 일본에서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마지막 황세손 이구(李玖) 장례식 모습
1931. 12. 29~2005. 7. 16) / 壽 73세 장례식 모습
6. 줄리아
이구의 전 아내. 미국에서 고생하는 동안 외로운 동양 청년 이구와 사랑으로 결혼. 실내장식가인 남편을 따라 한국에 왔으나 외국인에다가 후손이 없다는 이유로 이혼하라는 종친회와 큰 갈등을 가졌다. 그런 상황속에서도 실내장식품을 만들어 시어머니였던 방자여사의 사업을 돕고 왕실의 일원으로 열심히 활동하였다.
시어머니였던 이방자여사는 줄리아에 대해 외국인만 아니었다면 최고의 왕실며느리 감이었다고 평가했다고 한다.
그러나 종친회의 갈등 및 일본에서 생활하고 있던 이구씨와의 관계악화에 의해 1982년 이혼했다.
줄리아숍을 운영하다 결국 생활고에 의해 1995년 하와이로 떠났다가 2000년 남편의 사진 450점을 돌려주기위해 다시 한국에 방문하였는데, 그리운 남편의 얼굴을 보지 못한채, 줄리아가 왕세자비시절 다정하게 대해주었던 시아버지 영친왕의 묘소를 방문한후 왕실의 30여년간 삶을 회고하는 편지를 남겼다.
이런 사실이 언론에 보도 되면서
"줄리아의 마지막 편지"라는 특집방송이 방영되기도 하였다.
▲좌로부터..황태손 이구, 순정효황후 윤씨, 황태자비 이방자 여사
황태손 이구부인 줄리아 멀록 여사
▲1963년 6월 프린스호텔(옛날의 자택에서 方子女史와 며느리 쥴리아 멀록 女史와
李玖氏
▲이방자 황태자비(李方子 皇太子妃)
[4] 의친왕(義親王) 이강(李堈,1877~1955) 가계도
▲의친왕(義親王) 이강(李堈)
1. 의왕 이강(李堈)
고종과 귀인 장씨 사이에서 태어났으며, 이름은 이강. 일찍이 생모를 잃고 외로움 속에서 성장했다. 그러한 상황속에 아버지인 고종은 항상 미안해했고, 고종은 1900년 미국 유학을 보낸 후 같은해 8월 의왕에 봉해주었다. 1905년 적십자총재가 되었고, 1919년 항일 독립투사들과 접촉하여, 임시정부가 있는 상해로 탈출하려다 실패하여 일제의 심한 감시를 받게 된다.
그후 여러차레 일본으로 부터 도일을 강요 받았으나 항일의 기개를 굽히지 않았다. 해방후 6.25전쟁을 경험한뒤 사가인 사동궁에서 곤궁한
생활을 하다가 1955년 8월 15일 79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망국의 한과 일제의 감시속에서 술과 여자에 빠지게 된 것으로 보이며, 울분과 욕구불만의 불행한 생을 살았다고 알려진다. 하지만 독립운동을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고, 왕족 중 가장 똑똑하고 수려한 외모로 제왕의 기질 또한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알려진다. 설하에 1남 이우(李鍝)와 2남 이건(李健) 등의 자녀를 두었다.
▲의친왕비
의친왕비(義親王妃, 1878 ~ 1964), 본관은 연안(延安), 아버지는 김사준(金思濬,1855년(철종 6)~ 1917년)으로
1894년 17세 때 의친왕(당시 의화군)과 결혼, 설하에 소생은 없다.
▲의친왕과 아들들(이건, 이우)
2. 이건(李鍵)
이건 황손(1909 ~ 1991)
의친왕(義親王)의 장남으로, 수관당 정씨 소생 1918년생. 11세에 일본에 볼모로 가서
일본왕족 딸과 강제결혼하였다. 해방후 이혼하고 일본인으로 귀화. 재혼한 일본 부인과
일본에 살다가 현재는 별세했다.
▲李鍵公殿下夫妻
3. 이우(李鍝)
의왕의 차남으로 궁인 김씨의 소생이다. 1911년생. 12세에 일본에 볼모로 가서 군인으로 복무중 1945년 8월 히로시마의 원폭으로 34세의 젊은 나이에 비운의 생을 마친 것으로 알려진다. 똑똑하고 인물이 좋아 의왕의 사랑을 받았으며, 조선 말기 왕족중 거의 유일하게 오랜기간 일본의 강압결혼에 저항하여 결국 한국여성인 박찬주씨와 결혼하였고 청과 종이라는 자식을 두었다. 이종씨는 현재 사망했고 이청씨는 미국 시카고에 거주하고 있다.
다홍 슬란치마 |
황태자 이우, 부인 박찬주
4. 이수길(李壽吉)
이우의 동생. 1918년생. 민주당 장면 내각때 문화재관리국장을 지내며, 영왕을 귀국시키는데 공헌하였다. 칠궁에서 살다가 전두환 대통령 당시 청와대 경호실의 강제 축출 강요에 충격받고 1982년 65세로 별세. 부인 김신덕 여사는 칠궁에서 쫓겨나 서울 개포동의 19평 시영 아파트에 거주하고 있다. 딸인 이순씨는 인천 아들인 이한주씨는 일본에 살고 있다.
5. 이석
본명은 이해석으로 홍씨 소생. 1941년 생으로 관훈동 사동궁에서 의왕의 11번째 아들로 태어났다. 어린시절 잠시간의 행복한 생활이 있었지만 6.25전쟁으로 왕실은 재산의 대부분을 잃고, 그나마 남아있던 재산이 이승만 정권에 의해 국고로 환수당한 뒤 가족들은 심한 생활고를 겪어야 했다.
특히 1959년 아버지 의왕이 사망하자 그는 동생들의 학비를 벌기위해 종로 2가 음악다방에서 DJ일을 시작했고, 1962년부터는 미8군에서 한달에 3만원을 받으며 노래도 불렀다. 그러나 왕실어른들과 문중 어른들에게 노여움을 샀고 그는 경제력 무능력한 왕족의 신분에 대해 눈물로 왕실어른들께 호소하는 상황이 벌어지기도 했다.
1964년 사회각층의 인사와 만나는 TV프로그램"굿이브닝쇼"의 사회를 보게되자 결국 윤대비는 화를 풀었다고 전해진다. 가수 이석은 '비둘기집', '두 마음', '외로운 조약돌' 등의 노래를 부르며, 한때 대중적인 인기를 끌었다.
1964년 여러 주변상황에 의해 그는 월남전에 참전했다. 제대후 암으로 고생하시던 어머니 홍씨를 잃고, 어려운 생활이 시작되었다. 그러다가 미국 한인회장인 김병묵박사의 도움으로 1979년 미국으로 건너가서 생활을 시작했다. 그러나 공부의 길이 쉽게 열리지 않았고, 불법체류자의 신분으로 육체노동을 하는 등 고생을 하다가 1987년 드디어 미국의 영주권을 얻었다.
그러나 1989년 이방자여사의 장례 직후 다시 조국인 한국으로 돌아오고 싶다는 결의가 생겼고, 결국 귀국한후 잠시간 가수생활을 하기도 하면서, 흩어진 왕실을 다시 모우는데 노력을 기울였다. 현재 그가 만난 세 명의 부인은 모두 그의 곁을 떠났고, 이석씨는 어려운 생활을 하고 있다.
그러나 그는 다시 음반을 준비하면서, '황실보존국민연합회' 총재로써, 황실 문화 복원 작업 등의 활동을 하고 추진중이다.
6. 이해경(李海瓊)
현재 미국에 거주하고 있으며, 의왕과 김금덕여사 사이에 태어난 딸이다.
1950년대 몰락하는 왕가가 싫어 미국으로 도미했다. 1969년 컬럼비아대 동아시아 도서관 사서로 일하면서 의왕 이강의 독립운동사실을 알아냈고, 의왕의 명예를 살리기 위해 복권운동을 추진하기도 했다. 한국 방문때 "나의 아버지 의친왕"이라는 강연을 주체한 적도 있으며, 왕실의 유품등을 기증하였다. <끝>
본자료를 편집하며 우리는 왜 마지막 황실을 복원할 수 없었나하여 가습 먹먹해짐을 가눌 길이 없었다. 마지막 황실을 바라보는 일반인으로서 찾찹한 마음 금할 길 없다. 사이버 상의 다양한 자료를 수합한 것이라서 혹, 사실과 다를까 심히 열려하며 자료를 편집하여 올린다.
-------------------------------------------------------------------------------------------------------------------------------------------------------
[3] 영친왕(英親王) 이은(李垠)의 가계도
[생졸년] 1897년(광무 1) ~1970년 5월 1일 / 수(壽) 73세(歲)
[목차]
◇망국의 황태자, 볼모가 되다.
◇마사코와 결혼하다.
◇이왕가를 계승하다.
◇경계인의 고독
◇쓸쓸한 한국, 침묵의 영면
1907년 대한제국의 황제 고종(高宗)은 일제의 병탄 야욕에 대한 최후의 승부수로 제2차 만국평화회의가 열리는 네덜란드의 헤이그에 정사(正使) 이상설(李相卨,1871년 1월 27일~1917년 3월 2일/향년 46세), 부사(副使) 이준(李儁,1859년 1월 21일~1907년 7월 14일 / 향년 48세), 통역관(通譯官) 이위종(李瑋鍾,1884년 1월 9일~1924년 이후 /향년 40세 이상 추정)을 파견하여 일본의 기만적인 횡포를 세계 만방에 알리고자 했다.
1905년에 일본과 맺은 보호조약은 자신의 뜻이 아니므로 무효라는 것이다. 하지만 밀사들은 열강의 외면과 일본 대표단의 방해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 이때 고종의 밀명을 받은 선교사 호머 헐버트는 현지에서 헤이그 밀사들을 측면 지원한 다음 미국으로 건너가 워싱턴 당국에 구원을 요청했지만 반응이 없었다.
이 사건이 수면 위로 드러나지자 조선통감 이토 히로부미는 고종에게 헤이그 밀사 파견을 힐난하며 퇴위를 강요했다. 고종은 어쩔 수 없이 순종(純宗)에게 보위를 물려주는 대신 총애하던 순헌황 귀비 엄씨 소생의 영친왕(英親王) 이은(李垠)을 황태자로 들어앉혔다. 고종으로서는 그가 훗날 보위에 올라 국권을 회복해주길 바랐겠지만 이미 불 꺼진 등잔에 기름 붓기였다.
▲영친왕(英親王) 이은(李垠)의 모습
대한제국의 운명이 바람 앞의 촛불처럼 흔들리던 그 시절, 영친왕은 황태자가 되자마자 볼모로 일본에 끌려가 일본식 군사교육을 받았다. 조국이 일제에 병탄된 뒤에는 일본 왕족과 정략결혼을 당했으며, 일본 육군 장교로서 중일전쟁과 태평양전쟁 중일전쟁과 태평양전쟁의 선전 선동 임무에 동원되었다.
전후에는 그의 정치적 영향력을 경계한 미군정과 대한민국 정부의 외면으로 국적마저 얻지 못했다. 그 때문에 오랫동안 일본에서 생활고와 병고에 시달리던 그는 뒤늦게 조국 땅을 밟았지만 영혼은 이미 육신 밖에 있었다.
● 망국의 황태자, 볼모가 되다.
▲이토 히로부미와 영친왕 이은
영친왕(英親王) 이은(李垠)은 조선의 26대 국왕이자 대한제국 초대 황제인 고종의 일곱째 아들이다. 1897년 경운궁 숙옹재에서 태어났다. 순종과 의친왕 이강, 덕혜옹주와는 이복형제 사이다. 어머니 엄씨는 8세 때 입궐하여 나인이 되었는데 명성황후를 모시던 중 고종의 승은을 입은 것이 발각되어 쫓겨났다가 을미사변(乙未事變, 1895년 10월 8일)으로 명성황후가 시해되자 다시 입궐하여 고종의 총애를 받았고, 이은을 낳은 뒤 귀인, 순빈, 순비 등를 거쳐 1903년 황귀비에 책봉되었다.
을미사변 이후 가중되는 일본의 압박을 아관파천(俄館播遷: 1896년 2월 11일부터 다음해 2월 25일까지 고종 황제와 세자가 러시아 공사관으로 옮겨서 거처한 사건)으로 극복한 고종은 1897년 러시아공사관에서 경운궁으로 이어한 다음 대한제국을 선포했다. 황제에 즉위한 그는 중국의 전례에 따라 왕자들을 모두 친왕으로 책봉했다.
이때 이은이 영친왕으로 책봉되었고, 궁내부 관제로 영친왕부도 설치되었다. 이은은 1902년 고종이 근대화의 일환으로 설립한 대한천일은행의 제2대 은행장으로 추대되었지만 실질적인 운영은 내장원경 이용익이 도맡았다. 1905년 러일전쟁(1904년 2월 8일~1905년 9월 5일 까지)에서 승리한 일본은 고종에게 을사늑약(乙巳勒約,1905년 11월 17일)을 강제하여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박탈함으로써 보호국으로 삼았다. 사실상 대한제국을 식민지로 만드는 데 성공한 일본은 경성에 통감부를 설치하고 이토 히로부미를 초대 통감으로 임명하여 내정을 장악했다.
영친왕 이은은 1906년부터 서울에 황족과 귀족 자제들을 위해 세운 근대식 교육기관 수학원에서 공부했다. 1907년 고종이 퇴위와 함께 그를 황태자로 책봉하자 유림에서는 과거 연잉군의 경우처럼 황태제로 해야 한다며 반발했다. 그러자 고종은 건국 초기 태종이 정종으로부터 왕위를 계승할 때 왕세제가 아니라 왕세자 자격으로 받았다는 전례를 내세워 황태자란 명칭을 고집했다. 당시 순종은 후사가 없었고, 김홍륙 독차사건의 후유증으로 건강이 나빴으므로 이 문제는 전적으로 고종의 뜻에 따라 결정되었다.
그와 함께 고종은 여흥 민씨 가문이던 민영돈의 딸 민갑완을 황태자비로 간택했다. 민영돈은 명성황후의 먼 조카뻘로 1898년 고종의 특명전권공사로 임명되어 영국·미국·벨기에 공사를 지냈으며, 을사늑약으로 국권을 빼앗겼을 때 고종의 밀지를 해외에 전했던 인물이다.
그러나 민갑완은 그해 12월 영친왕이 일본 유학을 떠나고 일제에 의해 파혼 당하자 상하이로 가서 평생 혼자 살았다. 후손들의 회고에 따르면 그녀는 어두운 옷을 입었으며 자신이 드러나길 원치 않았는데, 죽을 때까지 영친왕을 원망하지 않았다고 한다.
고종이 이은을 황태자로 책봉하자 통감 이토 히로부미는 재빨리 이은의 일본 유학을 제안했다. 그것은 일본의 막부 시절 지방 번주와 가족을 인질 차원에서 일정 기간 에도에 살게 하던 참근교대제를 원용한 것이었다. 이에 고종과 엄비는 완강하게 반대했다.
사랑하는 아들이라 언제까지나 곁에 두고 보살피려 했는데 아닌 밤중에 홍두깨로 맞은 격이었다. 하지만 고귀한 황태자에게 전례대로 최상의 교육을 실시해야 한다는 이토 히로부미의 논리를 뒤엎을 묘책이 없었다. 결국 엄비는 황태자가 방학 때마다 조선을 방문하는 조건으로 유학을 허락했다.
▲창덕궁 낙선재 / 사적 제122호 서울시 종로구 율곡로 99(와룡동)
● 마사코와 결혼하다.
이은(李垠)은 1915년 일본 육군사관학교 제29기로 입학하여 2년 뒤인 1917년에 졸업한 다음 육군 소위로 임관했다. 이듬해인 1916년 8월 조선의 왕세자 이은과 나시모토노미야 마사코(梨本宮方子, 한국명 이방자,1901년 11월 4일, 일본~1989년 4월 30일(향년 87세)의 약혼 소식이 언론에 대서특필되었다. 마사코는 왕족 나시모토미야(梨本宮)의 장녀로 일찍이 일본의 왕태자비 후보로 물망에 올랐지만 한일융화의 초석이 되라는 일왕의 명령으로 정략결혼에 내몰린 것이었다.
조선에서 15년 동안 이왕직 궁내관을 지낸 곤도 시로스케의 《대한제국황실비사》에는 고종이 두 사람의 결혼에 쌍수를 들어 환영했다고 씌어 있다. 반대로 이방자 여사의 회고록 《세월이여 왕조여》에 따르면 고종은 명성황후를 암살하고 대한제국을 멸망시킨 일본의 왕녀를 며느리로 받아들일 수 없다며 강경하게 반대했다. 하지만 이미 나라를 잃고 허수아비로 전락한 고종이나 볼모가 된 이은으로서는 아무런 결정권이 없었다.
결혼식은 1919년 1월 25일로 정해졌는데 1월 21일 갑자기 고종이 의문의 죽음을 당하면서 혼사가 무기 연기되었다. 그러다 이듬해 4월 28일에 이르러서야 도쿄에 있는 이은의 저택에서 예식이 치러졌다. 당일 이들의 결혼에 불만을 품은 유학생 서상일이 마사코가 타고 있던 마차에 사제폭탄을 던졌지만 불발되었다.
조선 총독 사이코 마코토는 특별 포고문을 통해 두 사람의 결합을 내선일체(內鮮一體)의 표본으로 선전했다. 이에 대하여 상하이에서 발행된 독립신문에서는 이은을 ‘원수의 여자와 결혼한 금수(禽獸)이며 적자(賊子)’라고 강력히 비난했다. 이은은 마사코와의 사이에서 1921년 8월 장남 이진(李晉)을 얻었지만 조선 방문 도중 병사했고, 10년 뒤인 1931년에 차남 이구(李玖)를 얻었다.
● 이왕가를 계승하다.
이은은 일본에 머무는 동안 정체성에 심한 혼란을 겪어야 했다. 일본에 온 지 3년만에 대한제국이 병탄되자 한국인들은 그를 나라를 팔아먹고 호의호식하는 매국노라며 손가락질했다. 반대로 일본인들은 그를 위험 인물이라 여기고 가까이하려 들지 않았다. 원하든 원치 않든 그는 일본과 조선 사이에 끼어 있는 불안정한 존재였다.
그런 막막한 상황에서 그는 나름의 생존법을 터득했다. 1915년 육군사관학교에 입학한 뒤 좌고우면하지 않고 공부에 열중하여 모범생 소리를 들었다. 어학에 소질이 있어 영어와 불어에 능통했다. 그는 또 수시로 집에 일본인이나 한국인 장교들을 초대하여 신뢰감을 쌓았다. 당시 부인 마사코는 손님들을 위해 청주와 냉육, 샌드위치, 과자, 홍차 등을 대접했다고 한다.
이은은 그렇듯 다양한 방식으로 자신의 존재 의의를 찾고자 했지만 내면의 고독은 쌓여만 갔다. 날이 갈수록 조국에 대한 그리움도 짙어졌다. 견디다 못한 그는 조선에 편지를 보내 낙선재에 있을 때 가지고 놀던 조약돌을 보내달라고 청했다. 얼마 후 조약돌을 전해 받은 그는 향수병이 몰려올 때마다 그 돌을 만지작거리며 위안거리로 삼았다.
1919년 아버지 고종이 승하했지만 일본 정부의 허락을 받지 못해 장례식에도 참가하지 못했다. 이듬해 3월, 조선 땅에서는 고종의 인산일을 기해 독립을 염원하는 만세운동이 벌어졌다. 한데 그는 핍박받는 동포들을 위해 아무런 의사표명도 할 수 없었다. 인질로서 적지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소경에 벙어리가 되어야 했다.
▲순종 장례식, 영친왕과 이방자 여사 ⓒ 연합뉴스
참담한 세월은 덧없이 흘러갔다. 이은이 일본 육군대학교를 졸업하고 참모본부 소속으로 근무하던 1926년 4월. 순종이 창덕궁 대조전에서 승하했다. 이은은 다이쇼 일왕의 칙령에 따라 순종이 갖고 있던 ‘이왕(李王)’ 직위를 계승했다. 아울러 순종이 갖고 있던 쇼토쿠노미야(昌德宮)의 호칭도 물려받았다.
이왕가는 명목상 일본의 왕공족에 포함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이때부터 이은의 정식 칭호는 창덕궁 이왕(昌德宮 李王)이었지만 이왕직 내부에서는 사왕 전하(嗣王殿下)라고 불렀다. 하지만 그는 1년에 며칠 동안만 종묘제례를 위해 조선에 갈 수 있었다. 그래서 조선에서는 그를 도쿄 이왕(東京 李王)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1927년 5월 이은 부부는 수개월 일정으로 유럽 여행을 떠났다. 정보를 입수한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는 상하이에서 그들을 납치하려 했지만 일제에게 사전 탐지되어 실패하고 말았다. 두 사람은 이집트, 프랑스, 영국, 이탈리아, 독일, 모나코 등지를 순회한 다음 이듬해 4월 일본으로 돌아갔다.
오랫동안 일본에 체류하면서 현지 생활에 안정을 찾은 이은은 조국을 위한 봉사활동을 시작했다. 1933년 일본 육사에 다니는 한국인 생도를 위해 일요하숙을 마련해 주었고, 1940년에는 사재를 털어 재일 한국인 여학생들을 위해 기숙사인 홍희료를 지어주었다. 또 재일유학생을 지원하기 위해 이화회(李花會)를 설립했다.
훗날 종묘제례 때문에 귀국한 이은이 이화회 회원들과 만났을 때 정확한 발음의 한국어로 학생들의 근황을 묻고 정답게 대화를 나누어 주변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당시 조선에서는 미나미 지로 총독이 창씨개명과 함께 일본어 상용 정책을 강요하고 있었지만 그는 전혀 개의치 않았다고 한다.
중일전쟁(이 한창이던 1937년 이은은 육군 장성으로서 화북 등 주요 전선에서 선전활동을 했고, 일본 본토 후방을 지키던 제1항공군의 지휘를 맡았다. 그 엄혹한 시기에 이은은 조카 이우를 통해 조선의 민요와 창극이 수록된 레코드판과 민속품 등 각종 문화재를 사들였다. 아울러 당대 일본 유명화가들의 작품을 수집하기도 했다. 또 서울 종묘에 있는 역대 선조들의 위패 81위를 똑같이 복제하여 도쿄 아카사카(赤坂)의 저택에 모셨다. 그는 자신이 5백년 조선 왕조의 후예임을 잊지 않았던 것이다.
● 경계인의 고독
1941년 12월, 일본의 하와이 기습공격으로 촉발된 태평양전쟁이 장기화 되면서 이은은 황망한 나날을 보냈다. 일본 육군의 현역 중장으로서 일선을 시찰하며 전쟁을 독려했고 이왕의 신분으로 조선으로 건너와 정신무장을 역설했다. 하지만 초강대국 미국에 대한 일본제국의 무리한 도전은 필연적으로 패배를 예고하고 있었다.
1945년 8월 12일 이은은 도쿄에서 열린 왕족들의 긴급회의에 불려가 히로히토 일왕의 무조건 항복 방침을 통보받았다. 러시아의 선전포고,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떨어진 두 발의 원자폭탄이 이미 갈갈이 찢겨진 욱일승천의 깃발을 태워버린 것이다. 이때 이은은 히로시마의 참모본부에서 근무하고 있던 조카 이우가 목숨을 잃었다는 소식을 듣고 넋을 잃었다. 7월 13일 도쿄에서 만난 지 불과 한 달만에 들려온 비보였다.
종전 이후 일본의 왕족들은 연합군 최고사령부(GHQ)의 신적강하(臣籍降下), 즉 ‘왕족의 특권을 포기하고 평민이 된다는 결정’에 따라 연금을 비롯한 각종 면세 특권을 박탈당했다. 이왕가 역시 왕족으로 간주되었으므로 졸지에 수입이 끊긴 이은은 전전긍긍하게 되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집안의 곳간이 바닥을 드러내자 궁지에 몰린 그는 도쿄의 저택을 참의원 의장 공권으로 빌려주고 집세를 받아 생활했다. 생활고로 인해 그 동안 모아두었던 조선의 문화재와 장신구들도 모두 팔아치웠다. 그는 자포자기 상태에 빠진 듯 고급요정에 틀어박혀 게이샤를 모델로 누드화를 그리다 부인과 다투기까지 했다.
▲영친왕의 누드화, 1955년작 ©연합뉴스 | 2345 x 1933 | 저작권자의 허가 없이
사용할 수 없습니다.
당시 그의 희망은 조국으로 돌아가 일정한 정치적 위치를 보장받는 것이었지만 친일파라는 멍에가 그의 발목을 잡았다. 대한민국에서는 그가 대한제국의 황태자였음에도 불구하고 일본 육군에 복무했고, 일본 왕족과 결혼했으며, 일본 왕족에 준하는 대우를 받았다는 것이 문제시 되었다. 국회에서 반민족행위처벌법을 토의할 때 의열단 출신의 박건웅은 “동경의 이왕은 민족 반역자인데 왜 자살하지 않았는가?”라고 성토하기까지 했다.
이런 조국의 뒤틀린 시선 때문에 이은은 괴로웠다. 일본 육사 출신으로 육군참모총장을 역임한 이형근의 증언에 의하면 당시 그는 과거 조선 동포들을 나락으로 떨어뜨린 선조들의 잘못을 사과하겠다는 뜻을 표명하며 이제라도 해방된 조국을 수호할 수 있는 강력한 군대를 갖추어야 된다고 역설했다고 한다. 그 말에 감명받은 자신이 귀국한 뒤 국군 창설을 주도했다는 것이다.
종전 후 미군에게 배포된 한국 관련 팜플렛에 영어로 번역된 아리랑이 수록되어 있었는데 추적 결과 번역자가 바로 이은이었다. 이로 미루어볼 때 그는 일본 육사에서 정식 군사교육을 받았던 자신이 신생 조국의 군무에 일정한 역할을 기대했던 것 같다. 하지만 미군정은 정치적으로 민감한 그의 귀국을 허락하지 않았다.
1946년부터 시작된 과도입법위원회 시절에는 그를 정적으로 인식한 이승만의 견제 때문에 발이 묶였다. 1946년 5월 미국의 뉴욕 타임스는 이은이 대통령이 될 것이라는 기사를 실었다. 그 때문이었을까. 이은이 도쿄에서 미군정이 주최한 만찬에 참석했을 때 만난 이승만에게 귀국 의향을 밝혔지만 “오던 가던 마음대로 하시오.”라고 냉랭한 응답을 받았을 뿐이다.
1948년 8월, 남쪽에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자 이은은 재차 귀국을 타진했지만 그의 정치적 영향력을 우려한 이승만 대통령으로부터 외면당했다. 그렇듯 이은은 미군정과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귀국 허가를 받지 못하고 고립상태에 빠졌다. 아들 이구의 미국유학을 결정한 뒤 대한민국 정부에 아들의 여권 발급을 요청했지만 역시 반응이 없었다. 그 때문에 1950년 8월 이구가 미국유학을 떠날 때 일본 정부가 발급한 임시 여권을 사용해야 했다.
1950년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그는 유엔군을 위해 학습원 교수 블라이드와 함께 《A First Book of Korean》이라는 한국어 교본을 저술했다. 아울러 주일 공사 김용주의 부탁으로 재일교포를 대상으로 하는 의용군 모집과 구호물자 수집에 나섰다.
그는 또 일본에 밀항한 한국인 학생을 돕기 위해 동분서주했지만 일본 내에서 특별한 수입원이 없었으므로 1952년 도쿄의 저택을 세이부(西武) 그룹의 창업자인 쓰쓰미 야스지로에게 팔아 자금을 마련했다. 고난에 빠진 조국을 위해 뭔가 조금이라도 기여할 수 있었던 보람찬 시기였다.
● 쓸쓸한 환국, 침묵의 영면
1954년 대한민국에서는 구황실재산처리법을 제장하여 대한제국 황실의 재산을 모두 국유화했다. 그 대신 황족의 직계와 배우자에게 매월 생활비가 지급되었지만 일본에 머물고 있던 이은은 제외되었다. 대한제국의 실질적인 후계자였던 그로서는 황망한 일이었다.
1955년, 그는 여동생 덕혜옹주와 소 다케유키와의 이혼을 성사시켰다. 자신과 마찬가지로 일찍부터 일본으로 끌려와 고독하게 살다가 정략결혼의 희생자가 되었던 불쌍한 동생이었다. 고향에 대한 그리움으로 정신질환을 앓고 있던 그녀는 당시 의사 결정 능력이 전무했다. 그래서 아내인 이방자 여사가 도맡아 일을 추진했다.
이은 부부는 1957년 아들 이구가 매사추세츠 공과대학교를 졸업하자 미국으로 건너가 한동안 뉴욕에 머물렀다. 한데 이은이 1959년 3월 갑자기 뇌일혈로 쓰러졌다가 가까스로 회복되자 5월에 일본으로 돌아갔다. 그 탓으로 그해 10월 25일 이구는 부모가 불참한 가운데 우크라이나계 미국인 줄리아 멀록과 결혼식을 올렸다.
1960년, 4.19혁명으로 이승만과 자유당 정권이 붕괴되고 장면(張勉,1899년 8월 28일~1966년 6월 4일 / 향년 67세)의 민주당 정부가 수립되면서 이은에게 새로운 기회가 열렸다. 장면은 그를 통해 민심을 얻으려는 생각으로 주영 대사직을 제안했지만 건강상의 이유로 고사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귀국길이 활짝 열리자 마음이 설렜다.
1961년 5월, 이은은 이구가 살던 하와이를 다녀온 뒤 지병이 재발하여 성 누가 병원에 입원했다. 그의 병명은 뇌혈전증으로 인한 실어증이었다. 그 무렵 카톨릭 신부의 권유로 영세를 받아 요셉이란 본명을 얻었다. 그해 5.16군사정변으로 정권을 잡은 박정희(朴正熙)는 이구의 소식을 듣고 치료비와 생활비를 지원했지만 병세는 악화일로를 걸었다.
1963년 11월 22일에 이은은 드디어 고대하던 귀국길에 올랐다. 하지만 곧 혼수상태에 빠져 곧장 성모병원에 입원했다. 그 후 오랫동안 고독한 투병 생활을 하던 그는 1970년 5월 1일 창덕궁 낙선재에서 세상을 떠났다. 향년 73세였다. 그날 임종을 지키던 이방자 여사는 60여년 간 함께 했던 고독한 황태자 이은에게 작별인사를 했다.
“안녕히 가세요.”
일국의 왕자로 태어나 평생 한 번도 자신의 뜻대로 살아보지 못했던 비운의 황태자 이은, 그의 마지막 소망은 고국에서 평범한 나날을 보내는 것이었지만 그조차 격변하는 시대의 회오리바람 속에서 산산히 부서졌다. 그의 부음이 알려지자 전주 이씨 대동종약원에서는 의민황태자(懿愍皇太子)란 시호를 바쳤다. ‘의민(懿愍)’이란 ‘평생 고난의 길을 걷다’라는 뜻이다.
출처> 한국사인물열전 이상각
1963년 충남 태안 출신. 시인, 작가. 대한민국항공회 자문위원, 복잡하고 난해한 고전과 역사기록을 알기 쉽게 해석함으로써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역사 교양서를 쓰고 있다. 아울러 조선시대 역사 교양서를 쓰고있다. 아울러 조선시대 역관이나 화원 등의 전문가 집단과, 백정이나 광대, 노비 등 핍박받던 천민들의 삶을 적극적으로 조명한다.
최근에는 우리나라의 민항공사를 정리한 항공역사서를 집필했다. 저서로《고려사》,《조선왕조실록》,《이도 세종대왕》,《이경 고종황제》,《효명세자》,《한글만세, 주시경과 그의 제자들》,《꼬레아러시》,《나는 사도세자의 아들이다》,《조선팔천》,《조선역관열전》,《조선노비열전》,《조선정벌》,《조선몽》등이 있다.
인터넷 및 다음백과 자료수집 편집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