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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도로공사 산악팀과 함께 한 추억 |
회사가 창립된 지 벌써 장년의 나이인 40년이 되어 지나간 날을 회상하며 나의 직장생활 25년과 산악팀 창단의 활동에 대해서 쓰게 되어 감회가 새롭다.
처음 영업소라는 곳에 출근했을 때 일제 강점기 순사를 연상케 하는 모자를 쓰고 영업소에서 요금을 정산할 때 모습을 생각하면 지금도 빙그레 웃음이 나옴은 어쩔 수 없다.
25년 동안 근무하는 과정에서 존경했던 선배님, 그리고 동료들이 구조조정으로 인하여 떠나갈 때는 가슴 아픈 고통을 느끼기도 했고 새로운 직원이 배속될 때는 가르치는 재미 또한 쏠쏠했음을 부인할 수 없다. 대학생 동아리활동을 통해 산을 알았고 직장생활 속에서도 틈틈이 산에 대한 열정은 지속적 이였다. 산악인이면 누구나 더 높은 곳을 향하는 심정은 같을 것이다. 나는 더욱 그랬다. 그래서 산악인의 단체인 대한산악연맹과 학생산악연맹에 관심이 있었으며 80년대 후반부터 시작한 이 지역 히말라야등반 붐에 동참하고자 하는 마음을 항상 가지고 있었다.
산악운동은 나에게는 운명적이며 숙명적인 내용이 있었던 것만 같다. 왜냐하면 1989년 낭가파르밧 원정대에 선발된 대학후배가 히말라야를 간다고 도움을 청하러 왔을 때 나는 마치 그 일이 내일인 양 기뻐 어쩔 줄 몰랐고 후배에게 산악장비를 구입할 경비를 지원하고 그들의 등반이 성공하기를 손꼽아 기다렸으나, 후배는 정상공격 중에 “나는 할 수 있습니다.”라는 말 한마디를 남기고 히말라야 품으로 돌아가고 말았다.
그 후, 산에 대한 열정과 히말라야에 대한 고통의 추억들이 내 생활을 떠나지 않고 맴돌았으며 산에서 죽은 후배 생각에 나는 잠 못 이루는 날이 많았었다.
2년 후, 조난당했던 후배의 한을 달래고자 다시 낭가파르밧 원정을 추진하게 되었고 우리대원들의 마음과는 달리 원정은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당시 직장인으로서의 나의 위치 때문에 나는 원정에 참여할 수가 없었으며 한국도로공사에 전문산악실업팀이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시간은 덧없이 흘러 1996년에 낭가파르밧 등반에 대한 재도전의 지휘봉을 잡아달라는 후배와 동료들의 요청으로 힘들고 어려운 히말라야원정을 꾸리기로 마음을 먹었다. 막상 꾸리려고 하니 엄청난 경비와 일력이 우선 문제였고 잘 훈련된 대원의 필요성이 절실했다. 그 무렴 한국도로공사 호남본부에 근무했던 선배님께 부탁해서 호남본부와 학생산악연맹이 공동으로 주체하는 1997년 낭가파르밧 등반을 꾸리고자 했다. 처음에는 긍정적인 대답을 받아서 등반을 열심히 준비했다. 그런 와중에 급작스레 호남본부에서 회사의 사정으로 합동등반 추진이 어렵다는 통보를 받았고 당시 우리 대원과 나의 마음은 천 길 낭떠러지로 떨어지는 절망을 맛보아야만 했으며 피나게 훈련시켰던 원정 대장으로서 무책임과 생활 속에서 꿈꿔왔던 히말라야등반의 포기라는 것은 당시의 나로서는 상상할 수도 없었기에 나는 집을 팔아서라도 후배들의 약속을 지켜주려고 맘을 먹었었다. 그때 호남본부 선배님께서 한국도로공사의 노동조합과 함께 일을 해보면 어떠하겠냐는 제안해서 나는 기쁜 마음으로 계획서를 가지고 노동조합 간부들 앞에서 성심성의를 다해 브리핑했다.
여러 가지 어려운 환경과 여건 속에 이루어졌던 것이다
산악인의 도전정신과 더 높은 곳을 향하는 열정의 정신을 노동조합에 부합시켜 강한 조합으로 승화시키는 계기를 만들었고 산악인의 새로운 길을 열어 희망을 주는 정신을 승화시켜 도공 혼을 심는 계기가 되었다.
하늘이 돕고 나의 열정이 주변을 감동시키고 당시 노동조합 간부들의 트인 생각으로 우리는 한국도로공사이름으로 첫 원정대를 꾸리는 기쁨을 맛볼 수 있었다.
막상 히말라야 등반을 시작했을 때 생기는 크고 작은 어려움들이 우리에게 닥쳤지만 그 모든 것은 산에 대한 열정 하나로 극복해 갔으며 부족한 자금을 충당하기 위해서 이곳저곳 얼굴만 아는 선배님에게 그리고 후배들에게.. 자금조달을 위한 구걸을 조금도 부끄럼 없이 했었다.
막상 산에 도착해서 지휘를 시작하니 8천 미터가 넘는 봉우리의 웅장함과 등반의 어려움들은 내가 상상하는 이상의 것이었고 그 과정에서 겪는 대장으로서의 갈등과 고충은 말할 수 없을 정도였으며. 특히 한국도로공사 이름으로 꾸린 원정대가 무난히 성공해야 공기업으로서 이상과 전 국민에게 도로공사의 또 다른 이념을 보일 수 있다는 강박관념이 나를 계속 짓눌렀으며, 오직 성공해야만 된다는 생각으로 나는 내 스스로가 거칠어져 가고 있음을 보면서 히말라야 원정의 지휘가 얼마나 힘들고 고통스러운 여정인가를 다시 생각하곤 했었다.
대원들의 노력과 하늘이 도와 무사히 정상등정을 이루어냈을 때 그 기쁨은 이루 말 할 수 없었고, 1997년 6월 29일 한국도로공사 이름으로 간 첫 원정대의 등정 성공을 이뤄냈다는 안도감으로 나는 밤잠을 이루질 못했다.
세계 최초의 노동조합주관 원정의 성공은 우리나라는 물론이요 세계적인 이슈가 되기도 하였다
원정이 끝나고 나서 정상 등정한 김주형대원은 도로공사에 근무하게 됐음으로 우리는 실업팀을 만들 수 있는 근거가 싹트기 시작했었다. 그 후 1999년 대한산악연맹과 KBS합동으로 추진한 새천년 희망을 위한 칸첸충가 원정에 김주형대원이 참가하게 되고, 한국도로공사간부들의 현장 방문이 이루어지고 난 후에 한국도로공사 내에서도 실업산악팀이 창단된다면 도로공사홍보와 사기진작에도 도움이 될 것 같다는 생각과 한국산악발전에 핵심적인 역할에 도로공사가 중추의 역할을 담당할 수 있겠다는 의견들이 나오게 되면서 회사 내 산악실업팀의 창단 과정은 급물살을 타게 되었다.
당시노조위원장의 의식과 산악인의 도전정신과 경영진의 의지가 맞아 떨어져 2001년 산악 실업팀이 창단하게 되었다.
그런데 막상 창단시점에서 나는 철저히 배제가 되고 말았다. 배제된 이유와 과정은 지금도 베일 속에 싸여있지만 첫 출발한 원정대의 모양 상으로나 전력상으로 나의 도움이 필요했었다고 본다. 그러나 배제된 나의 아픔은 마음속에 묻어두고 첫 실업팀 창단이라는 기쁨 속에서 대한산악연맹 학생산악연맹 모두에게 창단식의 참석을 독려했으며 창단에 대한 기쁜 소식을 전국에 알리는데 열심히 노력했다. 그 이유는 첫 출발한 산악인의 정서를 잘 이해하지 못한 갈등으로 인해서 걸어보지도 못한 채 주저앉아야만 하는 고통을 감내해야할 용기가 내게는 없었다. 그 후 들리는 산악팀 내에 정서들로 원정이 실제적으로 꾸려지는 것이 힘들었던지 시샤팡마 등반을 앞두고 회사 모 처장님께서 다시 한 번 지휘봉을 잡아줬으면 좋겠다는 제안이 들어왔고 직장에 근무하면서 회사상사의 요청을 거절할 수도 없었기에 몇 가지 요구사항과 함께 나는 팀을 맡기로 했다.
시샤팡마 남벽에 한국 최초로 신 루트를 내는 책임을 맡게 되었고 그 등반준비로 나날이 바쁘게 살아야만 했다. 등반하는 도중에 베이스캠프에 격려를 왔던 격려 팀 중 한 노조간부는 우리가 등반하는 과정을 보더니 “그동안 산악팀에 대한 반대를 많이 했는데, 여기 와서 보니 짐승이나 해야 하겠구먼”하시면서 웃는 모습은 우리들 추억 속에 지금도 감동적으로 남아있다.
원정의 성공은 조직원들의 응집력과 실력 그리고 리더의 사심 없는 지휘만이 성공의 영광을 누릴 수가 있다. 만약에 이와 같은 여건이 성숙되지 않는 원정대의 결과는 항상 실패와 조난으로만 점철되어왔다. 그래서 대장은 혹독한 결정을 내릴 때도 많고 조직의 응집력을 향상시키기 위해 일상적으로 이해하기 힘든 행동을 할 때가 있다. 이 자리를 빌어서 그러한 부분에 대한 나의 오해와 미움을 씻어주시기를 간곡히 바란다.
격려팀들의 하산이 포터들의 스트라이크로 지연되면서 운 좋게도 2004년 5월 5일 한국 최초 8000m 신 루트 시사팡마 등정을 노사가 함께 즐길 수 있었으며 그날의 흥분된 분위기는 어려운 일을 해냈다는 자부심과 원정대를 꾸리는 과정에서 일어났던 크고 작은 많은 일들의 서운함과 뒤섞여 함께 얼싸안고 함성 과 눈물을 흘리며 우리 모두는 진한 행복감에 도취되었고 그때 그 길을 코리아하이웨이라고 명하였다.
호사다마라고 생각하고 인천공황에 귀국해서 등정에 참여했던 모든 대원들에게 겸손하며 회사 일에 최선을 다하라고 신신당부를 했던 것은 적어도 히말라야에 다니는 사람은 직장생활에서도 다른 사람보다도 더 열정적이고 모범적 태도를 보여야만 한다는 나의 생각 때문이었다.
시샤팡마등정 후 한국산악활동사에서 도로공사의 입지는 급격히 상승되었고 한국도로공사가 추구하는 보다 나은 회사발전과 일치하여 산악운동도 좀 더 어렵고 힘든 루트를 통해서 발전시키고자 노력을 했다.
당시 국내외적으로 로체남벽에 등반은 대단히 어렵다고 평가되었으며 한국산악회가 풀어야하는 절대 절명의 숙제라고 여겼기에 우리는 2004년 로체 남벽원정대를 출발시킬 수 있었다. 이 등반을 통해 한국등반사를 새로 쓰고 싶었고 이 등반이 성공적으로만 이뤄진다면 한국도로공사 산악팀은 산악역사상에 우뚝 서는 한 페이지를 장식하는 자격을 갖추게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원정대가 꾸려지는 과정에서 팀의 분열과 원정대 대원들의 등반에 대한 확신 부족, 생각보다도 어렵기만 한 루트, 원정대 대원들의 개인적인 생각과 행동들이 결국에 가서는 등반에 실패를 자초하고 말았다. 지나보면 잘 이끌어 내지 못한 나의 부덕함과 능력부족이 뼈저리고 포용하기 못한 나의 옹졸함이 크게만 다가온다. 당시 날씨 상황도 좋지 못해 계명대학교 원정대 3명이 조난을 당했어야만 했고, 우리원정대에 철수 시점에서 발생한 캠프1 붕괴사건 등은 우리도 적절하지 못한 판단과 고집에 의한 등반을 계속 했었더라면 조난의 위험에 대해서 자유롭지 못했을 거란 생각이 든다.
그 등반을 통해서 지혜, 포용력, 인내는 나의 생활 속에서 풍요롭게 싹터옴을 볼 때마다 오히려 로체남벽등반의 실패가 나에게는 커다란 가르침이 되었던 것 같다.
사람은 상처를 통해서 성장하고 상처받은 매화가 빨리 핀다는 말이 있듯이 로체 원정실패는 여러 가지 부작용과 억측 그리고 편견 오해들을 만들어 박정헌은 회사를 떠나게 되고, 실업팀은 존폐의 논란에 휩싸이게 되었다. 다행이 당시 회사의 임원들의 적극적인 후원에 힘입어 시대상황에 맞는 도로공사의 위상을 정립하고자 장애인과 함께하는 2007 에베레스트와 로체 동시등정 원정대를 발족할 수가 있었다. 등반 중에 사장님과 임직원이 베이스캠프에 방문해 주어 많은 다른 원정대들의 부러움을 한 몸에 받았으며 등반시작 후 5일 만인 5월4일(강연룡, 김미곤, 윤중현) 알파인 스타일로 로체 등정자 3명을 시즌 처음으로 만들어 냈을 때 한국도로공사 산악팀이 명실 공히 국내최고의 강팀이라는 사실을 알릴 수 있었다. 베이스캠프에 있는 박영석 허영호 등 수많은 외국 원정대들이 함께 했으며 그곳에서 한국도로공사원정대가 보여주었던 행위들은 정말 전위적인 등반의 형태였었다.
이어서 5월16일 장애인 김홍빈과 김미곤 윤중현 3명의 에베레스트 등정을 성공했을 때 우리의 마음은 하늘을 뛸 뜻이 기뻤으나 에베레스트 남서벽을 등반 중인 박영석원정대에서는 조난사고가 발생하여 2명의 뛰어난 등산가가 죽고 말았다. 조난당한 이현조군과 오희준군은 우리와 함께 베이스캠프 생활도 했으며 로체남벽훈련할 때 함께했던 대원들이라 상실의 고통은 우리팀 등정의 기쁨보다 훨씬 크고 힘들었다.
“기쁨도 눈물 근처에 있다.”
우리의 원정성공과 실패는 몸을 아끼지 않고 헌신적으로 등반에 임해주는 여러 대원들이 있었기에 가능했음을 다시 한 번 느낀다. 다행히 한국도로공사팀은 한명의 조난사고도 없이 이뤄낼 수 있었던 것은 우리 모두에게 필요했던 맑은 영혼과 열정 덕분이라고 생각한다.
회사 창립 40주년이 된 만큼 내 나이도 50이 훌쩍 넘었다. 회사에서 일하면서 부족하나마 산악활동을 통해서 회사의 긍지와 자부심을 전국에 알렸고 한국산악회가 지켜야 할 등로주의노선을 성실히 지켰으며 장애인과 함께하는 에베레스트 등반을 통해 한국도로공사의 따뜻한 마음이 전국에 알려지는 계기된 것은 그동안 말없이 지켜봐 주고 응원해주고 지원해 주었던 수많은 회사임원과 직원 여러분의 덕이라고 생각한다.
앞으로도 우리 회사는 수많은 도전을 받고 외부로부터 여러 가지 견제를 받고 있으므로 안정된 직장인으로서의 근무 여건과 상황은 예전만큼 좋지 못함을 요즘 우리는 통감하고 있다.
시대상황이 어렵고 국가경제적인 여건이 어려운 요즘 각 개인의 생활과 사회의 풍요로움을 위해서 공기업으로서 한국도로공사는 막힘없는 진취적인 행동을 보여줘야 할 때라고 본다.
힘들 때 국민들에게 용기와 희망을 주고 불우한 사람을 돌보아 더불어 함께 사는 사회를 만들어 갈 수 있는 마음의 여유를 가져야 하는 한국도로공사가 되어야한다고 본다.
우리의 존재는 비쳐주는 모습으로만 존재한다는 것을 다시 한 번 되새기며 글을 마치고 싶다.
첫댓글 "후배사랑" 이 한마디로 요약할 수 있을것 같습니다. 수십년 세월동안 이 지역과 한국 산악계에서 보여주셨던 선배님의 발자취는 저희 후배들에게 나아갈 바를 몸소 보여주셨다고 생각합니다. 자신의 모든 것을 던져 후학들을 위해 실천하신 용기와 땀방울을 후배들은 잊지 않을 것입니다. 현역에서 더욱 활발한 지도와 활동을 감히 부탁드리며 건승하시길 기원합니다.
님의 글을 통해 평생 배워야한다는 사실을 절감하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존경스럽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