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년 1월 O일 : 마라톤 입문
4월 2일 : 첫 대회 참가 '제2회 전주군산마라톤 하프'
2002년 1월 12일 : 첫 풀코스대회 참가 '제1회 거제도마라톤'
2004년 11월7일 : 첫 서브-3 달성 '중앙일보마라톤'
....
그리고 무려 일년 반이 지났다.
고성, 전주, 중앙, 여수, 진안 무려 다섯번의 대회에서 갖가지 사연과 이유를 들어 그냥 '원천기술 보유자'로 머물러 있게 되었고...
문득 문득 떠오르는 악몽이 '유관장님의 전설'
다른건 다 배우고 본받아도 그것만은...
방법은 간단하다.
기초부터 다시~
처음 서브-3에 도전하는 마음처럼 모든 것을 리셋.
일단 운동시간부터 바뀌는데 지난 수년간 이어오던 새벽운동 패턴을 저녁운동 위주로 바꾼다.
수면부족으로 인한 피로누적을 피해보자는게 가장 큰 이유이고 혹한기에 충분한 워밍업 시간을 마련하기 위한 방편도 빼놓을 수 없는 이유.
그리고 주변의 동료들에 비해서 가장 취약한 점이 술자리가 잦다는 것과 시빗거리에 늘 휘말린다는 점.
이점에서는 도리가 없다.
그냥 도닦는 마음, 그 하나 밖엔...
길을 막고 못 뛰게 하는 사람이 있지 않는 한 나는 그냥 '나나 잘 할께요!'
본성은 바꾸지 못하겠지만 갈고 닦으면 뭔가는 변화가 있는 법인지 겨울을 지나는 동안 내가 생각해도 참 많이 달라졌다.
어리석은 자신을 수없이 반성하고 또 반성하고...
결국 문제는 모두다 나에게서 생기는 것이니...
'그저 나만 잘하면 된다!'
훈련이야 짜 놓은 스캐줄 대로 충실하게 이행하면 되는 것이니 오히려 별것이 없다.
주간 단위로 작성한 계획을 무난하게 소화해 냈다.
장거리훈련은 여수대회와 용담대회가 아주 훌륭하게 대체해 주었고~
작년 중앙대회 때처럼 집안문제, 생업문제가 돌발 악재로 작용하지 않아서 그나마 다행이고 모든 준비는 제대로 마쳐졌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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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일 오후3시 차편으로 상경, 숙소로 잡아 놓은 '비원 게스트하우스'에 몸을 눕힌다.
기대와는 달리 거의 여인숙 수준의 침실, 거기다가 옆방을 예약했던 강성노조(?) 런너들이 험악하게 싸우는 통에 분위기까지 쥑여준다.
하지만 남이사 그러든 말든 우리는 내일 뛸 걱정만 한다. 오직!
예상대로 밤새도록 꿈만 꾸다가 일어났지만 운기조식하며 가만~히 누워있었으니 차를 타고 새벽에 온것보다야 백번 낫고~
식당겸 부엌에서 챙겨온 찰밥에 국을 데워서 먹고 짊을 챙기는데 텔레비젼에서 황수관 박사 강의가 나오고 있다.
얼굴만 봐도 웃음이 절로 나오는 그분의 강의를 듣다보니 저절로 기분전환까지~
한파주의보가 내려서 살벌한 날씨인데 한바탕 웃고 나니 걱정근심이 한결 덜어진 느낌이 든다.
밤사이에 뒤척이며 수없이 짜본 계획은
5Km 21:00, 10Km 20:55, 15Km 20:50 (1:02:45), 20Km 20:45, half 1:27:55
25Km 20:50, 30Km 20:55 (2:05:15), 35Km 21:10, 40Km 21:20, Finish 09:30
[2:57:15]
하지만 생각을 하면 할수록 이 계획에 관해 자신감은 없어진다.
애초에 꿈꾸었던 기록은 52~3분대였기에 그것에 비하면 많이 늦춘 것임에도 불구하고 기온이 지나치게 차겁고 바람이 거세기 때문에 솔직히 서브-3 조차도 큰소리 칠 형편이 아니다.
'에구 어떡하나? 지난 겨울 그렇게 열심히 준비했는데...!'
광화문 대로엔 여느해처럼 수많은 인파가 북적이고 사람들의 열정이 넘친다.
하지만 그와는 대조적으로 기온은 너무도 차거워 장갑 낀 손이 시려워서 주체를 못할 지경이다.
지난 여수대회와 용담대회때 절실히 느꼈듯이 영하의 기온에서는 다소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보온을 해주는 것이 필요할 것 같아 긴 타이즈에 긴팔티셔츠 + 클럽런닝유니폼 + 폴라폴리스 조끼, 그리고 귀마개에 겨울 장갑까지 중무장을 한다.
(신발도 장고끝에 예전에 서브-3할때 신었던 '이봉주화'를 챙겨왔다)
A그룹 사람들의 복장은 대체적으로 상의는 긴팔이지만 아래는 숏츠 정도만 입었는데 남이야 그러든 말든 나는 좌우지간 따뜻하게 안전빵으로~
출발 직전에 오선수에게
"오늘, 역사가 새로 써져야 하는 거야! 반드시~!"
"..."
이것 참 큰일이다.
큰소리를 뻥뻥 치던 예전과는 달라도 너무 다른 모습을 보인다.
한술 더 떠서 살살 피해 달아나는 느낌까지...어허~
잃어버렸던 길섭을 간신히 찾아 쨈매주었는데 ....걱정...
8시 엘리트선수가 출발하고 6분 뒤에 A그룹의 출발신호가 떨어진다.
맨 처음 5Km가 관건인데...
어처구니가 없다.
21분 40초(공식 기록으론 21:34)
서브3 필요조건인 21:15 보다 얼마나 더 오버된거야? 휴~
인파속에서 떠밀려 가는 형국이라 거리표지를 보는 것도, 속도를 조절하는 것도 내맘대로 할 수 없다.
조금만 속도를 낼라 치면 영낙없이 앞사람 뒷꿈치를 건드리고 옆사람 뒷사람 팔꿈치에 어깨 밀치는 것은 다반사, 마치 트랙경기에서 몸싸움 하는 것 같다.
편하게 뛴것도 아니면서 초반 기록이 이렇게 형편없이 나오니 걱정이 태산같이 쌓인다.
서브-3 페이스메이커 풍선 두개도 이미 150여미터 쯤이나 멀어져 있다.
최소한 저것은 따라잡아야 되는데....
아무래도 오늘 일이 잘못 풀릴것 같다고 촉이 떨어지고 있는데 누군가 등을 탁! 치며 다정하게 다가온다.
"아니, 서장님!"
방서장님이 아주 반갑게 말을 건내시는데 반가운 마음은 똑같지만 지금 상황이 워낙 심각한지라 미주알 고주알 이야기를 나눌 형편이 못되고 외마디 소리 몇 마디만~
길이 꺾이고 드디어 청계천변으로 들어선다.
군데군데 맞바람이 심하게 몰아칠 때마다 주자들이 휘청이며 대열이 한바탕 소란이 인다.
10Km지점 쯤에서 김기풍 풍선(뒷 서브-3 페이스메이커)하고 거리가 많이 좁혀졌고 15Km지점 즈음에서는 하형태 풍선(앞 서브-3 페이스메이커)의 뒤를 바싹 따라갈 정도의 조건이 되었다. (1:02:27)
첫 구간에서 까먹은 것을 충분히 보충했으니 이제 서브-3에 관한 근심은 한풀 덜었다.
청계천을 달리는 동안 개천 가운데 남겨둔 '존치교각' 두개만 덜렁 보았을 뿐 아래를 내려다 볼 정신도 없고 도무지 뭐가 있는지 신경쓸 겨를도 없다.
잠시만 긴장을 늦추면 발이 걸리든 몸이 밀리든 난리가 나는 통이니...
20Km즈음부터는 다시 길이 넓어지고 예전 코스와 중복되는 것 같다.
이제 주자들을 추월하기는 한결 쉬워졌지만 섯불리 경솔하게 나서다간 맞바람에 된서리를 맞을 수 있기 때문에 눈치껏 재줏껏~
25Km까지는 계획보다 다소 당겨서 진행하고 있기에 안심이 되었는데 30Km구간에서 심한 맞바람에 상당히 시달리며 기록을 좀 까먹었다.
(2:05:29)
대열 전체가 똑같이 움직이고 있으니 어쩔수 없는 일이고...
20Km 무렵부터 간간히 눈에 띄던 이세형님과 완주형이 이 무렵에 매우 가까워졌다.
천만 다행인것이 우려했던 체력저하나 근육경련 등은 일어나지 않고 오히려 몸이 풀리는 기분이 든다.
30Km 급수대 이후에 하풍선을 뒤로 하고 본격적으로 대열을 거슬러 오르기 시작하는데 마침 뒷바람까지 솔솔~ 협조를 해준다.
32Km 즈음에서 완수형을 지나치며 화이팅을 외쳤는데 이 양반 성격이 꼭 예전 기영이성과 같은지 툭탁거리는 소리를 내며 순식간에 15미터 가량이나 앞으로 인터벌을 쏜다.
'아이구 형님 고마워!'
정말로 진심으로 고맙다는 생각이 든다.
한참 집중력이 떨어질만한 시기에 이렇게...
하지만 딱 두차례 그런 반복이 있은 뒤 골인할 때까지 완수형의 자취는 느낄수가 없다.
'뒷심 좋은 분이니까 바싹 뒤따라 오다가 골인지점 앞두고 또 한차례 뛰쳐 나가겠지!'
손쉽게 35Km지점에 이르렀고 곧이어 대망의 잠실대교로 올라선다.
여기에서 바람때문에 상당히 고전하리라고 각오를 단단히 했었는데 오히려 뒷바람이 거세게 불며 도와준다.
계속해서 대열을 앞지르며 수많은 주자들을 추월해 나간다.
지금 앞지르고 있는 이 주자들은 두말할 나위없이 대한민국 최고수들이 아닌가?
가슴이 뜨거워지고 울컥! 감정이 벅차오른다.
'나는...어릴때부터....어릴때부터...잘 하는게 달리기 밖에....'
'그래... 나는.... 달리는게 좋았어... 그냥 좋았어!'
'산아 해찬아! 아빠가 너희들에게 남겨줄 가장 큰 유산 하나를 지금 만들고 있다.'
'나중에 세월이 흘러 너희가 아빠만 해졌을때 지금 아빠의 이 모습을 기억해주기 바란다. 꼭!'
잠실대교 위에서 계속 그렇게 울컥거리며 발길을 재촉한다.
롯데월드가 나오고 이제 남은 거리는 5Km,
'오늘 확실하게 역사가 바뀐다!'
40Km지점이 나오고 마지막 급수대가 길게 이어져 있다.
여기에서야 비로소 폴라폴리스 조끼와 귀마개를 벗어 자원봉사자에게 건낸다.
안전빵 작전이 이제서야 해제된 셈이다.
마음껏 날뛰자!
이제 내 세상이다!
경기장 외문에 이르는 마지막 구간에서 맞바람이 몹시 거세다.
지칠대로 지친 주자들에게 너무도 가혹한 바람이지만 나에게는 그리 큰 위협이 되진 않는다.
'마음 먹기에 따라 이렇게 달라질 수가 .....!'
스타디움에 들어설때까지 완만한 오르막 양편으로 도열한 응원객들이 저마다 소리 높혀 화이팅을 외쳐주고 있다.
발에 밟히는 물컹한 느낌 또한 변함이 없고 ...
바깥쪽으로 속도를 높혀 피니쉬 아치를 향해 빨려 들어간다.
이 기분...아~이 기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