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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2011. 05. 23(월)
■ 昌寧曺氏 始祖 實史 考察
一. 서설
우리 창녕조씨 시조공 휘 계룡께서는 과연 어떠한 분이었을까?
그리고 시조 할머니는 누구였을까? 이에 관하여 한번 이상 생각해 보신 분들이 많을 것으로 믿는다.
지금까지 우리가 통상 접할 수 있는 우리 창녕조씨 족보나 고구려와 신라와 백제 역사의 정사라 할 수 있는 삼국사기, 그리고 삼국사기에 비하여 야사라고 할 수 있는 삼국유사에서는 우리 시조 할아버지의 선대와 그 역사, 그리고 시조 할머니의 함자가 무엇인지 직접적으로 명시한 기록을 찾아 볼 수 없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우리 창녕조씨족보나 삼국사기, 삼국유사, 그리고 경주김씨족보, 또 경주이씨족보 등에서 시조 할아버지와 시조 할머니의 실체를 추적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즉 각 기록의 글자와 글자 속에서 시조실사를 찾아낼 수 있다는 것이다.
아래에서는 우리 시조와 관련된 여러 기록을 토대로 시조공과 시조공의 선대의 역사를 추적해 보면서 앞으로 혹시 발견되게 될 지도 모르는 시조관련 기록에 앞서 불경불손함을 무릎쓰고 조심스럽게 저 나름대로 연구한 것을 차후 연구하시는 분들게 참고나 될까해서 소개하여 드리고자 한다.
二. 시조공의 원래 성씨 고찰
1. 창녕조씨의 득성 유래
창녕조씨 족보 등에 의하면, 갈빗대 아래 또는 등 뒤에 曺자른 글자가 있어서 성씨를 조씨로 하였다라고 한다. 과연 이 말이 무엇을 가리키는 것일까? 갈빗대 아래 또는 등 뒤에 조라는 글자가 있었다라는 것은 원래 성씨가 조씨라는 것일까, 아니면 다른 성씨였는데 조씨가 되었다는 것일까?
2. 시조공의 원래 성씨 고찰
시조공의 원래의 성씨와 휘자(諱字)를 분명히 밝히고 있는 기록은 현재로서는 찾을 수 없다. 여기서 시조공의 원래 성씨와 휘자를 추적해 보고자 한다. 우리 창녕조씨족보에 의하면 시조공은 용의 아들인 옥결(玉唎)의 아들로 기록되고 있는데, 옥결의 원래 성씨가 밝혀지면 자연히 시조공의 원래 성씨가 밝혀지게 된다.
기록에 의하면, 신라 한림학사 이광옥(李光玉)의 딸 예향(禮香)이 나이 20세가 되어 청룡병을 얻어 창녕 화왕산 용지(龍池)에서 목욕할 때 용을 만난 후 시조공을 낳았다라고 하고 있다. 여기서 청룡병이라는 것은 나이 20세가 되어 혼인할 사람을 찾는다는 말이 되고, 창녕 화왕산 용지에서 용을 만났다라는 말은 용과 혼인을 하였다라는 것을 가리킨다.
또 창녕은 비사벌가야 지역으로서 신라 진흥왕이 서기 555년에 비사벌에 완산주(完山州)를 설치하고 서기 561년에는 창녕순수비를 세웠다라고 하는 바, 이는 진흥왕이 서기 555년이전에 비사벌가야를 합병하고서 신라 땅으로 하였다는 말이 된다.
그러므로 진평왕 때는 이미 창녕은 신라 땅인 바, 이 당시 창녕의 유력한 세력가는 새로이 신라로부터 봉함을 받은 자, 아니면 원래 비사벌가야의 왕족일 것이다. 신라로부터 봉함을 받은 경우 진흥왕 때의 신라 왕족은 김씨이므로 김씨일 가능성이 농후하며, 한편 비사벌가야의 왕족인 경우에는 금관가야의 김수로왕과 같이 김씨일 것임이 거의 확실하다.
여기서 신라 김씨인 경우 최소한 진골 신분을 가지게 되며, 가야 김씨인 경우 금광가야의 김씨와 마찬가지로 진골로 편입되었을 가능성이 짙다. 여하튼 이 당시 창녕 지역의 유력한 세력가는 김씨일 가능성이 농후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용이라는 것은 옛부터 왕의 상징어로 쓰여져 왔으므로 용자 옥결은 왕의 아들로서 왕족이 된다. 이리하여 용자 옥결이 김씨일 것임이 거의 확실하며 아들인 시조공 또한 김씨임이 거의 확실해진다. 이로써 시조공의 선대는 신라왕족이나 가야왕족임이 거의 확실한데, 창녕화왕산 안에 있는 용지라는 말에서 원래의 비사벌가야의 왕족일 가능성이 더 많아 진다.
반면, 시조공의 성씨가 원래부터 조씨였다면, 창녕가야 즉 비사벌가야의 왕족은 조씨였다는 말이 되는데 이 경우 한반도인 우리나라에서 자생한 성씨가 아니라면, 중국의 조씨(曹氏)가 우리나라로 온 것이 될 것이다.
三. 시조공은 진평왕의 사위
우리 족보상에는 시조공은 나중에 진평왕의 사위 즉 부마(駙馬)가 되었다라고 기록되고 있다. 진평왕은 세 딸을 두었는데, 첫째가 제1비인 마야부인 김씨(摩耶夫人 金氏)의 딸인 덕만(德曼)공주로 경주김씨선원세보(慶州金氏璿源世譜)와 경주김씨세보권지일(慶州金氏世譜卷之一)에 의하면 남편은 김인평(金仁平)이며, 둘째가 제2비인 승만부인 손씨(僧滿夫人 孫氏)의 딸인 천명부인(天明夫人)으로서 그 남편은 김춘추의 아버지인 김용춘(金龍春)이며, 셋째가 서동요(薯童謠)를 통하여 세상에 잘 알려진 바대로 제2비인 승만부인 손씨의 둘째 딸인 선화(善化)공주로서 그 남편은 백제 의자왕(義慈王)의 아버지인 무왕(武王)이다.
한편 선덕여왕의 뒤를 이은 진덕여왕은 진평왕의 동생인 국반갈문왕과 월명부인(삼국유사에서는 阿尼夫人) 박씨의 딸로 이름은 승만(勝曼)이다. 경주김씨 선원세보에 의하면 진평왕의 사위로 조계룡이 기록되어 있고, 경주김씨세보권지일에서도 조계룡이 사위로 기록되어 있으며, 경주이씨족보에 의하면 경주이씨 시조 알평의 20세손인 이광옥(李光玉)의 딸 예향(禮香)이 조계룡의 어머니로 기록되어 있고, 경주이씨 대동보 총편 일람에서는 광옥(光沃)이 조계룡의 어머니인 예향의 아버지로 기록되어 있으며, 경주이씨 송설공파보전에서는 광옥(光沃)의 딸 예향(禮香)이 조계룡의 어머니로 기록되어 있다.
이상에서 살펴보면, 시조 휘 계룡은 신라 한림학사 이광옥의 딸인 예향의 아들이며, 아버지는 용의 아들이고, 진평왕의 사위이시다.
진평왕의 세 딸 중 둘째인 천명부인과 셋째 선화공주는 모두 남편이 어떤 인물인지 역사적으로 분명히 나타나고 있으나 선덕여왕의 남편은 김인평 또는 음갈문왕(飮葛文王)이라는 것 외에는 어떤 인물인지 분명히 나타나고 있지 않다.
진평왕의 세 딸 외에 또 딸을 두었다라는 기록이나 전설이 지금까지 발견되지 아니하였는 바, 세 딸 외에 딸을 두었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그러므로 시조공의 부인은 덕만공주인 선덕여왕일 가능성이 짙어진다.
한편, 우리 족보상에 나타나는 시조공이 부마도위(駙馬都尉)라는 기록에서 시조공의 부인이 선덕여왕임을 시사해 주고 있다.
부마는 임금의 사위를 가리키는 말이며, 도위(都尉)는 위(尉)의 윗 계급을 가리키며 위(尉)는 공주(公主)나 옹주(翁主)와 혼인한 자에게 준 관직이다.
구체적으로 공주와 옹주를 나누어서 보면, 왕의 정비(正妃)의 딸은 공주가 되며, 정비 이외의 딸은 옹주가 되는데, 도위는 위의 제일 윗자리이므로 정비의 딸인 공주의 남편이 오를 수 있는 벼슬이라 할 것이므로, 진평왕의 정비인 마야부인의 딸은 덕만공주로 나중에 선덕여왕이 되었는 바, 도위인 시조공은 바로 선덕여왕의 남편임이 거의 확실해 진다.
반면, 진평왕의 둘째 딸인 천명부인과 셋째 딸인 세칭 선화공주는 정비가 아닌 후비인 승만부인 손씨의 딸이므로 조선시대로 말하면 옹주가 된다.
四. 시조공과 선덕여왕의 탄생 및 혼인 연도 고찰
1. 시조공의 탄생 및 혼인 연도 고찰
경주이씨 족보에 의하면, 시조공의 어머니이신 예향의 아버지 이광옥(李光沃. 李光玉과 동일인)은 신라 법흥왕(서기 514-540) 때인 서기 536년경 탄생한 사람인데, 여기에다 혼인적령기인 20년을 더하면 556년경이 되고 이때는 진흥왕(서기 540-576) 17년경이 되는 해이며, 서기 556년경에 예향이 탄생한 것으로 보면 20세가 되는 해인 서기 576년경에 창녕 화왕산에서 용자 옥결과 혼인하여 시조공을 낳은 것이 되는데 이때는 진지왕 1년경이 된다.
그리고 서기 576녕에다 혼인 적령기인 20년을 더하면 서기 596년경이 되는데, 이때는 진평왕 18년경이 되는 해가 된다.
이상에서 보는 바와 같이 시조공께서는 서기 576년경 탄생하시고 서기 596년경 혼인한 것으로 추정된다.
2. 선덕여왕의 탄생 및 혼인 연도 고찰
여러 기록에 의하면 선덕여왕은 진평왕의 맏딸임이 틀림없다. 둘째 딸인 천명부인은 태종무열왕 김춘추의 어머니인 바, 삼국유사에 의하면 김춘추는 서기 603년에 탄생하여 서기 661년에 59세로 사망하였는데, 그러면 김춘추의 어머니 천명부인이 혼인한 연도는 서기 603년경 이전이 되고 혼인적령기 20년을 빼면 서기 583년경이 되는데, 서기 583년경 이전에 천명부인이 탄생한 것이 된다.
한편, 셋째 딸 선화공주는 백제 무왕의 왕비인데, 무왕은 서기 600년에 왕위에 올랐는 바, 서기 600년 이전에 선화공주와 혼인한 것이 된다. 앞에서 김춘추의 어머니 천명부인은 서기 603년경에 혼인한 것이 된다고 하였는데, 선화공주가 혼인한 해를 서기 600년경 이전이라고 볼 때, 천명부인은 서기 600년 이전에 혼인하였을 가능성이 짙어지고 이에 따라 서기 580년경 이전에 탄생한 것이 된다.
이리하여 선덕여왕은 천명부인보다 먼저 탄생하였으므로 서기 580년경 이전보다 최소한 1-2년 이전이 되는 서기 579년경 이전에 탄생한 것이 되는 바, 여기에 혼인적령기인 20년을 더하면 서기 599년경 이전에 혼인한 것이 된다.
한편으로는 진평왕이 제2비인 승만부인을 얻은 것은 마야부인에게서 아들을 얻지 못한 것에서 그 연유를 추정할 수 있으므로 덕만공주인 선덕여왕의 탄생연도는 3-5년 이상 이전에 탄생한 것이 된다. 그리고 선덕여왕이 즉위한 해인 서기 632년은 최소한 54-57세 이상이 될 것이다. 이로써 선덕여왕이 즉위할 당시에는 이미 할머니였음이 밝혀지게 된다.
3. 결론
앞에서 본 바와 같이 시조공은 서기 576년경에 탄생한 것이 되고, 선덕여왕도 서기 576년경 이전에 탄생한 것이 된다.
물론 혼인 적령기를 보통의 여성을 기준으로 하여 20세로 보았으나 경우에 따라서는 15-30세로 볼 수도 있겠다.
그러나 선덕여왕이 탄생한 해는 천명부인보다 늦지 않다라는 것은 명백한 사실이므로 서기 580년경 이전이 될 것이다.
이로써 시조공과 선덕여왕의 춘추가 서로 비슷한 것으로 산출되는 바, 혼인가능성은 일단 높은 것으로 보인다.
五. 시조공은 원래 김인평
선덕여왕의 남편이 기록상 김인평 또는 음갈문왕 이외에는 누구였는지에 관하여 명시한 기록이 없는 바, 앞에서 시조공과 선덕여왕의 각 탄생 및 혼인 연도를 살펴보면서 진평왕의 사위가 되셨다는 시조공께서 진평왕의 세 딸 중에서 김용춘의 부인이 된 천명부인과 백제무왕의 왕비가 된 선화공주를 제외한 덕만공주인 선덕여왕과 혼인하였을 가능성을 고찰해 보았다.
그러면 과연 진평왕의 사위인 시조공 휘 계룡과 선덕여왕의 남편이라고 기록된 김인평 또는 음갈문왕과는 어떤 관계가 있을까?
첫째,
음갈문왕의 음은 마실 음(飮)인 바, 마실갈문왕으로 읽을 수 있다. 즉 선덕여왕의 배필인 음갈문왕은 순우리말로 마실갈문왕이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지금 우리가 쓰고 있는 조(曺)는 원래 신라시대 말로 마실 조였다.
마실은 원래 '마 ㅅ . ㄹ'에서 'ㅅ . ㄹ'자가 유성음화 되고 다시 '을'로 변함으로써 마을이란 말로 되었다.
마실 조(曺)는 즉 관청을 뜻하는 말로 국(局)이나 청(廳)과 같은 뜻을 가진 글자이다.
마실 음과 마실 조는 마실이라는 말에서 서로 통하는 글자가 되며 이두식으로 읽게 되면 둘다 마실이라는 말이 되므로 음(飮)갈문왕은 즉 조(曺)갈문왕이 되는 것이다. 즉 삼국유사 왕력보에서는 (曺)갈문왕의 조를 마실로 읽어서 같은 훈을 가진 음(飮)자로 기록한 것이 된다.
둘째,
시조공의 성씨는 시조공이 창녕 화왕산을 거점으로 한 비사벌가야의 왕손일 것이라는 점에서 위에서 본 바와 같이 김씨임이 거의 확실하다. 즉 선덕여왕의 남편이라고 기록된 김인평의 김씨와 일치하게 된다.
이리하여 음갈문왕은 마실(曺)갈문왕이 되며 원래 김씨였으나 이에 성씨를 한자식 성씨인 조(曺)를 쓴 것이 되고, 음갈문왕은 선덕여왕의 남편이므로 결국 김인평과 동일인이 되는 것이다.
선덕여왕, 천명부인 그리고 선화공주 외에 또 진평왕에게 딸이 있었다라는 기록이다 전설이 없음이 확실한 이상 선덕여왕의 남편이 곧 시조공 휘 계룡일 것임은 위에서 본 바대로 거의 확실하다고 본다.
六 선덕여왕에 대한 역사서 기록 고찰
역사소설등에서 선덕여왕이 처녀인 것으로 기록함으로써, 보통사람들은 선덕여왕이 처녀인 줄로만 인식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선덕여왕에게 배필이 있었는지 여부에 관하여 한마디 언급도 없으며, 삼국유사 기이편 선덕여왕의 지기삼사에서는 남편이 없다라는 의미로 적고 있으나, 삼국유사 왕력보에서는 선덕여왕의 남편이 음갈문왕이라고 분명히 적고 있고, 또 경주김씨족보에서는 선덕여왕의 남편이 김인평이라고 분명히 기록하고 있으며, 또한 앞에서 고찰해 본 바와 같이 선덕여왕의 배필은 선덕여왕의 배필은 창녕조씨 시조공임이 거의 확실한 것으로 나타났는 바, 이하에서는 선덕여왕이 배필이 있었다라는 것을 토대로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의 기록상의 의문점이나 모순점을 설명하고자 한다.
1. 삼국사기 기록
우선 삼국사기 선덕여왕편의 기록중 논하고자 하는 부분을 발췌하면 다음과 같다.
...선덕여왕이 즉위하였다. 이름은 덕만이고 진평왕의 장녀이다. 어머니는 김씨 마야부인이다. 덕만은 성품이 너그럽고 어질며 명철하고 민첩하였다. 왕(진평왕)이 돌아가시매 아들이 없어 나라 사람들이 덕만을 세우고 호를 올려 성조황고(聖祖皇姑)라고 하였다.
전왕(前王. 진평왕) 때에 당나라로부터 모란꽃 그림과 함께 꽃의 씨를 얻어 왔는데, 덕만에게 보이나, 덕만이 말하길 "이 꽃은 반드시 향기가 없겠나이다"하니 왕은 웃으면서 말하기를 "너는 어찌 그것을 아느냐?" 라고 묻자, 대답하여 이르길, "그림의 꽃을 보니 벌 나비가 없는 까닭으로 이를 알겠나이다. 대체로 여자가 국색이면 남자들이 따르고 꽃이 향기가 있으면 벌 나비가 따르는 이치이온데 이 꽃은 아주 아름다우나 그림에 벌 나비가 없사오니 이에 반드시 향기가 없을 것이 옵니다"하였다.
씨를 심어 보았더니 과연 말한 바와 같았다. 덕만은 먼저 판단하는 식견이 이와 같았다.
원년(서기 632) 2월에 대신 을제(乙際)로 하여금 나라의 모든 정사를 보게 하였다.
3년(서기 634) 봄 정월에 원년을 고쳐 인평(仁平)이라 하였다.
...16년(서기 647) 봄 정월 8일에 왕이 돌아가시므로 시호를 선덕이라 하고 낭산(狼山)에 장사지냈다. (당서에 이르기를, 정관 21년(서기 647)에 돌아가셨다하고, 통감에는 말하기를 25년(서기 651)에 돌아가셨다고 하는데 본사(本史)로써 이를 고찰하건대 통감이 틀렸다.)
논하건대, 신(臣. 김부식)이 듣기에 옛날에 여와씨가 있었으나 바로 천자는 아니었고 복희를 보좌하여 구주를 다스렸을 따름이며, 여치 무조와 같은 사람에 이르러서는 어리고 약한 주인(임금)을 맞아 조정에 임하여 정사를 대신하였으나, 사서(史書)에는 공공연하게 왕이라 하지 아니하였고 다만 고황후여씨, 측천황후 무씨라고 기록하였다.
이를 하늘의 도리로써 말하면 곧 양은 강하고 음은 유하고, 사람으로 말하면 곧 남자는 높고 여자는 낮은데, 어찌 가히 모구(悁垯)가 안방을 나와서 국가의 정사를 결단하랴? 신라가 여자를 세워 왕위에 앉힌 것은 실로 난세의 일이며, 나라가 망하지 않은 것이 다행이다.
서경에 말하기를, 암탉이 새벽을 알린다 하고, 역경에 말하기를, 암퇘지가 껑충거린며 날뛴다 하였으니 가히 경계할 일로 감아야 하지 아니 하겠는가?
2. 사국유사의 기록
가. 왕력보(왕력보)
제27대왕 선덕여왕은 이름이 덕만이고 아버지는 진평왕이며 어머니는 마야부인 김씨이다. 성골의 남자가 없으므로 여왕이 즉위하였다.
왕의 배필은 음갈문왕이다. 인평 갑오년에 즉위하였다. 14년을 다스렸다.
나. 선덕여왕의 예언 (善德王知機三事)
선덕여왕이 살아 계실 때 미리 안 것이 세가지가 있는데, 여기서는 삼국사기에도 기록되어 있는 모란꽃 그림과 나비에 관련된 부분을 중심으로 적어 본다.
제27대왕으로 덕만인데 시호는 선덕여왕이다. 성은 김씨이며 아버지는 진평왕이다. 정관 6년 임진년에 즉위하여 16년을 다스렸다.
무릇 미리 안 것이 세가지가 있는데, 첫째로 당나라 태종이 빨강, 자주, 흰색의 모란꽃 그림과 그 씨 석되를 보내었는데, 왕이 그림꽃을 보고 가로되, 이꽃은 반드시 향기가 없다라고 하였다. 이에 명을 받아 뜰에 종자를 심고 꽃이 피고 지는 것을 기다렸는데 과연 그 말과 같았다.
그당시 여러 신하들이 왕에게 이르길, "꽃에 관한 것을 어떻게 아셨습니까?"하고 물으니, 왕이 이르기를, "꽃을 그렸으나 나비가 없어 그것이 향기가 없다는 것을 알았으며 이는 당나라 임금이 과인이 배우자가 없는 것을 우롱한 것이다"라고 대답하였다.
이에 여러 신하들이 모두 그 성스러운 지혜에 탄복하였다. 세가지 색의 꽃을 보낸 것은 대개 신라에 세 여왕이 있음을 알고서 그러하였는지! 선덕, 진덕, 진성이 이 세 여왕이다. 당나라 임금이 앞을 내다보는 눈이 있음이다.
3. 기록 고찰
가. 선덕여왕은 할머니
위 사국사기의 기록중 모구(悁垯)라는 말에서 선덕여왕은 왕위에 오를 당시 연세 많은 할머니였다는 사실을 알 수가 있다.
이때 할머니라는 말은 혼인한 할머니인지 혼인하지 아니한 처녀몸인 할머니인지에 대하여는 명백한 기록이 나타나지 않는다.
모란꽃 그림과 벌나비에 대한 이야기에서도 선덕여왕 자신이 처녀라든지 혼인하였는지 여부에 대하여 언급되어 있지 아니하다.
즉 삼국사기에서는 선덕여왕이 혼인하였는지 여부에 관하여는 일언반구도 없다. 물론 남편에 대한 기록도 없다.
그러나 삼국유사에서는 왕력보에서 선덕여왕의 배필은 음갈문왕이라고 분명히 기록하고 있는 바, 선덕여왕은 혼인한 할머니였음이 밝혀진다. 이리하여 선덕여왕은 처녀의 몸으로 왕위에 오른 것이 아니고 이미 혼인했던 할머니로서 왕이 되었던 것이다.
나. 꽃그림 사건의 시기
삼국사기에서는 전왕 즉 진평왕 때의 일이라고 적고 있고, 삼국유사에서는 당태종 때의 일로 적고 있어 꽃그림 사건이 과연 언제 있었는지 불명확하다.
진평왕은 서기 579년부터 서기 632년까지 왕위에 있었으며 당태종은 서기 627년부터 서기 649년까지 왕위에 있었는데, 삼국사기 진평왕조에는 당태종이 꽃그림을 보냈다는 기록이 없는 반면, 진평왕 43년(서기 621년)에 당고조가 국서와 비단 300필을 보냈다는 기록이 있고, 삼국유사에서는 당태종이 꽃그림을 보냈다고 적고 있으나 이에 의하면 서기 632년부터 선덕여왕이 돌아가신 서기 647년 사이에 있었던 일이 되는데 삼국사기에는 선덕여왕 시절에 당나라로부터 꽃그림을 받았다는 기록이 없을뿐더러 삼국사기에서 말하는 전왕(前王) 즉 진평왕 때의 일이라는 기록과 상호 모순이 된다.
삼국유사의 기록은 삼국사기의 기록보다 연대면에서 보면 구체적이지 않고 포괄적으로 적고 있는 바, 편년체로 상세히 적고 있는 삼국사기의 기록이 일단 정확한 것으로 보아야 마땅할 것이다. 그러므로 기록을 종합하건대 위 꽃그림 사건은 선덕여왕이 공주시절이었던 진평왕 43년(서기 621년)에 당나라의 고조가 보낸 화병풍으로 인한 것이 된다.
이리하여 삼국유사의 기록은 정사라기 보다 이야기 중심으로 엮은 기록이 되는데 이야기는 시대를 뛰어 넘어 종종 비약적으로 적히는 수도 적지 않다. 즉 정확한 연대에 기초하지 않고 흥미거리나 전설 또는 신화적인 이야기로 기록되어 전하기도 하는 것이다.
선덕여왕은 당태종 시절에 왕위에 올랐기 때문에 선덕여왕에 얽힌 이야기는 당태종 시절에 있었던 것으로 기록되기 쉽상이다.
구체적으로 공주시절이라고 하지 않고 여왕이라는 최후의 신분을 염두에 두고 기록하기 때문에 일어나는 것이다.
역사상 상세하지 않은 기록은 거의 생략적이거나 비약적으로 기록되는 데 이는 흔히 있는 일이다.
다. 삼국유사 기록의 모순 해결
삼국사기에서는 선덕여왕에게 배필이 있었는지 여부에 관하여 한마디도 없어 그 가능성이 반반이라고 볼 수 있는 반면, 삼국유사에서는 선덕여왕의 배필은 분명히 음갈문왕이라고 적었으면서도 기이편 지기삼사에서는 선덕여왕 자신이 배우자 없음을 당태종이 우롱한 것이라고 적음으로써 삼국유사 자체의 기록에 모순이 있는 바, 삼국유사의 기록만을 기초로 하여 살피면, 당나라 태종 시절에 선덕여왕은 배필이 없는 여왕이라는 것이 되는데, 그러면 서기 632년 이전 즉 진평왕 때인 덕만공주 시절에는 배필이 있었고 그 배필은 즉 음갈문왕이라는 말이 된다.
여기서 갈문왕이란 신라 때 왕의 아버지, 형제, 남편을 봉하여 호칭한 것인데, 삼국유사의 기록에 의하면 선덕여왕은 여왕이 된 후 이미 사망한 남편을 봉하여 음갈문왕으로 삼은 것이 되나, 왕력보에서는 음갈문왕을 추봉한 것으로 적고 있지 아니하다. 따라서 선덕여왕은 즉위하면서 남편을 봉하여 음갈문왕으로 삼은 것이 되어 아직도 남편이 생존한 것이 된다.
이리하여 결국 선덕여왕의 꽃그림 또는 화병풍에 얽힌 이야기는, 기록 자체내의 모순이 있는 삼국유사의 기이편 지기삼사의 기록처럼 당태종 시절 여왕에게 남편이 없을 때가 아니라 당나라 고조 시절에 덕만공주가 남편이 생존해 있을 때인 서기 621년의 일로 되어, 삼국유사 기이편 지기삼사에 적은 선덕여왕이
"과인에게 배우자 없음을 당태종이 우롱한 것이다"
라는 기록은 진편왕 때 덕만공주가 명석하고 사리에 밝았다라는 이야기가 후대에 전해지면서 선덕여왕 때의 일로 와전되고, 신라에 세 여왕이 있었다라는 사실을 기초로하여 당태종의 예지를 과장하는 등 전설이나 기록자의 주관적인 견해를 가필함으로써 연유한 것으로 결론 내릴 수 있겠다.
4. 결론
이상 삼국유사 기이편 지기삼사에 나오는 모란꽃 그림 이야기는 삼국사기 선덕여왕편에 나오는 모란꽃 그림 이야기 그리고 삼국사기 진평왕편 43년조에 나오는 화병풍 선물 기록을 종합하건대, 이 이야기는 선덕여왕이 공주시절이었던 서기 621년(진평왕 43년, 당고조 4년)에 있었던 일로서 당시 남편이 생존해 있었으며 당나라로부터 받은 화병풍의 모란 그림에 벌 나비가 없는 것을 보고 그 모란꽃이 향기가 없을 것이라 예언하였고 실제로 그 씨를 심어 꽃을 피웠더니 향기가 없었다라는 것이 된다.
5. 여론
삼국사기 선덕여왕편 원년조에 대신(大臣) 을제(乙際)에게 국정을 총리케 하였다라는 기록만 있고 을제라는 인물이 누구인지에 대하여 기록이 없는데, 당시 제 2인자였을 가능성으로 보면 선덕여왕의 남편일 가능성을 전혀 배제할 수 없는 바, 연구해 볼 만하다고 생각한다.
또 삼국사기 선덕여왕편 3년조에 "개원하여 인평(仁平)이라고 하였다"라는 적고 있는 바, 경주김씨선원세보에 의하면 선덕여왕의 남편이 김인평(金仁平)이라고 기록되고 있어 연호인 인평과 인물명인 인평과는 어떤 연관이 있는지 연구해 보는 것도 가치가 있다고 본다.
또한 삼국사기 선덕여왕 말년조에 "통감에는 정관 25년인 서기 651년에 선덕여왕이 돌아가신 것으로 기록되어 있기도 한데, 이 기록이 선덕여왕의 남편인 음갈문왕과 어떤 연관이 있는지 연구해 볼 만하다. 혹시 음갈문왕이 서기 651년에 돌아가신 것을 우회적으로 선덕여왕이 돌아가신 것으로 적은 것은 아닌지 의문이 간다.
즉 선덕여왕이 비록 서기 647년 1월 8일에 돌아갔으나 제 2인자로서 비상대권을 받았다고 생각되는 인물인 음갈문왕께서 실제 돌아가신 해인 서기 651년을 선덕여왕의 돌아가신 해로 적었을 가능성도 있다는 것이다.
1) 신라 한림학사 이광옥의 딸 예향이 처녀 때 청룡병을 얻어 화왕산의 용담에서 목욕하다가 용의 아들 옥결과 서로 만나 계룡을 낳으니 갈
빗대 아래 조라는 글자가 있으므로 성을 조씨로 하였다(新羅翰林學士李光玉女諱禮香得靑龍疾浴于火王山龍潭與龍子玉唎相遇生
繼龍脅下有曺字仍姓曺云)<梅溪家牒 참조. 梅溪는 曺偉의 號>
예향이 20세에 이르러 청룡병을 얻어 창녕화왕산의 용지에서 목욕하다가 용의 아들을 만났는데 교접하는 용이 그 위에 있었으며 아들
을 낳으니 갈빗대에 조라는 글자가 있으므로 이에 성을 조씨, 이름을 계룡이라 하였다...(禮香少熺年至二十得靑龍疾浴于昌寧火王
山龍池遇龍王子交龍其上已生子脅有曺字仍姓曺氏名繼龍昌城府院君眞平王女生五男二女其後九代平章事十二代少監)<慶州李
氏 松卨公派譜全, 菊堂公派譜 참조>
...아들을 낳으니 등 위에 글자가 있어 가로되 용의 아들인 옥결의 아들 조계룡이라...(...生子背上有字曰龍子玉唎子曹繼龍云...)
<昌寧火王山龍潭錄 乙丑, 草堂先生文集, 국립중앙도서관, 1922.2.2.간행, 참조>
2) 원래 다른 성씨로서 또다른 성씨가 된 예는 신라 유리왕 때 사성을 받은 최씨를 들 수 있는데, 원래 소(蘇)씨였다.
경주최씨의 중시조는 최치원(崔致遠)이다. 이후 안동김씨와 안동권씨도 원래 성씨가 있는 데서 다른 성씨로 된 예에 해당된다.
3) '원래 성씨가 조(曺)씨'라 함은 신라 진평왕이 사성(賜姓)한 것이 아니거나 이때 조씨가 처음 나타난 것이 아니라 그 이전부터 있어온
것을 가리키는 바, 지금까지 우리 기록에서는 이러한 사실을 찾을 수 없는데, 이 경우 창녕 즉 비사벌가야의 왕족은 조씨라는 것이 된다.
한편, 중국의 曹씨는 서기전 12세기경 주(周)나라 문왕(文王)의 아들인 진탁(鎭鐸)이 조(曺) 땅에 봉해져 성씨가 되었다 하며 그후 삼
국시대 위(魏)나라(서기 220-265) 조조(曹操)의 가문이 소설 삼국지를 통하여 잘 알려져 있다.
4) 구체적으로는 '교접하는 용이 그 위에 있었다(交龍其上)라고 적고 있기도 한데 이 말은 혼인을 하였다라는
말과 같다(...交龍其上已...<전게 慶州李氏松卨公派譜全 참조><전게 昌寧火王山龍潭錄 乙丑 참조>).
5) 전게 慶州李氏 松卨公派譜全, 菊堂公派譜 참조.
6) 김씨는 원래 부도(符都)에서 동쪽으로 온 씨족인데 온양덕후하고 지마왕이 손녀를 주어 아내로 삼게했는데, 이에 이르러 왕위에 이르니
이가 미추왕이 되었다(金氏者元來符都東遷之族而溫讓德厚祗摩氏以孫女妻之至是繼立爲味雛氏也<朴堤上 著/金殷洙 譯解, 符
都誌, 가나출판사, p.93.>).
부도란 임검씨(壬儉氏) 즉 단군(檀君)이 세운 수도를 가리킨다고 함.
원래 한국의 김씨는 소호금천씨(少昊金天氏. 서기전2598-2514)의 후손이자 서기전 2세기경 한(漢)나라에 포로가 된 흉노족의 휴도
왕(休屠王)의 후손으로 서기 8년경 그 후손인 왕망(王莽)이 세운 신(新)나라가 서기 23년경에 후한(後漢)에게 망하면서 왕망의 일족
이 난을 피하여 한반도 남쪽으로 건너와 김수로왕의 금관가야를 비롯한 6가야가 되었다고 하고 서기 65년경 김알지가 경주로 진출하여
경주김씨가 되었다고 함<문정창, 가야사, 1978. 참조>
...신라고사에 이르기를 하늘에서 금궤가 내려온 연유로 성을 김씨라 했다...신라 사람은 스스로 소호금천씨의 후예이므로 성을 김씨라
한다(신라의 국자박사 설인선이 지은 김유신의 비와 박거물이 지은 요극일의 글과 삼랑사비문에 나타나 있다)(...新羅古事云 天降金櫃
故姓金氏...新羅人自以少昊金天氏之後故姓氏(見新羅國子博士薛因宣撰金庾信碑及朴居勿撰姚克一書三郞寺碑文))<三國史記
卷第二十八 百濟本紀第六 義慈王 末尾 참조).
...신라 사람들은 스스로 소호금천씨의 후손이라 이르는데 김유신의 묘비에도 역시 헌원의 후예이며 소호의 영윤이라 이른 즉 남가야의
시조인 김수로왕과 신라 김씨는 같은 성씨이다.(羅人自謂少昊金天氏之後故姓金庾信碑亦云軒轅之裔少昊之胤則南加耶始祖首露
與新羅同姓也)<三國史記 卷第四十一 列傳第一 金庾信上 참조>.
또 중국기록인 사기에는 황제헌원(서기전 2698-2599)의 뒤를 이어 소호금천씨(서기전 2598-2514)가 왕이 되었고 그 아들로 적혀 있
기도 한데, 황제헌원의 원래 성씨는 공손씨(公孫氏)이나 후에 희(姬)로 바꾸었고 후대에 주(周)나라 왕족은 희씨이다.
공손씨는 유웅국(有熊國)의 왕으로 배달나라 때 웅족출신이 된다. 공손이라는 말은 곰의 후손 즉 곰족의 후예라는 말로서 이두식 표기
이다. 사기에 의하면 소호금천씨는 황제헌원의 아들이 되므로 역시 웅족 출신이 된다.
한편 우리 기록인 신시본기에서는 ...대변경에서 말하길... 신농은 소전의 아들이고 소전은 소호와 더불어 모두 고씨의 방계이다...
우리 치우천왕께서는 신시의 힘을 이어... 유망의 정세가 쇠약해 지니 군대를 일으켜 출정하였다...
때에 유망은 소호를 시켜 대항하여 싸우게 하였으나... 소호는 대패하여 변두리로 도망치더니 공상으로 들어가 유망과 함께 도망하여 버
렸다... 때에 공손헌원이라는 자가 있었는데 토착인들의 우두머리였다...
천왕은 먼저 항복한 장수 소호를 보내어 탁록을 에워싸 압박하여 쳐들어가 이를 멸하였다... 헌원은 굴복치 아니하고 100회나 감히 싸
움을 걸어 왔는데... 헌원과 더불어 탁록의 유웅이라는 들에서 계속하여 싸우면서...참살하니 그 수를 셀 수 없었고...(大辯經曰...神農
少典之子少典與少筧皆高矢氏之傍支也...我蚩尤天王承神市之餘烈...及楡罔衰政乃興兵出征... 時楡罔使少昊据戰... 少昊大敗落
荒而走入空桑偕楡罔出奔... 時有公孫軒轅者土着之魁... 天王先遣降將少昊圍迫瞴鹿而滅之軒轅猶不自屈敢出百戰... 與軒轅連
戰于瞴鹿有熊之野... 斬殺無算...)라고 기록하고 있는 바<임승국 역해, 桓檀古記 神市本紀, 정신세계사,1987,pp.177-181. 참조>,
이 기록에 의하면 소호는 소전과 더불어 고시씨의 방계로 웅족출신이며 유망과 함께 치우천왕에게 항복한 장수였고 황제헌원과 전쟁을
한 것으로 보아, 아마도 황제헌원의 뒤를 이어 왕이 되었다는 소호(금천)와는 다른 사람일 가능성이 있으며, 소호금천씨가 실제로 황제
헌원의 친 아들이 아니면서 세력이 막강하여 황제헌원의 나라를 이었으므로 그냥 아들로 적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게 된다.
소호를 백제(白帝)의 아들이라고도 하므로 황제(黃帝)의 아들이라는 기록과 대조하여 연구해 볼 만하다.
고시씨는 배달나라의 웅족출신으로 우가(牛加. 농사담당관)였는데, 후세에 고시씨의 덕을 기리어 고시례라는 풍습이 생겼다고 한다.
7) 진골은 부모중 한편이 왕족인 경우이다. 둘다 왕족이면 성골(聖骨)이 된다.
8) 단순히 창녕지역이나 비사벌가야라고 표현한 경우에는 신라나 비사벌가야의 세력가라 할 가능성이 반반인데, 화왕산 용지를 언급함은
역사를 강조하는 의미이므로 비사벌가야의 세력가임을 암시하는 글이 된다.
9) 중국 조씨의 시조는 周나라 文王의 아들인 鎭鐸이며 曹나라에 봉해져 성씨가 되었다. 중국 魏나라는 曹씨의 나라이다.
시조공의 성씨가 원래부터 조씨라면 경주김씨족보상에 기록된 선덕여왕의 남편이라는 김인평의 김씨와는 일치하지 아니하므로 다른 인물이 될 것이며, 시조공이 진평왕의 사위이므로 세상에 알려진 세 딸 외에 또다른 딸이 있었다는 말이 되는데, 이는 납득하기 어려운
것이 된다.
10) 三國遺事 王歷譜에서는 飮葛文王이라 적고 있다.
11) 태종무열왕 김춘추에 의하여 갈문왕인 文興大王으로 추봉되었음.
12) ...子眞平王, 女善德王 夫金仁平, 女天明夫人金龍春文興王妃, 女曺繼龍昌寧人官太師曺氏始祖<慶州金氏璿源世譜 참조>
金閼智-...-眞平王-女善德王...夫金仁平, 女天明王后夫文興王, 女曺繼龍昌寧人官太師曺氏始祖, ...子眞平王 女善德王...夫金仁
平, 女曺繼龍夏城人太師駙馬都尉昌城府院君<慶州金氏世譜卷之一 참조>
13) 백제 제31대왕으로 서긴 641년부터 660년 망하기까지 20년간 재위.
14) 백제 제30대왕(서기 600-640).
15) 삼국유사에서는 國其安으로 적고 있음.
16) 부모 모두 왕족이므로 성골로서 선덕여왕을 이어 신라 제28대 왕이 되었음(서기 647-654).
17) 창녕사람으로 벼슬은 태사요 조씨의 시조(昌寧人官太師曺氏始祖)라 적고 있다.
18) 하성 사람으로 태사요 부마도위이며 창성부원군(夏城人太師駙馬都尉昌城府院君)이라 적고 있음. 하성은 창녕을 가리키는 또다른
말이다.
19) ...李光玉 유리왕 9년 서기 32년 文宣公 알평의 20세손 法興王建元元年 서기 536-禮香-曺繼龍夏城人太師駙馬都尉昌城府院
君...謁平-...-光沃-..., ...子光沃 眞平王朝登第官至致仕翰林學士生女禮香生子曺繼龍<이상 慶州李氏大同譜總編一 참조>
20) 경주이씨송설공파보 및 동 국당공파보에서는 이광옥에 대하여 진흥왕 때에 등용문하고 벼슬은 한림학사에 이르렀다(眞興朝登龍門官
至翰林學士)라고 적고 있다. 경주이씨대동보총편일에서는 이광옥이 진평왕 때에 등제하여 한림학사에 이르고 치사하였다(眞平王朝
登第官至致仕翰林學士...)라고 적고 있다.
21) 禮香 少熺年至二十得靑龍疾浴于昌寧火王山龍池遇龍王子交龍其上已生子脅有曺字仍姓曺氏名繼龍昌城府院君眞平王女生五
男二女其後九代平章事十二代少監.
22) 신라 제27대 선덕여왕의 이름은 덕만이고 아버지는 진평왕이며 어머니는 마야부인 김씨인데 성공의 남자가 없어졌으므로 고로 여왕
이 즉위하였고 왕의 배필은 음(마실)갈문왕이며, 인편 갑오년에 즉위하여 14년을 다스렸다(第二十七 善德女王 名德曼 父眞平王 母
摩耶夫人金氏 聖骨男盡 故女王立 王之匹 飮葛文王 仁平甲午立 治十四年)<三國遺事 王歷譜>
여기서 선덕여왕이 연호를 인평이라 한 서기 634년에 즉위하여 14년간이 되는 서기 647년까지 왕위에 있었다라고 통상 해석하고 있
으나, 삼국사기에 의하면 실제로는 서기 632년에 즉위하여 서기 647년까지 16년간 왕위에 있었는 바, ...王之匹飮葛文王仁平, 甲午
立...으로 읽어 배필은 음갈문왕 인평 즉 음갈문왕이 곧 인평이라고 해석하는 것도 가능하다고 보는데, 이렇게 되면 경주김씨 족보와 일
치하게 되어 의문점은 사라지게 된다. 음갈문왕의 이름이 인평이라고 직접적으로 명시한 기록이 발견되면 좋을 것이다.
23) 예로 昌寧曺氏正言公派諱希直派世譜에서는 시조공에 대하여 부마도위(駙馬都尉)등으로 기록하고 있다.
慶州金氏世譜卷之一에서도 같은 기록(...駙馬都尉...)이 있다.
24) 공주(公主)의 남편은 조선시대로 말하면 종일품인 위(尉)에서 시작하고, 옹주의 남편은 종이품 또는 정이품인 위(尉)에서 시작하는
바, 도위(都尉)는 종일품의 윗 계급인 정일품을 가리키는 것이 될 것이다.
25) 전게 慶州李氏大同譜總編一 참조.
26) 신라 제29대 태종대왕은 성이 김씨요 용수(또는 용춘)각간이며 추봉된 문흥대왕의 아들이고 어머니는 진평대왕의 딸로 천명부인이며,
왕비는 문명왕후 문희로 김유신의 작은 누이라...영휘5년 갑인년에 즉위하고 8년을 다스렸으며 용삭 원년인 신유년에 붕하였는데 나
이는 59세라...(太宗春秋公 第二十九太宗大王姓金氏龍樹(一作龍春)角干追封文興大王之子也搙眞平大王之女天明夫人妃文明
皇后文姬卽庾信公之季妹也...以永徽五年甲寅卽位御國八年龍朔元年辛酉崩壽五十九歲...)<三國遺事 紀異第一 太宗春秋公>
27) 백제 제30대왕으로 서기 660-640년까지 41년간 재위.
28) 단, 선화공주가 먼저 혼인하였을 가능성을 전혀 배제할 수는 없다고 할 것이다.
29) 창녕조씨정언공파휘희직파세보에서 시조공이 돌아가신 해가 진덕여왕 5년인 서기 651년이 81세라 하였는 바(昌寧曺氏正言公派諱
希直派世譜 始祖一世繼龍...眞德女王五年辛亥卒享壽八十一...), 역산하면 시조공의 탄생년도는 서기 571년이 되고 이는 앞에서
서기 576년경에 탄생하였다라고 추정한 해와는 단지 5년밖에 차이가 나지 않으므로 일단 타당성이 있는 것이 된다.
30) 마실은 지금으로는 마을이라는 말이나 원래 의미는 관청을 가리키는 글자인데, 속된 말로 '마실다닌다'라는 말은 원래 '관청이 있는 시
내에 다녀온다', '관청에 볼 일 보러 간다'라는 말에서 생긴 듯 하다. 마을은 관청이 소재하는 단위로 보인다. 한편, 조선시대 육조(六
曹)의 조는 직접 관청을 가리키는 글자로 육조는 의정부(議政府) 아래 관청으로 현재의 행정부(行政府)에 해당한다.
31) 진평왕대나 선덕여왕대부터 조(曺)를 성씨로서 대외적으로 실제로 썼는지 여부에 대하여는 문헌상 확인되지 않아 원래 성씨인 김씨를
썼는지 아니면 사성받은 조씨를 썼는지 불명확한데, 최소한 고려태조 때 중시조 휘 겸(謙)부터는 실제 조를 성씨로 쓴 것으로 생각된
다.
32)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서 선덕여왕 3년 즉 서기 634년인 갑오년에 연호를 인평(仁平)이라 하였다라고 적고, 경주김씨족보에 의하면
남편인 음갈문왕의 원래 이름은 인평(仁平)이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우연의 일치라고 보기보다는 어떤 연관성이 있을 것으로 보이나,
아직 이러한 기록이 발견되지 않고 있는 바, 현재로서는 선덕여왕의 배필인 음갈문왕의 원래 이름이 인평이기도 하고 선덕여왕의 연호
가 인평이기도 하다.
33) 善德王立諱德曼眞平王長女也母金氏摩耶夫人德曼性寬仁明敏王薨無子國人立德曼上號聖祖皇姑前王時得自唐來牡丹花子以
示德曼曰此花必無香氣王笑曰爾何以知之對曰畵花而無蜂蝶故知之大抵女國色男隨之花有香氣蜂蝶隨之故也此花絶艶而圖畵
又無蜂蝶是必無香花種植之果如所言其先識如此<三國史記 卷第五 新羅本紀 第五 善德王 참조>
34) 元年二月以大臣乙際摠持國政<三國史記 卷第五 新羅本紀 第五 善德王 참조>
35) 三年春正月改元仁平<三國史記 卷第五 新羅本紀 第五 善德王 참조>
36) 할머니, 늙은 여자를 뜻함.
37) 十六年春正月...八日王薨諡曰善德葬于狼山(唐書云貞觀二十一年卒通鑑云二十五年卒以本史考之通鑑誤也)
論曰臣聞之古有女氅非正是天子佐伏羲理九州耳至若呂雉武爔値幼弱之主臨朝稱制史書不得公然稱王但書高皇后呂氏測天皇 后武氏者以天言之則陽剛而陰柔以人言之則男尊而女卑盖可許悁垯出閨房斷國家之政事乎新羅扶起女子處之王位亂誠世之事國
之不亡幸也書云牝鷄之晨易云櫕豕孚甄瘙其可不爲之戒哉<三國史記 卷第五 新羅本紀 第五 善德王>
38) 第二十七 善德女王 名德曼父眞平王母摩耶夫人金氏聖骨男盡故女王立王之匹飮葛文王仁平甲午立治十四年 <三國史記 王歷第
一>
39) 善德王知機三事 第二十七德曼一作万諡善德女大王姓金氏父眞平王以貞觀六年壬辰卽位御國十六年凡知機有三事初唐太宗送
畵牧丹三色紅紫白以其實三升王見畵花曰此定無香仍命種於庭待其開落果如其言...<三國遺事 卷第一 紀異第一善德王知機三
事>
40) 當時群臣啓於王曰何知花蛙之事之然乎王曰畵花而無蝶知其無香斯乃唐帝欺寡人之無治也...於是群臣皆服其聖智送花三色者
盖知新羅有三女王而然耶謂善德眞德眞聖是也...<三國遺事 卷第一 紀異第一 善德王知機三事>
41) 당고조(唐高祖(李淵) 무덕(武德) 4년인 신사(辛巳)년이다.
42) 四十三年秋七月王遣使大唐朝貢方物高祖親勞問之遣通直散騎常侍庾文素來聘賜以璽書及畵屛風錦綵三百段<三國史記 卷第
四 新羅本紀 第四 眞平王>
43) 단군신화, 해모수신화, 고주몽신화, 박혁거세신화, 김수로신화, 김알지신화 등 우리나라의 신화를 비롯하여 , 중국의 고대 왕들의 탄생
또는 업적들이 신화적으로 기록되고 있다. 그러나 인물에 대한 신화는 역사적 사실이 변형되어 전해진 것에 불과하다.
실제 있었던 역사적 사실을 알게 되면 신화로 표현된 부분이 모두 해석되게 된다.
44) 태종무열왕 김춘추는 아버지 김용춘을 추봉하여 문흥대왕이라 하였는데 삼국유사 왕력보에서는 ...
龍春卓文興葛文王...이라 적고 있다.
45) 실제 창녕조씨정언공파휘희직파세보(昌寧曺氏正言公派諱希直派世譜)에서는 시조공이 진덕여왕 5년인 서기 651년에 돌아가신 것
으로(始祖一世繼龍字麟卿新羅二十六代王眞平大王建福四十八年唐太宗貞觀五年辛卯春二月 日生新羅三韓壁上佐命功臣 駙
馬都尉 輔國大將軍 上柱國大都督 太子太師 文武王 金紫光祿大夫 昌城府院君 眞德王五年辛亥卒 享壽八十一 諡號文懿 墓慶州
郡安康邑老堂里二里紫玉山下草堤洞辛坐) 기록되어 있기도 하다.
여기서 시조공께서 탄생하셨다는 진평왕 건복 48년과 당태종 정관 5년인 신묘년은 서기 631년이 되는데, 이는 시조공이 마실(이두식
표기로는 조(曺) 또는 음(飮))이라는 성씨를 받은 해로 보이며, 또 文武王이라는 칭호는 갈문왕의 정식 호칭인 것으로 보인다(예 : 태
종무열왕의 아버지는 문흥갈문왕인데, 문흥대왕이라고도 적으므로 문흥대왕은 갈문왕의 또다른 호칭이다). 그리고 진덕여왕 5년은 서
기 651년에 해당되는데 이로부터 향수 81세를 역산하면 서기 571년에 시족공께서 실제 탄생한 연도가 된다.
이 기록에 의하면 결국 시조공은 서기 571년에 탄생하시고 서기 631년에 조(曺)를 사성받으셨으며, 서기 651년에 돌아가신 것으로
된다. 아주 타당성 있는 기록이라고 생각된다.
[昌寧曺氏始祖實史]
1. 昌寧曺氏正言公派諱希直派世譜
◾始祖一世繼龍字麟卿
◾新羅二十六代王眞平大王建福四十八年唐太宗貞觀五年辛卯春二月 日生
◾新羅三韓壁上佐命功臣 駙馬都尉 輔國大將軍 上柱國大都督 太子太師
◾文武王 金紫光祿大夫 昌城府院君
◾眞德王五年辛亥卒 享壽八十一 諡號文懿
◾墓慶州郡安康邑老堂里二里紫玉山下草堤洞辛坐
2. 용어 풀이
◾眞平王 (579-632)
◾建福(584- ) 48년 : 서기 631년
◾唐 太宗(627-649) 貞觀 5년 : 서기 631년
◾辛卯年 : 서기 631년
◾三韓壁上 佐命功臣
-壁上三韓三重大匡(고려 충렬왕 34년 1308년 정일품, 공민왕 11년 1362년 정일품)
◾駙馬都尉
-尉.조선시대 儀賓附(駙馬府) 정일품, 종일품, 정이품, 종이품
-公主(왕의 嫡女)의 배우자 : 初授尉從一品
-翁主(왕의 庶女)의 배우자 : 初授尉從二品
-都尉 : 위의 윗 계급
◾輔國大將軍(武官) : 고려 성종 14년 995년 정이품
◾上柱國大都督
-都督(外官) : 智證王六年以異斯夫爲悉直州軍主 文武王元年改爲摠管 元聖王元年稱都督位自級瑗至伊瑗爲之
-大都督 : 도독의 윗 계급
◾太子 : 대를 이을 왕자
◾太師 : 고려 三師 중의 하나. 정일품
◾文武王 : 갈문왕의 칭호 즉 文武葛文王인 것으로 해석
◾金紫光祿大夫(文官) : 고려 공민왕 5년 1356년 종일품
◾昌城 : 昌寧의 옛 명칭
◾府院君 : 조선시대 왕비의 부(정일품) 또는 親功臣(정일품)에게 내린 칭호
◾眞德王(647-654) 5년 辛亥 卒 : 서기 651년에 돌아가심.
◾享壽 81 : 서기 571-651
3. 기록해석
시조 휘 계룡의 자는 인경이며, 신라 26대왕인 진평대왕(579-632) 건복 48년(631)이자 당나라 태종 정관 5년 신묘년인 서기 631년
봄 2월 일에 탄생하셨다(61세에 마실<이두식 표기로는 飮. 한자식 성씨로 표기하면 曺가 됨>로 사성 받음. 실제 탄생 연도는 서기 571
년임).
신라 삼한벽상좌명공신이셨고, 공주의 남편으로 부마도위가 되셨으며, 보국대장군, 상주국대도독을 역임하셨고, 태자태사이셨고, 문무
갈문왕이 되셨으며, 금자광록대부를 지내셨으며, 창성부원군에 봉해지셨다.
진덕여왕 5년 신해년인 서기 651년에 돌아가시니 연세가 81세(571-651)이셨고 시호는 문의이시다.
묘는 경주군 안강읍 노당리 2리 자옥산 아래 초제동의 신좌에 모셔져 있다.
4. 참고
가.선덕여왕이 즉위하여 남편(경주김씨선원세보에는 金仁平)인 시조공 휘 계룡을 갈문왕(삼국유사 왕력보에는 王之匹 飮葛文王)에 봉
함.
나.갈문왕(葛文王)은 신라시대 왕의 아버지(예: 태종무열왕의 아버지인 金龍春은 文興大王으로 추봉됨), 동생
(예: 진평왕은 동생 伯飯을 眞正갈문왕, 國飯을 眞安갈문왕<진덕여왕 아버지>으로 봉함), 여왕의 남편(예: 선덕여왕의 남편은 飮갈
문왕), 기타(예: 진성여왕은 角干魏弘을 惠成大王이라 시호를 추봉함) 등 본왕 이외의 자에게 내린 왕의 칭호임.
조선시대 高宗의 아버지를 흥선대원군이라 하고, 왕의 장인을 부원군이라 하고, 정일품인 공신을 부원군이라고 하였던 것과 같은 제도
이며,고구려의 古鄒加, 백제의 吉師 제도와 비슷한 제도임.
출처 : 역사마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