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아대책이 올해로 설립 25주년을 맞았습니다. 기아대책에서 매월 발행되고 있는 소식지에서도 25주년의 역사를 고스란히 볼 수 있습니다. 1992년 12월부터 263권이 발행된 <월간 기아대책> (1989년 기아대책 설립이후 초기 3년 동안은 <생명의 양식>이라는 제호로 3개월에 한 번씩 발행되던 소식지가 있었지만, 공식 출판물로 등록된 것은 1992년 12월호부터이다.)에는 기아대책의 사업소식을 알리고 후원자들과 소통하는 통로역할을 했습니다. 이번에는 과거 회보 기사를 통해 기아대책 역사를 살펴보려고 합니다.
동전 한 닢도 소중히 <사랑의 밥그릇>
|1. 1993년 <월간 기아대책> 1부의 구독료는 100원이었다. (지금은 무료로 배포하지만, 상당기간 구독료를 받아 발송되었다.) 당시 100원을 가지면 학교 앞 문방구에 가서 아폴로, 쫀드기, 밭두렁 등 간식 몇 가지를 거뜬히 살 수 있었다. 때문에 10원, 50원, 100원, 500원짜리 동전모금은 지금보다 훨씬 가치 있고 효과적인 모금운동이었다.
|2. <사랑의 밥그릇>은 1992년 처음 일회용 저금통을 제작하여 배포한 것을 시작으로 초기 5년 동안 400만 여개를 배포했다. 저금통 모금 후에는 엄청난 양의 동전분류와 계수작업이 간사들을 기다렸다.
밥그릇 저금통은 지금도 배포되고 있다. 올해도 약 6만 개의 저금통이 어린이집과 점포들을 대상으로 배포된다. 모금액도 연간 약 10억원 가량으로 결코 적지 않다. 동전이 사라지지 않는 한 사랑의 밥그릇도 영원히 존재하리라. (저금통 후원문의: 02-2085-8227)
달리고, 달리고, 17년을 달렸다! <자선달리기>
|3~5. 1991년 5월 처음 시작 된 자선달리기는 2007년까지 자그마치 17년 동안 계속됐다. 누구도 이렇게 오랫동안 달릴 줄 예상하지 못했다. 서울에서 처음 열린 자선달리기가 92년 부산, 93년 대전 등 전국적으로 확산됐다. 자선달리기대회가 열리던 올림픽주경기장에는 많은 학생과 가족 참가자들로 항상 붐볐다. 당시 자선달리기 2부 행사에서는 최고의 가수들이 콘서트를 열어 행사의 열기를 더해주었다. 2007년을 끝으로 이듬 해 부터는 “한톨나눔축제”라는 이름의 청소년 자원봉사축제로 행사의 형태가 바뀌었지만, 자선나눔축제의 명맥은 올 해까지 계속 이어지고 있다.
2007년 마지막 자선달리기가 열렸을 때, 2만명이 넘는 학생들이 참석했고 그동안 자선달리기를 거쳐간 사람은 전국적으로 약 40만명 정도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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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션NGO 전문요원의 양성소 <기아봉사단 훈련 시작>
|6. 1993년 2월15일~24일까지 기아봉사단 1단계 훈련이 처음으로 실시됐다. 대로우밀러(국제기아봉사단 부총재), 게리 워멜스도프(국제 기아봉사단 디렉터), 스티브코베트(국제기아봉사단) 등 국제기아대책의 강사들이 방문하여 당시로서는 파격적으로 모든 강의가 영어로 진행되었다. 사람들의 참여를 유발하는 토론식 수업방식으로 훈련생들에게 많은 생각의 전환이 일어났다. 초창기 훈련생들은 신학생, 사역자 뿐 아니라 대학생, 교수, 직장인 등 다양한 분야의 사람들이었다. 기아봉사단 훈련 역시 계속 된다. 그리고 훈련의 문은 모두에게 열려있다. 더 많은 기아의 대변자들을 길러내는 것이 기아대책의 목적이기 때문이다.
(기아봉사단 훈련문의:02-2085-8149)
이젠 PC로도 후원금을 납부할 수 있습니다! <시대와 함께 변화하는 후원금 납부>
|7~9 1990년대부터 2000년대까지 세상이 이토록 빠른 속도로 변한 적이 없었다. 그리고 그런 사회적 변화를 이끈 선두주자는 누가 뭐래도 정보화기술의 발달이다. 정보화기술의 발달에 따라 후원금의 납부방식도 달라지고 다양해 졌다. 초기에는 지로를 통해 은행에 직접방문해서 후원금을 납부해야만 했지만 나중에는 PC통신을 통해서도 납부가 가능해 졌다.
1998년 기아대책에도 드디어 인터넷시대가 열렸다. 도메인주소 kfhi.or.kr의 인터넷 홈페이지가 개설되었고, PC로도 후원금을 납부할 수 있게 되었다. ‘이젠 PC로도 후원금을 납부할 수 있습니다!’라는 문구와 ‘먼저 PC가 있어야합니다’라는 요건이 지금 볼 땐 우수꽝스러워 보이지만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변화였을지도 모른다. 요즘은 인터넷뱅킹, 모바일뱅킹 등 보다 다양한 서비스를 통해 후원금을 납부할 수 있으니 참 편리하다. 앞으로 얼마나 더 변화할지 궁금해진다. 한 가지 더 흥미로운 것은, 93년 입금계좌 목록상의 한일, 상업, 제일, 조흥, 주택, 서울신탁 등의 은행들은 지금은 사라지거나 합병되어 없는 이름들이다.
기아대책 대표번호 이야기 <544-9544의 의미는?>
|10. 기아대책 대표번호는 02-544-9544 이다. 이 번호에 뜻이 있을까. 기아대책에서 오랫동안 일한 직원들은 알고 있지만, 젊은 대다수의 직원과 오랜 후원자들도 이 번호의 의미를 잘 모른다. ‘구호하고 살린다’라는 의견, ‘본부 건물이 있던 강남 쪽 전화번호에 맞추다 보니 그렇게 되었다(강남 5번으로 시작)’는 의견, ‘오소서, 구하소서’라는 의견 등 그동안 몇 가지 추측들이 있어왔다. 정답은 1993년 2월호에 실린 기사를 통해 확인할 수 있었다. 吾死死-救!吾死死. 해석해보면 ‘나,죽네 죽어~ 구해줘요! 나,죽네 죽어’절실함이 묻어나는 표현이다.
|11~13 한편 기아대책 사무국은 서울 강남의 사무실 한 귀퉁이에 팩스 1대와 전화기 2대를 설치하고 출발했다. 이후 몇 차례의 이사를 거쳐 지금은 서울 강서구 염창동에 소재하고 있다. 아무래도 10년 넘게 둥지를 틀고 있었던 강남구 청담동 111번지를 많은 분들은 잊지 못한다.
* 기아대책 주소의 변천 : 서초구 잠원동 29-11(1989년) / 강남구 신사동 638-10번지(1993년) / 청담동 111번지(1999년) / 강서구 염창동 267-23번지 (2011년)
언제나 효과만점 모금방송 <10시간 특별 생방송>
|14. 기아대책의 모금활동 중 빠질 수 없는 것이 모금방송이다. 그동안 라디오, TV 등 다양한 매체를 통해 모금방송을 진행해왔다. 과거 모금방송하면 모금함 뒤로 길게 늘어선 줄이 가장 먼저 떠오른다. 기아대책도 본사, 방송국, 롯데백화점 영등포점, 종로서적 등 주요 지점에 모금함을 설치하고 현장모금을 실시했다. 1995년 12월, 10시간 특별생방송으로 진행된 모금방송에는 ‘방송을 듣다가 당장 성금 할 것이 없어 물려받은 반지를 갖고 나오신 아주머니, 한 달 용돈 전부를 송금하겠다는 여고생’ 등 다양한 사연의 후원자들이 모금에 동참했다. 소중한 후원의 마음들이 끊어지지 않고 계속되는 것이 항상 흥미롭다.
![](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www.kfhi.or.kr%2FAdmin%2Fupload_img%2Fimages%2F000007%2F20140901212008406_1JSPHJE8.jpg)
기아대책을 이끈 리더십 <기아대책 역대 회장님 열전>
|15. 기아대책은 그동안 네 명의 회장을 거치며 성장해왔다. 과거 회보 속에서 이들의 땀방울과 비전의 글을 많이 발견할 수 있었다. 초대 회장을 역임한 故 최태섭 회장(89년~93년)에 대해 윤남중 목사는 ‘최태섭 회장은 영적, 지적, 정신적, 도덕적으로 훌륭한 지도자였다. 최태섭 회장은 사람들을 대할 때 무제한으로 포용하는 바다와 같은 사람이었다.’(13주년 기념 칼럼에서)고 회고한다.
2대 강성모 회장(94년~97년) 재임당시에는 르완다, 일본고베지진 구호팀 파견으로 본격적인 긴급구호사업에 앞장섰고, 국내 지역마다 지역본부가 개설되어 기아대책이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1997년 말 부터는 기아대책의 설립자인 윤남중 목사가 2005년까지 8년 동안 회장으로 재임했다. 그는 부드럽고 온화한 성품으로 기아대책 사역이 예수님의 방법대로 올바른 방향을 향하고 성장하도록 이끌었다. 그리고 2005년부터 가장 최근까지 기구를 이끈 4대 故 정정섭 회장. 온 몸과 맘을 다해 가장 역동적이고 힘 있는 사역으로 오늘의 기아대책이 있기까지 주도적으로 사역했다.
어느 단체나 그렇듯 초창기 조직의 기반은 리더십으로부터 온다. 그런 면에서 기아대책은 훌륭한 리더를 가진 행복한 단체이다. 앞으로도 기아대책 리더들의 열정행전이 풍성하게 이어지기를 기대한다.
<다시 읽는 명칼럼> 96년 7주년_최태섭 명예회장의 글
기독교 정신을 한마디로 압축한다면 나는 사랑이라고 생각한다. 그렇기 때문에 기독교가 사회에 의미를 준다면 그것은 역시 크고 강한 실천을 할 때라고 생각한다. 하나님의 형상을 받고 태어난 삶이 굶주림 때문에 목숨을 잃는다는 것은 인간에 대한 존엄성의 기초를 흔드는 일이 아닐 수 없다. (중략) 나는 한국국제기아대책기구 초대 회장이었다. 다른 많은 일들에도 불구하고 이 일을 시작한 것은 바로 이 인간의 존엄성 때문이었다. (중략) 지구의 한 구석 어디에선가 당장 생존이 절실한 문제인 사람들이 고통받고 있다는 사랑을 잊지 말아야 한다. 쓰러져 일어나지 못하고 있는 사람에게는 건강한 사람이 내미는 손이 커다란 힘이 된다.
언제나 현장 속으로 <발빠른 재해재난 긴급구호>
|16~18 기아대책은 재난이 발생하면 누구보다 먼저 달려갔다. 90년대에는 르완다 난민사태(94년), 코소보 긴급구호(99년) 등에 의료지원팀을 파견하는 활동을 했다. 2000년대에는 매 해 대형 재난이 발생하여 전 세계인의 마음을 안타깝게 했다. 2001년 페루 부터 시작해서 이란(03년), 파키스탄(05년), 중국(08년) 등지에 대형 지진이 빈번하게 발생했다. 아프가니스탄(01년)과 이라크(03년)에서는 전쟁난민을 돌보는 사역과 긴급의료팀사역이 필요했다. 그리고 2004년에는 전 세계를 놀라게 했던 동남아시아 해일지진으로 인한 피해현장에서 활동했다. 가장 최근으로는 필리핀 태풍피해 현장과 시리아 난민들을 위한 긴급구호를 진행했다.
기아대책 회보의 역사
기록은 기억을 지배한다는 광고카피처럼, 소중한 기록들은 우리의 삶을 더 풍성하고 의미 있게 만든다. 창립기념 25주년을 맞이한 2014년 9월호부터 <기아대책>은 판형과 지면을 키우고 보다 다양하고 전문적인 이야기를 담아 개편했다. 대신 매 달 발행되던 방식에서 격월 발행으로 변경된다. 소식지 <기아대책>은 기아대책의 역사와 계속 함께 할 것이다.
개편된 새로운 소식지는 9월부터 만나보실 수 있습니다. 후원자님들도 앞으로도 계속해서 소식지 <기아대책>에서 더욱 다양한 이웃들의 이야기에 관심가져주시길 부탁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