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극명(李克明 1388~1454) 선략장군(宣略將軍) 호분위호군(虎賁衛護軍)이였으며 순충적덕보조공신(純忠積德補祚功臣) 정헌대부(正憲大夫) 병조판서(兵曹判書)에 증직되고 함평군(咸平君)에 봉(封)해졌다.
이 긍(李兢 1389~1433) 1433년 증 이조판서(吏曹判書), 공조판서(工曹判書)을 지냈다.
이종생(李從生 1423~1495) 이시애(李施愛)난의 평정으로 정충출기(精忠出氣) 적개공신(敵愾功臣)에 봉해지고 각도의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를 역임했으며, 가정대부(嘉靖大夫)로 한성부좌윤(漢城府左尹) 오위도총부부총관(五衛都摠府副摠管)의 벼슬을 지내고 함성군(咸城君)에 봉해 졌다. 병조판서(兵曹判書)에 증직되고 장양(壯讓)의 시호(諡號)를 받았으며 금남(錦南) 최부(崔簿)가 묘지(墓誌)를 지었다. 해동명신록(海東名臣錄)에 여섯 사람의 무인(武人) 중 두 번째로 올라있고 해동명장전(海東名將傳)에도 고려의 최영(崔瑩), 조선의 이지란(李之蘭), 어유소(漁有沼) 등과 함께 올라있다.
제하여 정언(正言)을 지냈으며 문집(文集)이 있다.
이숭운(李崇運 1729~?) 정조 갑진년(1786년)에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정언(正言) 사간원(司諫院 政6品)을 지냈다.
이유홍(李儒弘 1733~1761)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통정대부(通政大夫), 붕화부사(中和府使) 증좌승지(贈左承旨)를 지냈다.
이일운(李日運 1736~?) 정조 병과년(1796년)에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승지(承旨)를 지냈다.
이익운(李翼運 1738~?) 영조 을유년(1765년)에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사간원(司諫院)의 정언(正言)를 지내다 이인좌(李麟佐)의 역모시 참두상소(斬頭上疏)를 올리다 북청(北靑)으로 귀양 갖으나 영조의 특명으로 돌아왔으나 젊은 나이에 병사하였으며 필법(筆法)이 능하여 국왕(國王)이 극찬하였다.
이경운(李庚運 1745~1821) 영조 임인년(1782년)에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삼사(三司)의 가의대부(嘉義大夫), 참판(參判)을 지냈으며 봉조하(奉朝賀)에 봉(封)해 졌다.
이유수(李儒修 1746~?) 정조 계묘년(1783년)에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사간원(司諫院)의 사간(司諫)을 지냈으며 궁술(弓術)에 능하여 연중칠장(連中七場)하여 정조께서 호(號)를 칠발(七發)이라 하였다.
이유경(李儒敬 1747~1804)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선전관(宣傳官) 승지(承旨), 금위중군(禁衛中軍), 우포도대장(右捕盜大將), 삼도수군통제사(三道水軍統制使)을 거쳐 1799년 평안도 병마절도사(平安道 兵馬節度使)가 되었으며 국경 지역인 평안북도 창성군에 당아산성(當峨山城)을 700여보 증축했다.
이정운(李貞運 1747~1812) 정조(正祖) 을사(乙巳)(1809년)에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삼사(三司) 통정대부(通政大夫) 당상관(通政大夫 堂上官), 사간원 대사간(司諫院 大司諫)을 지냈으며 10권의 문집(文集)이 있다.
이유경(李儒慶 1748~1818) 영조 임진년(1772년)에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한림옥서의 도승지(都承旨), 참판(參判)을 지냈고 유고집(遺稿集)이 있다
이상훈(李尙勳 1956生) 대법관
이재원(李載沅 1958生) 제30대 법제처장
이재돈(李載敦 1941生) 해군사단장
이건주(李建周 1917生) 해양대학교총장
이계훈(李啓勳 1952生) 공군참모총장
이계철(李啓喆 1968生) 육군군수사령부 참모장
이종범(李鍾範 1970生) 야구선수
이재현(李栽賢 1937生) 40, 41대 무안군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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