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2013. 12. 12. 10:58
헤이그 만국평화 회의 이후 이상설 선생의 행적
1.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대한제국의 밀사로 파견된 이상설·이위종 선생이 1907년 8월 1일 뉴욕항으로 들어왔다.
두 사람은 같은 해 7월 14일, 이준이 헤이그 현지에서 분사(憤死)하자 장례식을 치르고 대서양을 건넌 것이다.
박용만이 뒤늦게 통역으로 윤병구와 송헌주를 헤이그에 파견했으나 이들은 서로 만나지 못 한다.
이들의 입국기록에는 '미국에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none)'고 적혀 있다.
2. 이후 이상설과 이위종은 박용만이 소개한 윤병구, 송헌주와 함께 다시 유럽 순방길에 올랐다.
이들은 유럽 여러 나라를 방문하면서 일본의 침략성과 극동의 평화를 위한 영세중립국을 주장한다.
그리고 이듬해인 1908년 3월 윤병구와 함께 뉴욕으로 돌아온 이상설은 스티븐스 저격사건과 1908년 7월 연해주 한인대표로 애국동지
대표회의를 지켜보았다.(하지만 밀정의 보고에 따르면 유고가 있어 회의에는 불참했다고 함)
3. 이후 이상설은 1908년부터 미국에 1년여 간 머무르면서 미국 조야에 대한제국의 독립지원 호소를 계속하는 한편, 각지의 교포를 설득
하여 조국독립운동의 새로운 계기를 만드는 데 힘썼다. 이 당시 이상설은 박용만과 깊은 교감을 자주 나누었다.
4. 한편 이듬해 1909년 2월1일에는 하와이의 한인합성협회와 샌프란시스코 공립협회가 통합해 국민회가 탄생했다.
이후 국민회는 1년 뒤 대동보국회까지 포함해 1910년 5월 미주지역 독립운동을 총 지휘求� 대한인국민회로 발전한다.
이 당시 이상설은 주로 샌프란시스코에 머물렀다.
5. 이상설이 다시 블라디보스톡으로 떠난 것은 1909년 4월경이었다.
1909년 4월 국민회 총회장 최정익 등과 국민회의 제1회 이사회를 열고 구체적 사업을 결정한 다음 정재관과 연해주로 떠난 것이다.
국민회는 농지를 개간하고 독립운동 기지를 만들기 위해 그 전 해 가을 블라디보스토크에 '아시아실업주식회사'를 설립했다.
이 사업을 적극적으로 추진하기 위해 북미지방총회장 정재관이 블라디보스톡으로 갈 때 이상설도 동행했다.
6. 한편 러시아 지역에서도 공립협회가 국민회로 개편된 이후 러시아 지역 국민회 지회는 계속 발전했다.
이처럼 러시아 지역에서 국민회 지회 조직이 활발히 이루어지자 국민회 본부에서는 이 지역의 조직을 보다 확장하기 위하여 정재관, 이
상설을 미국에서 파견한 것이다. 이에 대해 신한민보 1909년 6월 2일자 국민회보에서는,
위임장
위는 아령 원동각처에 주지한 우리 동포를 규합하여 단체를 고결하며 본회의 종지를 창명하여 목적을 관철케 함이 현시의 급무인 바 본회원 이당은 덕망이 귀중하고 경륜이 탁월하여 나라를 근심하고 동포를 사랑하는 열심과 성덕이 가히 우리 회의 표준을 지을지라. 그럼으로 원동방면의 일체 회무를 전권 행사케 하기 위하여 본회의 대표원을 추정하노니 왕재 욱재하여 중망을 극부할지어다.
융희 3년 5월 1일
국민회 북미지방총회장 최정익
국민회 하와이지방 총회장 정원명
라고 했듯이 1909년 5월 1일 정재관과 이상설에게 원동방면의 일체 회무를 전권 행사케 하기 위해 국민회의 대표원으로 이들을 임명한다고 했다. 이들의 원동파견은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고 할 수 있다. 이상설은 헤이그밀사로 널리 알려진 인물이며, 정재관은 공립협회 때부터 이 단체의 핵심인물이었다.
특히 정재관은 공립협회의 서기, 총무, 총회장 등을 거친 핵심인물로서 공립신보의 사장 겸 주필도 역임한 인물이었다.
이처럼 중요한 인물들을 파견한다는 것은 그만큼 원동을 중요시 생각했기 때문일 것이다.
7. 그러나 원동에 도착한 이상설은 정순만과 함께 미주의 국민회가 조선을 거부하고 신한국을 건설하려 한다고 생각하고 이들과의 대열에
서 이탈하고 말았다고 한다. 한편 정재관이 블라디보스톡에 온 이후 러시아 지역의 국민회 조직 활동은 더욱 활기를 띠게 되어, 1909년
11월 초에는 13개 지회가 성립되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1910년 5월 국민회가 대한인국민회로 발전할 때까지 러시아 지역에는 20개의
국민회 지회가 조직되었다.
<이상설 선생의 행적에 대한 의문점>
1. 당시 헤이그 만국평화회의는 1907년 6월부터 10월까지 약 4개월 간 회의가 열렸다. 따라서 이상설이 1907년 8월 1일 미국 뉴욕에 입
항한 뒤 다시 유럽 순방길에 오른 이유는 만국평화회의 참석을 재시도하거나, 회의 기간을 이용해 유럽에서 ‘한국인의 호소’를 계속한
것이 아닐까?
2. 고종의 또 다른 밀사였던 헐버트는 3인의 특사가 오기 전 헤이그에 도착했다.
하지만 어떤 이유에서인지 제4의 특사인 헐버트도 1907년 7월 중순, 예정보다 일찍 가족들과 함께 미국으로 떠났다.
이후 헐버트는 대한제국의 독립운동을 지원하기 위해 <뉴욕 타임스>와 인터뷰를 하거나 강연과 모금운동을 했다.
이 당시 헐버트와 이상설과의 교류는 없었을까? 또 이상설이 미국에 체류 중일 때 박용만이나 이승만과의 교류나 구체적인 행적을 더 알
수 없을까?
3. 이상설이 국민회의 파견으로 1909년 4월 블라디보스톡으로 돌아와서 이 지역의 국민회와 뜻이 맞지 않아 대열에서 이탈했다고 하는
데, 이 내용은 다시 검토해 보아야 할 것이다 .즉 또 다른 기록에 따르면 1911년 7월, 대한인국민회 모금액 5만 달러만을 가지고 이상설
(원동임야주식회사)과 정재관(태동실업주식회사)이 대리인으로 밀산 토지를 공동구매하여 2,430에이커(약 300만평)의 규모로 등기를
마쳐 밀산에는 150가구, 100가구, 50가구의 한인부락과 산재한 200가구 등 총 500가구에 2,000명 정도가 집결했다는 기록이 있다. 따라서 이상설은 미국에서 온 정재관에게 연해주 지역에서 국민회 지부의 확대 임무를 맡기고, 이상설은 정순만과 함께 또 다시 원대한
꿈을 진행한 것이 아닐까?
4. 이상설이 미국에서 블라디보스톡에서 온 시점이 1909년 4월 경(음력으로 보아야 할 듯) 이라면, 이상설과 이회영이 블라디보스톡에서
만난 시점도 이 때로 수정되어야 할 것이다. 그동안 대부분의 책에서는 이 둘의 만난 시점을 1908년이라고 하거나, 그 시기를 밝히지 않
은 채 대충 얼버무리고 있다.
출처: 이상설선생기념사업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