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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회재 이 선생 행장〔晦齋李先生行狀〕
선생의 성은 이씨(李氏)이고 휘는 적(迪)인데, 뒤에 중묘(中廟)의 명으로 언(彦) 자를 더하였다. 자는 복고(復古)이고, 자호(自號)는 회재(晦齋)이며 자계옹(紫溪翁)이라고도 하였다. 그 선대는 여주(驪州) 사람으로, 향공 진사(鄕貢進士) 세정(世貞)의 후손이다. 중간에 영일(迎日)로 거주지를 옮겼다가 다시 경주(慶州) 양좌촌(良佐村)으로 옮겼다.
고조의 휘는 권(權)이니 부사직(副司直)이고, 증조의 휘는 숭례(崇禮)이니 병조 참판에 추증(追贈)되었다. 조부의 휘는 수회(壽會)이니 훈련원 참군(訓鍊院參軍)으로서 이조 판서에 추증되었다. 고(考)의 휘는 번(蕃)이니 성균관 생원으로서 의정부 좌찬성에 추증되었다.
선비(先妣)는 정경부인(貞敬夫人) 손씨(孫氏)이니 정충출기적개 공신(精忠出氣敵愾功臣) 계천군(雞川君) 손소(孫昭)의 따님이다.
선생은 홍치(弘治) 신해년(1491, 성종22)에 태어났는데 선천적으로 자질이 뛰어났다. 9세에 부친을 여의었고, 점차 자라면서 학문에 힘쓰고 문장에 능하였으며, 과거(科擧) 공부에도 두루 통달하였다.
정덕(正德) 계유년(1513, 중종8)에 생원시에 합격하고, 갑술년(1514) 별시에 박세희(朴世熹)와 동방 급제 하였으니, 당시 나이가 24세였다. 권지 교서관부정자가 되었다가 경주부의 교관(敎官)에 차임되었다. 얼마 뒤에 조정으로 들어가 정자(正字)가 되었으며, 무인년(1518)에 저작(著作)이 되었다.
참군공(參軍公)이 별세하자 선생이 승중(承重)하여 상제(喪制)를 매우 근엄하게 치렀다. 탈상한 뒤 교서관 박사로 승진하였다.
신사년(1521, 중종16)에 선발되어 홍문관 박사와 세자시강원 설서가 되었으며, 천거로 이조 좌랑이 되었다.
갑신년(1524)에 외직(外職)을 자원하여 인동 현감(仁同縣監)이 되었다. 병술년(1526)에 사헌부 지평으로 소환되었다가 이조 정랑으로 전보되고, 다시 사헌부 장령에 제수되었다. 기축년(1529)에 성균관 사성으로 있다가 밀양 부사(密陽府使)로 나갔는데, 백성들을 다스리고 아전들을 거느리는 데 크고 작은 일들이 모두 조리와 법도가 있었으므로 아전들은 행동을 삼가고 백성들은 덕에 감복하였다.
경인년(1530)에 소명을 받고 들어와 사간원 사간이 되었다. 당시 김안로(金安老)가 오랫동안 유배되어 있었는데, 조정에서 그를 다시 등용하는 문제를 논의하면서 “동궁이 외로운 처지이므로 이 사람을 우익으로 삼아야 한다.”라고 하였으니, 이는 김안로의 아들 연성위(延城尉)가 공주에게 장가들어1) 동궁에게 도움이 될 수 있다는 이유였다.
가장 먼저 이렇게 주장한 자는 정언 채무택(蔡無擇)이었으니, 채무택은 김안로의 처족(妻族)으로서 이를 통해 김안로가 다시 기용되는 길을 마련하려 한 것이었다. 대사헌 심언광(沈彦光) 등이 거기에 동조하여 온 조정이 그쪽으로 쏠렸으나, 선생은 홀로 힘껏 불가하다고 말하여 채무택과 의견 일치를 보지 못하였다.
이 일로 채무택이 정언에서 체차되었으나, 물의(物議)가 도리어 선생이 이견(異見)을 내세운 것을 비판하는 바람에 사예로 좌천되었다.
어느 날 심언경(沈彦慶) 형제에게 들렀는데, 심언광이 “사예는 김안로가 소인이라는 것을 어떻게 압니까?”라고 하므로, 선생이 “김안로가 경주 부윤으로 있을 때 그의 마음가짐과 일 처리를 익히 보았는데, 참으로 소인의 정상이었습니다.
이 사람이 뜻을 이루면 필시 나라를 그르치고 말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심언경이 “조정으로 들어온다고 해도 어찌 그에게 막중한 권력을 위임하겠소. 단지 동궁을 도우려는 것일 뿐이오.” 하므로, 선생이 “그렇지 않습니다. 그가 만약 들어온다면 오래지 않아 반드시 권력을 잡고 제멋대로 날뛸 것이니, 누가 감히 그를 막을 수 있겠습니까.
또 동궁은 온 나라 신민(臣民)들의 촉망을 받는 분인데, 어찌 김안로를 등용해야만 지위가 안정되겠습니까.”라고 하니, 심언광이 성을 내며 일어나 나갔다. 그러고는 조정에서 공공연히 “이모(李某)가 조정에 있으면 김안로가 들어오지 못할 것이다.”라고 하고는 마침내 탄핵하니, 선생이 파직되어 고향으로 돌아갔다.
김안로가 조정에 나와서 선생이 자신을 공격한 말을 듣고도 그다지 노여워하지 않았고, 경주 사람 중에 뇌물을 써서 관직을 구하려는 사람이 있자 김안로가 그에게 “조심해서 이모가 알지 못하게 하라.”라고 당부하였다. 정유년(1537, 중종32) 겨울에 김안로가 패사(敗死)하니, 중묘(中廟)가 선생의 충직함을 생각하여 가장 먼저 서용(敍用)하여 복직시키도록 명하였다.
이에 장악원 첨정이 되었다가 종부시 첨정으로 옮겨졌다. 홍문관에 들어가 교리, 응교가 되고, 의정부로 전보되어 검상(檢詳)을 거쳐 사인(舍人)에 이르렀다. 군기시 정에 제수되었다가 얼마 있지 않아 직제학에서 품계가 올라 병조 참지가 되었다. 그러고는 전주 부윤(全州府尹)으로 나갔는데, 1년 만에 경내가 크게 다스려져 백성들이 비(碑)를 세워 덕을 칭송하였다.
선생이 비록 연로하신 모친 때문에 고을 수령이 되기를 자청하였으나, 임금을 사랑하고 나라를 걱정하는 마음을 하루도 내려놓은 적이 없었다. 마침 재변으로 인해서 구언(求言)하는 전지를 내리자 수천 글자에 달하는 상소를 올렸다2). 상소에서 강령으로 제시한 것이 하나이니 군주의 심술(心術)이고, 조목으로 든 것이 열 가지이니 가정을 엄히 다스리는 것, 국본(國本)을 기르는 것, 조정을 바르게 하는 것, 사람을 쓰고 버리기를 신중히 하는 것, 천도(天道)를 따르는 것, 인심을 바르게 하는 것, 언로를 넓히는 것, 지나친 욕심을 경계하는 것, 군정(軍政)을 정비하는 것, 기미를 살피는 것이었다.
말한 바가 모두 군주의 마음을 바로잡고 당면한 일을 시행하는 것이었으며, 임금을 선으로 인도하는 계책이 지극히 충성스럽고 곧았다. 중종대왕이 크게 칭찬하고 감탄하면서 “옛날의 진덕수(眞德秀)3)라도 이를 넘어서지는 못할 것이다.”라고 하고, 즉시 동궁과 조정 신하들에게 보여 주도록 명하였다.
특지(特旨)로 품계를 가선대부로 올리고, 얼마 뒤에 병조 참판을 제수하고 세자우부빈객을 겸하게 하였다. 선생은 “말을 채택해 주신다면 다행이겠지만 외람되이 상을 받는 것은 감당할 바가 아니다.”라고 하며 전(箋)을 올려 간곡히 사양했으나 상이 허락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예조 참판, 성균관 대사성, 사헌부대사헌 겸 세자좌부빈객, 홍문관 부제학을 역임하였다. 홍문관에 있으면서 또 상소하여 성학(聖學)의 본말과 시정(時政)의 득실을 극렬히 진달하였다.
신축년(1541, 중종36) 가을에 자헌대부(資憲大夫)로 품계가 오르고 한성부 판윤에 제수되었다. 곧이어 정헌대부(正憲大夫)로 가자되고 의정부 우참찬에 제수되었으며, 이조 판서로 전보되었다가 다시 의정부 참찬, 대사헌, 형조와 예조의 판서, 의정부 우참찬이 되었다.
계묘년(1543)에 외직으로 나가기를 청하여 안동 부사(安東府使)가 되었으나 사간원이 아뢰어 유보되었다. 선생은 모부인(母夫人)이 고향에서 노환(老患)을 앓고 있어 멀리 떨어져서 벼슬살이를 할 수 없다며 여러 차례 정세를 아뢰고 돌아가서 봉양하게 해 주기를 간절히 청하였는데, 성상이 위유(慰諭)하기를 “경의 말이 지극히 간절하나, 경의 진퇴는 국가의 안위(安危)에 관계되는 것이므로 윤허하지 않는다.”라고 하고, 본도(本道)에 명하여 모친에게 식물(食物)을 지급하게 하였으며, 또 모친을 모시고 상경하도록 유시하였다.
선생이 더욱 황공하고 감격스러워하며 더욱 힘껏 외직을 요청하니, 조정에서 어쩔 수 없이 본도 감사에 제수하여 그 바람을 조금이나마 이루게 하였다. 갑진년(1544)에 한성부 판윤으로 좌부빈객을 겸하였는데, 마침 병이 있었으므로 사임을 청하였다. 11월에 중종이 승하하였는데도 대궐로 달려가지 못하자 밤낮없이 근심하고 슬퍼하느라 병이 더욱 위중해졌다.
인종이 즉위하여 가장 먼저 소명(召命)을 내리고, 을사년(1545, 인종1) 1월에 의정부 우찬성으로 발탁하였다. 선생이 두 차례 정장(呈狀)하여 병을 이유로 사양하니, 상이 교지를 내려 돈유(敦諭)하였다. 그 글에 “왕년에 선왕께서 경의 상소를 보여 주셨을 때 진실로 탄복하였고, 또 서연(書筵)에서 강설을 듣고 내가 경을 마음에 둔 지 오래되었다.
그러니 경이 어찌 찬성으로 합당하지 않겠는가.” 하였다. 이어 약물(藥物)을 하사하고 조리한 뒤 올라오라고 하였다. 윤1월과 3월에 연달아 사직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초여름에야 병이 조금 차도를 보여 비로소 조정에 나아갈 수 있었다.
이때 선생이 양조(兩朝)의 융숭한 지우(知遇)에 감격하여 스스로 힘을 내어 한번 나아갔던 것이니, 이는 장차 큰일을 해 보고자 함이었다. 그런데 인묘(仁廟)의 병환이 오래도록 낫지 않아 정무를 살피지 못하였기 때문에 국가의 근심이 말할 수 없을 정도로 깊었다.
선생이 일찍이 개인적으로 영의정 윤인경(尹仁鏡)에게 말하기를 “지금 주상에게 후사가 없고 대군은 춘추가 어리십니다. 그런데 어찌 일찍 건의하여 세제(世弟)로 책봉함으로써 국본(國本)을 정하지 않습니까.” 하니, 윤인경이 “공의 말이 맞소. 다만 지금 산릉(山陵)의 일이 겨우 끝났고 조사(詔使)가 나올 날도 임박했으니 어느 겨를에 이 일을 논하겠소.” 하였다.
7월에 인묘가 승하하고 금상(今上)이 즉위하여 수렴청정(垂簾聽政)의 의례(儀禮)를 거행하게 되었다. 백관(百官)이 빈청(賓廳)에 모여 논의하는 자리에서 윤인경이 “지금 대왕대비와 왕대비가 계시는데 어느 전(殿)이 수렴청정을 해야 하겠소?” 하자 좌우가 모두 침묵하였는데, 선생이 “예전에 송(宋)나라 철종(哲宗) 때 태황태후가 함께 청정(聽政)하였으니, 본래 고례(古例)가 있는 일이므로 의문을 가질 필요가 없습니다.
또 형수와 시동생이 함께 대전(大殿)에 임어(臨御)하는 이치가 어디 있겠습니까. 지금은 수렴청정의 의제(儀制)만 정하면 될 것입니다.” 하니, 이로 인해서 조정에 다른 논의가 없게 되었다. 처음 경연을 여는 날 선생이 입참(入參)하여 삼가 옥음(玉音)이 낭랑한 것을 듣고는 자신도 모르게 기쁨의 눈물을 흘렸다.
어전에서 물러나 춘추관으로 가자 유인숙(柳仁淑)이 주상의 글 읽는 모습이 어떠하더냐고 물었는데, 선생이 “성상의 자질이 영명(英明)하여 한 글자도 잘못 읽은 곳이 없었으니, 이는 종사(宗社)와 신민(臣民)의 복입니다.” 하였다. 8월에 정부(政府)에서 서계(書啓) 10조(條)를 올렸다05).
제1조는 자전(慈殿)께서 성상의 자질을 잘 인도하여 보양하기를 청한 것이고,
제2조는 경연관을 널리 선발하여 항상 더불어 강론하고 함께 지내도록 하여 성학(聖學)을 향상하기를 청한 것이고,
제3조는 전하께서는 대행 대왕(大行大王)에게 아들의 도리도 있고 신하의 도리도 있으므로 상례(喪禮)에 정성과 효성을 다하지 않아서는
안 된다는 것이고,
제4조는 궁금(宮禁)을 엄히 하고 척속(戚屬)의 왕래를 막기를 청한 것이고,
제5조는 궁인(宮人)을 신중히 택하기를 청한 것이고,
제6조는 특지(特旨)를 쓰지 말기를 청한 것이고,
제7조는 판부(判付)를 내리지 말기를 청한 것이고,
제8조는 승정원의 직임은 출납을 미덥게 하는 것이니 내지(內旨)에 합당하지 않은 점이 있으면 봉환(封還)하도록 허락하라는 것이고,
제9조는 궁중과 조정은 일체가 되어야 하니 사사로운 문을 열어 놓지 않음으로써 공평하고 밝은 다스림을 하라는 것이었으며,
제10조에서는 “대행 대왕께서 학문에 힘쓰신 덕분에 공도(公道)가 크게 행해졌으므로 사람들이 지치(至治)를 기대하였는데, 갑자기 이렇
게 큰 변고를 당하였습니다.
지금 전하께서 보위를 이으셨으므로 나라 안의 사람들이 대행 대왕께 기대하던 것을 전하에게 크게 기대하고 있습니다. 그 기틀이 지극히 중요하니, 바라건대 양전(兩殿)께서는 유념하소서.” 하였는데, 이 서계는 대부분 선생의 손에서 나온 것이었다.
얼마 뒤에 윤임(尹任) 등의 죄를 다스리려고 양전이 함께 충순당(忠順堂)에 임어하고, 밀지(密旨)를 내려 재신(宰臣)들을 인견하였다. 이때 문정왕후(文定王后)가 대단히 진노하여 사람들이 감히 조금도 거스르지 못했는데, 선생이 앞으로 나아가서 말하기를 “신하의 의리는 자신이 섬기는 군주에게 마음을 다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 당시 대행 대왕에게 마음을 다했던 자들에게 어찌 깊이 죄를 물을 수 있겠습니까. 또 일 처리는 밝게 드러나도록 해야 하니, 그렇지 않으면 사림(士林)이 화를 많이 입게 될 것입니다.” 하였다. 옆에서 말을 듣는 자들이 모두 두려워서 목을 움츠렸으나, 선생은 두려워하는 기색이 없었다.
윤인경이 아뢰기를 “당초 수렴청정을 논의할 때에 이언적이 신에게 어느 전(殿)이 청정해야 하겠냐고 묻기에 신이 자전(慈殿)께서 청정해야 한다고 대답하였습니다.” 하였는데, 선생은 자리가 조금 멀어서 윤인경이 자신의 이름을 거론하는 것만 듣고서 내심 의아하게 여겼다가 물러 나온 뒤 주서(注書)의 일기(日記)를 보고서야 거짓으로 아뢴 실상을 파악하였다.
그러나 또 윤인경이 무거운 처벌을 받기를 원하지 않았기 때문에 서계(書啓)하여 아뢰고, “윤인경의 말은 필시 이와 같지 않았을 터이니, 아마도 주서가 잘못 기록한 것일 듯합니다.” 하였다. 상이 그 단자(單子)를 빈청에 내리니, 윤인경이 실색(失色)하여 대답을 하지 못하고 그저 좌상 홍언필(洪彦弼)에게 해명을 부탁할 뿐이었다.
이에 홍언필이 아뢰기를 “충순당이 협소하여 기주관(記注官)이 나아가고 물러가기에 불편하니, 이는 필시 주서가 잘못 들은 데서 비롯된 일일 것입니다.” 하였는데, 선생도 다시 따져서 밝히려 하지 않았다. 이달에 충순당에 입시했던 재추(宰樞)들을 녹훈(錄勳)하여 정난위사 공신(定難衛社功臣)의 칭호를 내리자, 선생은 힘껏 사양하며 “어찌 공로도 없이 함부로 녹훈을 받아 국법을 문란하게 하겠습니까.”라고 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병오년(1546, 명종1) 봄에 차자06)를 올리기를,
“선현(先賢)의 말에 ‘군주의 덕을 성취하는 것은 경연관에게 책임 지운다.’라고 하였습니다.07) 신이 외람되이 경연의 직임을 맡았기에 책임을 다하지 못할까 항상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삼가 선유(先儒) 정이(程頤)의 격언(格言)과 지론(至論) 가운데 성덕(聖德)에 보탬이 되고 지금 시행할 만한 것들을 취하여 조목별로 기록하여 올립니다.
이는 모두 어린 군주를 보도(輔導)하는 데 절긴(切緊)하고 핵심적인 말이니, 전하께서 진실로 깊이 믿고 힘써 행하신다면 제왕의 공업(功業)에 도움이 되는 바가 어찌 적겠습니까. 신이 또 보양(輔養)하는 도리를 생각해 보건대, 강마(講劘)하고 규계(規戒)하는 책임은 진실로 경연에 있지만, 궁중에서 보호하고 가르치는 역할은 전적으로 자전(慈殿)의 몫입니다.
그러니 주상께서 하루 세 차례 문안을 드리는 때에 학문에 힘쓰고 대신을 공경하고 간쟁을 받아들이고 바른 사람을 가까이하고 간사한 자를 멀리하고 천명을 두려워하고 백성들의 고통을 보살펴야 한다는 등의 일로 항상 자상하게 타이르시고, 또 반드시 몸을 닦아 덕을 향상하는 것을 근본으로 삼고 보고 듣고 말하고 움직이는 것을 모두 예법에 따라 옛날의 성스럽고 명철한 제왕을 본보기로 삼게 하소서. 그렇게 하신다면 성덕(聖德)이 일취월장하여 종사(宗社)의 무궁한 복이 될 것입니다.”하였다.
3월에 정사(呈辭)하고 근친(覲親)하였다. 출발하기에 앞서 차자08)를 올리기를,
“왕자(王者)는 마음을 바르게 하여 조정을 바로잡고, 조정을 바르게 하여 백관을 바로잡고, 백관을 바르게 하여 만백성을 바로잡는데, 마음을 바르게 하는 요지는 학문을 강구하고 이치를 밝히며 현인을 친히 하고 간사한 사람을 멀리하는 것일 뿐입니다.
성현의 가르침을 깊이 음미하고 의리의 근원을 연구하면 마음속에 천리가 날로 밝아지고 인욕이 날로 사라지게 되며, 현인을 가까이하고 간사한 사람을 멀리하면 감화되어 바루어지는 이로움이 있고 했다가 말았다가 할 염려가 없게 됩니다.”하였으니, 군부(君父)에게 바라는 바가 더욱 깊고 절실한 것이었다.
그러나 당시의 집권 세력과는 빙탄(氷炭) 같은 형세라서 실제로 또한 서로 용납하기가 어려웠으므로 귀향한 뒤에 세 차례 상소하여 사직을 청하니, 이에 체차하여 판충추부사로 삼도록 명하였다. 이때 예관(禮官)이 당저(當宁)에게도 발을 드리우기를 청하였는데09), 선생이 듣고 차자10)를 올리기를,
“군주가 남면(南面)하여 정무(政務)를 보는 것은 태양이 하늘에서 만물을 모두 비추는 것과 같습니다. 더구나 즉위하신 지 얼마 되지 않아 신하들이 한 번이라도 맑은 용안(龍顔)을 우러러보기를 바라는데, 지금 대전(大殿)에 임어(臨御)하시어 용안을 가리도록 한다면 어찌 신하들의 의구심을 불러일으키지 않겠습니까.
송나라 조정의 의절(儀節)은 황제가 정무를 볼 때에는 입시한 신하들이 모두 앉으며, 경연에서는 강관(講官)이 서서 강을 하고 황제가 태후와 동쪽 서쪽에서 서로 마주 보는데 양쪽의 거리가 매우 가까웠습니다. 그래서 황제의 자리도 발 안쪽에 두었던 것입니다.
우리 조정의 예는 입시한 신하와 강관이 모두 부복(俯伏)하여 사관일지라도 감히 올려다보지 못합니다. 그러니 어찌 굳이 전하의 자리에까지 발을 쳐서 막을 필요가 있겠습니까. 자전께서 함께 어전에 거둥할 때에는 충순당에서 면대(面對)하는 의절대로만 한다면 지금 시행하는 데에 의혹됨이 없고 후세에 남겨 법으로 삼게 할 수 있을 것입니다.”하였다.
이때 조정의 논의가 흉흉하여 모함하는 말이 마침내 선생에게 미쳤다. 9월에 이기(李芑)가 아뢰기를, “이언적은 사론(邪論)에 현혹되어 세자(世子)에게 아부하고 중종을 배반하였으며, 10조의 서계를 올려 임금의 수족을 묶었습니다. 또 유인숙(柳仁淑)과 결탁하여 역적을 구호하는 말을 많이 하였습니다.
신이 예전에 장리(贓吏)의 사위였기 때문에 현직(顯職)에 오르지 못했는데, 이언적이 대사헌이 되었을 때 비로소 이것을 풀어 주었으니 신에게는 은혜가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 신은 국가를 위해 사사로운 은혜를 따지지 않고 감히 아뢰는 것입니다.”하고, 대사헌 윤원형(尹元衡), 지평 진복창(陳復昌) 등이 뒤를 이어 아뢰니, 이에 훈작을 삭탈하였다.
정미년(1547, 명종2) 9월에 어떤 무뢰한이 익명으로 국가를 비방한 변고11)가 있었다. 이를 기화로 을사년(1545)의 여러 사람12)에게 대대적으로 죄를 덮어씌웠는데, 선생도 그 속에 들어 강계부(江界府)에 안치(安置)되었다. 선생이 세 임금에게 몸을 바쳐 나아가고 물러났던 마음과 행적은 해와 별처럼 밝았으며, 언론(言論)과 소차(疏箚)로 임금을 인도하여 도(道)에 맞게 하려고 노력한 충성이 간절하고 시종 한결같아 털끝만큼도 흠잡을 점이 없었다. 그런데도 끝내 화를 면하지 못한 것은 다름이 아니다.
처음에 선생이 경상 감사로 있을 때 도사(都事) 이천계(李天啓)가 지평으로 부름을 받고 대궐로 올라가면서 선생에게 묻기를 “듣기로 지금 복상(卜相)해야 하는데 여론이 모두 이기에게로 쏠린다고 합니다. 어떻게 생각하십니까?”라고 하므로, 선생이 “그는 사람이 음험하여 재상 자리에 앉혀서는 안 된다.”라고 하였다. 얼마 뒤에 이기가 과연 재상으로 발탁되었으나 양사(兩司)가 탄핵하여 파직되었는데, 이기가 그 연유에 대해 듣고서 선생에게 크게 앙심을 품었다.
이때에 와서 이기가 원훈(元勳)으로서 국정을 좌지우지하였는데, 선생이 함께 조정에 있으면서 매번 서로 의견 충돌을 빚었다. 하루는 선생이 원상(院相)13)으로 입직하여 주서(注書)를 불러 서계(書啓)를 쓰게 하기를, “모든 죄인은 죄상에 대한 승복을 받은 후에 형벌을 정해야 하는데, 근래 삼성(三省)에서 국문(鞫問)할 때 형장(刑杖)을 과도하게 써서 지레 죽은 자가 많습니다. 억울하고 원통한 사람들이 있을 듯하니, 교정장(校正杖)14)을 사용하여 죄상을 파악한 뒤에 형벌을 정했으면 합니다.” 하였다.
이튿날 이기가 들어와서 써 놓은 서계를 보고 성을 내며 “저 자가 형장이 제 무릎에 떨어질까 두려워서 그러는 것인가?”라고 하였다. 게다가 윤인경은 지난날 자신이 잘못을 해 놓고도15) 도리어 그 때문에 선생에게 감정을 품었고, 윤원형은 선생이 전에 자신을 구원하는 말을 해 주었다는 이유로 누차 선생과 교분을 갖고자 했으나 선생이 관계를 끊고 왕래하지 않자 깊은 원한을 품었다.
이렇게 감정을 품은 세 사람이 합세하여 해를 입히려고 모의하는 데 실로 여력이 없었다. 더구나 선한 사람을 모함하고 현직 재상에게 아첨하여 자신의 이익을 탐하는 한때의 간악한 무리들이 주위를 에워싸고 있었음에랴. - 살펴보면 김광준(金光準)이 사감(私憾)을 품고 해를 입힌 것이 많았다.16).
선생이 지킨 바는 모두 저들이 두려워한 것이었고, 저들이 당시에 뜻을 얻은 것은 실로 선생이 평소 군주를 위해 깊이 우려하며 힘껏 방지하려 했던 일이었다. 그렇다면 선생이 충성으로 죄를 입은 것이 어찌 괴이할 것이 있겠으며, 선생에게는 또 어찌 한스러울 것이 있겠는가.
유배의 명을 듣고 온 집안이 통곡하였지만 선생은 마시고 먹고 말하고 웃기를 평소와 같이 하였다. 그러고는 집안사람들에게 당부하기를 “대부인을 잘 봉양하거라. 하늘이 위에서 굽어보시니 내가 머지않아 돌아오게 될 것이다.”라고 하였다.
선생이 유배지에 도착한 이듬해인 무신년(1548, 명종3)에 대부인이 별세하였으니, 이 일은 선생에게 세상에 다시없을 큰 슬픔이었다. 게다가 선생이 평소 한질(寒疾)을 앓고 있었으므로 이때에 이르러 사람들이 더욱 위태롭게 여겼다. 그런데도 대부인의 유의(遺衣)로 신위(神位)를 설치하고 조석으로 통곡하고 슬퍼하면서 3년의 상기(喪期)를 다하도록 별 탈이 없었으니, 어찌 신령의 도움이 있어서 그런 것이 아니겠는가.
선생은 곤경에 처하고 환란을 당해서도 편안히 받아들이며 학문에 정진하고 책을 저술하는 일을 중단하지 않았다. 날이 밝기 전에 일어나 밤이 되도록 끊임없이 노력하였으며, 궤안(几案) 옆에 스스로 경계하는 글을 써 놓기를 “나는 날마다 세 가지 일로 나 자신을 돌아본다. 하늘을 섬기는 데 미진함이 있지는 않았는가. 임금과 부모를 위하는 데 정성이 부족하지는 않았는가. 마음가짐에 바르지 못한 점이 있지는 않았는가.” 하였다.
하루는 어사(御史) 이무강(李無疆)이 뜻밖에 달려 들어왔으므로 온 고을이 놀라고 두려워하며 좋지 않은 일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였으나, 선생은 동요하지 않고 의관을 정제하고 앉아서 책을 읽었다. 선생이 평탄함과 역경을 동일시하여 사생(死生)과 궁액(窮厄) 때문에 평소의 절조를 바꾸지 않은 것이 이와 같았다.
계축년(1553, 명종8) 11월에 병으로 유배지에서 별세하니, 향년이 63세였다. 갑인년(1554)에 널을 경주로 운구하여 11월 갑진에 흥해군(興海郡) 남쪽 달전리(達田里) 도음산(禱陰山)에 장사 지냈으니, 선영(先塋)에 모신 것이었다. 선생의 선고 부군(先考府君)은 젊어서부터 선비로 이름이 알려졌다.
일찍이 본도(本道)의 하과(夏課)에서 수석을 차지하였는데, 성종(成宗)이 그 시부(詩賦)를 좋게 여겨 불러 보고 옷감을 하사하신 다음 성균관에 머물며 공부하게 하였다. 뒤에 향리로 돌아와서 날마다 후생들을 가르치기를 일삼았으니, 선생이 비록 부친의 가르침을 받지 못하였으나 그 가업(家業)은 본디 유래가 있었던 것이다.
손 부인(孫夫人)은 현명하고 식견과 사려가 있어 사랑에 치우쳐서 가르치고 독려하는 일을 소홀히 하지 않았다. 이미 외숙인 이조 판서 손중돈(孫仲暾)에게 가서 배우게 하고, 또 가난한 살림에도 불구하고 멀고 가까운 곳에 가서 공부하도록 뒷바라지를 하였다.
선생은 남달리 영민하였고 타고난 자질이 도(道)에 가까웠다. 경사(經史)에 통달했을 뿐만 아니라 과거(科擧) 문체도 그리 힘들이지 않고 일찍 성취하였다. 이에 속학(俗學) 이외에 이른바 위기지학(爲己之學)이 있다는 것을 알고서 구하고자 하였다.
비록 이름난 스승의 문하에서 종유하며 배우지는 못했지만, ‘도는 나의 성(性)에 구비되어 있고 그에 대한 설명은 책에 갖추어져 있으니, 진실로 뜻을 독실히 한다면 얻지 못할 이치가 없다.’라고 생각하고는 강구하여 밝히고 체득하여 실행하면서 치지(致知)와 성의(誠意)에 힘을 쏟았다.
사람됨이 침착하고 중후하고 단정하고 자상하였으며, 평소 고상한 뜻을 품고 있었다. 어려서 여럿이 모여 공부할 적에 옆에서 혹 누군가 장난을 치거나 떠들고 웃어도 들리지 않는 것 같았다. 27세에 〈오잠(五箴)〉을 지었으니 〈외천(畏天)〉, 〈양심(養心)〉, 〈경신(敬身)〉, 〈개과(改過)〉, 〈독지(篤志)〉였고, 30세에는 또 〈입잠(立箴)〉을 지었다.
그 글의 내용은 모두 옛 성현이 몸소 행하고 마음으로 터득하였던 절실하고도 긴요한 뜻이었으니, 일상생활 속에서 마음을 보존하고 성찰하며, 형세에 따라 물러나 은거하며 감정과 욕망을 절제하고 허물을 고쳐 선으로 옮겨 간 것이 본디 이미 실제로 일삼는 바가 있었던 것이요 빈말이 아니었다.
파직되어 돌아와서는 경주부 서북쪽 자옥산(紫玉山)에 터를 잡고, 그곳의 봉우리와 골짝이 수려하고 내와 못이 맑고 깨끗한 것을 사랑하여 집을 지어 거처하면서 그 당을 독락당(獨樂堂)이라고 이름을 붙였다. 그리고 소나무와 대나무, 화훼를 더 심고서 날마다 그곳에서 읊조리고 낚시하고 노닐면서 세상일을 사절하고, 한 방 안에 단정히 앉아 좌우의 도서를 정밀히 연구하고 깊이 사색하니, 고요한 가운데서 이룬 공부가 이전에 비해서 더욱 깊고 전일하게 되었다.
그런 뒤에야 그동안 듣고도 깊이 이해하지 못했던 것들이 비로소 환히 깨달아져 친절하게 징험함이 있는 듯하였다. 화평하고 담박한 지취(志趣)를 기르며 오랜 세월을 보냈으니, 성(性)과 이(理)를 깊이 연구하되 성현이 진덕 수업(進德修業)하였던 방도를 따랐고, 고명(高明)한 천도(天道)를 탐구하여 솔개가 날고 물고기가 뛰노는 묘리를 즐겼다.
볼만한 행실을 짚어 보면, 어버이를 섬기는 데 사랑과 공경을 독실히 하여, 뜻을 받들어 즐겁게 해 드리고, 계절 따라 따뜻하고 시원하게 지내도록 보살피며, 음식을 입맛에 맞게 마련하는 등 곡진함을 다하지 않음이 없었으며, 하나 있는 동생 언괄(彦适)과는 우애가 깊어 한 몸과 다름이 없었다.
집을 다스리는 데 법도가 있어 집안이 숙연하고 노복들도 삼가고 공손하였으며, 종족과 친척, 고을 사람들을 어루만지고 대하는 데도 모두 마땅함을 얻었다. 제사를 받드는 예(禮)에 정성과 공경을 다하려고 노력하였고, 특별히 한 책을 엮어 《봉선잡의(奉先雜儀)》라고 이름하였으니, 고금(古今)을 참작하여 예문(禮文)을 정하고, 또 《예기(禮記)》 등에 실린 효성스럽고 자애로운 자손들이 정성을 다해 재계하고 제사를 받드는 글을 모아 수록함으로써 이를 살펴 봉행하게 하려 함이었다.
수양의 힘이 깊어 아무리 다급한 경우라도 말이 빨라지거나 표정이 변하는 일이 없이 차분하고 바른 태도를 견지하였다. 전주(全州)에 있을 당시 절일(節日)을 만나 나희(儺戱)가 벌여졌는데, 관찰사 김정국(金正國) 공은 품행이 바른 사람인데도 더러 돌아보며 웃는 일이 없지 않았으나 선생은 보지 못한 것처럼 초연하였으며, 옥당(玉堂)에 입직하였을 때는 더러 동료들과 종일토록 마주하고 있어도 한마디 말이 없었으니, 대개 지경(持敬) 공부가 깊어서였고 억지로 꾸며서 그런 것이 아니었다.
심신(心身)과 성정(性情)에 근본하여 가정과 향리와 나라에 행하였으니, 이른바 체(體)와 용(用)을 겸비한 학문으로, 옛 도를 계승하여 오늘에 미치고 효를 옮겨 충(忠)을 한 것이었다. 그러므로 조정에서 벼슬할 때에 나아가고 물러가며 건의하여 아뢰기를 저렇듯이 광명정대하게 하였던 것이다.
말이 입에서 나오지 않을 것 같고 몸이 옷을 이기지 못할 것 같았으나, 간사한 자를 배척하거나 위태롭고 의심스러운 사안을 결정하는 데 이르러서는 두려워함이 없이 곧장 나아가 맹분(孟賁)과 하육(夏育)17)이라도 그 뜻을 꺾을 수 없을 법하였으니, 요컨대 그 언론(言論)과 풍도(風度)가 권강(勸講)에 대비하고 군주의 직임을 보필하기에 더욱 충분하였던 것이다.
그 마음은 더할 수 없이 간곡하고 정성스러워 항상 군주를 요순 같은 임금으로 만들고 백성들을 요순 시대 백성으로 만드는 책임을 자임(自任)하였다. 그러므로 유배지에 있으면서도 지극한 충성심을 억제하지 못하여 《주역(周易)》의 진덕 수업(進德修業)의 뜻을 부연해서 팔규(八規)를 지었으니18), 충성을 바치려는 뜻에서 나온 것이었다. 비록 시의(時義)에 맞지 않아 올리지 못했으나, 이를 통해서 선생이 평소에 쌓아 온 바를 더욱 잘 알 수 있다.
그러나 선생이 당시에 이미 스스로를 깊이 감추고 드러내지 않았기 때문에 사람들은 선생이 도를 갖춘 분인 줄을 알지 못했다. 불초한 나는 본디 선생을 찾아가서 뵌 적이 있었음에도 제대로 깨닫지 못한 탓에 이를 계기로 깊게 질문하여 발명(發明)한 바가 없었다.
십수 년 이래 병을 앓으며 산속에서 지내는 동안 먼지 묻고 좀 먹은 서책에서 엿본 것이 있는 듯하였으나, 돌아보면 의탁하여 물을 곳이 없었다. 그런 뒤에야 한탄스럽게 선생의 사람됨을 떠올리며 그리워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몇 년 전 선생의 서자(庶子) 전인(全仁)이 와서 선생이 찬술한 여러 책을 보여 주었는데, 근래 전인이 또 그 아들 준(浚) 편에 수집한 선생의 시문(詩文)과 지명(誌銘) 및 거쳐 간 관직의 시말, 언행(言行)과 사실을 거듭 보내 주었다.
내가 삼가 받아서 읽고 반복해서 참고하고 검토하면서 옛 성현들의 말씀과 대조해 보았다. 그러고 나서야 선생이 도학(道學)에 대해서 이렇게 절실하게 추구하고, 이렇게 힘을 다해서 행하고, 이렇게 바름을 얻어, 선생의 출처(出處)의 대절(大節)과 충효(忠孝)의 일치가 모두 근본한 곳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선생이 유배지에서 《대학장구보유(大學章句補遺)》, 《속대학혹문(續大學或問)》, 《구인록(求仁錄)》을 짓고 또 《중용구경연의(中庸九經衍義)》를 편수했는데, 《중용구경연의》는 미처 완성하지 못하였지만 더욱 심력을 기울인 것이었다. 이 세 책을 통해서 선생의 학문을 볼 수 있거니와, 그 정밀한 견해와 홀로 터득한 묘리는 망기당(忘機堂) 조한보(曺漢輔)에게 준 무극 태극(無極太極)에 관한 편지 네다섯 편19)에 가장 잘 드러난다.
그 편지의 내용은 우리 유학의 본원을 밝히고 이단(異端)의 사설(邪說)을 물리친 것으로, 정미함을 꿰뚫고 상하를 관철한 뜻이 순수하게 모두 바른 도리에서 나왔다. 그 의미를 깊이 탐색해 보면 모두 송(宋)나라 유학자들의 학설을 이어받은 것인데 특히 고정(考亭 주희(朱熹))에게서 얻은 것이 많다.
아, 우리 동국(東國)은 예로부터 인현(仁賢)의 교화를 입었음에도 그 학문이 전해지지 않았다. 고려 말부터 본조(本朝)에 이르기까지 스스로 이 도에 뜻을 두고 세상에서도 도학(道學)으로 지칭한 호걸의 선비가 없지 않았다. 그러나 그 당시를 상고해 보면 대부분 명성(明誠)의 실질20)을 다하지 못했고, 후세에 와서 일컫는 데는 또 연원을 징험할 길이 없었다. 그리하여 후대의 학자들로 하여금 자취를 좇아 따를 바가 없게 함으로써 지금은 명맥이 완전히 끊어지기에 이르렀다.
우리 선생의 경우에는 전수받은 곳이 없이도 스스로 이 학문에 분발하여, 은은하면서도 날로 드러나는 덕이 행실과 부합되고, 훌륭한 저술을 남겨 말이 후세에 전해지게 되었으니, 동방에서 찾아보면 거의 견줄 만한 이가 드물다. 못된 소인배가 조정에 있어 잠깐 동안은 훌륭한 행적을 무함할 수 있었지만, 현인은 모두 존경하는 법이니 장차 높은 산처럼 우러르는 사람들이 구름처럼 일어날 것이다. 그러니 어찌 선생의 덕업(德業)과 행적을 기술하여 세상에 전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렇지만 나는 우매하고 고루하며 아는 것이 없어서 이 책임을 감당할 수 없다는 것을 극히 잘 알고 있다. 다만 우러르고 존경하는 마음을 스스로 그만둘 수가 없기에 감히 전인(全仁)의 요청에 따라 외람되이 서차(序次)를 정하였다. 훗날 지혜와 덕과 문장력을 겸비한 군자가 나와서 여기에 의거하여 재단하는 바가 있기를 바랄 뿐이다.
선생의 부인은 정경부인(貞敬夫人) 박씨(朴氏)로 선무랑(宣務郞) 박숭부(朴崇阜)의 따님인데, 불행히 자식이 없어 종제(從弟)인 경력(經歷) 통(通)의 아들 응인(應仁)을 후사로 삼았다. 서자가 하나 있으니 바로 전인이다. 딸이 하나인데 출가하지 않았다.
전인이 아들 둘을 낳았으니 준(浚)과 순(淳)이다. 전인은 시서(詩書)를 익히고 의리를 아는데, 옥산(玉山)의 별업(別業)을 전인이 받들어 지킨다고 한다. 가정(嘉靖) 45년인 병인년(1566, 명종21) 10월 을해에 가선대부(嘉善大夫) 전 공조 참판 진성(眞城) 이황(李滉)은 삼가 행장을 쓴다. <끝>
[註解]
[주1] 연성위(延城尉)가 공주에게 장가들어 : 연성위는 김희(金禧)이고, 공주는 중종의 장녀 효혜공주(孝惠公主)이다.
[주2] 수천 …… 올렸다 : 《회재집》 제7권에 실려 있는 〈일강십목소(一綱十目疏)〉이다.
[주3] 진덕수(眞德秀) : 송나라 사람이다. 영종(寧宗) 때 벼슬하며 10여 년간 수십만 글자에 달하는 상소를 올렸는데, 내용이 모두 사리에
맞고 시무(時務)에 절실하였다고 평가된다.
[주4] 또 …… 진달하였다 : 《회재집》 제12권 습유(拾遺)에 실려 있는 〈홍문관에서 올린 상소〔弘文館上疏〕〉이다.
[주5] 8월에 …… 올렸다 : 이 서계는 권13에 실려 있다. 그런데 올린 날짜가 원주에는 7월 18일로 되어 있고, 《명종실록》에는 즉위년 7월
25일 조에 실려 있어 이 연보의 기록과는 차이를 보인다.
[주6] 차자 : 《회재집》 제10권에 실려 있는 〈병오년 봄에 올린 차자〔丙午春箚子〕〉이다.
[주7] 선현(先賢)의 …… 하였습니다 : 송(宋)나라 정이(程頤)가 철종(哲宗)에게 올린 차자에서 “천하의 중임으로는 재상과 경연관이 있
을 뿐이니, 천하의 치란은 재상에게 달려 있고, 군덕의 성취는 경연관에게 책임 지우는 것입니다.〔天下重任, 惟宰相與經筵, 天下治
亂繫宰相, 君德成就責經筵.〕”라고 하였다. 《續資治通鑑長編 卷79》
[주8] 차자 : 《회재집》 제10권에 실려 있는 〈3월에 정사하고 나서 올린 차자〔三月呈辭上箚子〕〉이다.
[주9] 이때 …… 청하였는데 : 이때 명종이 어려 대왕대비인 문정왕후가 발을 드리우고 정사를 듣게 되자, 예조에서 대왕대비가 왕과 함께
신하들을 접견하는 때의 의절(儀節)을 논하면서 왕의 자리 앞에도 대왕대비와 같이 발을 드리우기를 청하였던 것이다.
[주10] 차자 : 《회재집》 제10권에 실려 있는 〈발을 드리우는 것이 옳지 않음을 밝힌 차자〔不宜垂簾箚子〕〉이다.
[주11] 정미년 …… 변고 : 윤원형 일파가 윤임(尹任)의 잔존 세력을 제거하기 위해 조작했다고 알려진 양재역 벽서 사건(良才驛壁書事
件)을 가리킨다.
[주12] 을사년의 여러 사람 : 을사사화 당시 미처 다 제거하지 못한 대윤(大尹) 계열 인사들과 을사사화 때 비판적인 견해를 보였던 사림 계
열 인사들을 말한다.
[주13] 원상(院相) : 국왕이 승하한 뒤 26일 동안 정무를 대행하던 승정원의 임시 벼슬로, 원로대신 중에서 임명하였다.
인종이 승하했을 때는 이언적과 권벌(權橃)이 원상이 되었다.
[주14] 교정장(校正杖) : 법에 정한 규격대로 교정한 형장(刑杖)으로, 남형(濫刑)을 막기 위한 제도적 장치였다. 형장에는 규격이 있으므
로, 동(銅)으로 만든 형장의 틀을 형을 집행하는 관서나 각 고을에 비치하여 형장을 교정하도록 한 것이다. 《退溪集 攷證 卷7》
[주15] 윤인경은 …… 놓고도 : 명종이 즉위하여 수렴청정을 논할 당시에 이언적은 대왕대비가 수렴청정을 해야 한다고 했으나, 윤인경이
어전에서 이언적이 왕대비가 수렴청정을 해야 한다고 했다고 거짓으로 아뢰었던 일을 가리킨다.
[주16] 김광준(金光準)이 …… 많았다 : 김광준과 관련된 일은 《회재집》 제11권에 실린 〈사벌국전(沙伐國傳)〉에 자세하다.
[주17] 맹분(孟賁)과 하육(夏育) : 옛날의 이름난 용사(勇士)로, 맹분은 전국 시대, 하육은 주대(周代)의 인물이다.
[주18] 주역(周易)의 …… 지었으니 : 진덕 수업(進德修業)은 《주역》 〈건괘(乾卦) 문언(文言)〉에서 공자가 구삼(九三) 효(爻)의 뜻을 풀
이하기를 “군자는 덕(德)을 향상하고 업(業)을 닦아야 하니, 충(忠)과 신(信)은 덕을 향상하는 방법이고, 언사(言辭)를 정성스럽게
함은 업(業)을 보유하는 방법이다.”라고 한 것을 말한다. 팔규는 《회재집》 제8권에 실려 있는 〈진수팔규(進修八規)〉이다. 이 상소
는 이언적의 사후인 1566년(명종21) 8월에 아들 이전인(李全仁)이 명종에게 올렸다.
[주19] 망기당(忘機堂) …… 편 : 《회재집》 제5권에 실린 〈망재와 망기당의 무극태극설 뒤에 쓰다〔書忘齋忘機堂無極太極說後〕〉와 〈망
기당에게 답한 편지〔答忘機堂書〕〉 4편이다.
[주20] 명성(明誠)의 실질 : 본연의 밝은 성품을 간직하고 끊임없이 수양함으로써 지극한 경지에 이르는 것을 말한다. 《중용장구》 제21장
에 “성실함으로부터 선에 밝게 되는 것을 성이라고 하고, 선에 밝음으로부터 성실해지는 것을 교라고 하니, 성실하면 선에 밝게 되
고 선에 밝으면 성실하게 된다.〔自誠明, 謂之性; 自明誠, 謂之敎. 誠則明矣, 明則誠矣.〕”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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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文]
晦齋李先生行狀 - 李滉.
先生姓李氏。諱迪。後中廟命加彥字。字復古。自號晦齋。又號紫溪翁。其先驪州人。鄕貢進士世貞之後。中移于迎日。復遷于慶州良佐村。高祖諱權。副司直。曾祖諱崇禮。贈兵曹參判。祖諱壽會。訓鍊院參軍。贈吏曹判書。考諱蕃。成均生員。贈議政府左贊成。妣貞敬夫人孫氏。精忠出氣敵愾功臣鷄川君昭之女。先生生于弘治辛亥。生有異質。九歲而孤。稍長。力學能文。旁通擧業。正德癸酉。中生員試。甲戌別擧朴世熹榜登第。年二十四矣。權知校書館副正字。差本府敎官。尋入爲正字。戊寅。爲著作參軍。公歿。先生承重。居憂制甚謹。服闋陞博士。辛巳。選授弘文館博士。侍講院說書。用薦爲吏曹佐郞。甲申。乞外爲仁同縣監。丙戌。以司憲府持平召還。轉吏曹正郞。除掌令。己丑。由成均館司成。出爲密陽府使。臨民御吏。細大皆有條法。吏戢民懷。庚寅。召入爲司諫院司諫。時金安老久在屛黜。朝廷方議復引用。以爲東宮孤單。須此人爲之羽翼。蓋安老子延城尉尙公主。於東宮爲有力也。倡此說者。正言蔡無擇。無擇。安老妻黨。以此爲安老得路之地。大司憲沈彥光等隨聲和附。擧朝靡然。先生獨力言其不可。與無擇不合。無擇褫正言而物論旋訾先生立異。左遷爲司藝。先生一日。過沈彥慶兄弟。彥光曰。司藝何以知安老之爲小人乎。先生曰。安老尹東京時。熟觀其處心行事。眞小人情狀也。此人得志。誤國必矣。彥慶曰。雖入。豈授以權柄乎。但欲爲東宮地耳。先生曰。不然。彼若入。非久必秉國鈞。專擅用事。誰敢有禦之者。且東宮。一國臣民所共屬意。何待安老而後安耶。彥光怒起去。乃宣言于朝曰。李某在朝。安老不得入矣。遂劾罷歸田里。安老旣至。聞先生攻己語。亦不甚怒。慶人有以賄求官者。安老謂其人曰。愼勿令李某知之也。丁酉冬。安老敗死。中廟思先生忠直。首命敍復。爲掌樂僉正。遷宗簿。入玉堂爲校理,應敎。轉中書。由檢詳至舍人。除軍器寺正。俄以直提學。陞秩爲兵曹參知。已而出尹全州。歲中府境大治。其民立碑以頌德。先生雖以親老乞郡。其愛君憂國之念。未嘗一日而忘于懷。會因災異求言。乃上疏數千言。其疏爲綱者一。曰人主心術。爲目者十。曰嚴家政。曰養國本。曰正朝廷。曰愼用舍。曰順天道。曰正人心。曰廣言路。曰戒侈欲。曰修軍政。曰審幾微。所言無非格君心措時務。啓沃謀謨。極其忠讜。中宗大王深加奬歎曰。古之眞德秀。無以過也。卽命傳示東宮以及外朝。特旨陞嘉善。俄拜兵曹參判兼世子右副賓客。先生以謂如蒙採言則幸矣。遂有僭賞。非所敢當。上箋懇辭。上不許。於是。歷禮曹參判,成均館大司成,司憲府大司憲兼世子左副賓客。弘文館副提學。在館又上疏。極陳聖學本末時政得失。辛丑秋。陞資憲判漢城府。尋加正憲。議政府右參贊。轉吏曹判書。再爲參贊,大憲,刑,禮曹判書,右參贊。癸卯。求出爲安東府使。諫院啓留之。先生以母夫人老病在鄕。不可以睽離遠宦。累陳情悃乞歸養。上慰諭之曰。卿辭至切。進退有關。故不允。命本道題給母食物。又諭令將母來京。先生益爲之惶恐感激。請外愈力。朝廷不得已除爲本道監司。俾以少遂其情。甲辰。判漢城府兼左副賓客。會。病乞辭。十一月。中宗昇遐。亦未赴臨。日夜憂慟。病益重。仁宗卽阼。首降召命。乙巳正月。擢爲議政府右贊成。先生再上狀辭病。上下旨敦諭。若曰。往年先王賜觀卿疏。固已歎服。且於書筵聞講說。予爲卿留意久矣。豈不合貳公乎。仍賜藥物。令調以來。閏月及三月。連辭猶不允。至夏初。病稍間。始克造朝。時先生感兩朝知遇之隆。自力一行。蓋將以有爲也。而仁廟不豫日久。曠不視事。國之隱憂。有不可勝言者矣。先生嘗私謂領議政尹仁鏡曰。當今主上無嗣。大君年幼。何不早建白封爲世弟以定國本乎。仁鏡曰。公言當矣。但今山陵纔畢。詔使臨迫。何暇及此。七月。仁廟昇遐。今上嗣服。當擧垂簾之儀。百官會議賓廳。仁鏡曰。今有大王大妃,王大妃。何殿當聽政乎。左右默然。先生曰。昔宋哲宗時。太皇太后同聽政。自有古例。不須疑問。且安有嫂叔同御殿之理乎。今但定垂簾儀制耳。由是朝無他議。始開經筵。先生入參。伏聞玉音琅然。不覺喜淚下。退詣春秋館。柳仁淑問主上讀書何如。先生曰。聖質英明。讀書無一字差誤。宗社臣民之福也。八月。政府書啓十條。一。請慈殿善導養聖質。二。請博選經筵官。恒與之講論游處。以進聖學。三。殿下於大行大王。有子道有臣道。喪禮不可不盡誠孝。四。請嚴宮禁防戚里。五。請愼擇宮人。六。請勿用特旨。七。請勿用判付。八。政院職出納惟允。內旨有不合。許令封還。九。宮中府中當爲一體。請勿開私門。以昭平明之理。十。言大行大王學問之效。公道大行。人顒至治。奄至斯極。今上嗣緖。國人方以望於大行大王者望於殿下。其機甚重。願兩殿留神焉。大率皆先生筆定也。已而。將治尹任等罪。兩殿同御忠順堂。密旨引見宰臣。時天威震赫。人莫敢少拂。先生進曰。人臣之義。當專於所事。當彼時專心於大行王者。豈宜深罪。且擧事當顯明。不然。恐士林多有橫罹禍者。聞者縮頸而先生無懼色。尹仁鏡啓曰。當初議垂簾時。李彥迪問臣何殿當聽政乎。臣答以慈殿當聽政。先生位稍遠。但聞其擧己名。心疑之。出取注書日記。檢得其誣啓之實。然又不欲尹得重罪。乃書啓云云。仁鏡之言必不如是。恐注書記錄之誤也。上下其單賓廳。仁鏡失色。無以對。但囑左相洪彥弼。彥弼啓曰。忠順堂狹隘。不便於記注官進退。此必注書誤聞之故也。先生亦不復辨明焉。是月。錄入侍忠順堂宰樞賜定難衛社功臣之號。先生力辭。以爲豈可無功而濫受。以紊王典乎。不聽。丙午春。入箚云先賢之言曰。君德成就責經筵。臣忝是職。日夜懼無以稱塞。謹取先儒程頤格言至論有裨於聖德而可施於今日者。條錄以獻。此皆輔導幼主切要之言。殿下誠能深信而力行之。則其有補於聖功。豈云小哉。臣又念輔養之道。其講劘規箴。固在於經筵。至於在宮中保護敎諭之益則專在於慈殿。宜於主上三朝之際。常諄諄勉諭以勤學問。敬大臣。納諫諍。近正人。遠邪佞。畏天命。恤民隱等事。而又必以修身進德爲本。視聽言動。一循乎禮。期以古之聖帝明王爲法則聖德日就。爲宗社無疆之福矣。三月。呈辭省親。將行進箚云。王者正心以正朝廷。正朝廷以正百官。正百官以正萬民。正心之要。在於講學明理。親賢遠邪而已。沈潛聖賢之訓。窮格義理之源則方寸之間。天理日明。人欲日消。親賢臣遠邪佞。則有薰陶匡捄之益。而無一曝十寒之患云。其所望於君父者。益深切矣。然而當時氷炭之勢。實亦有難相容者。旣歸。三上章乞辭職。乃命遞爲判中樞府事。于時。禮官請於當宁幷垂簾。先生聞之上箚云。人君南面而聽治。當如大明麗天。萬物畢照。況在臨政之初。群臣思得一望淸光。今乃御殿而障蔽天顏。豈不致群情之疑阻乎。宋朝之儀。蓋以皇帝聽政。侍臣皆坐。經筵講官立。而皇帝與太后東西相對。相距密近。故帝座亦在於簾內。我朝之禮。侍臣與講官皆俯伏。雖史官亦莫敢仰視。何必於殿下竝設簾障乎。至於慈殿同御殿之時則只得如忠順堂面對之儀。行於今而無惑。垂諸後而可法矣。是時朝論洶洶。謾讕遂及於先生。秋九月。李芑啓曰。彥迪惑於邪論。諂附世子。背叛中宗。書上十條。縶人主手足。與柳仁淑交結。多有營捄逆賊之言。臣往以贓吏女壻。不得爲顯職。彥迪爲大憲時始解之。於臣有恩。今臣爲國不計私。敢啓。大憲尹元衡,持平陳復昌等繼之。乃削奪勳爵。丁未九月。有無賴子匿名謗國之變。因以大加罪乙巳諸人。先生亦在其中。江界府安置。夫以先生委質三朝。進退心跡。昭如日星。而言論疏箚。務引君當道。忠誠懇惻。終始一致。無一毫可疵。而終至不免者。無他焉。初先生在慶尙日。都事李天啓以持平召赴闕。請於先生曰。聞今當卜相。物論皆歸於李芑。何如。先生曰。其人陰險。不可以置相位。已而。李果相而兩司劾罷之。李聞其故。深銜之。至是李以元勳。當國用事。先生與之同朝。動與爲矛盾。一日。先生以院相入直。召注書書啓曰。凡罪人當取服定罪。近日三省訊鞫。過用刑杖。徑殞者多。恐有橫冤。欲望用校正杖得情。然後定罪。翌日。芑入見啓草。忿然曰。渠恐杖落渠膝故耶。加以仁鏡用前釁。反有嗛於先生。元衡以先生嘗有救己之言。屢欲納交。先生絶不往。由是深恨焉。三憾合勢。其謀欲中害。固不遺餘力矣。矧乎一時姦憸之徒。誣善類阿時相。以饕己利者相環也。按金光準挾私憾。中傷之力居多。 凡先生所守。皆彼之所畏。彼輩今日之得志。寔先生平昔。爲君上深憂而力防之者則先生之以忠獲罪。何足怪哉。而於先生。又何恨焉。聞謫命。擧家號泣。先生飮食言笑如平時。乃屬之曰。好侍養大夫人。皇天在上。吾不久當還矣。先生至謫所之明年戊申。大夫人下世。是則爲先生終天之痛。而先生素有寒疾。至是人益危之。乃以遺衣服設位。朝夕攀號毀慼。以盡三年猶無恙。豈非有所扶護而然者歟。其處困行患。有以自安。進學著書。不輟其功。未明而起。乾乾夕惕。其几案上。書自戒之辭曰。吾日三省吾身。事天有未盡歟。爲君親有未誠歟。持心有未正歟。一日。御史李無疆。不意疾馳而入。一府驚怖。以爲有不善意。先生不爲動。正衣冠坐而看書。其一視夷險。不以死生窮厄易素操如此。癸丑十一月。以疾終于彼。享年六十三。甲寅。返櫬于慶州。十一月甲辰。葬于興海郡南達田里之禱陰山。從先壟也。初。先生先考府君蚤歲以儒聞。嘗魁本道夏課。成宗嘉其詩賦。召見賜衣物。俾留國學學焉。後歸鄕里。日以訓後生爲事。先生雖不逮趨庭之訓。其家業固有所自來矣。孫夫人賢有識慮。不以慈愛弛敎督之方。旣令就學於舅氏孫吏判仲暾。又撥貧窶。資給遠邇。先生英悟出人。天資近道。不唯通經史。習時文不勞而早成。乃於俗學之外。知有所謂爲己之學而欲求之。雖未見有名門之師從游而受業。然謂道備於吾性。而其說具在方冊。苟能篤志。無不得之理。於是講明體履。用力於致知誠意之地。爲人安重端詳。雅有高趣。自少群居肄業。或有嬉戲喧呶於其側。若無聞焉。年二十七而作五箴。畏天也養心也敬身也改過也篤志也。三十而又作立箴。其言皆古聖賢躬行心得切要之旨。其操存省察於日用動靜之間。懲窒遷改於遵養時晦之際。固已實有所事而非空言也。其罷歸也。卜地於州西北紫玉山中。愛其巖壑瑰奇。溪潭潔淸。築室而居之。名其堂曰獨樂。益樹以松竹花卉。日嘯詠釣游於其間。謝絶世故。端坐一室。左右圖書。硏精覃思。靜中下功夫。比之前時。尤深且專一。然後向來有聞而未甚契者。始若心融而神會。親切而有驗焉。養以沖恬之趣。積以歲月之久。潛神性理。遵聖賢進修之方。玩心高明。樂鳶魚流行之妙。夷考其可見之行。其事親也篤於愛敬而承順悅豫。溫凊滫瀡。靡不曲盡。一弟彥适。與之友于。如手如足。治家有法。門庭肅然。奴僕謹恭。宗戚鄕黨。撫待各得其宜。祭先之禮。務盡誠敬。特爲之編輯一書。名曰奉先雜儀。旣參酌古今。以定禮文。又裒錄禮記等書所載孝子慈孫竭誠齋祭之文。以觀省而奉行焉。大有定力。雖遇倉卒。未嘗有疾言遽色。靜正自持。其在全州。遇節日張俗戲。監司金公正國。正人也。往往猶不免顧笑。先生超然如無見也。其直玉堂。或與同僚。終日相對無言。蓋持敬功深。非矯而爲之。本之於身心性情。而行之於家鄕邦國。所謂有體有用之學。述古而推今。移孝以爲忠者也。故其立乎本朝也。進退建白。如彼其光明正大。言若不出口。體若不勝衣。至其斥姦邪定危疑。直前無畏。雖賁育莫之奪也。要之其言論風旨。尤足以備勸講而補衮職。其心懇懇焉。常以堯舜君民之責自任。故其在遷謫。猶不勝其拳拳之忠。嘗取易經進德修業之義。衍而爲八規。志欲獻忠。雖以時義之不可而莫之進。其素所蓄積。益可見矣。然而先生在當時。旣深自韜晦。故人未有知其爲有道者。滉之不肖。固嘗獲登龍門而望芝宇矣。亦懵然莫覺。不能以是深叩而有發焉。十數年來。病廢林居。若有窺覘於塵蠹間。顧無所依歸而考問。然後未嘗不慨然想慕乎先生之爲人。頃年。先生庶子全仁來示先生所纂修諸書。近全仁又遣其子浚。以其所裒集先生詩文誌銘及歷官首末言行事實重來示。滉謹受而伏讀之。反覆參究。質之以古聖賢之言。於是始知先生之於道學。其求之如此其切也。其行之如此其力也。其得之如此其正也。而凡先生之出處大節。忠孝一致。皆有所本也。先生在謫所。作大學章句補遺,續或問,求仁錄。又修中庸九經衍義。衍義未及成書而用力尤深。此三書者。可以見先生之學。而其精詣之見。獨得之妙。最在於與曺忘機漢輔論無極太極書四五篇也。其書之言。闡吾道之本源。闢異端之邪說。貫精微徹上下。粹然一出於正。深玩其義。莫非有宋諸儒之緖餘。而其得於考亭者爲尤多也。嗚呼。我東國古被仁賢之化。而其學無傳焉。麗氏之末。以及本朝。非無豪傑之士有志此道。而世亦以此名歸之者。然考之當時則率未盡明誠之實。稱之後世則又罔有淵源之徵。使後之學者。無所尋逐。以至于今泯泯也。若吾先生。無授受之處。而自奮於斯學。闇然日章而德符於行。炳然筆出而言垂于後者。求之東方。殆鮮有其倫矣。靑蠅止樊。僅能誣芳躅於電往。中原采菽。擧將仰高山而雲興。則先生之德業行蹟。胡可無紀述以傳于世乎。而滉極知昧陋無聞。不足以任是責矣。徒以景仰尊慕之心有不能自已者。敢因全仁之請而僭爲之掇拾序次。以俟他日知德能言之君子有所據而裁幸焉爾。先生內子。封貞敬夫人朴氏。宣務郞崇阜之女。不幸無嗣。以從弟經歷通之子應仁爲後。有庶子一人。卽全仁。一女未行。全仁生二子。曰浚。曰淳。全仁習詩書知義方。玉山別業。全仁奉守云。嘉靖四十五年歲在丙寅冬十月乙亥。嘉善大夫前工曹參判眞城李滉。謹狀。<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