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2014. 08. 05(화)
▲정순붕 묘(鄭順朋 墓) ⓒ개미실사랑방
■ 정순붕(鄭順朋)
정순붕『鄭順朋, 1484년(성종 15) ∼ 1548년(명종 3)』은 자는 이령(耳齡), 호는 성재(省齋), 본관은 온양(溫陽), 증조는 정포(鄭袍), 조부는 지평 정충기(鄭忠基), 아버지는 헌납 정탁(鄭鐸), 어머니는 도진손(都震孫)의 따님 성주도씨(星州 都氏), 배위는 봉양수(鳳陽守) 이종남(李終南)의 딸 전주이씨이다.
연산군 10년(1504)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중종 11년(1516) 조광조(趙光祖)· 박상(朴祥)· 김정(金淨) 등과 더불어 사유(師儒)로 선발되고, 이조판서 송천희(宋千喜)의 천거로 장령에 임명되었다.
이어 좌부승지(左副承旨-正三品) ·충청도관찰사(忠淸道 觀察使-從二品)· 형조참의(刑曹參議-正三品)에 이르렀으나, 기묘사화(己卯士禍)가 일어나 사림이 일망 타진되면서 이에 연루되어 전주부윤(全州府尹)으로 좌천되었다가 1520년 파면되고, 이듬해 삭탈관직 되었다.
중종 32년(1537)년 김안로(金安老) 등이 제거되어 기묘사화(己卯士禍)로 죄를 받은 사람이 모두 풀려나면서 서용되었다.
중종 34년(1539) 공조참판· 형조참판· 강원도관찰사· 공조참판· 한성부우윤· 형조판서· 호조판서· 우참찬· 대사헌이 되었다.
인종이 즉위하여 대윤이 득세하면서 우참찬에서 지중추부사로 체직되었다. 명종이 즉위하여 문정왕후가 수렴청정을 하자 윤원형(尹元衡)·이기(李?) 등이 을사사화(乙巳士禍)를 일으켰는데, 그는 이기(李芑) 등과 어울려 음모를 꾸며 많은 사람을 죽이고 귀양보내니 사람들은 그를 이기(李芑)와 더불어 간흉이라 하였다.
을사사화로 인하여 보익공신(保翼功臣) 1등에 책록되고 온양부원군(溫陽府院君)에 봉해졌으며 벼슬이 우의정(右議政-正一品)에 이르렀으나, 선조 11년(1578) 관직과 훈작이 모두 삭탈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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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의정 정순붕 묘갈명(右議政 鄭順朋 墓碣銘)
공의 자는 이령(耳齡), 호는 성재(省齋)이다. 시조는 보천(普天)으로 고려시대 때 호부상서를 지냈고, 조부인 충기(忠基)는 지평이었으며, 부친인 탁(鐸)은 헌납을 지냈다. 어머니는 성주도씨(星州都氏)이고 배위는 완산이씨(完山李氏)로 도정(都正) 종남(終南)의 딸이다.
공은 성화(成化) 갑진년(성종15년, 1484년)에 태어났고, 갑자년(연산군 10년, 1504년)에 과거에 합격하여 관직은 우의정까지 올랐으며 가정(嘉靖) 무신년(명종 3, 1548년)에 사망했다. 중간의 이력은 고증할 문헌이 없어 상세히 기술할 수 없다.
자녀는 5남을 두었다. 렴(磏)은 북창(北窓)선생이라고 불리웠고, 적(磧)의 호는 금송당(琴松堂)이며 후사가 없었다.
담은 문과에 합격하여 경기도사(京畿都事-從五品)를 지냈으며 호가 십죽헌(十竹軒)이고, 현(礥)은 성천부사(成川府使- 從三品)를 지냈고, 호가 만죽헌(萬竹軒)이며, 작(碏)의 호는 고옥(古玉)으로 후사가 없었다.
연대가 이미 멀어져 자손들이 경향 각지에 흩어져 있으므로 모두 기록할 수 없고, 관직에 있는 사람만 기록한다. 손자 항렬에 해당하는 지승(之升)은 호가 총계당(叢桂堂)이고, 증손자 항렬인 회(晦)는 좌랑으로 찰방으로 나가 있다. 현손 항렬인 익경(翼卿)은 문과 출신으로 참의를 지냈고, 두경(斗卿)은 문과 출신으로 참판과 제학을 역임했으며 호는 동명(東溟)이다.
인경(麟卿)은 문과 출신으로 승지를 지냈으며, 뇌경(雷卿)은 문과 출신으로 필선(弼善-世子侍講院의 正四品)을 지냈는데 소현세자(昭顯世子)를 따라갔다가 죽었다. 5대손 항렬의 정양(正陽)은 현감을 지냈고, 유악(維岳)은 문과 출신으로 판서를 지냈다. 6대손 항렬인 수연(壽淵)은 현감이었고, 수곤(壽崑)은 군수를 지냈으며, 수륜(壽崙)은 직장이었다. 기안(基安)은 문과 출신으로 우윤을 지냈고, 수강(壽岡)은 찰방을 지냈다.
7대손 항렬에 속하는 광은(光殷)은 문과출신으로 사서(司書-正六品)를 지냈고, 광겸(光謙)은 군수(郡守-從四品)를 지냈으며, 광익(光益)은 문과출신으로 주서(注書-正七品)에 추증되었다. 광충(光忠)은 문과출신으로 대사헌(大司憲-從二品)을 지냈고, 광주(光周)는 군수를, 광한(光漢)은 문과출신으로 판서(判書-正二品)를 지냈으며, 만석(晩錫)은 문과출신으로 지금 찰방(察訪-從六品)이고, 광헌(光憲)은 전(前) 주부(主簿-從六品)이다.
8대손 항렬에 속하는 창유(昌兪)는 군수를 지냈고 창성(昌聖)과 창순(昌順)은 문과출신으로 전(前) 판서이며, 창조(昌朝)는 부솔을 지냈고, 창기(昌期)는 지금 군수이며, 창로(昌老)는 전 좌랑이다. 택부(澤孚)는 문과 출신으로 전 정언이고, 창모(昌謨)는 전 주부이다. 9대손 항렬인 원시(元始)는 문과 출신으로 참판이었고, 민시(民始)는 문과 출신으로 전 판서(判書-正二品)이며, 만시(萬始)는 전(前) 응교(應敎-正四品)이다.
대명숭정(崇禎) 후 3년 을사년(현종 6, 1665년) 월 일 세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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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文]
右議政 鄭順朋 墓碣銘
公字耳齡號省齋始祖諱普天高麗戶部尙書祖諱忠基持平考諱鐸獻納妣星州都氏配完山李氏都正終南女公以成化甲辰生登甲子科官止右議政卒於嘉靖戊申中間履歷文獻無徵不得詳述有五男曰磏北窓先生曰磧號琴松堂無后曰 文科京畿都事號十竹軒曰礥成川府使號萬竹軒曰碏號古玉無后年代旣遠子孫散在京鄕不可盡錄只就有官者書之孫行曰之升號叢桂堂曾孫行曰晦佐郎時察訪玄孫行曰翼卿文科叅議斗卿文科叅判提學號東溟麟卿文科承旨雷卿文科弼善從 昭顯世子死莭燕舘五代孫行曰正陽縣監維岳文科判書六代孫行曰壽淵縣監壽崑郡守壽崙直長基安文科右君壽岡察訪七代孫行曰光殷文科司書光謙郡守光益文科 贈注書光忠文科大司憲光周郡守光漢文科判書晩錫文科今察訪光憲前主簿八代孫行曰昌兪郡守昌聖文科前判書昌順文科前判書昌朝副率昌期今郡守昌老前佐郎澤孚文科前正言昌謨前主簿九代孫行曰元始文科叅判民始文科前判書萬始前應敎
大明崇禎後三乙巳 月 日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