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안산악회(扶安山岳會)를 창설한 이야기
내가 부안산악회라는 모임을 정식으로 발족시킨 것은 1963년쯤의 봄 개암동의 영월정(迎月亭)에서였던 것 같다. 이보다 2~3년 이전부터 우리학교 김영진, 신상근, 이중석 신이근 선생과 이웃 삼남중학교 김규술 선생, 교육청의 신규종 장학사 등 5~6명이 김용술 아저씨를 리더로 모시고 때때로 변산의 높고 낮은 봉우리와 깊고 얕은 골짜기를 오르내리곤 하였는데, 이것이 자연스럽게 모체가 되어서 발전된 것이다. 김용술 아저씨는 6·25 이후 변산에서 빨치산으로 활동하다가 붙잡혀 5년의 형을 마치고 출소한 후 지금의 남일당한약방 자리에서 광문당이라는 서점겸 문방구점을 하고 있었는데, 성품이 자상하고 인자하였으며, 겸손하며 지도력과 포용력이 남달라서 장사도 잘 되었다. 이 분은 공산당 운동을 하는 동안 초취와 재취 모두 사별하고 형무소를 출소한 후에는 있을 곳도 없었는데 옥성당의 호민(胡民)께서 홀로된 따님으로 사위를 삼아 문방구점을 차려주어 안정된 생활을 할 수 있게 하였었다.
그 때 산악회의 창립 멤버는 김용술(金榕述), 김형주(金炯珠), 신규종(辛圭鍾), 이중석(李仲錫), 김규술(金圭述), 신상근(辛相根), 신이근(辛而根), 김영진(金榮珍), 오하근(吳河根), 신조영(辛祖永), 이삼건(李三建) 등으로 기억되며 <전북산악회>의 회칙을 빌려다 거기에 준하여 회칙을 만들었고 최연장자인 김용술씨를 회장으로 모셨다. 이것이 부안에서 등산을 순수한 레저 스포츠로 조직한 최초의 모임체였다.
그리고 그 해 여름방학 때 지리산 종주등산을 하였는데 당시만 하여도 등산용 장비는 물론이요, 야외 취사도구 등의 개발이 거의 안되어 있어서 남대문 시장에서 미군 군용 판초와 버너, 일본군이 버리고 간 항고(밥통) 등을 구입하여 사용하거나 더러는 자그마한 양은솥을 짊어지고 다니기도 하였다. 이때 지운(遲耘) 김철수(金隋洙) 선생은 작은 옹기단지에 고추장을 담아가지고 오셨는데 노고단에서 천왕봉으로 오르다가 반야봉 근처에서 절벽 밑으로 실족 추락할 때 그 고추장 단지가 깨져 뻘겋게 옷을 적신 것을 보고 우리는 큰 부상을 하여 피를 흘리는 것으로 알고 크게 놀랬던 일이 지금도 생생하다.
그 후로 산행을 할 때마다 회원이 늘어나 고희를 넘기신 지운 선생을 비롯하여 임삼곤(林三坤), 정진석(鄭振奭), 구준회(具駿會), 신영달(辛泳君), 신한근(辛漢根), 한규봉(韓圭鳳), 이낙근(李洛根) 등 장년층들이 대거 입회하여 함께 산행을 하니 활기가 넘쳤다. 일제 암흑기인 1930년대에 김태종씨가 중심이 되어 신석정 등과 등산동호인 모임을 만들어 천막 등을 짊어지고 변산, 선운산, 마의산, 내장산 등을 산행한 이후로는 우리의 모임이 처음인 것같다.
1960년대 초만 하여도 등산은 매우 생소한 특수 운동으로 여겼으며 부안에서는 등산을 스포츠나 레저로 즐기는 사람이 거의 없었던 시기요 전주에 곽규훈 선생이(성심여고 교사) 이끄는 전북산악회가 막 조직된 직후였다. 우리는 곽선생의 등산복을 빌려다가 노블양장점에서 이를 모방하여 단체로 유니폼처럼 등산복을 맞추어 입고는 매주 일요일이면 등산복을 차려입고는 변산을 누비고 다녔으며 여름방학이면 지리산을 비롯하여 오대산, 소백산, 설악산, 울릉도의 성인봉까지 버너나 코펠 하나도 없는 빈약하고 위험한 장비로 벌거벗은 산봉우리와 산골짝을 누비고 다녔었다. 당시만 하여도 산들의 대부분은 남벌로 인하여 나무가 없는 벌거숭이 민둥산이었다.
우리 회원 중에는 빨치산 출신이 4명이 있고 초기 조선공산당을 조직한 거물 김철수 선생이 함께하고 다니므로 이상한 눈으로 보는 사람들이 있었으며 실지로 부안읍내 박아무개는 이 모임을 좌경적 이념단체라며 정보기관에 제보하여 나와 몇 사람이 중앙정보부 부안 주재원으로부터 조사를 받기도 하였다. 그러나 당시 부안경찰서 정보과장 김아무개씨가 빨치산 출신이었는데, 우리 회장과는 호형호제하는 절친한 사이여서 이 모임이 그런 이념적인 모임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더 이상 문제되지는 않았다. 김아무개 정보과장은 고창 선운산 지역의 이름난 빨치산 유격대장으로 변산의 임아무개씨와 함께 당시 누구나 아는 이름난 분이었는데 체포된 후 전향하여 경찰로 특채된 분이다. 그 분의 두 딸이 내 제자였는데 이런 인연으로 큰딸 김아무개는 뒷날 우리 학교 가정과 교사로도 재직하였었다.
이 무렵 어느 일요일에 백산중고교의 정아무개 교장으로부터 점심 초대를 받은 일이 있는데 그 장소가 평교가 아닌 정읍 영원면 흔랑리 과수원이라 하여 나는 정 교장이 그 과수원을 매입하고 산악회 회원들에게 한턱 내는가보다고 생각하였었다. 이때 초대된 사람들이 부안산악회의 핵심 회원들 몇 사람이었는데 매우 성찬의 음식접대를 받았다. 회식이 거의 끝날 무렵에야 선배들이 정 교장과 주고받는 농반 진반의 축하말 속에서 본부인과 이혼하고 흔랑리 과수원집 빨치산 출신의 노처녀와 혼인한 잔치 음식임을 알게 되었다.
정 교장이 처자가 다 있는 40대 중반의 늦은 나이에 다소 낭만적인 불륜적인 사랑에 빠져 무리하게 이혼을 하고 재혼을 한 이 사건은 당시 부안에서 커다란 화제 거리요 비난하는 목소리도 있었다. 그 분이 강직한 성품으로 옳고 그름을 분명히 하여 온 덕망이 있는 교육자였는데 여러 명의 자녀를 두고 아무런 잘못도 없는 조강지처를 버리고 사랑에 빠진 것이라 하여 중년 교육자의 로맨스를 이해하려는 사람은 많지 않았었고 나 또한 이와 같은 그 분의 행의(行誼)에 실망한 것이 사실이다. 그런데도 그런 비난의 소리가 그 후 쉽게 가라앉은 것은 후처로 들어앉은 사모님의 고매한 인품과 부덕, 그리고 헌신적인 자녀들 사랑에 사람들이 감복하였기 때문인 것 같았다. 이 두 분의 결합을 비난하는 사람들 중에는 산에서 빨치산으로 있으면서부터 야합한 것으로 오해하는 분들이 많았는데 이는 전혀 그렇지 않다. 정 교장은 변산에서 빨치산 활동을 하다가 자기만의 비밀 아지트인 땅굴에서 생포된 것이고 사모님은 정읍의 빨치산으로 내장, 순창 등지를 전전하다가 체포되어 남원수용소에 있을 때 비로소 서로를 알게 되었고, 출소 후에도 중매인이 있어 사귀어 인연을 맺게 된 것이다.
정아무개 교장은 자신의 가정문제에 대하여 그의 자성록(自省錄)에서 “나의 어려운 인생역정 중 괴롭고 어려운 일들이 많지만 이 가정의 일이 어느 괴로움 못지 않게 괴로웠고, 지금도 그 여진은 나의 사상문제보다도 괴로운 문제며, 내 생명이 있는 한 끝없이 계속될 것이다.”고 술회하였다.
나는 정 교장을 가까이에서 모셔 본 일은 없지만 그 분이 살아온 험난했던 역정을 대충은 알고 있었기 때문에 마음속으로 존경하여 왔었다. 그런데 이 분이 돌아가시기 3년 전인 2002년 말 살아온 일생을 총 정리한 자성록(自省錄) <옳고 그름을 떠나서>를 출간하여 그 출판기념회가 그 인품만큼이나 성대하였는데 이때 내가 유일하게 축사를 하였었다. 나중에 들으니 축사 할 사람을 한 사람으로 제한하여 청하기로 하면서 사모님이 나를 추천하였다고 하니 뜻밖이었다. 또 그 후 2004년 3월 정 교장께서 주관하여 지운(遲耘) 선생 추모의 대비(大碑)를 백산고등학교 정문 앞에 세우고 제막을 할 때도 그 축사자로 나를 정한 일들을 돌이켜 보면 정 교장 내외분께서 나를 과하게 아껴주신 것인데도 나는 사교성도 없고 주변머리도 없어서 이에 부응하지 못하고 마음속으로만 존경하여 왔었다.
우리 부안산악회의 산행은 항시 조난의 위험성을 지니고 있었는데 그 이유는 리더인 김용술 회장의 무리한 강행군 때문이다. 설악산 대청봉에서 밤에 길을 잃고 새벽까지 헤맨 조난사고나 지리산의 종주등산 때 노고단에서 태풍으로 조난당한 일이며 지운 선생의 실족 추락사고 등이 모두 강행군으로 인한 사고였는데, 오랜 빨치산 생활에서 항시 쫓기는 행군이 몸에 배어 있어서 그런 것이 아닌가 싶었다. 그럼에도 우리는 리더의 지시에 충실히 따랐었는데 산생활의 경험이 많이 축적되어 있어서 산의 속성이나 산세 그리고 비상시의 대처방법에 능하였기 때문이기도 하였지만 회원들이 그 인품을 신뢰하고 따랐기 때문일 것이다. 지운 선생의 반야봉에서의 실족사고는 절벽이 높지는 않았지만 다행히 중간의 나무그루터기에 받혀져서 큰 부상이 아니었으나 그로 인하여 3개월 정도를 출입도 못하고 집에서 치료와 요양을 하였다. 이때 이 사고로 천왕봉 오르는 일정을 중단하고 뱀사골 덕동 반선리로 하산하여 단방약으로 소주와 계란을 어렵게 구하여 드시게 하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