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산 비봉에 있는 신라 진흥왕 순수비
1. 개요.
신라 제24대 임금 진흥왕이 6세기 중반, 고구려를 한강 유역에서, 백제를 관산성 전투에서 물리치고 새로 정복한 한반도 중부지방의 한강유역을 직접 순시하고 북한산 비봉 정상에 설치한 비석으로 지금까지 알려진 진흥왕 순수비4기 중 하나이다.
또한 세워진 지 천 년 가량의 오랜 세월이 흘러 어떤 비석인지도 잊혀 있었던 것을, 조선시대 후기의 실학자 추사 김정희『金正喜,1786(정조 10)~1856(철종 7)』가 직접 비봉 정상에 올라가서 비문을 해독하고 신라 진흥왕의 순수비임을 밝혀낸 것으로도 유명하다.
2.역사
6세기 중엽, 신라 진흥왕이 한강유역을 고구려와 백제에게서 빼앗은 후 그 영토를 선포하기 위하여 세운 순수비이다. 지금의 서울특별시 종로구 북한산 비봉(560m) 정상에 위치해 있었다가 1972년 8월 17일 경복궁으로 옮겨진 후 1986년 8월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옮겨져 보호를 받고 있다.
험준한 산봉우리 암반 정상에 있다 보니 신라 멸망 이후 잊혀졌다가 조선시대에 이르러서는 인근에 승가사라는 절이 있기 때문에 막연히 무학대사의 비라고 잘못 알려졌다. 그러다 조선 후기에 실학자 서유구『徐有榘,1764(영조 40)~1845(헌종 11)』가 처음 10여 자를 판독하여 진흥왕 순수비임을 밝혀냈고,1817년7월 21일에는 금석학자 김정희가 비문 해독에 성공해, 마침내 이 비석의 가치가 드러났다.
이때 김정희는 기쁜 나머지 비석 옆면에 해설을 새겼는데 오늘날 관점에서 보면 문화재 훼손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당시에는 그저 어디에나 있는 지형지물일 뿐이었다. 고구려의 비석인지도 잊히고 마을 주민들에게는 선돌 정도로 인식되어 오던 충주 고구려비나 빨래판 신세로 전락했던 지안고구려비보단 나았다고 해야 할까......
지금 누군가 낙서를 하면 반달리즘이겠지만 이건 과거 유명인물이 쓴 글씨라 이 글씨 또한 역사의 일부가 된 것으로 여길 수도 있다. 다른 사람의 글씨라면 낙서에 불과하나 추사 김정희의 글씨라면 그 역시 또 다른 문화재이다. 왜냐하면 이 순수비를 해독한 과정 자체도 역사적인 일이기 때문이다.
3. 건립시기
흔히 진흥왕이 555년에 세웠다고 알려져 있으나, 이는 정확한 사실이 아니다. 엄밀히 말해 비문에서는 건립년도를 확인할 수 없다.
다른 순수비처럼 이것도 세운 시기를 기록하기는 했을 테지만 현재는 해당 부분이 풍화되어 판독할 수 없게 되었기 때문이다.
다만 555년설이 제기되는 이유는 '삼국사기 진흥왕 16년(555)' 기사에 '(왕이) 북한산을 다녀갔다.'는 기록이 등장하기 때문에 555년으로 추측하는 것으로, 다시 말해 북한산과 직접 관련된 기록이 하나밖에 없으니 진흥왕이 딱 이 때 북한산에 왔으며, 와서 비석도 세웠을 것이라고 보는 것이다.
▲삼국사기(옥산서원본) 진흥왕 16년 기사의 해당 부분.
冬十月, 王巡幸北漢山, 拓定封疆.
겨울 10월에 왕이 북한산(北漢山)에 순행(巡幸)하여 강역을 넓혀 정하였다.
<삼국사기 권4 신라본기 제4 진흥왕 16년(555년) 中> 출처>국사편찬위원회
十一月, 至自北漢山, 敎所經州郡復一年租調, 曲赦除二罪皆原之.
11월에 (왕이) 북한산(北漢山)에서 돌아왔는데, 거쳐 지나온 주(州)와 군(郡)의 1년 동안 조(租)와 조(調)를 면제해 주고, (그 지역의) 죄수 가운데 두 가지의 사형죄를 제외하고는 모두 용서해 주었다. <삼국사기 권4 신라본기 제4 진흥왕 16년(555년) 中> 출처>국사편찬위원회
하지만 이 기록을 통해 '진흥왕이 555년에 북한산에 행차했다.'는 사실은 알 수 있으나, '555년 10~11월 사이에 순수비가 건립되었다.'에 대한 참・거짓은 판별할 수 없다. 순수비는 왕이 순수(행차)했다는 일을 나타내므로, 진흥왕이 재위기간 수십 년 동안 북한산을 더 방문했을 가능성을 부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 또 삼국사기만을 근거로 555년이라고 추정하기에는 삼국사기에 나머지 순수비를 세운 창녕, 황초령, 마운령을 방문한 기록이 없다는 점도 문제시된다.
廢沙伐州, 置甘文州, 以沙湌起宗爲軍主. 廢新州, 置北漢山州.
사벌주(沙伐州)를 폐지하고 감문주(甘文州)를 설치하여 사찬(沙湌) 기종(起宗)을 군주(軍主)로 삼았다. 신주(新州)를 폐지하고 북한산주(北漢山州)를 설치하였다. <삼국사기 권4 신라본기 제4 진흥왕 18년(557년) 中> 출처>국사편찬위원회
冬十月, 廢北漢山州, 置南川州. 又廢比列忽州, 置達忽州.
겨울 10월에 북한산주(北漢山州)를 폐하고 남천주(南川州)를 설치하였다. 또한 비열홀주(比列忽州)를 폐하고 달홀주(達忽州)를 설치하였다. 삼국사기 권4 신라본기 제4 진흥왕 29년(568년) 中 출처>국사편찬위원회
삼국사기에서 북한산이라는 어휘는 2년 후에 행정구역을 북한산주로 명명하면서 다시 등장한다. 이 북한산주는 약 10년 뒤인 568년에 폐지되어 남천주로 재개편되는데, 일부 학계에서는 이것이 순수비의 건립년도를 짐작할 수 있는 열쇠라고 보기도 한다.
순수비 비문에도 '남천군주(南川軍主)'라는 관직명이 등장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를 근거로 순수비가 황초령비, 마운령비와 같이 568년 또는 그 이후에 건립됐다고 보는 견해가 있다. 사실 이 쪽의 설이 555년보다 먼저인데, 대표적인 학자가 다른 사람도 아니고 이 비석을 처음으로 조사했던 추사 김정희로 그의 논문인 금석과안록(金石過眼錄)에서 이렇게 추정했다.
이렇게 건립년도가 정확하지 않음에도 어쩐 일인지 각종 교과서와 시험에 등장하는데, 공식적인 기관에서 이런 행위를 하는 것이 문제다. 후속 연구나 발굴로 순수비가 다른 시기에 건립되었다고 밝혀질지도 모르는 상태에서 역사 왜곡의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부분은 '상세내용 불명'으로 남겨두는 것이 상식이고, 교과서에 연도를 명기하거나 시험 문제로 출제해서는 안 된다. 한 공무원 시험에서 이 순수비의 건립년도를 묻는 문제가 나와 논란이 된 적이 있는데, 국정 교과서에 서술되어 있다는 것을 근거로 555년을 정답으로 인정해 버렸다. 시험의 평가가 한국사 본래의 목적을 압도해 버린 셈이다. <끝>
글>나무위키 자료 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