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히 겨울 산행은 쓸쓸하다고 합니다. 봄에는 꽃이 피고 여름에는 녹음이 우거지며, 가을에는 단풍이 우리를 반기지만 겨울에 우리를 반기는 것은 추위와 앙상한 나무가지와 눈이 고작이기 때문이지요. 하지만 설산이 나름대로의 운치도 있습니다. 눈이 온 바로 다음 날 가면 더욱 동화같은 세상을 맛볼 수 있지만 그렇지 않더라도 눈이 다 녹지 않은 산을 오르노라면 마음이 포근해지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래서인지, 겨울산행의 쓸쓸함을 더욱 느끼게 한 어제 1/11일 산행은 실로 오래간만의 '나홀로 산행'이었습니다. 년초가 되서인지 아니면 우연히도 중요한 스케쥴과 겹쳤는지 회원들의 참여가 없었습니다. 너무 하시는구먼...-_-;;
2. 우이동 아카데미 하우스
지하철 4호선 수유역에서 아카데미 하우스행 마을버스를 탔습니다. 배낭을 매고 타는 분들이 몇 사람 보입니다. 4.19탑 주변에는 웬 음식점들이 이리도 많은지, 날이 갈 수록 늘어나는 추세입니다. 이제는 4.19 국립묘지로 승격이 되있습니다. 무척 다행스러운 일입니다.
마을버스 종점인 아카데미 하우스는 몇 번 와서 식사를 했지만 참 좋은 장소에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산으로 길이 막혀있고 바로 옆에 북한산 매표소가 있고, 이따금 마을버스가 들어오는 조용한 곳입니다. 하지만 날 따듯해지고 주말이면 결혼식이다, 회갑/고희 잔치의 손님들로 매우 혼잡한 곳이기도 합니다.
하여간 대학 후배가 산행에 온다고 해서 10시까지 기다렸습니다. 하지만 전화도 없는 것으로 봐서 필시 간밤의 동문회에서 과음으로 못 일어났을 것이란 생각이 들어서 더이상 기다리지 않고 산행을 시작했습니다. 그 후배, 다음에 만나면 죽음입니다. ^^
3. 대동문 가는 길
이쪽 코스로는 처음 와보는 산행이었습니다. 조용하고 사람들도 별로 없고 아주 조용하니 좋더군요. 봄이 되면 이 진달래 능선은 아마 사람들 무척 많을 것입니다. 등산로 양쪽으로 진달래 나무가 많이 있더군요. 봄에 진달래 피면 아이들과 산책이나 와야겠습니다. 산길은 아직 눈이 녹지 않아서 미끄러운 편이나 아이젠 끼지 않고 그런대로 갈 수 있었습니다.
대동문까지는 약 1시간이 걸렸습니다. 천천히 여유있게 걸었는데도 등에는 땀이 나서 속옷이 다 젖어버렸습니다. 잠시 쉬면서 가지고 간 따듯한 녹차를 꺼내 마셨습니다. 겨울산에서 따듯한 차가 역시 최고입니다.
여기서 잠시 북한산성에 대하여 제가 조사해서 퍼온 글(조선일보 연재기사)을 보고 넘어가죠.
북한산성은 백제가 하남위례성(河南慰禮城)에 도읍을 정하였을 때 도성을 지키는 북방의 성으로 132년(개루왕 5)에 축성(築城)되었습니다. 이때 백제군이 이 성에서 고구려의 남진을 막았으며, 그뒤 근초고왕의 북진정책에 따라 북벌군의 중심요새가 되었습니다. 1232년 고려 고종 때는 이곳에서 몽골군과의 격전이 있었고, 현종은 거란의 침입을 피하여 이 성에 태조의 재궁(梓宮)을 옮긴 일도 있는데 이때 성의 중축(重築)이 있었고, 1387년 우왕 때는 개축공사가 있었습니다. 조선시대에 와서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등 외침을 자주 당하자 도성 외곽성의 축성론이 대두하여, 1711년(숙종 37) 왕명으로 대대적인 축성공사를 시작하여 석성(石城) 7,620보(步)가 완성 되었습니다.
이 북한산성의 축성에 지대한 공헌을 한 사람이 전주이씨 124개 파중의 한 파인 세종의 다섯째 아들 광평대군파(廣平大君派) 10대 후손인 녹천(鹿川) 이유(李濡:1645~1721)입니다. 조선시대 서울 시장인 한성판윤을 20명이나 배출했다는 이 집안은 연임한 경우도 많기 때문에 이 기간까지 계산하면 총 40대에 걸쳐 한성판윤을 배출한 집안입니다. 다른 벼슬보다도 유달리 한성판윤이 많았던 배경에는 왕손집안이라는 책임감도 간접적으로 작용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왕궁과 종묘사직이 자리잡은 수도 한양을 지키고 관리하는 것은 국가 일이기도 했지만, 자기 집안 일이기도 했던 것이죠. 이 집안에서 손꼽는 인물인 녹천(鹿川) 이유(李濡)는 숙종때 한성판윤을 거쳐 영의정을 지냈는데 그의 대표적인 업적은 서울을 방어하는 북한산성 축조였습니다. 국가 사업에 그냥 이름만 내건 게 아니라, 조정의 온갖 반대의견을 무릅쓰고 몸을 던져 이뤄낸 역사(役事)였습니다. 수도 방위가 중요하다는 사실은 임진왜란 때 증명됐는데 왜군이 쳐들어올 때 왕실에서는 전투다운 전투 한번 해보지도 못하고 수도를 넘겨줘야만 해서 서울 함락은 두고두고 시비 거리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나온 대안이 남한산성 축조였고 평지보다는 험준한 산세를 이용한 산성에다 거점을 두고 서울을 방어하는 것이 더 유리하다는 판단에서였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쌓은 남한산성도 안전하지 못했죠. 1636년 병자호란 때 청나라 군사에게 포위 된지 45일만에 항복하고 말았으니까요. 병자호란의 치욕을 맛본 조정에서는 서울 북쪽을 방어할 수 있는 산성 구축을 생각했으나 실천에 옮기지는 못했습니다. 반대가 그만큼 심했는데 반대파의 요점은 3가지로 동대문과 남대문으로 이어지는 기존 도성(都城)을 고수해야 한다는 주장과 함께 북쪽에 산성을 쌓으면, 청나라에서 자신들을 겨냥한 것으로 여기고 가만히 있지 않을텐데 그 의심을 어떻게 피해갈 것인가 하는 문제와 난공사라서 노동력과 돈이 많이 들어간다는 점도 강력한 반대이유였습니다.
청나라의 의심을 피해가기 위한 묘안으로 녹천은 "있는 성을 보수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답변을 준비했습니다. 녹천이 이 묘안을 생각해 내자 그동안 청나라의 문책을 두려워하던 조정 대신들은 비로소 북한산성 축조에 동의했고 녹천은 북한산성 축조에 솔선수범을 보였습니다. 산성 축조가 국가의 거대한 프로젝트였던 만큼 당연히 국가예산을 사용해서 공사를 진행했지만, 산성의 필요성을 가장 강력하게 주장했을 뿐 아니라 당시 영의정으로서 공사의 총책임자였던 만큼 자신이 뭔가 모범을 보여야 한다는 책임을 느꼈을 것입니다. 현재 지하철 1호선 '녹천역'은 녹천의 호를 따서 지은 이름이다. 녹천은 북한산성 축조 당시 이곳에 살다시피하면서 공사를 독려했습니다. 녹천의 가족과 노비를 비롯한 친인척들도 공사 인부들의 밥을 해주고 생필품을 측면에서 지원하느라 이곳을 자주 드나들었습니다. '녹천골'이라는 이름이 붙은 것은 그 때문입니다.
녹천의 11대 종손인 이병무(李丙武·58)씨의 증언에 의하면 이때 들어간 이 집안의 사재가 대략 쌀 300석 규모라고 합니다. 이런 솔선수범이 있었기 때문에 반대여론을 설득할 수 있었던 것이죠. 그가 사재를 털면서까지 북한산성 축조를 고집한 배경에는 왕가로서의 긍지와 사명감, 도덕적 책무가 상당부분 작용하였다고 여겨집니다. 지하철 '창동역'도 북한산성 공사때 소요된 기자재 창고가 있던 곳이라고 해서 생긴 이름입니다. '평창동'이라는 지명도 마찬가지로 북한산성과 서울 도성 사이의 중간 지점이 현재의 평창동인데, 이곳에는 유사시 북한산성에서 사용할 군량미를 저장하던 창고인 '평창(平倉)'이 설치되어 있던 곳이었습니다.
4. 맛있는 점심
대동문을 지나 백운대로 향했습니다. 성벽을 오른쪽으로 끼고 가는 길은 수월했습니다. 동장대에 도달하니 갑자기 배가 고파지더군요. 동장대 밑으로 내려가서 자리를 잡고 도시락을 꺼냈습니다. 와이프가 토요일 저녁에 이것저것 점심 반찬을 준비하더니 많이 싸주었더군요. 냉이무침, 다시마/초고추장, 김치, 오이무침, 꽈리고추 멸치볶음. 펴보는 순간 와이프의 정성이 느껴지는 맛있는 반찬을 보고 매우 행복했습니다. 먼저 따듯한 녹차를 한 잔 마시고 식사를 했습니다. 냉이무침이 향이 아주 좋더군요. 초고추장에 찍어 먹는 다시마 역시 별미고요. 뭐니뭐니해도 김치가 빠지면 안되겠죠. 적당히 익어서 먹기 좋은 김치가 아주 개운했습니다. 싱싱한 오이무침이 사각사각 씹는 맛이 그만이었고 꽈리고추의 약간 매운 맛이 입맛을 돋굽니다. 아... 배도 부르고 담배를 한 대 피우면 금상첨화겠는데 아쉽네요. 참아야지 어쩝니까...
5. 백운대 가는 길
날도 포근해서 산행하기에는 아주 좋은 날이었습니다. 기온이 아침에 영상 0.4 도 였으니 봄 날씨였죠. 눈이 녹아서 질퍽거리는 길을 따라 가다보니 17야영장이 보이고 다시 길은 눈길로 미끄러워집니다. 아이젠 끼기가 귀찮아서 계속 버티고 갔습니다. 하지만 위문 못 미쳐서는 길이 험하고 아이젠이 없이는 위험하더군요. 할 수 없이 아이젠을 착용하고 갔습니다. 길이 좁아서 한 쪽에서 가면 반대쪽은 기다려야하는 그런 길이었습니다. 그런 길을 아이젠도 없이 일반 운동화 신고 가는 사람도 있더군요. 대단한 사람들입니다. 쇠줄을 잡고 가는 길이라 오늘 아침에 일어나니 어깨쭉지가 좀 뻐근했습니다. 마침내 위문에 도착했습니다. 일단 한 숨을 돌리고 백운대를 바라보았습니다. 여기는 사람이 많아서 길이 매우 밀립니다. 도로에서 차만 밀리는게 아니라 산에서 산길이 정체가 되는군요. 백운대는 여러번 올라갔었기 때문에 이번에는 생략했습니다. 그러고 보니, 기억에 백운대는 항상 겨울에만 올라가본 것같습니다.
6. 하산길
이제부터는 하산길입니다. 역시 하산길은 올라가는 길보다 힘이 듭니다. 관절에 통증도 서서히 오기 시작하고. 그래도 아이젠이 있어서 비교적 위험하지는 않았는데 아이젠이 바위에 닿을 적마다 관절이 아프더군요. 깔딱고개가 휴식년제로 2005년 말까지 금지가 되있습니다. 그래서 옆으로 하루재고개로 하산을 했습니다. 뭐, 그리 돌아가는 느낌이 안 들정도로 비슷한 거리 같습니다. 이어서 도선사 주차장을 거쳐 우이동으로 하산했습니다. 전에는 고향산천이 있던 그 자리는 지금은 어느 돈 많은 교회에서 샀더군요. 그래서 한동안 등산로를 막았다가 사람들의 항의로 다시 개방을 해놓았습니다. 그 고향산천을 보고 내려오는 길에 있는 목련나무가 몇 그루 있는데 벌써 새순이 돋아나와서 몽오리가 막 벌어지려고 합니다. 봄소식은 역시 목련이 가장 빠르군요.
혼자 하는 산행이라 조금 심심했지만 그런대로 좋은 산행이었습니다. 가보지 않은 코스로 새로운 길을 가 본 것도 좋았고 날씨 좋았습니다. 버스종점 전에 길거리 포장마차에서 따듯한 홍합 국물에 동동주 몇 잔 마셨습니다. 담배도 맛있게 피우고요. 산행후의 또 한가지 맛이라면 바로 이런 맛이 아닐까요. 누가 옆에 있으면 더 좋았을텐데... 다음 달의 산행에는 많은 분들이 참가 했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