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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십(70) 이레의 비밀
<단9:24~27>
24. 네 백성과 네 거룩한 성을 위하여 칠십 이레로 기한을 정하였나니 허물이 마치며 죄가 끝나며 죄악이 영속되며 영원한 의가 드러나며 이상과 예언이 응하며 또 지극히 거룩한 자들이 기름부음을 받으리라
25. 그러므로 너는 깨달아 알찌니라. 예루살렘을 중건하라는 영이 날 때부터 기름부음을 받은 자 곧 왕이 일어나기까지 일곱 이레와 육십 이 이레가 지날 것이요 그 때 곤란한 동안에 성이 중건되어 거리와 해자가 이룰 것이며,
26. 육십 이 이레 후에 기름부음을 받은 자가 끊어져 없어질 것이며 장차 한 왕의 백성이 와서 그 성읍과 성소를 훼파하려니와 그의 종말은 홍수에 엄몰됨 같을 것이며 또 끝까지 전쟁이 있으리니 황폐할 것이 작정되었느니라.
27. 그가 장차 많은 사람으로 더불어 한 이레 동안의 언약을 굳게 정하겠고 그가 그 이레의 절반에 제사와 예물을 금지할 것이며 또 잔포하여 미운 물건이 날개를 의지하여 설 것이며 또 이미 정한 종말까지 진노가 황폐케 하는 자에게 쏟아지리라 하였느니라.
통상적으로 칠십 이레 하면 남조 유다의 바벨론 포로에서 칠십년 만에 고토로 귀환한 것으로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실제 역사는 그렇지가 않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문자대로 490일이나 혹은 490년 만에 돌아온 것인가? 그도 맞지를 않는다. 신학자들은 맞지 않는 숫자에 매여 별별 추측을 해대며 여러 가지 이론들을 내놓고 있지만 모두 헛수고일 뿐이다.
심지어 세대주의 자들은 역사의 종말에 대한 표를 만들어 주님의 재림에 대한 예언을 해오고 있지만 매번마다 빗나갔다. 그리고 하는 변명은 주의 재림이 무엇, 무엇 때문에 연기 되었단다... (참 뻔뻔한 후안무치의 행위이다.) 이 70 이레와 맞물려서 천년왕국의 실행에 대한 이론이 일부 종파의 기독교계에서 강하게 제기되고 있는 현실이다. 그러나 모두가 하나님의 구원계획을 몰라서 빚어내는 촌극이다.
성경을 역사로 보면 종교인이 된다. 복음은 모두 내게 적용되어야 생명이 된다. 주님의 탄생- 죽고 장사됨과 부활- 승천과 재림은 역사로만 알 사항이 아니라, 모두 내 안에서 일어나는 영적인 변화와 현상들로 붙잡아야 한다. 그래서 주님의 재림은 누구에게는 이미 이루어졌지만, 누구들에게는 아직 미완료 사건이다. 이것이 기이한 비밀이다. 아직도 공중 하늘을 쳐다보며 숫자를 헤아리는 자들은 장담컨대, 영원히 재림을 맞이하지 못하고 망할 것이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서 70이레를 풀어보자. 참고로 바벨론 포로와 귀환의 역사를 잠시 알아보자.
* 바벨론 포로는 4차에 걸쳐 진행됨(BC.606, 597, 586, 581)
- 그 중에서 성전이 파괴되며 시드기야 왕이 포로된 시기가 586년
* 귀환은 3차에 걸쳐 진행
-1차: BC. 536년 스룹바벨 인도로 약 5만여명 귀환.
-2차: BC. 458년 에스라와 1,754명 귀환
-3차: BC. 445년 느헤미아가 유대 총독 자격으로 귀환.
위에서 어느 조합을 하더라도 70년 만에 돌아온 기간이 성립되지 않는다. 그런데 성전이 파괴된 586년을 기점으로 하여 1차 귀환을 계상하면 어떤 영감이 떠오른다. 즉, 586-536=50년이다. 바벨론 포로에서의 귀환은 50년 만에 온 것이다. 그렇다면 50년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희년이다. 옛 성전이 무너지고 새로운 스룹바벨 성전이 세워지는 시기를 희년으로 보라는 하나님의 의도이다. 자신 안에 성전의 지대가 놓여지는 것이 희년이다.
좀 더 살펴보자. 그런데 이 성전지대가 놓여지고 나서 사마리아 인들의 방해로 공사가 중단된다. 그리고 약 17년 경과후 공사가 재개되어 4년여 만에 성전 재건이 완료된다. 그 때가 516년이다. 586-516년=70년... 그렇다! 옛 성전이 끝나고 새 성전이 완성되는 시기를 하나님은 70으로 계산하신 것이다.
이것이 새 성전이요 스룹바벨 성전이다. 스룹바벨 성전은 심령 성전이다. 자신 안에서 율법 종교의 솔로몬 옛 성전이 무너져야 참 성전인 주님의 전이 세워지는 것이다. 이것이 구원의 완성이다. 이러한 이치를 칠십이레로 설명하시고자 하나님은 역사를 들어서 비밀리에 구원의 원리를 감추어 놓으셨다.
70 이레는 단순히 바벨론 포로에서의 귀환한 기한 70년이 아니고, 구원의 과정임을 나타내기 위해 다니엘서에서는 3단계로 나누어 설명하셨다. 7이레, 62이레, 1이레라고 한다. 이러다보니 하나님의 구원의 목적을 아는 자들에게는 더더욱 밝아졌지만, 구원의 의미를 모르는 자들에게는 더 오리무중으로 빠져드는 말씀이 되었다. (그러나 이것이 하나님의 경영인 것을 어찌 알랴?)
이 3단계를 이해하는 열쇠가 이레의 의미이다. 이레(7)를 시간의 개념으로 보아서는 답이 없다. 함정이다. 이레는 원어로 '샤부아'라고 해서 칠칠절(맥추절, 추수, 오순절)을 말한다. 이렇게 이해하고 다시 3단계를 풀어보자.
-7이레: 완전한(7) 칠칠절(추수)
-62이레 : 탈색(6)되어 탈바꿈(2) 되는 칠칠절(추수)
-1이레: 하나가 되는 칠칠절(추수)
이정도 되면 하나님의 영감이 있는 분들은 대충 짐작이 갈 것이다. 이제는 위의 본문을 통해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24절에서는 70이레의 분명한 목적을 명시하셨다.
* 누구와 누구를 위한 기한인가? 네 백성은 누구이고 네 거룩한 성은 누구일까?
=>그때나 지금이나 진리의 자녀들이다. 즉 부르심을 입고 거기서 택정함을 입은 자들이다.
* 이들에게 어떠한 일들이 발생하나?(70이레의 종합적인 목적을 명시함)
=>놀랍고도 기이한 최고, 최상의 영생 복락이 주어진다, 즉, 허물이 마치며 죄가 끝나며 죄악이 영속되며 영원한 의가 드러나며 이상과 예언이 응하며 또 지극히 거룩한 자들이 기름부음을 받으리라(구원의 완성이다)
이것은 창1장에서의 7째 날에 해당되는 자로서, 주의 사자(천사)요, 일곡된 자요, 안식일에 들어간 자를 지칭한다. 여기서 거룩한 자들(복수)에게 기름부음이란 오순절 성령을 말한다. 기름부음이란 성령의 일하심이다. 사실 이러한 성령의 역사는 첫째 날부터 매 날에 있어 왔다. 그렇다. 성령의 역사가 없이 어떻게 빛 비침 있었겠으며, 성령의 역사가 없이 어찌 죽은 자들에게 복음의 소리가 들리겠는가? 매 단계마다 성령의 바람은 역사하였지만, 오순절의 성령은 육체와 정과 욕심이 처리된 자들에게 임하여 주의 영과 하나 되는 사건을 말한다.
-25절 부터는 3단계를 구분하여 설명하고 있다.
* 예루살렘 중건 령은 파샤국의 고레스가 내린 칙령이다. 그는 하나님의 종이다. 즉, 하나님의 명령이다. 첫째 날부터 5째 날의 사람들은 모두 처음 성전이 깨어진 상태이다(마귀에 의해 더럽혀진 상태). 그들은 어서 빨리 새로운 심령성전(스룹바벨 성전으로 비유된)을 세워야 한다. 고레스의 칙령(성전 재건)이란 하나님의 소원성에 대한 비유이다.
* 기름부음 받은 왕(단수)이 일어나기까지 일곱이레다.
=> 그리스도 예수를 말한다. 주님은 어디서 태어나시는가? 여자에게서 나시고 율법 아래에서 나신다. 마리아라는 모반자의 태에서 나시며, 베들레헴이라는 떡집(혹은 싸우는 집)에서 출생하신다. 일곱이레-즉, 완전한 칠칠절이란 영의 구속을 의미한다. 거듭남이다. 오랜 광야교회의 여정인 42단계를 거쳐서 가나안 땅에 들어온 것이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온 것이다. 몽학선생 밑에서의 종노릇을 벗고 믿음의 주인에게 회귀한 것이다.
* 육십이 이레 동안의 역사는 곤란한 중에 성이 중건되고 거리와 해자가 이루어진다.
=> 계22장에서의 완성된 거룩한 성 안에는 성전과 성이 하나됨이라고 분명히 밝히고 있다. 성전 지대가 놓여졌다고 끝난 것이 아니다. 거듭남이 완성이 아니라는 말이다. 혼의 구원이 이루어져야 한다. 진리의 영으로 거듭나면 대 환란이 일어난다(마24:21). 창세로부터 전에도 없고 후에도 없을 환란이다. 말씀에 대한 환란을 말하는 것이다.
지금까지 교리로 알고 있던 말씀들이 반대로 뒤집혀지는 때이다. 해(하나님에 대한 관념)가 총담같이 검어지고 달(교회관)이 핏빛으로 바뀐다. 하늘의 별들이(목사) 땅에 떨어진다. 너무도 혼탁한 미혹의 영들이 강하게 역사하니까 여기서도 수많은 자들이 낙오하고 만다. 그러나 들을 귀가 있는 자들이 복이 있다. 소수의 택자 만이 진리를 고수하는 좁은 길로 견지하게 된다. 밭에 있던 두 사람 중 하나는 데려감을 당하고 하나는 남겨진다. 데려감을 받은 자는 진리를 따르는 자이다. 남겨진 자는 심판이다.
이렇게 택하심을 받은 자들은 진리의 사랑을 받아 은혜로 지켜주심을 따라, 독수리의 날개로 업혀져서 피난처로 도망간다. 광야 자기의 처소에서 1260일 혹은 한때, 두 때, 반 때가 지나간다(계12). 1260일이나 3년 반이나 한때, 두 때, 반 때나 모두 같은 말이다. 제자들이 주님의 보호 아래서 3년 반 동안 양육 받듯이 모든 택함을 입은 자들이 겪게 되는 과정을 설명하고 있다. 양육을 통해 빛과 어둠을 분명히 구분하는 장성한 자로 자라났다. 거리와 해자(방호벽)가 조성된 것이다.
* (26절) 62이레 후에 기름부음 자가 끊어져 없어지고, 성소와 성읍이 훼파됨.
=> 역사적으로 주님은 공생에 시작 후 삼년 반 만에 십자가에서 처형당하신다. 주님이 곧 성소요 성읍이시다. 그림자 격인 건물 성전인 스룹바벨 성전은 BC.171경에 시리아의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에 의해, AD70년에는 로마의 티토스에 의해 두 번 파괴된다. 두 번은 확증을 의미한다. 역사는 그림자와 모형이요, 영적인 것은 실제다. 주님께 일어난 것은 택자에게도 반드시 실현되어야 한다.
거듭난 후에, 자신의 영안에 오신 그리스도의 영을 힘입어 자신의 옛사람이 처리되는 때가 있다. 여섯 째 날이 마감되고 일곱째 날로 진입하는 시기이다. 육체와 함께 정과욕심이 십자가에 못 박히는 때이다. 육이 죽으면 그는 이제 완전한 부활의 사람이 된다. 주님의 사자요 추수꾼이다. 그러나 육신의 목숨은 붙어있다. 살아있으면서 죽어있는 자다. 육신의 모든 것이 후패되는 시기이다. 그것들에 가치를 두지 않는 삶을 말한다.
그래서 롬8장 말씀처럼 영의 생각으로 육의 생각을 다스리는 자이다. 이것을 천년(본성)을 왕노릇(다스림)한다고 표현한다. 그러나 여기서도 실족할 수가 있으니 조심해야 한다. 다윗의 밧세바 사건이 이 상태에서 빚어진 넘어짐이었다. 이때의 방심과 범죄는 추호도 용서가 없다 그래서 일곱째 날의 사람은 공의의 시간을 살아가는 것이다. 책임과 의무를 가진 하나님 나라의 공직자이기 때문이다.
* (27절) 그가 한 이레의 언약을 정하고, 그 이레의 절반에 제사와 예물을 금지할 것임.
=> 마21장에서 나귀타고 예루살렘 성을 입성한 이후부터는, 그동안 온유하시던 주님이 완전히 달라지신다. 성전에서 매매하는 자들을 내어 쫓으시며 돈 바꾸는 자들의 상과 비둘기 파는 자들의 상을 둘러엎으신다. 그리고 23장에서는 화 있을진저! 바리새인과 외식하는 서기관들아! 하며(7번이나) 질타하셨다. '화 있을진저'는 이 '지옥 갈 놈들아!'이다. 엄청난 욕이다.
이렇게 주님은 스스로 십자가를 택하신 것이다. 주님의 삼년 반의 사역의 결산이다. 종교의식적인 제사와 예물을 금지하시고, 하나님은 영이시니 영 안에서 실제의 삶으로(신령과 진리로) 예배를 드리라는 주문이셨다. 그러나 누가 들을 귀가 있어 주님의 호소를 듣겠는가? 로마의 티토스에 의해 헤롯 성전마저 돌 위에 돌 하나도 남지 않고 파괴되었지만, 사단은 광명의 천사가 되어 지금도 거짓 하나님을 전하고 있다. 악한 자의 아들들(신부와 목사들)이 사단의 종들이 아닌가?
이들이 미운 물건이다. 신학교를 나와 안수를 받으면 3권이 주어진다. 강도권, 안수권, 축복권이다. 이것이 날개이다. 날개란 권세이다. 자격증이다. 폭포수처럼 쏟아지는 말씀의 홍수를 먹으면 살겠는가? 아니다. 모두 죽어간다. 갈증난 사람에게 바닷물을 먹이는 것과 같다. 마실수록 더 빠르게 죽어간다. 마시는 물이 애굽의 하숫물이요, 바벨론의 유브라테스 강물이다. 여기서 빠져 나오는 자만 생명을 보존할 수가 있다. 그러나 어려운 일이다. 너무도 달콤함에 맛 들어 있기 때문이다.
* 한 이레는 주님과 한 영이 되는 때이다.
한 이레의 절반인 전 삼년 반은 거듭나서 혼이 구원을 이루는 때라고 이미 설명한 바 있다. 나머지 후 삼년 반은 내 영안에 오신 주님과 하나 되어 사역을 하는 때이다. 사도행전의 오순절에 능력의 성령을 받아 복음의 제사장 직임을 수행하는 때이다. 사도행전부터 서신서에 해당되는 때이며 일곱째 날의 사람들이다. 그러므로 이 한 이레는 일곱 날 중에서 가장 중요한 시기이다. 한 이레는 여섯째 날과 일곱째 날로 엮여져 있다. 중요한 것은 여섯째 날에 잘 양육 받아야 일곱째 날로 나아갈 수 있다는 것이다.
많은 사람이 여섯째 날에서도 머물다가 낙오한다. 가롯유다가 대표주자이다. 데마도 마찬가지이다. 진리를 듣지만 지식과 관념으로만 치부하고, 실제가 없는 신앙을 추구한다면 그렇게 될 것이다. 십자가를 두려워하거나 외면하는 결과이다. 아는 것과 믿는 것이 화합되어야 생명이라는 실제가 출산된다. 참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제를 증명하는 삶이다. 그래서 행함이 없이 현실과 타협하고 안주하는 것을 죽은 믿음이라고 한다.
주님과 하나됨의 실제는 무엇인가? 사랑의 화신이 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본질이 사랑이다. 만일 하나님에게서 사랑을 빼면 무엇이 남을까? 낫띵이다. 하나님은 사랑의 뭉텅거리이시다. 하나님은 사랑의 결정체이다. 만유를 보면 알수있지 않은가? 모든 곳에 사랑이 스며져 있다. 그 분이 사랑이시기에 그분의 호흡이 미치는 곳마다 사랑이 감지된다. 그래서 하나님은 만유이시다. 만유를 사랑으로 건설하셨다.
그런데 '사랑해요~'하고, 말로라야 무슨 일인들 못하랴? 말로 하나님을 죽기까지 사랑한다고, 그리고 이웃을 사랑한다고 베드로처럼 맹세도 할 수 있다. 신앙의 실제가 없는 것은 허풍이요, 스스로에 대한 기만이다. 환상 속에서 사는 자이다. 하루는 부자 청년이 찾아 왔다. 영생에 취하는 방법에 대한 질문을 했다. 모세의 율법도 다 지켰노라고 자랑스럽게 답했다. 주님의 말씀은 단호하시다. 그렇다면 네 재물을 팔아 이웃에게 나누어주고 나를 따르라! (청년은 돌아서 갔다!). 그는 율법이 곧 사랑임을 몰랐다.
우리의 신앙의 목적지는 어디인가? 내가 십자가에서 죽었다는 말의 진의는 무엇인가? 사랑의 행위자가 되라는 말이다. 이것이 열매다. 이것이 주님과 한 영된 증거이다. 하나님과 하나됨을 무엇으로 증명할 것인가? 지식인가? 지위인가? 성경해석인가? 거룩과 온전함의 증거도 마찬가지이다. 사랑하지 못하는 이유는 언제나 내가 살아 있기 때문이다. 내 아집과 내 생각과 내 주장과 나의 자아의식이, 바로 옆 사람을 포용하기는커녕 판단과 무시함으로 나타난다. 선악과의 독이다.
참 사랑은 기술이다. 저절로 되는 감정과는 다르다. 남녀가 사랑해서 결혼하는가? 아니다. 젊었을 때의 호르몬의 작용으로 눈이 멀어서 그것이 사랑인줄 착각해서 결혼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 호르몬의 약발이 다 떨어지면 본전이 생각나서 자기 이익을 위해 타를 핍박한다. 이것이 부부싸움의 원인이다. 부부싸움은 극도의 이기심에서 나오는 짐승 같은 본성이다. 피 튀기는 싸움을 해본 적이 있으신가?...가장 가까운 이웃은 부부관계다. 이것도 제대로 못하면서 다른 이웃을 사랑한다면 거짓이다.
그러므로 자신의 타고난 본성(자기만 아는 마귀의 속성)을 십자가에서 처리하고, 하늘의 본성으로 남편을 대하고 아내를 대하기 시작한다면, 이것이 참 사랑에 대한 본질을 회복한 자이다. 어려운가? 그렇다면 시험삼아 10번이라는 숫자를 목표로 죽음을 시도해 보자. 듣기 힘든 언어적 폭력도 좋다. 핍박도 좋다. 무시하고 조롱해도 좋다. 나는 죽은 자인데, 무슨 대응이 있을 수 있는가?
원수를 내가 갚지 말고 주님께 맡기자. 원수에게 잘해주는 것이 그의 머리에 숯불을 얹는 것과 같다. 갈릴리 바닷가에서 주님은 배신자 베드로의 머리에 3번이나 사랑의 숯불로 지져 버렸다. 왜 나를 배반하고 심지어는 저주까지 했느냐고 따져 묻지 않으셨다. 오히려 그를 믿고 사명을 주셨다. 내 양을 먹이라, 내 양을 쳐라. 내 양을 먹이라... 베드로는 여기서 뻗어 버렸다. 이것이 십자가를 통과한 분의 영이다.
그렇게 해서 베드로가 변했듯이 나도 변할 것이고, 내가 변하면 나의 원수도 급기야 변할 것이다. 이것이 진리이다. 십자가는 구호가 아니라 실제가 있어야 한다. 십자가는 내가 죽어 타를 살리는 생명의 승화이다. 그래서 살려주는 영이다.
이것이 70이레의 성취이다. 70은 말 그대로 완전한(7) 부요함(10)이다. 어디 한군데도 부족함이나 결핍이 없다. 장광고가 반듯한 그리스도의 신성한 인격체이다. 하나님의 형상 그대로이다. 그를 이름하여 144 규빗(모친/본질)이라고 한다. 혹은 144 천이라고도 한다. 천도 규빗도 하나님의 본성을 의미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