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7년 전북남원 출생
1956년 전주여자고등학교 졸업
1956년 출가
1963년 원광대 원불교학과 수료
1969년 동국대 대학원 불교철학과 졸업
1968년∼81년 사직교당, 원평교당, 우이동 수도원 교무
1994년 원불교 평양교구장
1996년 원불교 서울사무소장
2000년 청수나눔실천회 이사장
2001년 학교법인 영산성지학원 이사장
2003년 학교법인 전인학원 이사장
현재 원불교 강남교당 교무
어머니라는 단어보다 박청수 교무를 더 잘 설명하는 말은 없다. 50개가 넘는 나라를 다니며 많은 이웃과 어린이들을 챙기고 보듬지만 정작 자신을 위해서는 아끼고 또 아낀다. 민족 종교 원불교 강남 교당의 박청수 교무는 국내외를 가리지 않고 그를 필요로 하는 곳엔 어디든 달려간다. 봄볕같이 따뜻하고 여유로운 미소를 가진 박 교무. 봄비 내리는 아침 양재동 원불교 강남교당에서 '종교의 밑천을 실천'이라고 말하는 박청수 교무를 만났다.
(현)재 원불교 평양교구장을 맡고 있는 박 교무는 룡천 폭발사고는 정말 유감스러운 일이라는 말로 운을 떼었다. 하지만 이런 일을 기연으로 해서 온 겨레가 한 마음으로 뜨거운 만남을 가졌으면 한다고 전한다. "이번 룡천 사고는 분명 안 좋은 일이었지만, 좋은 결말을 맺을 것입니다." 내 동포에 대한 연민의 정을 확인 할 수 있는 사례로 현재의 우리 모습을 설명해준다.
"아무리 마음이 커도 한 걸음에 갈 수 없는 것이 남북의 현실이지만 경의선과 개성 공단 등 남북간의 교류와 협력의 모습을 보면 그래도 많이 가까워졌다고 생각합니다."
박 교무가 북한을 돕기 시작한 것은 1995년 9월 15일 적십자를 통해서였다. 당시 북한의 큰물 피해를 돕기 위해 대한적십자 창구를 통해 성금을 보낸 제1호다. 자꾸 돕겠다는 박 교무의 의지를 알고 있던 통일원(현 통일부)에서 창구가 열리자마자 오히려 박 교무에게 연락을 해온 것.
박 교무가 지금까지 북한에 보낸 물건만도 아홉 컨테이너에 이른다. 식량에서 비료, 의약품, 어린이 분유 등 종류도 헤아려지지 않는다. 박 교무는 그 중에서 가장 보람 있던 일로 20만개의 생리대를 만들어 보낸 것을 꼽는다. 어머니의 배려의 마음이다.
하지만 교무는 "그래도 아직 마음이 안 놓인다. 더 도와야 한다."고 말한다. 창밖에 내리는 봄비를 보고 우리 온 국민이 봄비 같은 촉촉하게 한 방울씩 스며드는 사랑을 해야 한다고 말한다. 북한과 같이 특수한 정책을 펴는 나라에 '상호주의, 퍼주기'를 운운하며, 통일을 은근히 바라지 않는 세력들이 있어 실망을 했다며 박 교무는 사랑, 사랑을 강조했다.
박 교무의 사랑은 한반도 전체를 아우르고 세계로 뻗어왔다. 양재동 강남교당 완공 이후 세계봉사를 위한 험난하고 외로운 사랑이 본격화되었다. 세계가 한 집안이라는 세계주의를 지향하는 원불교. 박교무는 이러한 세계주의를 무아봉공(無我奉公)할 때 이루어진다고 말한다.
전 세계에 은혜를 심는 박 교무. "딱한 사람을 만나면 가슴이 아프고 그 응어리를 풀지 않으면 못 견디게 되는 성미"라서 계속해서 은혜를 심게 된다고 말한다. 실제로 그는 무슨 일을 추진하면서 애를 태울 때는 임신부처럼 배가 불러오고 옆구리가 터질 것만 같은 증세에 시달리다가 일을 끝내고 나면 거짓말처럼 낫는다고 한다.
1987년 인도여행 중에 인도 노숙자들의 처절한 삶을 보고 돕기 시작한 것을 세계봉사의 시작으로 현재 그녀는 전 세계를 상대로 하는 사랑과의 전쟁을 계속하고 있다. IMF 이후 주위에서 가난에 갇힌 사람들이 더 자주 보여 너무나 괴롭다고 말하는 박 교무는 빨리 이런 이들을 도와 해방되었으면 좋겠다며 웃는다.
많은 사람들이 그런 일을 하기 위해 어떻게 모금하느냐 묻는데 아직 한번도 모금을 해 본적이 없다. "우리는 후원의 밤을 해본 적도 없고 지로 용지조차 없어요. 돕기 모임조직도 심지어는 사무실도 그리고 회의도 없지요. 신현대라는 분이 긴 세월 52개국을 동행하고 제가 하는 일을 뒷바라지하고 있지요."
(그)는 정말 직감적으로 남을 돕는다. 언제나 회의하고 고민했으면 아마도 이런 결과들을 얻지 못했을 것이다. 빨리 도우려는 마음으로 바로 시작하고 돕는 과정에서 문제를 해결한다.
세계 52개국을 돕는데, 그 동안 소요된 돈만 해도 57억이 넘는다.
어떤 사람들은 어떻게 여자의 몸으로 그런 일을 할 수 있었냐고 묻지만 연민의 정을 못 이기는 여자이기 때문에 할 수 있는 일라고 말한다. 물론 성 차별없이 교역자 교무가 될 수 있는 원불교 인이었던 것이 큰 배경이 되었다고 박 교무는 말한다.
또한 그녀는 "누군가를 돕는 것은 결국 나를 자유롭게 하는 것입니다. 내가 하는 일에 대해 반대하거나 불평하지 않고 묵묵히 따르고 도와준 교도들에게 감사합니다."라고 덧붙인다.
박청수 교무, 그녀는 원불교인으로 자라 사랑을 베풀도록 키워졌다. 독실한 원불교 신자인 어머니의 신앙심에 감동을 받으며 성장했다. "시집, 그까짓 시집은 뭣 하러 갈 것이냐, 다른 길이 있는지 모르면 여자로 태어나서 시집을 안 갈 도리가 없지만, 더 좋은 길이 있는데 뭣 하러 시집을 갈 것이냐? 교무가 되어 기왕이면 한평생 많은 사람을 위해 큰살림을 하거라"며 지금의 박 교무의 모습을 위해 노력한 어머니가 있었다.
어머니는 시집가지 않을 딸을 위해 계절마다 시집가서 입을 옷을 미리 해 입혔다. 또한 술 담그는 법, 음식 만들기, 엿 만드는 법 등을 가르치며 '남의 수고'를 알아야 한다고 가르쳤다. 또한 교무가 되려면 노래도 잘 해야 한다며 잠을 깨워 발성연습을 시켰다고 한다. 현재 어머니 김영순 여사는 박 교무와 함께 양재동 강남교당에 살고 계신다.
그는 한 집안의 작은 살림보다는 큰 살림을 하라는 어머니 말씀과 나라 안 보다는 넓은 세상에서 일하라는 정산 종사의 법문을 삶의 나침반 삼아 현재까지 왔다.
돕고 싶은데 돕지 못하면 몸에 기가 막혀서 헛배가 불러오니 어쩔 수 없는 봉사자가 그의 몫인지도 모른다. "모든 일을 혼자서 결심하고 어느 누구와도 의논없이 하기 때문에 그 일을 다 이룰 때까지 그 부담은 고스란히 내 삶의 무게가 됩니다. 빨리 그들을 돕고 해방되어야 저도 편하죠. 직접 보고 들은 문제들을 풀지 못하면 힘듭니다."
(세)인들이 걱정하는 내 집, 내 몸에만 한정된 걱정이 박청수 교무는 전 세계적으로 고민하고 풀어준다. 히말라야 라다크에서 자식과 헤어진 엄마와 아이들을 보고, 그 곳에 학교를 세웠다. "부모는 자식에게 주고 싶은 사랑을 줘야 하고 자식은 그 사랑을 받아야 합니다. 사랑이 아니라 눈치로 자란 아이들이 어떻게 되겠습니까?" 라고 오히려 되묻는다. 처음부터 교육사업같은 큰 생각이 아니라 그런 작은 생각에서 시작하게 된 사업은 결국교육사업으로 이어지게 된 것이다.
그는 히말라야 라다크에 1억을 보내 마하보디 불교기숙사를 지었다. 지금 이 학교에는 300명이 넘는 학생들이 다니고 있다.
남을 위해 좋은 일하는 박 교무이지만 정작 자신은 오히려 그들이 박 교무의 삶을 가꾸는 텃밭이 되며 때로는 넓은 경작지도 되어 삶의 의미를 충족해 주고 성취감과 보람까지 안겨주는 고마운 인연들이라 말한다.
하지만 이렇게 봉사를 할 수 있는 것은 박 교무, 박 교무를 믿어주는 사람들의 덕분이라고 말한다. "저를 믿고 도와주는 사람들. 영수증조차 끊어주지 않는 저를 믿고 도와주는 사람들에게 감사드릴 뿐이죠."
하지만 그녀가 도울 곳은 끊이질 않는다. 인구보다 더 많은 지뢰가 묻혀있다는 캄보디아. 그곳에도 박 교무의 손길이 미친다. "누구라도 먼저 아는 사람이 그것을 알고 캐내야 합니다.
지뢰를 심는 데는 5달러지만 그것을 완전히 제거하는 데는 1000달러가 듭니다. 인간이 그렇게 어리석죠." 캄보디아에 묻힌 지뢰를 모두 제거하는 데는 300년이 걸린다고 한다. 어리석은 인간은 먼 후손까지 다치게 한다. 아프가니스탄 또한 지뢰 최다보유국이다. 그 곳에선 의족, 의수를 만들어 주었다. 팔이 없는 아낙네가 자기 자식을 안아 보지 못한다는 말을 듣고 의수를 만들었다.
1500명이 넘는 사람들에게 팔과 다리를 만들어 주었다.
(박) 교무는 그렇게 남들을 도우며 살아가기에 연하장 한 장 보낼 수 없다. 박 교무는 형식적인 말들로 서로의 안부를 묻기보다는 히말라야에 종합병원을 세우고 캄보디아에 지뢰도 제거하고 우물도 파고 고아원도 세웠다. 캄보디아에는 작년에 무료 병원을 세웠는데 18,000명이 다녀갔다.
"이렇게 많은 지원에 앞장서고 있는 박 교무이지만 사실 그의 한 달 생활비는 10만원이다. 모든 원고료와 출연료, 강연료 등은 고스란히 남을 돕는 데 쓰인다. 자신은 굶는 한이 있어도 자식 굶기는 어머니는 없다는 말이 있다. '세계의 어머니'는 그렇게 몸을 아껴 자식들을 위하고 있었다.
박 교무는 세계 오지를 돌면서 누구보다 힘든 이들의 모습을 보아왔지만 내일에 대한 긍정으로 차있었다.
"17대 총선 이전엔 누구도 보기 싫은 뉴스를 많이 봐야 했어요. 관행이라 불리면서 오랫동안 해왔던 그런 일들이 이젠 좀 나아질 것으로 기대합니다. 시끄럽고 힘든 과정이지만 이런 것들을 끊어내는 과정이라고 생각합니다. 새 시대의 시작이죠. 좋아 질 것으로 기대합니다."
박 교무는 남북문제도 긍정적으로 전망했다. "통일이란 서로 왕래하며 길이 넓어지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보고 들어 알게 되면 무엇인가 해주고 싶어지죠. 이런 것들은 분명 통일을 위한 과정이라고 믿습니다."
양재동 원불교 강남교당 3층 히말라야 등에서 받은 선물 등이 가득한 테이블 위의 달력에는 스케줄이 빽빽하게 적혀있다. 너무 바쁘지 않은가라는 물음에 오히려 "내가 힘들어 보이나요" 라고 되묻는다. 그녀가 바빠야 더 많은 사람이 행복하고 그래야 박 교무도 행복한 웃음을 짓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