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墓 포천시 일동면 길명리(吉明里) 생이고개
✼ 戊戌(1958)에 정읍시 산내면 매죽리에 設壇하고 後孫 榮祚 撰碑文하다.
4) 配 陝川李氏 父 贊成事 德孫 祖 左僕射 存淳 曾祖 侍中 益瑞 外祖 樞密 茂松庾氏 垓
배 합천이씨 부 찬성사 덕손 조 좌복사 재순 증조 시중 익서 외조 추밀 무송유씨 해
出生年月日 未祥
5) 時享 五月 첫째주 日曜日(양력)
6) 子 四男 三女 長男 星吉
次男 郊
三男 玲
四男 安
長女 李公軾 次女 李克成
三女 崔洪儀(官 正尹)
☼ 충렬왕 33년(1307. 정미) 【국역 고려사: 세가, 2008. 8. 30. 경인문화사】
O 3월 신묘일. 전 왕(충선왕)이 태자(원나라 인종)의 지시에 따라, 왕유소·송방영·宋璘·한신·송균·김충의(金忠義)·최연(崔涓) 및 악행을 저지른 일당들을 체포해 자기 집에 수감하고, 왕을 ㉠경수사(慶壽寺)로 옮기게 하였다. 이로부터 왕은 실권 없는 허수아비가 되고, ㉡국정은 전 왕에게로 돌아갔다.
㉠ 경수사 : 원나라의 수도에 소재하던 원대(元代) 임제종(臨濟宗)의 본산으로서, 사경승(寫經僧)을 이끌고 원나라에 들어갔던 고려의 법상종 고승 홍진국존(弘眞國尊) 혜영(惠永)이 이곳에 머무른 적이 있었으며, 또한 충선왕이 유성황태후(裕聖皇太后)를 위하여 이 절에 대장경(大藏經)을 시납하기도 하였다.
㉡ 돌아갔다 : 충렬왕 말년 왕위계승전은 당시 원나라 제위계승전의 향배와 밀접한 관련을 갖고 있다. 충렬왕 33년(1307) 3월 26일경부터 충선왕은 왕유소 등 충렬왕 측근세력을 체포하고 충렬왕을 경수사에 유폐한 다음, 4월 9일에는 개가책동에 관여했던 서흥후 왕전(王琠)과 왕 측근세력을 주살함으로써 왕위 계승전에서 승리하고 있다. 이는 충선왕 지지 세력의 치밀한 대응과 3월 1일부터 시작된 원나라 제위 계승전에서 인종·흥성태후세력이 승리한 결과였다.
O 4월 갑진일. 충선왕의 귀국을 방해하고 계국대장공주를 서흥후 전에게 개가시키려한 죄로 귀국하여 실제로 정치를 맡고 있던 충선왕에 의하여 서흥후 왕전과 왕유소·송방영·宋璘·한신·송균·김충의·최연 등과 함께 원나라의 서울(大都)에서 처형되었다.
충렬왕 말년 왕위계승전은 당시 원나라 제위계승전의 향배와 밀접한 관련을 갖고 있다. 충렬왕 33년(1307) 3월 26일경부터 충선왕은 왕유소 등 충렬왕 측근세력을 체포하고 충렬왕을 경수사에 유폐한 다음, 4월 9일에는 개가책동에 관여했던 서흥후 왕전과 왕 측근세력을 주살함으로써 왕위 계승전에서 승리하고 있다. 이는 충선왕 지지세력의 치밀한 대응과 3월 1일부터 시작된 원나라 제위 계승전에서 인종·흥성태후세력이 승리한 결과였다. 1307년 원나라 무종(武宗)이 왕위에 오르는 데 공을 세운 충선왕이 귀국하여 실권을 잡자 송방영·왕유소 등과 함께 처형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