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끌벅적한 발소리들이 정겹게 오고가던 광장은 본래의 색을 잃은 지 오래되었다. 우렁찬 소리를 내뱉던 가게들은 하나둘씩 문을 닫았고 남아있던 소수마저도 그들의 행패를 버티다 못해 스스로 문을 내리는 길을 택했다.
희망은, 없다. 일찍이 기대를 접은 그들을 포함해 간신히 버텨오던 인간들은 결국 최후로 들어서는 결정을 내렸다. 마족들이 점령한 이곳에, 카나반에, 세르딘에. 푸르렀던 에르나스에. 밝은 태양이 내리쬐는 일은 없을 거라고.
모든 걸 접고 숨을 죽였다. 그리고 망연자실한 채로 살아온지 몇 달이 지났다. 비스듬히 기운 고개가 무료하다는 듯 오후의 햇볕을 향해 까닥까닥 쏠린다. 산들바람에 흩날리는 부드러운 금발을 가만히 쓰다듬으며 이르카를 포근히 응시하던 따스한 입가가 나직이 열렸다. 얘, 이르카.
"왜요?"
지루하다는 표정에 뚱한 입술이 돌아올 걸 예상했다는 듯 그 입가로 살풋 웃음이 터졌다. 항상 턱을 괸 채로 연신 하품을 쏟는 이르카에게 그녀는 뭔가 활기를 불어 넣어주고 싶었다.
그랜드체이스, 세르딘 여왕과 카나반 여왕이 행방불명되면서 해체된 조직이지만 한때는 모든 이들의 선망의 대상이었으며 평화로운 세상을 위해 몸을 사리지 않았던 그들을, 그녀는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5년 전, 몸이 좋지 않아 꼬박꼬박 약을 챙겨 먹어야 했지만 사정이 여의치 않아 그러지 못하고 통증을 잊으려 막연히 거리를 거닐던 때가 있었다. 그때의 상황도 지금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정치는 이미 마족의 손아귀에 먹힌 지 오래였고, 두 나라를 지탱해오던 두 여왕은 왕좌에 앉아 허수아비처럼 그들이 하라는 대로 손을 움직였다. 당시만 해도 반항의 불길은 무척이나 거셌기에 마족들은 그들을 진압하기에 적합한 병력을 투입하면서, 한편으로는 이곳이 일어설 가능성은 없다는 절망을 심어주기 위해 희망과도 같았던 그랜드체이스를 그 안에 서있게 만들었다.
그리고 결국, 희망의 불씨였던 마지막 폭동이 진압되고 위풍당당한 마족들의 행진 행렬이 마을을 지나갔다. 모든 이들의 입에서 어두운 현실의 한숨만이 흐를 때도 그는 살기 위해 거리 끝에서 이를 악물었다. 모든 게 흐릿하고 뭐가 뭔지 분간되지 않는 저의 귀로 들려왔던 호통이 그녀는 아직까지 생생했다. 뭐라고 했는지,
'미개한 인간 주제에 감히...우리를 무시하는 것이냐!'
눈을 감으니 더욱 선명히 떠오른다. 그러면서 저에게 성큼성큼 다가와 무언가를 내려치려 했었다. 한순간 숨통을 조이는 살기에 덩달아 심해지는 통증에 겁에 질려 도망칠 생각조차 못하던 찰나, 돌연 엄청난 굉음이 바로 옆에서 울렸다.
'으-아아아악!'
괴로운 비명에 덜컥 놀라 눈을 뜨니 당당할 것만 같던 마족의 안면이 처참히 일그러져 바닥에서 나뒹굴고 있었다. 난생 처음 본 잔인한 장면에 온 신경이 마비되어 움직일 수가 없었다. 머리는 도망치라며 난리인데 그를 몸이 따라주지 못해 굳어있는 자신의 시야로 불현듯 닥치는 어둠과 함께 귀찮다는 음성이 내려앉았다. 아아, 귀찮게, 진짜.
"얌전히 지나가자잖아. 쓸데없는 실랑이 벌일 시간 없다니까."
".....어."
이,목소리는....믿을 수 없다는 듯 눈동자가 크게 뜨이며 사근사근 움직이던 그 입이 한순간 조용해졌다. 왜 그래요? 언니? 재촉에 흔들리는 옷자락도 느끼지 못했다. 설마하며 활짝 열린 창가 너머로 떨리듯 향한 그녀의 눈가로 이내 눈물이 넘실거렸다. ....여전하시구나. 흐르는 눈물을 황급히 닦아내며 웃었다. 이르카는 이야기를 이어나가다 멈추더니 눈물을 흘리는 그녀가 살짝 어이없어 살풋 인상을 찡그렸다. 갑자기 왜 이러지? 뭐라도봤나?
눈을 떼지 못하는 게 뭔가 싶어 확인해보려 고개를 돌리려는 이르카의 손등을 감쌌다. 갑작스런 온기에 흠칫 어깨를 떤 이르카가 서서히 시선을 들었다. 또, 웃고 있어...? 언제 그랬냐는 듯 편안하게 입꼬리를 올리고 있는 그녀의 모습에 이르카의 얼굴로 황당함이 번졌다. 진짜 왜 이러지, 이 언니가? 그런 이르카를 내려다보던 그녀는 살짝 고개를 저으며 생긋 미소를 지었다.
"....오늘 어디 아픈 거 아니죠?"
그 물음에 그녀는 이르카를 답 대신 끌어안으며 조용히 눈을 감았다.
"....언니?"
희망은, 아직 남아 있었다.
그랜드체이스,part 1 : 허무한 하늘은
"네 놈은 안 된다. 그분의 명령이야. 여기서 그분을 기다리도록."
"...그래? 그럼 이쪽도 무력으로 나가줘야지."
뭐, 뭐하려는 거냐....! 여유롭게 검을 뽑는 한 손과 달리 여러 손들이 다급히 무기를 꺼내들었다. 일촉즉발의 사태가 이어지기 전에 본인들의 선에서 정리하려는 건지 자신을 둘러싸는 인기척을 빠르게 읽어낸 지크하트의 나직이 벌어진 입술로 뜨거운 숨이 터져나왔다. 지크하트는 이런 병력으로 저를 저지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한 마족들의 판단에 헛웃음을 흘리며 가볍게 검을 쥐었다. ....뭐 어쨌든, 이렇게 된 이상 더 귀찮아지기 전에 지나가야겠지. 비스듬히 고개를 기울이며 언제 그랬냐는 듯 눈에 띄는 제복을 갖춰 입고 있는 한 마족의 목덜미 깊숙이 살기를 박아넣는다.
"거기서 비켜. 죽고 싶지 않으면."
살벌한 기류를 미동없이 마주하던 그는 알 수 없다는 얼굴을 했다. 그리고, 변하지 않은 지크하트를 향해 의아하다는 듯 입을 열었다.
"...여전히 발버둥치는군. 대체 뭘 위해서 이렇게까지 하는거지? 이래봤자 돌아오는 건 절망뿐일텐데."
"그건 해봐야 알 일이고. 아, 참. 그리고 착각한 게 있는데."
"......"
없다. 뒤로 고개를 돌리니 지크하트를 향해 무기를 겨누고 있던 자들이 단칼에 베인 듯 비명 하나없이 죽어 있었다. 살아 있으면서도 죽어있는 자, 저 자의 끝에는 뭐가 있을까. 눈매를 가르는 검의 끝을 가만히 응시하던 그가 어느덧 귓가에서 멀어져가는 발소리를 쫓아 눈동자를 굴렸다. 어느새 저만치 걸어나가고 있는 그 손이 올라와 있다. 가볍게 휘저으며 나직이 흘러나온 마지막 말을 들은 그는 눈을 감을 수밖에 없었다. 싸운 적이, 없다라.
"....아무리 생각해도 종잡을 수 없는 자는 흥미로워."
특히 그 남자,
'난 단 한 번도 나라따위를 위해 싸운 적 없어.'
에르크나드 지크하트, 당신이 말이야.
/
"..무슨 일이야, 데이오스?"
"아, 왔어?"
뭐가 그렇게 재미있는 건지 데이오스는 항상 생글생글 웃는 얼굴이었다. 지금도 별반 다르지 않은 그를 보며 리르는 한숨을 내쉬었다. 나라가, 세상이 이꼴인데도 태평하게 앉아 유희를 즐기고 있는 자신들의 왕을 보자면 땅이 꺼질 수밖에 없었다. 거기 서있지 말고 이리 와. 녹진한 얼굴로 눈꺼풀을 내린 채 왕의 쉼터의 기둥에 기대어 있던 리르는 여유롭기 그지없는 어투에 짜증이 솟구쳐 살풋 눈가를 구기며 데이오스를 향해 날카롭게 고개를 돌렸다.
"어라? 왜 그런 얼굴이야, 재미없게."
"그럼 무슨 얼굴을 바란 건데. 장단 맞춰 하하, 웃기라도 해줘?"
"나 참, 예민하게 굴지 말고. 시대가 이런 때인 만큼 우울해서야 되겠어?"
너라도 기운을 내야지. 씩 입꼬리를 올리며 다시금 휘황찬란하게 떠있는 달을 향해 시선을 돌리는 데이오스를 지그시 쳐다보던 리르는 못 말리겠다는 듯 포옥 한숨을 쉬며 발걸음을 뗐다. 간간히 흩날리는 벚꽃잎이 그녀의 새하얀 살결로 흐드러진다. 얼굴에 내려앉은 잎을 집어 내려다보는 눈이 한없이 무겁다. 자신을 덮는 짙은 그림자를 느낀 데이오스는 반쯤 고개를 돌려 괴롭게 가라앉아 있는 눈매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이내 시선을 돌린 데이오스 또한 언제인지 모를 수렁에 잠겨 있었다.
엘프의 숲은 더 이상 푸르지 않다. 생명체는 말라 비틀어져가고 생기 넘치던 잎과 나무들은 영원한 겨울을 맞이했다. 꾀꼬리 소리도, 따스한 햇살도 존재하지 않는 척박한 땅이 되어 버렸다. 그나마 마족들의 입김이 닿지 않는 에류엘은 본래의 형상을 유지하고 있지만 이마저도 언제 바스라질지 모를 일이다. 그러니 그 전에. 지금보다 더 최악의 결말이 닥쳐오기 전에 막아야만 했다. 리르. 테라스를 짚고 있던 손을 떼어내며 바닥으로 내려온 데이오스를 보며 잡고 있던 벚꽃을 흘려보냈다.
"왜 또."
"당찬 붉은 머리와 귀여운 소녀를 찾으러 갈 생각은 없어?"
그 말에 지루해 죽겠단 표정을 짓고 있던 그 얼굴이 형편없이 무너져 내렸다. 급격히 어두워지는 리르를 지켜보며 데이오스는 그 입에서 나올 말을 가만히 기다렸다. 떨리는 손을 움켜쥐는 리르는 많은 것이 달라져 있었다.
막무가내보다 선뜻 나서지 못하는 망설임이 도드라졌고 당찬 모습은 서서히 사라져갔다. 녹안을 덮은 짙은 그늘이 더욱 진해져만 간다.
"....못 해."
"....."
"엘리와 아르메도 그렇고. 그 녀석들도....나는, 찾으러 못 가."
"리르, 너."
"잊었어? 엘리는 해야만 하는 일이 있다면서 사라져 버렸어. 아르메는 바이올렛 메이지의 급한 호출이 있다는 말과 함께 떠난 뒤로 소식하나 없고."
"....."
"로난님은....글쎄, 카나반 여왕님을 끝까지 보좌해드려야 한다고 하셨는데, 지금은 어떻게 되셨을지. 라스는 말없이 가버려서 아무것도 모르겠고."
"...그래서, 계속 이런 식으로 있을 생각인가?"
지친 듯 무의미한 말을 이어나가던 때였다. 불현듯 들려오는 익숙한 목소리에 리르의 눈이 크게 뜨였다. 이, 건....설마....저벅저벅 걸어오는 음은 여전히 제멋대로였다. 또다시, 그리운 향수가 코끝을 간질인다.
"어이, 거기 요정왕. 오랜만이야."
바뀐 것 하나없이 여전하다. 리르는 믿을 수 없다는 듯 망부석마냥 굳어 그 자리에 멍하니 서있을 수밖에 없었다.
"너무 늦게 왔잖아. 하이랜더 씨."
씨익 웃음 지으며 뒤를 가리키는 데이오스를 망연히 바라보던 바보같은 눈이 서서히 뒤돌아 달을 등져있는 지크하트와 마주했다. 정말.....지크하트?
"정말로....."
"그런 얼굴 하고 있지 말라고. 누가 보면 죽다 살아온 줄 알겠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울먹이고 있었다. 담긴 이름이 금세 녹녹해져 그림자를 적신다.
"...윽, 흡...지, 크하트."
"그래, 리르. 오랜만이야."
*
고민하다가 여기에 올리게 됐어요. 팬아트 게시판인데 올리니 뭔가 양심에 찔리는 것 같은...
혹시 많이 불편하시다면 내리도록 할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