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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기원]파룬궁이 중국 기공연구회를 탈퇴한 경위
▲ 1998년 국가체육총국 지도자들이 창춘에 가서 파룬궁 수련생들의 연공상황을 시찰하는 모습
중공 관방 신화사이트는 7월 1일부터 갑자기 파룬궁을 비방하는 글들을 연속으로 실었다. 그 가운데 하나가 바로 이른바 중국기공연구회가 1996년 파룬궁을 ‘제명’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당시 중국 파룬궁 연구회 책임자였던 예하오(葉浩)는 ‘이는 1999년 박해가 시작된 이후 장쩌민-뤄간 집단이 내놓은 최초의 거짓말 중 하나로 박해가 ‘타당함’을 입증하기 위해서 사용했다. 그러나 사실 진실 앞에서 모두 재고하지 않을 수 없다.’고 지적했다.
현재 해외에 거주하는 예하오는 명혜망 기자 황카이리(黃凱莉)와 가진 인터뷰에서 1996년 파룬궁이 중국기공연구회를 탈퇴한 경위에 대해 소개했다. 예하오 선생은 일찍이 중국 공안부의 국장급 간부이자 칭화대학 정치 지도원과 교수를 역임했다.
기공의 유행과 후야오방의 ‘삼불(三不)’정책
70년대부터 중국에서는 기공 붐이 일어나 80년대 말에 고조에 이르렀다. 수많은 기공 문파들이 전국을 휩쓸었고, 각종 신기한 현상들이 곳곳에서 발생했으며 일부 불치병에 걸린 사람들의 증세가 호전되거나 완치되었다. 이에 크고 작은 공원 도처에 온통 기공을 수련하는 사람들로 넘쳐났다.
기공이라는 유물론적 세계관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특이공능(特異功能, 초능력) 현상이 출현하자, 즉시 마르크스-레닌주의와 무신론을 일관되게 선전하며 사상을 통치하던 중공 고위층의 주의를 끌게되었다.
1980년 2월, <네이처> 편집부의 주관으로 상하이에서 제1회 인체특이공능 세미나가 열렸다. 회의에는 일부 특이공능을 가진 사람들을 초청해 현장에서 테스트를 하였다. 당시 중공 중앙 주석 후야오방 역시 자신의 비서를 보내 현장 감정에 참가했다. 현장에 있던 전문가들은 만장일치로 과학 실험 결과 인체특이공능이 존재함을 입증했다고 인정했다.
이 시기 중국은 10년간의 ‘문화대혁명’이 막 끝난 직후라서, 전 중국에서 ‘실천이 진리를 검증하는 유일한 표준’이라는 것에 대해 열렬한 토론이 전개되고 있었다. 얼마 후 후야오방은 중공 중앙 선전부에 기공과 특이공능에 대해 ‘(기공에 대해) 선전하지 않고 논쟁하지 않으며 비평하지 않는다’는 지시를 내렸다. 동시에 소수 사람들에게 연구를 허락했다. 1982년 4월, 중앙선전부는 이 정신을 전달하는 통지를 내렸으니 이것이 바로 그 유명한 ‘삼불(三不)’ 정책이다.
장전환(張震寰), 첸쉐썬(钱学森) 기공 보급에 공헌
예하오는 ‘중국 기공은 과거 20년 동안 빠르게 발전했다. 당시, 중국기공과학연구회(‘기공연구회’로 약칭)회장 겸 중국 과학위원회 부주임 장전환, 비서실장 리즈난(李之南) 및 당시 과학계의 태두였던 첸쉐썬 등이 기공 보급을 위해 아주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고 회고했다.
예하오는 아울러 첸쉐썬을 대표로 하는 일부 과학자들은 ‘인체과학’이란 개념을 제시했다. 첸은 ‘기공은 중의(中醫)학 이론과 인체특이공능이 인체과학에 내포되어 있는 가장 근본적 이치이며’, ‘(인체과학은) 한 차례 과학혁명을 초래할 것이며 사람의 객관세계 인식에 있어 한 차례 도약이될 것이다.’라고 주장했다.
‘6.4천안문 사건’ 이후 중공 태도 변화
1989년 ‘6.4’ 천안문 학살 사건 이후 기공에 대한 중공의 태도는 빠르게 변했다. 90년대 초 9부위 위원회 9인팀을 만들어 기공을 감시 통제했다. 원래 중국과학원 대학원생이었으며 현재 미국 노스웨스트 대학에서 박사 후 과정을 밟고 있는 뤼강(呂罡)은 ‘바로 9부위원회에서 각각 한 명을 뽑았는데 국가과학위원회, 체육위원회, 공안부(公安部), 국가안전부(国安部), 종교관리국, 민정부(民政部), 위생부 등이었다. 이들은 ‘6.4’ 직후 반란을 일으키지 않을까 걱정했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외부인사가 전문가를 지도한다’는 것은 전문 영역에 있어서는 일종의 재난이었지만 중공 통치에는 오히려 필요했다. 예하오는 90년대에 이르러 중국 관방 통계에 따르면 2천여 가지의 기공이 있었다고 한다. 새벽에 도처의 공원에서는 다양한 기공을 연습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후에 중공은 이 일에 대해 통제를 강화하기 시작했고, 일부 성장(省長), 부장(部長 역주: 한국의 장관에 해당) 등 직위에서 물러난 퇴직 당간부들을 기공 연구회의 책임자로 배치했다. 그는 ‘이 사람들은 기공사가 아니었으며 기공사는 단지 그 공파의 명의에 의지해 기공연구회의 회원이 되었다.’고 말했다.
예하오는 ‘사실상, 중공은 기공연구회란 사회 단체를 중공의 당지부로 만들어 기공을 감시 통제하였다. 왜냐하면 중공은 기공이 ‘의화단’으로 발전할지 모른다고 걱정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즉 《9평》에서 서술한 것처럼 중공은 전 중국의 민중을 감시 통제하기 위해, 마을마다 당지부를 설치하고, 모든 기관이나 회사에도 당지부를 설치했다.’고 지적했다.
장전환 사망 후 낙하산 인사
장전환이 1994년 세상을 떠난 후, 중공은 옌안(延安)에서 항상 마오쩌둥과 동행했었고 장시성(江西省) 부성장과 간쑤성(甘肅省) 성장을 지냈던 황징보(黃靜波)를 중국기공과학연구회 회장으로 임명했다. (주: 옌안은 항일 전쟁 시기 중공 근거지를 말한다. 당시 중공은 그곳에서 대규모로 아편을 경작하며, 식량을 재배한다고 거짓말을 했다.)
예하오는 황과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다고 밝혔다. 기공이 무엇인가에 대해 이야기를 할 때, 황은 ‘고대에 도간(陶侃)이 벽돌을 운반하지 않았는가? 도간이 매일 새벽 벽돌을 서재에서 집밖으로 옮기고, 저녁에는 다시 벽돌을 집안으로 층층이 운반했다. (기공이란) 바로 이런 것이다.’라고 말했다.
(주: ‘도간이 벽돌을 운반했다’ 것은 역사이야기이다. 도간은 동진 시기 려강(濾江) 심양(尋陽) 사람이다. 일찍이 무창(武昌) 태수와 영원(寧遠)장군, 형주(荊州) 자사(刺史)를 역임했다. 나중에 어떤 사람이 그들 질투하여 나쁜 말을 퍼뜨려 강등되어 광주(廣州)로 보내졌다. 그때, 그는 매일 백 개의 벽돌을 옮기는 방식으로 체력을 단련했다고 한다.)
예하오는 ‘황은 이것이 기공이라고 말했다. 그는 기공에 대해 완전 문외한으로 아무것도 몰랐다. 그 당시, 공산당은 기공계에서 당의 영도를 강화할 생각으로 이런 사람을 보내 기공연구회 회장을 맡게 한 것이다.’라고 말했다.
예하오는 ‘황징보가 회장이 된 후 가장 먼저 한 일은 바로 모든 기공사들을 소집하여 그들이 받고 있던 비용을 모두 기공연구회에 내도록 요구한 것이다.’라고 말했다.
기공 연구회 파룬궁을 직속 공파(功派)로 비준
당시 상황을 직접 목격한 증인으로서, 예하오는 수많은 파룬궁 사건이 발생한 구체적 시간, 단서에 대해 매우 분명히 알고 있었다.
예하오에 따르면 리훙쯔(李洪志) 선생은 1992년에 파룬궁을 전파하기 시작했으며 처음부터 베이징에 와서 중국기공과학연구회에 파룬궁이 무엇인지, 파룬궁 전파의 목적과 내용을 설명했다. 중국 기공과학연구회의 각급 지도자들은 그의 말을 듣고 완전히 긍정적인 평가를 내렸으며 파룬궁이 아주 좋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즉시 사부님께 베이징에서 학습반을 열도록 배치했는데 그 때가 92년 4월이었다.’라고 소개했다.
예하오는 ‘파룬궁의 1기, 2기 학습반은 92년 5월 창춘(長春)에서 열렸다. 중국기공과학연구회는 6월 21일 베이징에서 리훙쯔 선생님을 위해 파룬궁 소개회를 열었으며 매우 성공적이었다. 이후 6월 25일 베이징에서 첫 번째 파룬궁 학습반을 열었다. 나중에 또 연속으로 몇 기의 학습반을 개설했다.’고 말했다.
‘베이징에서 여러 차례 학습반을 개설한 것은 기공과학연구회가 주관한 것으로, 매번 지도자가 참가하여 발언을 했고 또 파룬궁이 ‘전 중국과 전 세계에 널리 보급될 좋은 공법’임을 비준했다. 예하오는 ‘92년 9월, 파룬궁이 중국 기공과학연구회의 직속공파로 확정되었다’고 말했다.
1993년 7월, 중국기공연구회는 정식으로 파룬궁을 직속 공파로 비준하였고, 아울러 파룬궁 연구 분회(줄여서 파룬궁 연구회)를 설립했으며, 또한 리훙쯔 선생에게 직속 기공사라는 칭호를 수여했다. 예하오는 ‘당시 기공연구회가 파룬궁에 수여했던 ‘중국기공협회 파룬궁 분회’ 휘장을 우리는 지금까지 보존하고 있다.’고 말했다.
자료에 따르면, 당시 전 중국에는 2천 여 개의 기공이 있었지만 기공 연구회가 직접 관리한 것은 240여 종에 불과하며, 직속 공파는 겨우 11개 인 것으로 드러났다.
동방 건강 박람회 최고인기공파
국가의 대형 기공행사 개최를 지원하기 위해, 리훙쯔 선생은 직접 일부 제자들을 이끌고 1992, 1993년 두 차례 베이징에서 열린 동방건강박람회에 참가했다. 두 차례 박람회에서 파룬궁은 가장 두드러졌다. 1992년 제1회 박람회에서 파룬궁은 ‘최고 인기 공파’로 불렸으며, 또한 첫 번째 로 표창장을 받았고 표창장을 가장 많이 받은 공파였다. 1993년 제2회 박람회에서, 리훙쯔 선생은 박람회 조직위원회 위원으로 초빙되었고, 요청을 받아 3차례 기공 학술 보고회를 진행했다. 매번 만원사례를 이뤘으며 아울러 ‘특별 금상’ 및 ‘최고 인기 기공사’라는 칭호와 대회 유일의 최고상인 ‘프런티어 과학 진보상’을 받았다.
통계에 따르면, 92년 5월부터 94년 12월까지 각지 관방 기공과학연구회의 초청으로 리훙쯔 선생은 중국에서 총 54기의 학습반을 열었다. 그 중 베이징에서 13기를 개최해, 전체의 4분의 1을 차지했으며 학습반 개설이 가장 많았던 도시이다. 학습반에 참가했던 베이징 수련인들은 대략 연인원 만 여명 가량이었다. 이런 행사는 베이징에서 커다란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파룬궁은 신속하게 유행하기 시작했고, 수련인 숫자도 급속히 증가했다. 95년 3월 이후 리훙쯔 선생은 해외의 초청을 받아 파룬궁을 해외에 전파하기 시작했다.
파룬궁 중국기공연구회 탈퇴 신청
예하오는 리홍즈 선생은 1994년 6월 전국적인 전수가 종식되었음을 선포했다. 같은 해 9월 중국기공과학연구회에 파룬궁은 앞으로 중국에서 학습반을 개설하지 않을 계획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나 당시 광저우의 기공 협회는 거듭해서 리 선생에게 다시 학습반을 열어 강연 해줄 것을 요구했다. 그래서 94년 12월 마지막 학습반이 열리게 된다.
95년 1월 4일, 리훙쯔 선생은 베이징 공안대학에서 회의를 열어, 《전법륜》 전국 공식 발행과 동시에 중국에서 법을 전하는 것이 이미 끝났으며, 해외에서 법을 전할 것을 선포하였다. 95년 7월 리훙쯔 선생은 해외에서의 전파 역시 끝났다고 선포했다.
예하오는 ‘1996년 3월, 리 선생은 나, 왕즈원(王志文) 그리고 왕샹우(王相武) 세 사람을 당시 파룬궁 연구회 책임자로 정식 파견하여, 중국 기공 연구회에 정식 보고서를 제출하게 하고 중국기공연구회 탈퇴를 신청했다. 이 보고를 듣고 있던 중국 기공연구회 지도자는 부이사장 장젠(張健) 및 중국 국가체육위원회 지도자 추위차이(邱玉才) 등 몇 사람의 책임자가 있었다.’고 말했다.
‘당시 지도자들은 이에 대해 매우 유감스럽게 생각했다. 거듭 만류함과 아울러 파룬궁을 극구 찬양하면서 파룬궁에 대해 아주 많은 긍정적인 말을 했다. 우리는 리 선생이 이미 기공학습반 개설 행사를 중단했고 불법(佛法) 연구에 전력을 다해 기공사 일을 할 틈도 없다고 설명했다. 이렇게 중국 기공연구회 탈퇴 신청을 고수했고 또 중국 기공연구회의 정식 확인을 받았으며 탈퇴 수속을 마쳤다. 이후 중국 기공연구회 직속 공파인 파룬궁 분회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당국에서 기공단체 등록 거부
그러나, 중국 국내에서 파룬궁을 배우는 사람들의 숫자는 날마다 계속 급증했다. 이에 어떻게 이 많은 대중들의 연공 활동을 관리하느냐가 새로운 문제가 되었다. 그래서 예하오를 포함한 사람들은 기공연구회 지도자에게 수많은 파룬궁 애호자들이 어떻게 하면 파룬궁 수련 단체를 설립하여 수속할 것인가라는 문제에 대해 상부의 지시를 바랐다. 당시 얻은 회신은 먼저 부(部)급 단위를 찾아가 파룬궁 대중 조직 업무를 지도하는 부문으로 정하고 민정부에 사단으로 신청한 후 다시 단체 회원 명의로 중국기공연구회에 들어오라는 것이었다.
이후, 예하오, 왕즈원,지례우(紀烈武), 리창(李昌), 왕샹우(王相武)와 위창신(于張新)등 6명이 파룬궁 수련인들을 대표하여 민정부, 전국 인민대표자대회, 민족위원회, 중국불교학회, 통일전선부 등에 3차례 정규 신청을 하고, 파룬궁 수련인 단체로 등록할 생각이었다. 이에 대해, 중공 중앙 통일전선부는 정식 문건으로 ‘동의하지 않는다.’ 및 ‘지지하지 않는다’고 의견을 표시했으며, 아울러 6명 발기자들의 직장 지도자들에게 책임지고 그들과 대화를 나누게 하여 정식으로 이 결정을 통지했다.
(주: 이 6인 가운데, 예하오가 이미 해외에 거주한 것 외에, 나머지 5명은 모두 99년 7월 20일 폭력 박해가 전면적으로 개시된 후, 심한 감시와 통제를 받았으며 불법으로 형을 선고 받는 등 심각한 박해를 당했다. 아울러 수감 기간 동안 세뇌와 정치적 압력을 받았다.)
AFP 통신의 2000년 1월 14일 홍콩 보도에 따르면 중국 공군장성이었던 위창신이 파룬궁 때문에 군사 법정에서 17년 형을 선고 받았다고 한다. 이것은 지난 달 베이징 법원이 리창에게 18년 형을 선고한 이후 가장 중한 형벌이다.
74세의 위창신은 중국 공군 대학 교관이다. 2000년 1월 6일 베이징 군사 법정에서 비공개로 17년 형을 선고 받았다. 그는 중요 공군 장성으로 일찍이 공군에 뛰어난 공헌을 한 바 있다. 수많은 퇴직 장교들이 이 판결에 대해 불만을 표시하고 있다.
2000년 1월 14일 AP통신의 뉴욕 보도에 따르면, 74세의 고급 공군장교 위창신이 파룬궁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이유로 1월 6일 공군 군사 법정에서 비공개로 17년 형을 선고 받았다. 한 군부 대변인은 이 보도에 대한 확인을 거부했으며 법정 전화번호도 알려주지 않았다.)
이로 인해, 예하오 등 파룬궁 대표들은 1997년 11월, 12월 각각 민정부, 공안부에 보고서를 제출하여 사단 등록 신청은 국가, 정부 관련 부서의 파룬궁에 대한 체계적인 관리와 지도를 위한 것이라고 설명하면서 중앙이 동의하지 않는다면 자신들도 더 이상 사단 설립 신청을 제출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탄압 전, 파룬궁 각급 승인 얻어
1998년 5월, 국가체육총국은 파룬궁을 조사한 이후, 파룬궁이 사회 안정과 정신문명 건설 효과에 매우 두드러진 역할을 하고 있다고 인정했다.
1998년 9월 의학 전문가로 구성된 팀은 국가체육총국조사에 협력하기 위해 광둥에서 12,553명의 파룬궁 수련인들에 대해 표본 조사를 진행했다. 그 결과 파룬궁이 병을 없애고 신체를 건강하게 하는데 97.9%의 효과가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1998년 하반기, 차오스(喬石)를 중심으로 한 중국 전국인민대표대회 퇴직 원로간부들이 군중들이 보내온 서신에 근거하여 중국 공안의 파룬궁 수련인에 대한 소란과 박해를 반영하며 파룬궁에 대해 수 개월 간의 상세한 조사 연구를 진행했고, ‘파룬궁이 국가와 국민에 아주 유익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아울러 연말 중공 중앙 정치국에 조사 보고서를 제출했다. 중앙은 파룬궁을 국가체육총국으로 집중시켜 관리하게 했다.
1998년 10월, 국가체육총국은 창춘과 하얼빈에 조사 연구팀 팀장을 보내 파룬궁에 대해 조사를 한 후 파룬궁의 신체 건강 효과와 사회 안정 및 정신문명 촉진 역할을 인정했다.
‘삼퇴(三退)’열조, 중공 대세 이미 상실
당시 수많은 해외 인사들이 장쩌민의 파룬궁 탄압 소식을 듣고 난 후 첫 번째 터져 나온 질문이 바로 ‘왜’였다.
예하오는 중공의 파룬궁 탄압은 자신의 위기감을 없애고, 총서기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라고 말한다. 현재 《9평》을 읽고 중공의 본질을 알게된 수많은 사람들은 중공이 누군가를 탄압할 생각을 하면 모두 인정하는 이유가 필요하지 않으며 단지 모두 중공이 주입한 ‘이유’를 수용하면 된다. 예를 들면 반당(反黨), 사회안정침해 혹은 국가기밀누설 및 군중을 들고 당과 다툰다는 등이다. 현재까지, 중공이 발동한 모든 탄압과 숙청 (당내뿐만 아니라 전 사회를 포함)은 어느 한 차례도 천리(天理)와 국법(國法), 인정(人情)을 따르지 않았고, 어느 한 차례도 유언비어를 유포해 분위기를 조성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만약 중공이 이치를 중시한다면 그것은 더이상 중공이 아니다.
향년 71세의 베이징 출신으로 중국에서 56년 동안 기계분야 고위 기술자로 일했던 양칭(楊靑)은 중공은 진실을 말한 적이 없다고 말한다. 과거 7년 동안, 파룬궁에 대한 피비린내 나는 박해에 대해 중공은 유언비어로 진상을 은폐하며 탄압을 유지하고 있다.
양칭은 ‘중공이 필사적으로 인터넷을 차단하고 있지만 차단할 수 없다. 많은 중공 관료들과 중국 민중들은 《9평》을 읽었다. 이러한 소식들도 더욱 알려지고 있다. 작년부터 일어난 중공 탈퇴 흐름은 이 점을 설명한다. 점점 더 많은 중국인들이 중공의 본질을 알게된 후, 중공과 한패가 되고 싶어 하지 않는다. 현재 이미 1천 1백만 명 이상의 사람들이 이 악당을 탈퇴했다. 중공은 놀라서 부들부들 떨고 있으며, 이미 자신도 대세가 지나갔고 멸망을 앞두고 있음을 알고 있다. 그러나 중공은 여전히 최후의 발악을 하면서 다시 유언비어를 내놓았다. 그러나, 이것은 헛수고이다.’라고 말했다.
자료에 따르면, 파룬궁은 1992년부터 전파되기 시작했고 1999년 중공이 박해를 시작하기 전까지 중국에는 약 1억 명의 파룬궁 수련인들이 있었다. (중공 관방에 통계로는 7천만 명이라고 인정했는데, 이는 중공 당원 총수를 넘는 것이다.) 이 박해는 이미 7년간 지속되고 있으며, 국내외 파룬궁 수련인들은 계속해서 각종 평화적인 방식으로 박해에 반대하면서, 사람들에게 파룬궁에 대해서 또 잔혹한 박해 실태를 폭로하면서 알리고 있다. 해외에서는 현재 80여 개 국가와 지역에서 다양한 인종과 언어의 사람들이 파룬궁을 수련하고 있다. 파룬궁 수련자들은 아울러 현지 국가와 지역에서 당국의 동의를 거쳐 각지 ‘파룬따파 불학회(法輪大法佛学会)’를 설립했으며 현지의 사회단체로 인정받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