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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네이버 블로그 <만약에 우리> 에서 퍼왔습니다.
작품 설명 : 고려불화의 백미 <수월관음도>, 높이 4m 20cm, 너비 2m 55cm. 세계 최대 크기의 이 작품은 현재 일본 사가현립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1310년 제작된 작품으로 달밤에 보타락가산에 앉은 관음보살이 진리를 구하는 선재동자에게 깨달음을 주는 장면을 그린 것이다. 700년이나 지난 지금에도 이 그림 속 관음보살은 여전히 자애로운 미소를 머금은 채 사바세계의 중생을 한없이 달래주고 있다.
동북아시아 예술의 백미, '수월관음도'
글을 쓰는 이유 - 우리 예술은 무엇인가?
서양의 문화예술을 이해하기 위해 우리는 그리스신화(Greece神話)와 성서(聖書)를 공부한다. 우리가 접하는 그들 대부분의 회화 작품 중 적어도 19세기 이전 것들은 주로 그리스 신화 속 인물과 사건, 그리고 성경에 등장하는 인물과 사건을 다루고 있다. 오늘날의 기념사진에 해당하는 '초상화'나, 일반 풍경화를 제외한 대부분의 순수창작물의 주제가 거의 그랬는데, 예를 들어 라파엘로의 작품 중 우리가 기억하고 있는 명작 <초원의 성모>는 성모 마리아와 아기 예수의 장면을 담고 있고 있으며, 귀도 레니는 <가시 면류관을 쓴 그리스도>라는 작품을 통해 지금의 우리와 소통하고 있는 것이다. 조각에서도 이런 특성은 그대로 반영된다. 기원전 340년경 제작된 프락시텔레스의 위대한 조각품 <헤르메스와 어린 디오니소스>는 그리스신화를 주제로 한 것이고, 요즘은 속옷 광고를 통해 자주 접하는 이름이지만, 그 실상은 서양예술사 전반에 걸쳐 희대미문(稀代未聞)의 걸작으로 평할 만한 <밀로의 비너스>, 역시 그리스신화의 주인공 중 한 명을 소재로 한 것이다. 그러니 서양의 문화예술 일반을 이해하기 위해 우리는 먼저 그리스신화와 성서를 공부해야 한다고 주장할 수 있다. 특히 기독교문명사에 대한 역사적 지식은 필수인데 가령 6세기 말 그레고리우스 교황의 종교화를 통한 에반겔리즘(전도주의, Evangelism)적 포교정책에 대한 내용을 모르고서는 그 당시의 작품 등장 배경을 이해할 수 없으니 이 얼마나 중요한 지식인가.
그렇다면 서양이 아닌, 우리가 속해 있으며 현재 살고 있는 이곳, 그러니까 동북아의 문화예술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무슨 지식이 필요할까? 이 물음에 만약 정확한 답을 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그만큼 우리의 문화예술에 대해 무지하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이런 무지는 왜 생겼을까? 우리는 개인의 종교적 신념이나, 학술적 경향과 무관하게 문화와 예술을 이해하기 위한 방법론으로 특정 종교나 사상을 공부해야 하는데, 유독 배타성이 강한 일부 한국식 기독교(정확하게 말하자면 '한국식 Protestantism')와 우리 전통을 멸시하고 서구문명만 높이 쳤던 군부독재세력의 영향이 작용한 까닭으로 이런 공부에 지장이 생기면서 앞서의 무지가 생기게 된 것이다. 한국 대부분의 전통 예술은 서구의 전통 예술이 그렇듯 종교적이거나 신화적인 것이 많은데, 지금의 종교가 전통 예술 속 종교 내용과 다르다 해서 감상에 불편을 느낀다면 이는 슬픈 일이다. 그리고 새로운 미래를 위해 기존의 것에 집착을 버려야 한다고 다그쳤던 구세대 군부독재 영향권 속에 있었던 사람들이 여전히 영어에 집착하고 우리의 문화에는 등한시 하는 교육정책을 쓰고 있는 현실 또한 안타깝기 그지없는 일인 것이다. 국사를 선택과목으로 하자는 어처구니 없는 주장을 하는가 하면 영어공용화를 해야 한다며, 오렌지를 '오륀지'로 발음하기 좋아하는 이들의 시선에는 아마 우리 고유의 트레디셔널한 예술이 그리 달갑게 보이지 않을 것이다. 어쨌든, 우리는 이러한 우리의 무지를 통해 세계를 상대로 톡톡히 망신을 사고 있는데, 그 대표적인 예가 고려불화다. 2001년 2월 14일 집계를 기준으로 할 때 현존하는 고려불화는 200점 정도가 된다. 그 중 공개되어 있는 것이 유럽과 미국에 17점, 일본에는 무려 106점인데, 정작 우리는 13점 정도에 그치고 있다. 왜 이런 일이 빚어진 걸까? 우선 서양과 일본의 침략 행위를 거론할 수 있다. 고려시대부터 왜구는 우리의 강토를 자주 침범했는데, 고려불화도 이 시기 수탈되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그런데 우리는 오랜 세월 그렇게 수탈된 작품이 있었는지도 몰랐고, 또 알게 된 후에도 다시 되찾고자 하는 노력을 기울이지 않았다. 그러는 동안 몇몇 개인만이 고려불화를 되찾고자 애를 썼으나 정작 일본 학계와 화상들은 한국인에게 판매를 금한다는, 자기들 나름의 규칙을 가지고 미국 또는 유럽에만 판매를 해왔던 거다. 현실이 이런데도 지금까지 우리 정부가 고려불화를 되찾거나, 또는 고려불화에 대한 국민들의 무지를 일깨워주기 위해 조치한 외교 및 교육적 정책은 내놓지 않고 있다. 이렇게 우리가 무관심하고 있는 동안 미국은 2003년 센프란시스코 아시아 예술 박물관 개관 특별전으로 개최된 '고려왕조전'에서 <수월관음도>를 선보였다. 당시 이 <수월관음도>는 엄청난 반향을 일으켰다. 압도적인 규모와 정교한 표현력에 매료된 미국의 여러 언론지는 앞다투어 이 작품에 대한 특집 기사를 실었고, "모나리자에 버금간다.(it's the equivalent of the Mona Lisa.)"라는 평가를 했다. 정작 우리가 무심하는 동안 이 위대한 작품은 미국에서, 일본에서 온갖 주목을 다 받으며 그 위대한 예술미를 뽐내고 있었던 거다.
그러니 앞으로라도 이런 망신을 당하기 싫다면 다시 다그쳐 묻고 답을 구해야 할 것이다. 우리의 문화예술을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어떤 지식을 필요로 하는가? 이 물음에 대한 가장 정확한 답은 "유(儒)·불(佛)·도(道) 삼학에 대한 공부를 해야 한다."이다. 유교와 불교 그리고 도교에 대한 이해 없이 어찌 저 위대한 장승업의 도석화(道釋畫)를 감상할 것이며, 특히 신들린 듯한 필치로 우리에게 위대한 작품을 선사했던 김홍도의 군선도(群仙圖)를 보겠는가? 그러니 앞서 언급한 삼학에 대한 내용은 우리 전통 문화예술을 이해하기 위해 반드시 갖추고 있어야 하는 필수 지식인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삼학에 대한 이해를 깊게 할 만큼의 시간적 여유를 가지지 못했다. 어린 시절부터 특별히 인문학도임을 자처하면서 외로이 성장한 사람들의 경우를 제외하고는 대부분이 사회적 기준에 준하는 인재가 되고자 실용학에만 눈을 두었기에 동양미술을 이해할 수 있는 시력을 갖출 수 없었고, 또 지금도 갖추기에는 많은 어려움이 따르는 것이다. 그간의 정황이 이렇다 보니 많은 이들이 우리 문화와 예술이 중요하다고 말은 하면서도 정작 구체적 내용에 대해서는 입을 다물고 마는데, 이런 아픈 현실을 잘 알고 있는 필자는 이제, 석가탄신일을 맞이하여 특별히 고려불화의 위대한 예술을 간략하게나마 소개하고자 하니 부디 정성들여 읽어 준다면 이보다 더한 즐거움이 없겠다.
작품 설명 : <수월관음도> 중 상단에 해당하는 부분. 현존하는 고려불화 중 관음보살을 주제로 한 작품은 제법 많은 편 이다. 그 중에서도 <수월관음도>라는 이름을 가진 작품은 여럿 있는데, 지금 소개하고 있는 이 작품은 1310년에 그려진 것으로 현존하는 <수월관음도> 중 최대의 크기를 자랑하며, 연대가 알려진 것 중 제일 오래된 것이다. 필자 가 이 작품을 처음 보았을 때, 그 아름다운 미소에, 화려한 색감에 숨이 멎는 듯했고, 세간에서 그간 받았던 모든 상처가 일시에 치유되는 듯한 착각을 받았었다.
<수월관음도>가 품은 사연 - 왕숙비 김씨의 발원
세계를 놀라게 한 고려불화의 백미 <수월관음도>, 이 위대한 작품을 보고 있노라면 시간을 초월한 저 보살의 미소 덕분에 감상자 스스로가 무장해제되고 종교와 회화의 접점의 구현 속에서 탈세간적 평화를 맛보게 된다. 그런데 이처럼 위대한 작품은 어떤 배경으로 세상에 나온 걸까? 서양의 많은 종교화가 교회의 주문에 의해 제작되었듯이, 이 작품 역시 사찰의 주문에 의해 제작되었던 걸까? 이 궁금증을 풀기 위해서 우리는 한 일본인의 기록을 들여다봐야 한다. 이노 타다다카(伊能忠敬). 일본의 김정호라 할 수 있는 그는 일본전도를 완성하기 위해 노력했던 인물이다. 그가 남긴 <측량일기, 1812년 편>에 보면 이 작품에 얽힌 약간의 사연이 나온다. 기록에 따르면 본시 이 작품은 1310년 5월 즈음에 완성되었고 10월 정도에 일본의 카가미신사로 옮겨 온 것이라고 되어 있는데, 특히 다음의 문구가 우리의 눈을 사로잡는다. "願主王叔妃(원주왕숙비)". 여기서 '원주'라는 말은 '발원자'를 뜻한다. 그러니까 이 그림이 그려지기를 원하여 제작 의뢰한 사람을 뜻한다는 애기다. 그리고 "왕숙비"는 글자 그대로 왕비를 뜻하니, 이 그림이 고려 숙비에 의해 제작된 것임을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왕숙비'는 누구며, 그녀는 무슨 사연으로 저런 대작을 발원할 걸까? <고려사 89권, 후비2>에 보면 그녀에 대한 기록이 나온다. 김취려 장군의 증손녀인 그녀는 3남 5녀 중 일곱째인데 매우 빼어난 미모를 가졌다고 한다. 애초에 결혼을 했다가 남편의 사망으로 미망인이 되었던 그녀는 고려 충렬왕(忠烈王, 1236~1308)의 아버지 눈에 들어 후궁이 되었는데, 그가 죽자 다시 그의 아들인 충렬왕이 그녀를 취했다고 한다. 그러니 결혼을 무려 3번이나 한 기구한 운명의 소유자였던 거다. 한 번 운명이 기구하면 끝까지 그 삶은 기구한 것일까? 세 번째 결혼으로 충렬왕과 신혼 살림을 차렸던 그녀는 그리 오래지 않아 충렬왕의 죽음으로 또다시 홀몸이 되고 말았다. 서방에 대한 죽음. 이에 대한 그녀 심정은 어땠을까? 우리는 여기서 <수월관음도>가 제작된 결정적 원인을 추정하게 된다. 전문가들의 견해에 따르면 <수월관음도>가 제작된 데는 약1년 정도의 시간이 들었을 거라는데, 완성 시기가 1310년 5월인 것이다. 이 시기는 충렬왕의 삼년상(三年喪)이 되는 시기와 매우 정확하게 일치한다. 그러니까 우리는 이러한 시기 일치를 통해서 이 작품이 왕숙비 김씨가 자신의 남편 삼년상을 기념하기 위해 1년 전부터 준비했던 작품이라고 추정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이런 추정을 통해 저 작품이 왕숙비의 애처로운 사연을 품고 태어났다고 판단할 수 있는 거다.
<수월관음도의 본래 크기>
고려 여인의 애처로운 사연을 품고 태어난 <수월관음도>. 이 작품을 보면서 우리는 또 다른 의문을 가지게 된다. 이 글 맨 위에 올려 놓은 그림을 자세히 보면, 보타락가산에 앉은 관음보살과 선재동자 사이에 자연스럽지 못한 훼손이 눈에 들어오는데 그 이유가 궁금한 것이다. 보다 쉬운 이해를 위해 다음의 그림을 보도록 하자.
필자가 파란색으로 원을 길게 그려놓은 부분에 주목하자. 선재동자(파란색 머리를 한 어린이)와 관음보살 사이가 매우 협소하여 보는 이로 하여금 불편하게 하고 있으며, 또 이 둘 사이에 박락(剝落)이 다른 공간에 비해 유독 심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맨 위에 올려 놓은 전체 그림을 보면 관음보살의 머리와 그림 끝부분 사이가 충분하지 않아 구도에 답답함을 주고 있다는 것도 확인할 수 있다. 다른 고려불화에 비해 유독 이 작품만이 인물배치와 구도에 이런 아쉬움을 주고 있는데, 그 이유는 무엇일까? 이러한 의문을 풀기 위해 우리는 다시 이노 타다다카(伊能忠敬)의 <측량일기>를 봐야 한다. 이 일기는 <수월관음도>의 원래 크기가 높이 1장 8척(540cm), 너비는 9척(270cm)이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러니까 우리에게 알려진 크기보다 원래 높이가 약1m가량 더 높았고, 너비도 20cm 정도 더 넓었던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오늘날 보는 작품은 본 크기가 아니며, 일본인들에 의해 축소된 크기라 할 수 있겠다. 애초 고려 여인의 애처로운 사연을 품고 태어났던 <수월관음도>가 그녀의 기구한 운명을 이어 받은 채 일본으로 건너가 이처럼 축소되고 말았으니 그 아픔이 지금 우리에게도 그대로 전달되고 있다고 하겠다.
고려인들의 독창적인 미의식
작품 설명 : <수월관음도> 중 하단 부분. 대자대비한 관음보살의 발도 이처럼 귀엽게 생겼다. 우리는 이런 장면을 통해 대중과 멀게만 느껴지는 초월적 존재를 친근하게 느낄 수 있는 거다.
우리는 <수월관음도>를 통해 이 작품이 제작되던 당시의 고려인들이 어떤 미의식을 가지고 있었는가에 대해 파악할 수 있다. 위에 올려 놓은 부분 확대 그림을 보면 관음보살이 입고 있는 의상이 매우 화려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여기서 재미있는 것은 <수월관음도>가 인간의 시선을 끄는 방식에 있다. 서양 회화는 주로 다양한 색을 혼재하여 강렬한 느낌으로 인간의 시선을 끈다. 하지만 <수월관음도>는 주로 원색 계열의 흑, 황, 적, 백, 청 등의 오색만 이용하여 화려한 느낌을 자아내고 있는 것이다. 일본의 '정수성지보(井手誠之輔)'는 <고려시대의 불화>에서 풍부한 고명도의 색채와 뛰어난 농담 구사의 특징을 '궁정양식'으로 분류하고 있다. <수월관음도>의 회화적 우수성은 바로 이러한 '궁정양식'으로 그려진 대표적 사례라 할 수 있다. 그리고 '궁정양식'에는 디테일한 문양 묘사도 포함하고 있는데, 관음보살의 붉은 의상에 새겨진 문양이 거북 껍질 무늬를 하고 있으며, 상하대칭으로 타원형 연화문이 곱게 새겨져 아름다움을 더해주는 것이 그야말로 궁정양식의 작품으로 손색이 없는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 작품에서 확인되는 아름다움은 관음보살이 상의 위로 입고 있는 투명 너울에 있다. 부분 확대한 이 그림에서는 투명 너울 속으로 본 의상이 비치고 있지만, 저 위에 올려 놓은 원작을 보면 관음보살의 머리에서부터 어깨로 흘러내리며 하늘거리는 투명 너울의 아름다움이 정확하게 인지되는 것이다. 직조 기술에 매우 능했던 고려인들은 저렇게 속살이 비치는 투명 너울을 만들 줄 알았는데 그 세련된 의상을 관음보살에게도 입힌 것이다. 불교회화에서 투명 너울이 보이는 사례는 전 세계에서 오로지 고려불화만의 것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표현 기법이 고려인들 특유의 매우 독창적인 미의식에 따른 것이라는 점도 꼭 기억해주기 바란다.
관음보살과 선재동자
작품 설명 : <수월관음도>의 선재동자 부분. 귀여운 선재동자가 천진난만한 표정으로 자애로운 관음보살을 향해 합장하고 있다. 진리를 구하는 이 아이에게 관음보살은 대자대비한 마음으로 깨달음을 전해 준다. 이때 선재동자가 받은 깨달음은 무엇이었을까? 애욕에 짓눌려 사는 성인들의 세계로부터 벗어나 원융무애한 삶을 사는 그런 방법에 대한 것이었을까? 아니면 가녀린 것을 자비로 대해야만 비로소 온전한 존재가 된다는, 그런 일상의 진리였을까? 시간의 흐름이 선재동자의 손과 다리, 그리고 앞발 부분을 가져가 버렸다. 그러나 이미 집착과 애욕을 버린 선재에게 이런 상실이 무슨 문제일까? 이미 그는 온화한 미소를 머금고 저 파르미타의 세계를 바라보고 있을텐데.
<수월관음도>의 종류는 여럿 이지만 지금 소개한 1310년 작을 비롯한 대부분의 <수월관음도>에는 '선재동자'가 공통으로 등장한다. 그렇다면 선재동자는 과연 누구일까? 불교 경전 중 하나인 《화엄경(華嚴經)》,〈입법계품(入法界品)〉에 나오는 이 아이는 일체의 진상(眞相 : 사물이나 현상의 거짓 없는 모습이나 내용)을 알고자 문수보살(文殊菩薩)의 안내를 받으며 천하를 주유한 인물이다. 이 아이는 세상을 돌면서 다양한 스승을 만나는데, 신기하게도 이런 기행에 대한 서술구조는 훗날 프랑스의 소설가 생떽쥐베리가 집필한 <어린왕자>의 서술구조와 매우 유사한 것이다. 어린왕자가 진정한 친구를 찾아 편력의 길을 떠났듯이 선재동자는 진리를 찾아 구도의 길을 떠났고, 어린왕자가 다양한 행성의 사람들을 만나는 것처럼 선재동자는 다양한 스승을 만났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결론 부분에서 어린왕자가 깨달은 '마음'에 대한 내용이 선재동가 깨우친 깨달음과 매우 유사하다. 선재동자는 마지막 보현보살과의 만남을 통해, 사욕에 가려진 마음의 눈을 뜨고 나면 티끌만한 미물에게도 우주가 담겨 있음을 알게 된다는 깨달음을 얻었다. 진정으로 보기 위해서는 눈으로 보지말고 마음으로 봐야 한다던 여우의 가르침과 매우 비슷하다. 어쨌든 선재동자는 여행의 마지막에서 보현보살(寶賢菩薩)을 만나 십대원(十大願 : 불교에서 말하는 열 가지 큰 서원)을 들은 후 극락정토에 왕생(往生)하여 입법계(入法界 : 진리의 세계에 들어 가는 것)의 뜻을 이루었다고 전해진다. 세파에 시달려 본성을 잃어버린 어른에게 어린왕자의 교훈은 생각보다 낯선 것이듯, 마음만 깨끗하게 하면 작은 티끌 속에서도 우주를 볼 수 있다는 선재동자의 깨달음 역시 우리 어른에게는 매우 낯선 것이다. 이처럼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진리의 세계는 어른의 마음보다 어린이의 마음을 더 닮았나 보다.
작품 설명 : 원성스님의 작품. 어린왕자 못지 않게 귀여운 이 아이가 동방의 어린왕자인 선재동자다.
<수월관음도>에 등장하는 선재동자는 이처럼 화엄경 속에 등장하는 어린왕자였다. 그렇다면 <수월관음도>의 주인공이라 할 수 있는 '관음보살'은 누구일까? 산스크리트어로 '아바로키테슈바라(Avalokiteśvara)'인 그는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이란 명칭으로 우리에게 익숙하다. 관세음(觀世音)이란 글자를 보면 알 수 있듯이, 그는 세상의 소리를 관조하면서 대중을 살핀다. 세상에 존재하는 아픔의 소리, 고통과 절망에 사로잡혀 울고 있는 이들의 소리를 애처롭게 관조하면서 그들을 돕고자 서원을 세운 보살이 바로 관세음보살(줄여서 '관음보살'이라고도 한다)인 것이다. 따라서 예로부터 민중들은 부처에 귀의하는 것 못지 않게 관음보살에 귀의하기를 좋아했다.(특히 우리나라의 경우 신라 원효대사에 의해 '정토사상'으로 이 관음신앙이 수용되면서 매우 융성해졌다) 이렇게 해서 융성해진 보살신앙은 중국과 한국, 일본 등의 동북아 3국은 물론, 캄보디아를 비롯한 여러 동아시아 지역에 퍼지면서 오랜 세월 사람들의 사랑을 받고 있는 것이다. 관음신앙이 오래된 만큼 그에 관한 내용도 풍성하다. 흔히 '천수천안'이라 하여 천 개의 눈과 천 개의 손을 지니고 있다고 하는데, 이 많은 눈과 손으로 사바세계의 대중들을 보살핀다는 내용, 자애로운 여성성을 하면서도 악을 상대할 때는 매우 무서운 남성적 이미지를 보인다는 내용 등등은 관음에 대한 민중들의 애착이 반영된 결과이리라. <수월관음도>에 등장하는 관세음보살 역시 선재동자를 매우 자애롭게 바라보고 있다. 아마, 이 그림을 발원한 숙비 김씨는 자신의 기구한 운명을 저 관세음보살이 달래 줄 것으로 믿었으리라. 그리고 자신을 두고 먼저 떠난 남편이 극락정토로 갈 수 있도록 저 대자대비한 관세음보살이 도와 줄 것으로 믿었으리라. 그런 큰 소원을 짊어지고 있는 관세음보살에게 우리의 선재동자가 진리를 달라며 보채고 있으니 그 모습이 아련하면서도 귀엽기만 하다.
◎ 글을 맺으면서
긴 시간이다. 글을 쓰는 일은 언제나 그렇듯 길고 긴 시간을 요구한다. 저녁 식사를 하기 전, 사진모임회원들이 출사를 나오라며 부추기는 전화마저 외면한 채 쓰기 시작한 이 글이 밤 열시에 즈음하여 마무리되고 있다. 필자는 사람들이 우리의 문화예술에 더욱 깊게 다가갈 수 있도록 돕고자 하는 마음에서 이 못난 글을 쓰기 시작했지만, TV, 컴퓨터 게임, 친구들과의 술자리 등으로 말미암아 언제나 바쁜 이들에게 이런 글은 쓸데없이 길고 읽기 불편할 뿐 그 이상의 의미는 없는 건지도 모르겠다. 이런 염려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 글을 끝까지 쓴 것은 그만큼 필자가 우리 예술에 품는 마음이 간절하기 때문이다. 저 아름다운 고려불화나 그 외의 매우 우수한 한국미술작품들이 정작 우리에게 외면당한 채 외국에서 우수한 평가를 받고, 그런 후에야 다시 우리가 주목을 하면서 가치를 재발견하는 오늘이 매우 안타깝다. 혹, 이런 안타까움에 공감하는 이가 있다면 이 글을 주의 깊게 읽으면서 우리 예술을 음미해보라고 권하고 싶다. 글을 쓰는 동안 어려운 어휘들, 특히 예스러운 표현들은 쓰지 않으려고 애를 썼으며, <수월관음도> 이미지는 최대한 도판에 가까운 색을 보이고자 디지털 편집을 통해 색온도를 맞추었다. 이런 약간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읽기가 불편하고 보기가 좋지 않다고 느끼는 이가 있다면 이는 순전히 필자의 무능함 때문이지 우리 예술에 문제가 있어서 발생하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혹 이 글을 읽고 나름의 느끼는 점이 있어 우리의 예술을 가까이 해야겠다고 마음 먹는 이가 있다면 이는 순전히 우리 예술이 우수하다는 것을 알아본 여러분의 안목 덕분이지 필자의 글이 좋아서 생긴 결과는 아닐 것이다. 어쨌든 이제 그만 글을 맺어야겠다. 어깨도 아프고, 무엇보다도 손가락이 아리어 더 쓰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이제 좀 쉬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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