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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해랑길 고창 43코스 역방향 제2부
서정주생가-미당시문학관-서당마을-질마재-연기재-연기제-연기마을-
연기교-삼인교차로-선운사풍천교차로-선운교-선운산도립공원 관광안내소
20230322
1.눈물처럼 후두둑 지는 동백 꽃길을 따라
미당 서정주 생가를 살피고 미당시문학관을 찾아갔다. 문학관 전시실은 9시에 문을 열기에 관람할 수 없다. 시문학관 뜰 탁자에서 아침을 먹은 뒤 진마마을(질마재마을)을 거슬러 올라갔다. 질마재마을 길에는 미당 서정주의 시집 <질마재 신화>에서 질마재마을 사람들과 관련이 깊은 시들을 바탕하여 조형물을 조성하고 시 작품들을 소개하고 있다. 그 작품들을 음미하며 탐방하려면 시간이 많이 걸린다. 바삐 달아나는 일행들을 뒤좇아가면서, 건성건성 사진을 찍으며 조각작품들과 내용물을 훑었을 뿐이다. 상가수(上歌手), 알뫼댁, 설막동(薛莫同)이네 과부, 간통사건(姦通事件)과 우물 등 질마재마을에서 예전에 일어난 일들이 인간의 원초적 정서처럼 풋풋하게 느껴졌다.
서당물길을 따라 서당마을로 올라가는 길, 홍매화와 청매화가 흐드러지게 피어 있다. 봄날의 아침빛을 받아 매화꽃은 눈부시게 반짝거린다. 화사한 빛과 은은한 매향으로 눈과 머릿속을 맑히며 소요산 북쪽 자락에 아늑하게 자리한 서당마을 앞에 이르니 당산목으로 보이는 세 그루 나무가 그윽한 형상을 그리며 하늘로 솟아 있다. 서당마을 입구 맞은편 민가 부부에게 느티나무가 맞느냐고 물으니 모른다고 하며 아마도 느티나무일 것이라 한다. 이 주민은 이곳 토박이가 아니고 분명 외지에서 이곳으로 옮겨온 부부일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 느티나무가 질마재마을의 당산목 느티나무일 것이며, 미당 서정주 시인의 '堂山나무 밑 女子들' 작품의 배경이 되는 나무일 것이라 생각하지만 확실하지는 않다. 이 작품에서, 질마재마을의 여인들은 연애를 못하다가 4, 50대에 남편들이 저승으로 떠난 뒤에야 동백기름에 粉세수를 하며 연애를 하여, 이른 새벽 그네 房에서 숨어나오는 사내가 새빨간 코피를 흘린다고 미당은 천연덕스럽게 이야기한다. 이는 堂山의 무성한 암느티나무의 힘이 뻗쳐서 그런다는 것이다. 질마재마을의 당산목700살 된 암느티나무는 어디에 있을까? 서당마을 입구의 느티나무 3그루가 질마재마을의 堂山나무가 맞을까?
서당마을을 지나 질마재로 오른다. 질마재는 소금농사를 업으로 살아가는 심원 사람들이 좌치나루터에서 소금짐을 지고 부안면 중흥리 알뫼장터로 가는 고갯길이었다고 한다. 질마재는 소금짐을 지고 쉬어넘던 고개로, 성황당이 있는 소금샘은 잠시 쉬어가며 밥을 해먹었던 장소로 아직도 샘터가 남아 있다고 한다. 그 질마재를 넘는다. 가뭄 탓에 계곡물은 말라 있다. 질마재 가는 고갯길은 급경사는 아니며 완만하다. 초목들은 아직 겨울의 모습이지만 봄을 맞이할 준비에 열중이다. 갈색의 숲에 푸른 기운이 돌고 있음을 분명히 느낀다. 군데군데 진달래꽃이 연분홍으로 피어서 길손의 마음을 밝혀 주며 지난 시절 이 고갯길을 넘나들던 소금짐 사람들 모습을 떠올리게 한다. 아마도 동학농민군도 소요산 자락의 이 고개를 넘나들며 활동했을 것 같다. 그래서 소요산 남쪽 자락 연기마을에서 차경석이 탄생하여 동학교에서 파생한 신흥종교 보천교를 열었을 것이다.
질마재에서 소요산 자락길을 걸어 소요사 갈림목인 연기재에 이르렀다. 이곳에서는 가슴을 도려낸 수강산이 한눈에 들어온다. 석산 개발에 의해 부안면의 신령스러운 수강산 가슴이 잘려나간 모습에 길손의 가슴이 저릿저릿하다. 다시 수강산 정상까지 잘라낼 석산 개발 사업이 확장되고 있다니 이제 수강산은 머리와 가슴이 없는 허수아비 산으로 전락할 운명에 처해 있다. 이제는 나가다오. 내 가슴을 도려내고 내 목을 잘라낼 석산 개발업체여, 제발 여기서 그쳐다오. 내 목과 머리는 온전히 두고서 제발 내게서 나가다오. 수강산이 외치는 소리가 연기재에 메아리친다.
연기재에서 연기저수지로 내려가는 임도는 동백가로수길이다. 동백나무에는 짙붉은 홑동백꽃이 활짝 피어 하늘을 물들이고 있다. 생명을 끊은 동백꽃이 모가지째 땅바닥에 떨어져 있는 모습이 슬프다. 문정희 시인은, "천길 절벽 위로 뛰어 내리는 사랑/ 가장 눈부신 꽃은/ 가장 눈부신 소멸의 다른 이름이라(문정희의 '동백'에서)"고 붉은 동백꽃의 낙화를 가장 눈부신 소멸이라 노래했다. 그리하여 더 구체적으로 생명의 아름다움 속에 순간의 소멸을 꽃 피우는 동백꽃을 가혹한 확신주의자라고 노래했다. 동백꽃은 뜨거운 피의 혁명주의자 같다는 생각이 든다. "나는 저 가혹한 확신주의자가 두렵다// 가장 눈부신 순간에/ 스스로 목을 꺾는/ 동백꽃을 보라// 지상의 어떤 꽃도/ 그의 아름다움 속에다/ 저토록 분명한 순간의 소멸을/ 함께 꽃 피우지는 않았다(문정희의 '동백꽃'에서)"
가혹한 확신주의자의 모가지가 눈부시게 소멸하여 있는 동백꽃길, 송창식 가수가 노래한 '눈물처럼 후두둑 지는' 동백꽃길을 따라 소요산과 사자봉 사이의 계곡길을 따라 연기저수지로 내려갔다. 이곳의 동백나무는 추백, 동백, 춘백 중 봄날에 피는 춘백(春柏)이어서 동백꽃이 늦게 피어올랐다. 아직도 맑은 붉음으로 피어오르는 동백꽃은 사랑의 열정을 불태우는 듯하다. 눈물 같은 동백꽃길에서 뜨거운 동백꽃 사랑을 안고 연기저수지 둑방으로 내려갔다. 둑방에서는 저수지 아래의 효자바위공원과 연기마을이 한눈에 들어온다. 마을 아주머니에게 연기마을 뜻을 물으니 스님이 길을 잃었다가 연기가 나는 마을을 보고서 길을 찾아 이곳이 연기(煙氣)라는 지명을 얻게 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마을 지명 유래 및 다른 설명에서는 모두 연기조사(烟起祖師)가 연기사(烟起寺)를 지어 이곳 마을이 연기(烟起)마을이며, 연기사 터(烟起寺址)는 연기저수지에 의해 수몰되었다고 한다. 연기마을을 煙起라고 적은 곳도 있으며, 어느 자료는 연기조사를 연기조사(緣起祖師)라고 기록해 놓았다. 어느 것이 확실할까? 이 지역에서 지명의 한자를 확실히 기록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길손은 이 마을 이름이 연기가 피어오르는 연기(煙氣)마을이 어울릴 것 같다. 연기마을 앞으는 인천강(주진천)이 흐르는데 이 마을 사람들은 장수강이라 이른다. 이 장수강에 나루터가 있었다고 한다. 강나루가 있고 마을에 연기가 피어오르는 풍경, 마을의 평화가 절로 감각된다. 달리 煙起라는 지명도 괜찮을 것 같으며 연기(烟起)마을이 가장 격에 어울리지 않을 것 같다.
연기마을 연기길에는 살구꽃이 흐드러지게 피어나고 있다. 이호우 시인의 "살구꽃 핀 마을은 어디나 고향 같다."는 살구꽃 핀 마을이 연기마을처럼 느껴져 누구라도 만나면 등이라도 치고 싶다. 먼 청동기 시대의 유물 고인돌이 유서 깊은 마을의 증거처럼 놓여 있고, 강나루 풍천장어 음식점이 낭만처럼 강나루 언덕에 자리하고 있다. 인천강(주진천)의 연기교를 넘어 아산면 삼인리로 넘어갔다. 풍천장어 음식점들이 즐비하다. 풍천(風川)은 강물과 바닷물이 만나는 곳을 이르는 보통명사이다. 선운사 입구에서 곰소만으로 흘러가는 인천강 일대가 바람이 서해 바닷물을 몰고 들어와 민물과 바닷물이 만나는 대표적인 풍천(風川) 지역이며, 그래서 이곳의 풍천장어(風川長魚)를 일급으로 꼽는다고 한다. 풍천장어와 복분자를 오래 전에 먹은 기억이 있지만, 장어를 즐기지 않는 탓에 풍천장어와 복분자는 길손에게서 멀리 떨어져 있다. 그런데 고창 이곳에서는 보통명사인 풍천(風川)을 고창의 지명 '풍천(風川)'으로 사용하고 있다. 선운사 풍천교차로, 풍천터널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다.
선운사 풍천교차로를 지나 선운천의 선운교를 건너 선운산도립공원으로 들어선다. 선운산 도솔봉이 손짓하고 그 아래 선운사 동백나무숲이 펼쳐져 있다. 선운산도립공원 관광안내소 앞에서 21km가 넘는 43코스를 역방향으로 끝낸다. 별빛 흐르는 밤, 곰소만 남쪽 해안과 내죽도, 질마재마을의 미당 생가, 진마안길의 조형물들과 시 작품들, 질마재마을의 당산나무와 질마재 이야기, 연기재에서 내려오는 눈물처럼 후두둑 지는 동백꽃길, 연기마을의 살구꽃과 고인돌, 인천강과 풍천장어, 새벽부터 지금까지 걸어온 길이 먼 시절의 이야기나 되는 듯 아득하게 그리움으로 밀려온다.
2.탐방 과정
전체 탐방 거리 : 22.46km 중 9.96km
전체 소요 시간 : 5시간 44분 중 2시간 50분
서정주 생가는 2001년 10월 1일 복원하였다고 한다.
질마재시인마을 복합문화공간이 미당시문학관 앞쪽 아래에 조성되어 있다.
뒤쪽에 예전에는 '쇠산'이라 불렸던 소요산이 우뚝하다. 1998년 3월 1일에 폐교된 봉암초등학교 선운분교를 리모델링하여 미당시문학관이 2001년 1월 3일 개관하였다고 한다.
내 마음 속 우리 님의 고운 눈썹을/ 즈믄 밤의 꿈으로 맑게 씻어서/ 하늘에다 옮기어 심어 놨더니
동지 섣달 날으는 매서운 새가/ 그걸 알고 시늉하며 비끼어 가네 - '동천(冬天)' 전문
미당 탄생 일백주년을 기념하여 2015년에 '冬天' 시비가 세워졌다.
오전 9시에 전시실을 열기 때문에 관람하지 못하였다.
오른쪽 뒤에 소요산이 우뚝하다. 소요산은 쇠산, 삼신산이라고도 불린다.
미당시문학관 뜰 탁자에서 아침을 먹고서 출발한다.
미당시문학관 입구에서 질마재마을 맞은편의 변산반도 곰소만과 내변산 산줄기를 조망하였다. 오른쪽 송현리 안현마을 언덕은 미당의 선영으로 미당과 우하의 무덤이 있는 것 같다.
"질마재 상가수(上歌手)의 노랫소리는 답답하면 열두 발 상무를 젓고, 따분하면 어깨에 고깔 쓴 중을 세우고, 또 상여(喪輿)면 상여(喪輿) 머리에 뙤약볕 같은 놋쇠 요령 흔들며, 이승과 저승에 뻗쳤습니다./ 그렇지만, 그 소리를 안 하는 어느 아침에 보니까 상가수(上歌手)는 뒷간 똥오줌 항아리에서 똥오줌 거름을 옮겨내고 있었는데요. 왜, 거, 있지 않아, 하늘의 별과 달도 언제나 잘 비치는 우리네 똥오줌 항아리,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지붕도 앗세 작파해 버린 우리네 그 참 재미있는 똥오줌 항아리, 거길 명경(明鏡)으로 해 망건 밑에 염발질을 열심히 하고 서 있었습니다. 망건 밑으로 흘러내린 머리털들을 망건 속으로 보기 좋게 밀어 넣어 올리는 쇠뿔 염발질을 점잔하게 하고 있어요./ 명경(明鏡)도 이만큼은 특별나고 기름져서 이승 저승에 두루 무성하던 그 노랫소리는 나온 것 아닐까요?" - 서정주의 '상가수(上歌手)의 소리' 전문
'상가수'란 사람이 죽고 상여가 나갈 때 노래를 부르는 사람으로, 죽은 사람을 이승에서 저승으로 보내주는 역할을 한다. 그런데 이 상가수가 평소에는 똥오줌 항아리를 거울 삼아 망건 밑의 머리를 정리하고 있다. 상가수의 이런 특별한 행동에서 이승과 저승을 이어주는 깊은 노랫소리가 나온다고 생각하고 있다.
질마재 상가수(上歌手)의 노랫소리는 답답하면 열두 발 상무를 젓고, 따분하면 어깨에 고깔 쓴 중을 세우고, 또 상여(喪輿)면 상여(喪輿) 머리에 뙤약볕 같은 놋쇠 요령 흔들며 맨 앞에서 산과 들을 누비고 다니는 모습을 표현하였다. - 조각가 정춘표
"알뫼라는 마을에서 시집 와서 아무것도 없는 홀어미가 되어 버린 알묏댁은 보름사리 그뜩한 바닷물 우에 보름달이 뜰 무렵이면 행실이 궂어져서 서방질을 한다는 소문이 퍼져, 마을 사람들은 그네에게서 외면을 하고지냈읍니다만, 하늘에 달이 없는 그믐께에는 사정은 그와 아주 딴판이 되었읍니다./ 陰 스무날 무렵부터 다음 달 열흘까지 그네가 만든 개피떡 광주리를 안고 마을을 돌며 팔러 다닐 때에는 「떡맛하고 떡 맵시사 역시 알묏집네를 당할 사람이 없지」 모두 다 흡족해서, 기름기로 번즈레한 그네 눈망울과 머리털과 손 끝을 보며 찬양하였읍니다. 손가락을 식칼로 잘라 흐르는 피로 죽어가는 남편의 목을 추기었다는 이 마을 제일의 烈女 할머니도 그건 그랬었읍니다./ 달 좋은 보름 동안은 外面당했다가도 달 안 좋은 보름 동안은 또 그렇게 理解되는 것이었지요./ 앞니가 분명히 한 개 빠져서까지 그네는 달 안 좋은 보름 동안을 떡 장사를 다녔는데, 그 동안엔 어떻게나 이빨을 희게 잘 닦는 것인지, 앞니 한 개 없는 것도 아무 상관없이 달 좋은 보름 동안의 戀愛의 소문은 여전히 마을에 파다하였읍니다./ 방 한 개 부엌 한 개의 그네 집을 마을 사람들은 속속들이 다 잘 알지만, 별다른 연장도 없었던 것인데, 무슨 딴손이 있어서 그 개피떡은 누구 눈에나 들도록 그리도 이뿌게 만든 것인지, 빠진 이빨 사이를 사내들이 못 볼 정도로 그 이빨들은 그렇게도 이뿌게 했던 것인지, 머리털이나 눈은 또 어떻게 늘 그렇게 깨끗하게 번즈레하게 이뿌게 해낸 것인지 참 묘한 일이었읍니다." - 서정주의 '알묏집 개피떡' 전문
질마재를 배경으로 계피떡을 만들어 마을 어귀에서 쪼그리고 앉아서 파는 여인의 모습을 표현하였다.
"이 땅 위의 장소(場所)에 따라, 이 하늘 속 시간(時間)에 따라, 情들었던 여자나 남자를 떼내 버리는 방법에도 여러 가지가 있겠읍죠./ 그런데 그것을 우리 질마재 마을에서는 뜨끈뜨끈하게 매운 말피를 그런 둘 사이에 쫘악 검붉고 비리게 뿌려서 영영 정떨어져 버리게 하기도 했습니다./ 모시밭 골 감나뭇집 설막동(薛莫同)이네 과부는 마흔에도 눈썹에서 쌍긋한 제물香이 스며날 만큼 이뻤었는데, 여러 해 동안 도깝이란 별명의 사잇서방을 두고 田畓 마지기나 좋아 사들인다는 소문이 그윽하더니, 어느 저녁엔 대사립門에 인줄을 늘이고 뜨끈뜨끈 맵고도 비린 검붉은 말피를 쫘악 그 언저리에 두루 뿌려 놓았습니다./ 그래 아닌게 아니라, 밤에 등불 켜 들고 여기를 또 찾아 들던 놈팽이는 금방에 정이 새파랗게 질려서 「동네방네 사람들 다 들어보소.....이부자리 속에서 정들었다고 예편네들 함부로 믿을까 무섭네……」 한바탕 왜장치고는 아조 떨어져 나가 버렸다니 말씀입지요./ 이 말피 이것은 물론 저 신라(新羅) 적 김유신(金庾信)이가 천관녀(天官女) 앞에 타고 가던 제 말의 목을 잘라 뿌려 情떨어지게 했던 그 말피의 효력(效力) 그대로서, 이조(李朝)를 거쳐 일정초기(日政初期)까지 온 것입니다마는 어떨갑쇼? 요새의 그 시시껄렁한 여러 가지 이별의 방법들보단야 그래도 이게 훨씬 편하기도 하고 좋지 않을 갑쇼?" - 서정주의 '말피' 전문
서해랑길은 '도깨비집' 조각품 왼쪽 진마안길 58 방향으로 이어진다.
사잇서방을 두고 여우 같은 과부가 도깨비 방망이 차고 야반도주하는 형상을 해학적으로 표현하였다. - 조각가 정춘표
'도깨비집' 조각품이 있는 곳에서 왼쪽 진마안길 58 방향으로 이어간다.
오른쪽에 조각품 '우물터', 왼쪽에 복원한 우물터가 있다.
새와 나무들이 평화롭게 한데 어울려서 산과 들판 골짜기를 배경으로 마르지 않는 생수(폭포)를 형상화하여 표현하였다.
우리 생명의 원천은 물입니다. 삼년 가뭄에도 마르지 않는다는 샘입니다. 언제부터 있었는지 상고 때부터 있었을 것입니다. 소식의 교환과 여론의 발상터였지요. 미당 선생은 이 샘에 얽힌 이야기를 소재로 '간통사건과 우물'이라는 시를 쓰셨습니다.
"간통사건(姦通事件)이 질마재 마을에 생기는 일은 물론 꿈에 떡 얻어먹기같이 드물었지만 이것이 어쩌다가 주마담(走馬痰) 터지듯이 터지는 날은 먼저 하늘은 아파야만 하였습니다. 한정 없는 땡삐 떼에 쏘이는 것처럼 하늘은 웨-하니 쏘여 몸써리가 나야만 했던 건 사실입니다./ "누구네 마누라허고 누구네 남정(男丁)네허고 붙었다네!" 소문만 나는 날은 맨 먼저 동네 나팔이란 나팔은 있는 대로 나와서 '뚜왈랄랄, 뚜왈랄랄' 막 불어자치고, 꽹과리도, 징도, 소고(小鼓)도, 북도, 모조리 그대로 가만 있진 못하고, 퉁기쳐 나와 법석을 떨고, 남녀노소(南女老少), 심지어는 강아지 닭들까지 풍겨져 나와 외치고 달리고, 하늘도 아플밖에는 별 수가 없었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아픈 하늘을 데불고 가축(家畜) 오양깐으로 가서 가축용(家畜用)의 여물을 날라 마을의 우물들에 모조리 뿌려 메꾸었습니다. 그러고는 이 한 해 동안 우물물을 어느 것도 길어 마시지 못하고, 산(山)골에 들판에 따로따로 생수 구먹을 찾아서 갈증(渴症)을 달래어 마실물을 대어 갔습니다." - 서정주의 '간통사건(姦通事件)과 우물' 전문
'간통사건(姦通事件)과 우물' 시는 개인의 잘못을 마을 사람들 모두의 잘못으로 인식한 오랜 전통을 표현한 것이라고 한다.
서해랑길은 오른쪽 서당물길을 따라 이어진다. 서당물길이 무슨 뜻일까? 서당물은 서당리(書堂里) 지명을 이른다.
"서당물[일명 서당리(書堂里)] 남쪽에 법고낭골 등의 골짜기가 있고, 서당물에서 부안면 검산리 쇠점으로 넘어가는 고개인 질마재[일명 안현(鞍峴)]가 있다. 서당물 앞에 지형이 구유처럼 생긴 구숫들, 서당물 동남쪽에 독네들 등의 들이 펼쳐져 있다. 서당물 남서쪽에 더운바우, 더운바우 위에 노적가리 모양의 노적바우, 노적바우 위에 산기슭에 툭 불거져 솟은 불근바우가 있다. 선운리는 진마리·신흥리 2개의 행정리와 진마·신흥·서당 등의 자연 마을로 이루어졌다. 서당은 선운 동남쪽에 있는 마을로 예전 서당이 있어서 붙인 이름이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당산나무' 조각품이 있어서 이 느티나무가 당산목인 줄 알았는데, 서당마을 앞에 있는 느티나무가 당산나무로 보였다.
'당산나무' 조각품 앞에서 소요산 바로 아래에 있는 서당마을을 향하여 서당물길을 따라 올라간다.
신목으로 신성시되는 당산나무, 질마재의 신화를 품고 있는 당산나무를 전체의 통일감에 맞추어 당산나무를 원의 형태로 감싸고 도는 따뜻한 모녀의 모습으로 형상화하였다. - 조각가 김동헌
서당물길 길가에 호랑가시나무가 자라고 있다.
호랑가시나무 자잘한 꽃망울이 잔뜩 부풀어올라 곧 피어날 태세이다. 꽃말은 '가정의 행복', '평화', '청렴'이라고 한다. 행복과 평화를 지키기 위해서는 이를 해치는 것들을 막기 위해 가시 같은 방어도구가 필요하나 보다.
소요산이 솟아 있다. 왼쪽에 보이는 마을이 서당마을일 것이다.
서당마을 가는 서당물길 길가에 청매화꽃과 홍매화꽃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다.
이곳이 서당마을이며 이 느티나무가 질마재 당산나무일 것이라고 판단한다.
"질마재 堂山나무 밑 女子들은 처녀 때도 새각씨 때도 한창 壯年에도 戀愛는 절대로 하지 않지만 나이 한 오십쯤 되어 인제 마악 늙으려 할 때면 戀愛를 아조 썩 잘 한다는 이얘깁니다. 처녀 때는 친정부모 하자는 대로, 시집가선 시부모가 하자는대로, 그 다음엔 또 남편이 하자는대로, 진일 마른일 다 해내노라고 겨를이 영 없어서 그리 된 일일런지요? 남편보단도 그네들은 응뎅이도 훨씬 더 세어서, 사십에서 오십 사이에 는 남편들은 거이가 다 뇌점으로 먼저 저승에 드시고, 비로소 한가해 오금을 펴면서 그네들은 戀愛를 시작한다 합니다. 朴푸접이네도 金서운니네도 그건 두루 다 그렇지 않느냐구요. 인제는 房을 하나 온통 맡아서 어른 노릇을 하며 冬柏기름도 한번 마음껏 발라 보고, 粉세수도 해 보고, 金서운니네는 나이는 올해 쉬흔 하나지만 이 세상에 나서 처음으 로 이뻐졌는데, 이른 새벽 그네 房에서 숨어나오는 사내를 보면 새빨간 코피를 흘리기도 하드라구요. 집 뒤 堂山의 무성한 암느티나무 나이는 올해 七百살, 그 힘이 뻗쳐서 그런다는 것이여요." - 서정주의 '堂山나무 밑 女子들' 전문
진마마을 진마안길을 따라오다가 서당물길로 들어서서 그 길을 따라 올라왔다. 맞은편은 부안군 변산반도이다.
오른쪽 앞의 집 너머에 송현리 안현마을과 언덕의 미당 선영, 건너편에 부안군 변산반도의 내변산 산줄기가 조망된다.
중앙 왼쪽에 선운저수지가 있다.
질마재로를 따라 왼쪽 위 선운제 옆을 거쳐 올라간다.
왼쪽은 선운리 질마재마을, 오른쪽은 송현리 안현마을이다. 바다 건너 변산반도 왼쪽 끝은 궁항일 것이라 가늠한다.
질마재로를 따라가다가 오른쪽 소요산 자락골짜기 산길로 진입한다.
"仙雲里는 전라북도 고창군 부안면에 속하는 법정리. 선운리는 마을 앞에 포구가 있어서 선운포(仙雲浦)라고 명명한 것에서 기원하였다. 조선 말기 흥덕군 이서면과 부안면에 속했던 지역으로, 1914년 4월 1일 조선총독부령 제111호에 따라 부안면의 구룡리(九龍里)·신흥리(新興里) 일부, 이서면 선운리를 병합하여 선운리라 하고 고창군 부안면에 편입하였다. 구룡동 동쪽에 귀영다래, 독내들 밑에 남생이 모양의 남생잇골, 서당물[일명 서당리(書堂里)] 남쪽에 법고낭골 등의 골짜기가 있고, 서당물에서 부안면 검산리 쇠점으로 넘어가는 고개인 질마재[일명 안현(鞍峴)]가 있다. 모양이 길마처럼 생겨 붙인 이름이다. 서당물 앞에 지형이 구유처럼 생긴 구숫들, 서당물 동남쪽에 독네들 등의 들이 펼쳐져 있다. 서당물 남서쪽에 더운바우, 더운바우 위에 노적가리 모양의 노적바우, 노적바우 위에 산기슭에 툭 불거져 솟은 불근바우가 있다. 선운리는 진마리·신흥리 2개의 행정리와 진마·신흥·서당 등의 자연 마을로 이루어졌다. 서당은 선운 동남쪽에 있는 마을로 예전 서당이 있어서 붙인 이름이다. 신흥는 선운 동쪽에 있는 마을이고, 진마는 질마재 밑에 있어 붙인 이름이다. 부안면 송현리의 안현은 옛 흥덕현에 속했으므로 흥덕질마재, 선운리의 안현은 옛 고부군에 속했으므로 고부질마재라 한다. 선운리 앞 바닷가에 선운포 터가 있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질마재로에서 소요산 골짜기 진입 지점에 이정목이 세워져 있다. 그런데 이정목 날개 방향이 잘못되어 있다. 미당시문학관 방향은 오른쪽, 소요사는 직진 방향이어야 한다.
질마재로에서 소요산 골짜기로 진입하면 입구에 개인 주택이 있다. 그 앞을 통과하며 골짜기로 올라간다.
질마재로에서 소요산 골짜기로 진입하여 개인 주택 앞에서 질마재마을과 곰소만을 내려보았다.
질마재로에서 소요산 골짜기로 오르는 입구에 개인 주택과 묘지가 있으며, 아래에는 선운저수지가 있다.
질마재 바로 아래에 질마재 안내판이 설치되어 있다.
이야기가 있는 문화생태탐방로 제3코스 질마재길 : 소금짐 지고 쉬어쉬어 넘던 질마재, 소요산 자락을 넘어 선운리에 이르는 약 2km의 구간으로 질마는 소나 말의 안장을 뜻하는 길마의 사투리이다. 소금농사를 업으로 살아가는 심원 사람들이 좌치나루터를 넘어와 부안면 중흥리 알뫼장터에서 곡물과 교환하는 데 꼭 필요한 길이었다. 성황당이 있는 소금샘은 잠시 쉬어가며 밥을 해먹었던 장소로 아직도 샘터가 남아 있다. 서정주의 「질마재 신화」로 더 유명한데, 사오십년을 신혼 첫날밤의 자세로 앉아 기다린 신부를 고향으로 비유해, 회귀의 정서로 심금을 울리고 있다.
"新婦는 초록 저고리 다홍치마로 겨우 귀밑머리만 풀리운 채 新郞하고 첫날밤을 아직 앉아 있었는데, 新郞이 그만 오줌이 급해져서 냉큼 일어나 달려가는 바람에 옷자락이 문 돌쩌귀에 걸렸습니다. 그것을 新郞은 생각이 또 급해서 제 新婦가 음탕해서 그 새를 못 참아서 뒤에서 손으로 잡아다리는 거라고, 그렇게만 알곤 뒤도 안 돌아보고 나가 버렸습니다. 문 돌쩌귀에 걸린 옷자락이 찢어진 채로 오줌 누곤 못 쓰겠다며 달아나 버렸습니다./ 그러고 나서 四十年인가 五十年이 지나간 뒤에 뜻밖에 딴 볼일이 생겨 이 新婦네 집 옆을 지나가다가 그래도 잠시 궁금해서 新婦방 문을 열고 들여다보니 新婦는 귀밑머리만 풀린 첫날밤 모양 그대로 초록 저고리 다홍치마로 아직도 고스란히 앉아 있었습니다. 안스러운 생각이 들어 그 어깨를 가서 어루만지니 그때서야 매운재가 되어 폭삭 내려앉아 버렸습니다. 초록 재와 다홍 재로 내려 앉아 버렸습니다." - 서정주의 '新婦' 전문(「질마재 신화」, 1975)
오른쪽에서 올라와서 오른쪽 소요산 자락길을 따라간다. 왼쪽 길은 부안면 검산리 창내저수지 방향이다.
왼쪽에서 올라와 소요산 자락길로 들어서서 질마재를 뒤돌아보았다. 오른쪽은 부안면 검산리 창내저수지 방향이다.
"검산리(劍山里)는 전라북도 고창군 부안면(富安面)에 속하는 법정리. 검산리는 검곡(檢谷, 劍谷)의 ‘검’자와 중산(中山)의 ‘산’자를 따서 검산(劍山)이라 하였다. 조선 말기 흥덕군 부안면에 속했던 지역으로, 1914년 4월 1일 조선총독부령 제111호에 따라 팽정(彭丁)·창내(倉內)·중산·장등(長嶝)·검곡·부귀(富貴), 이서면 신안(新安) 등을 병합하여 검산리라 하고 부안면에 편입하였다. 검곡 서남쪽에는 오산저수지(鰲山貯水池)가 있다. 검산리는 부안면의 동부에 있다. 검곡리·중산리·창내리 3개의 행정리와 검곡·부귀리[일명 부근이]·중산·장동[일명 진등]·창내[일명 창안]·쇠점 등의 자연 마을로 이루어졌다. 문화 유적으로는 검산리 창내토성 터가 있다. 검산리 위로는 지방도 734호선이 지나고 있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부안면 검산리 질마재에서 소요산 자락길을 따라 연기재로 내려간다.
소요산 자락길에서 연기재로 내려가는 입구의 이정목, 미당시문학관 2.8km, 선운사 7.5km 지점이다.
부안면 검산리 연기재 언덕에는 쉼터정자가 조성되어 있다.
위쪽으로는 소요산 소요사, 아래쪽은 질마재로 이어지는 질마재로이다.
부안면 검산리 수강산이 석산 개발로 몸통이 움푹 파여 있다. 수강산은 고려시대 세곡미와 무기를 보관하던 국내 최대의 창고가 있는 곳으로 추정되며, 석축과 토축 등을 쉽게 볼 수 있다고 한다. 수강산은 부안면들이 기우제를 지내는 등 마을에 우환이 있으면 산 정상에 올라 제를 지내는 영산으로 여기는데, 석산개발업체가 수강산 정상까지 석산 개발을 확장한다고 하자 부안면민들이 거세게 항의하고 있다고 한다.
연기재는 행정구역으로는 부안면 검산리에 속한다.
검산리에서 용산리로 넘어와 사자봉 자락의 임도를 따라간다. 이 임도는 동백나무가 가로수로 조성되어 있는 동백길이다.
"龍山里는 전라북도 고창군 부안면에 속하는 법정리. 용산리는 풍수지리상 마을 주위 산세가 용의 형국이므로 용산(龍山)이라 하였다. 조선 말기 흥덕군 이서면에 속했던 지역으로, 1914년 4월 1일 조선총독부령 제111호에 따라 용산·신덕(新德)·반정(盤亭)을 병합하여 용산리라 하고 고창군 벽사면에 편입하였고, 1935년 3월 1일 도령 제1호에 따라 부안면에 편입하였다. 용산리는 부안면의 남부에 있다. 연기리·용산리·용흥리 3개의 행정리와 자연 마을로 이루어져 있다. 연기동은 용산 서쪽에 있는 마을로 예전 연기사(烟起寺)가 있어서 붙인 이름이다. 연기동 북쪽 소요산에 신라 진흥왕 때 연기조사(緣起祖師)가 창건했다는 연기사 터가 있다. 문화 유적으로 진흥왕 때 창건한 소요사(消遙寺), 소요사 경내에 소요사 부도, 연기동에 선비 김공배(金公培)의 효행을 기려 1906년(고종 43) 내린 김씨정문(金氏旌門)이 있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소요산(逍遙山) 정상 바로 아래에 소요사(逍遙寺)가 있다.
이 동백은 봄에 꽃을 피우는 춘백 동백나무라고 판단한다.
홑동백꽃이 봄하늘을 붉게 물들인다. 사모의 정념이 느껴진다.
왼쪽 소요산 정상 바로 아래에 소요사가 보인다.
"소요산(逍遙山)은 전라북도 고창군 부안면 용산리와 선운리에 걸쳐 있는 산. 소요산은 소요대사가 창건한 소요사에서 따온 이름이다. 소요사는 풍수지리상 제비가 보금자리에 깃든 형상의 연소혈(燕巢穴)로, 소요산 목울대 부근[소요산 동쪽 암벽 아래]에 있다. 소요산의 별칭은 높이가 같은 경수산[경수봉]과 형제처럼 나란히 솟아서 형제봉으로 불리며, 두 개의 산중에서 하나가 흥하면 하나는 쇠퇴한다는 속설이 있다. 또 소요산의 형상이 붓끝처럼 뾰족해서 문필봉으로도 불리고 있다. 『흥덕현지』에 따르면, 옛날 소요산 산정에 기우제를 지내던 천제단이 있고, 북쪽은 취은처사 황세기와 귀암 황제중 부자가 시를 짓던 명옥대와 유선대가 있고, 남쪽에는 김하익의 효행 일대기를 담은 ‘백허당(白虛堂)’이 새겨진 효자바위가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소요산 동쪽에는 백제 위덕왕 때 소요대사가 창건한 소요사가 있다. 이 곳에 소요사를 창건한 소요대사, 연기사를 창건했던 연기조사와 도선선사 등 당대의 고승들이 머물렀다. 북쪽에는 미당 서정주의 고향인 부안면 선운리 진마마을에 미당시문학관이 있다. 소요산 주변에서 미당 서정주, 인촌 김성수, 보천교의 창시자 차경석 등이 태어난 곳이기도 하다. 서쪽에는 고창의 젖줄인 주진천[인천강]을 비롯한 선운산 도립공원 자락에 동백과 상사화로 유명한 선운사가 있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소요사(逍遙寺)는 전라북도 고창군 부안면 용산리에 있는 한국불교 태고종 소속의 사찰. 소요사(逍遙寺)의 창건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설이 있다. 첫째, 백제 위덕왕 때의 고승이던 소요대사(逍遙大師)에 의해 개창되었다는 설이다. 당시 소요대사는 이곳 소요사에서 큰 가르침을 깨닫고, 이름을 얻은 곳이라는 의미에서 산 이름도 소요산이라 불렀다고 한다. 두 번째 창건설은 지리산 화엄사와 천은사 및 연곡사를 창건했다는 연기조사(烟起祖師)가 소요사 바로 아래에 있는 연기사(烟起寺)를 창건하면서, 지금의 소요사 자리에 작은 암자를 짓고 수도했다는 설이다. 이 두 가지 창건설에 대해 현재 소요사에서는 연기조사의 창건설을 사실로 받아들이고 있다.
조선 시대가 되면서 수많은 선승들이 이곳 소요사에서 수도를 하였다고 한다. 그 가운데서 가장 대표적 수행자는 같은 시대 사람들인 진묵 일옥, 소요 태능이다. 이 두 승려가 이곳에서 수행함에 따라 인근의 승려들과 신도들이 법문을 들으려고 끊임없이 모여들었다. 이때 절의 규모도 상당히 번창했다고 한다. 태능이 중건한 시기는 1583년(선조 16)으로 전한다. 그러나 정유재란 때 왜군의 노략질로 당우들은 소실되고 겨우 요사만 남았다. 그 뒤 1644년(인조 22)에 승려 허기(虛機)가 중건한 대웅전은 조선 후기까지 존재했다고 한다. 그러나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권36 흥덕현 불우조와 『여지도서(輿地圖書)』 등에는 소요사에 대한 기록이 나타나지 않고, 1871년~1895년에 작성된 『호남읍지(湖南邑誌)』에는 소요암으로 나오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들 기록을 종합해 보면 소요암은 창건 이후 공식적으로 알려진 사찰이라기보다는 비공식적으로 알려진 사찰이고, 17~18세기를 전후해서 일시적으로 폐찰된 듯하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홑동백꽃이 단아하게 예쁘다.
연기(烟起)저수지가 대단히 넓다. 왼쪽 소요산과 오른쪽 사자봉에서 내려오는 물을 가두었다.
연기저수지 아래에 연기(烟起)마을, 백허당효자공원, 용산리 분청사기요지가 보인다. 백허당효자공원에는 고인돌에 白虛堂이 새겨져 있는 효자바위, 백허당(白虛堂) 김하익사적비, 백허당 김하익사적비 번역석, 흥효정(興孝亭)이 설치되어 있고, 그 위쪽 언덕에 용산리 분청사기 도요지가 있으며, 4개의 가마터가 있다고 한다.
"1648년(인조 26) 김하익(金夏翊)[1633~1697]이 16세 때 겨울날 어머니가 안질로 고생이 많았는데, 의원이 잉어의 쓸개가 좋다는 말을 하였다. 이에 김하익은 20리 떨어진 눈 덮인 장연강(長淵江)에 나가 얼음을 깨고 그 곁에 무릎을 꿇고 앉아 하늘에 기도를 올렸는데, 그 뜻이 하늘에 닿았던지 얼마 후 큰 잉어 한 마리가 튀어 올랐다. 잉어를 구한 김하익이 돌아오던 중 백호(白虎)를 만났다. 마침 늙은 중이 지나다가 왜 그런지 김하익에게 물었다. 늙은 중은 사연을 듣고 김하익에게 바위에 눈으로 ‘백허당(白虛堂)’이라는 글씨를 쓰면 백호가 살려줄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죽음을 면치 못한다고 하였다. 김하익이 눈물로 글씨를 쓰자 그의 효심에 감동한 중이 백호를 타고 사라져서, 다행히 모친의 병을 고칠 수 있었다. 그 뒤에도 눈물로 쓴 글씨가 지워지지 않았다고 해서, 효자바위라는 명칭이 붙었다. 훗날 김하익은 안성군수를 지냈다고 전해진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연기제(烟起堤)는 2009년 12월 30일 완공되었음을 알리는 표석이 세워져 있다.
백허당효자공원 입구에 세워진 안내판이다. 시간에 쫓겨서 이곳을 들르지 않고 일행과 함께 그냥 통과한다.
"연기도요지는 고려와 조선시대에 요업(窯業)이 활발하던 가마터로 총 네 기의 가마가 있었다. 1호기는 아궁이, 소성실, 굴뚝이 거의 완전한 형태로 보존돼 있다. 조선 전기 도자사와 가마의 천장부, 계단상의 소성실 등을 연구할 수 있는 귀중한 자료로 평가받고 있다. 바위에 새겨진 백허당(白虛堂)은 효자 김하익이 눈물로 쓴 글씨다. 부친의 병을 돌보기 위해 귀한 물고기를 잡아 돌아가던 김하익은 효자바위 근처에서 호랑이를 만나게 된다. 눈물로 백허당 세 글자를 새겨, 호랑이에게 풀려나게 된다."
연기(烟起)마을로 이어지는 연기길에는 살구나무가 가로수로 조성되어 있는데, 살구나무꽃들이 화사하게 피어나고 있다.
고인돌은 청동기 시대 지배자의 무덤이다. 위쪽으로 연기제(烟起堤)와 백허당효자공원 및 용산리 분청사기요지가 보인다.
연기길을 따라 선운하늘채펜션과 연기(烟起)마을 앞을 거쳐 인천강(주진천)의 연기교(烟起橋)로 향해 간다.
보천교(普天敎) 차경석(車京錫) 교주 생가터가 부안면(富安面) 용산리(龍山里) 연기교(烟起)마을에 있다.
"普天敎는 전라북도 고창군에서 활동하고 있는 증산교 계통의 신종교로, 전라북도 고창군 태생의 차경석(車京錫)(1880~1936)이 일제 강점기인 1911년에 강증산(姜甑山)을 신앙 대상으로 하여 전라북도에서 창시되었다. 보천교의 교리는 1928년 교강 변경 이전과 이후로 구분된다. 교강 변경 이전에는 강증산을 상제로 모시면서 당시 현실을 원(冤)이 가득한 상극의 시기로 보고 해원상생(解寃相生)의 후천선경을 지향한다. 그러나 변경 이후 보천교의 교리는 유교의 인의(仁義)에 기초하고 있으며 경천·명덕·정륜·애인의 네 가지를 강령으로 제시한다. 즉 인의를 실천하는 것이 인도(人道)의 처음이자 끝이라고 한다. 신앙의 대상은 삼광영(三光影)으로서 일(日)·월(月)·성(星)을 받든다. 의례는 사절후치성(四節候致誠)과 5회의 정례치성을 드린다. 교단에서 공식적으로 사용하고 있는 경전은 『대순전경(大巡典經)』을 비롯하여 『대도지남(大道指南)』·『교조약사(敎祖略史)』 등이다.
차경석(車京錫)(1880~1936)은 1880년 7월 전라북도 고창군 흥덕면 연기리(현 부안면 용산리)에서 출생한 인물이다. 한때 동학운동에도 가담했던 차경석은 1907년 전라북도 정읍에서 강일순(강증산)을 만난 후 제자가 되어, 이종 누나 고씨를 증산의 부인으로 맞아들이도록 주선하였다. 1909년 강일순이 죽은 후 1911년에 고부인 중심으로 선도교(仙道敎)(태을교)를 만들고, 1916년부터 교단 조직을 체계화하여 조직적인 포교를 시작하였다. 1921년 교명을 보화교(普化敎)로 개칭했으며 이듬해인 1922년 서울 창신동에 큰 건물을 짓고 교명을 보천교로 다시 개칭하였다. 1923년에는 서울에 인쇄소를 설치하여 『보광(寶光)』을 발행했고, 노동단체인 기산조합(己産組合)을 결성하였다. 1925년에는 최남선이 경영하던 『시대일보(時代日報)』를 인수하여 경영하였다. 그러나 1928년 보천교의 교강(敎綱) 변경 등 여러 요인으로 인해 교세가 위축되기 시작하였고, 1936년 교주 차경석이 사망한 뒤 조선총독부의 유사종교 해산령으로 교단 본부가 해체되었다. 1945년 해방 후 다시 교단이 조직되었지만 과거의 교세를 회복하지 못했고 신파와 구파로 분열되었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고창 지역의 식도락 음식을 소개하고 있다. 연기(烟起)마을은 콩나물국밥과 모싯잎 송편이 식도락 명품인 것 같다.
천년고찰의 기운이 흐르는 배산임수(背山臨水)마을 : 산 속에 은거하며 영험함을 지녔던 연기도사 설화에서 마을의 이름을 딴 연기마을은 배산임수(背山臨水)형 마을이다. 소요산과 주진천이 마을을 든든히 받치고 있다. 마을 뒤 소요산은 설화와 함께 백제 위덕왕 시절 창건한 천년고찰의 터가 발견된 곳이기도 하다. 연기마을의 대표음식은 콩나물밥이다. 연기마을의 콩나물은 천연유기황을 사용해 재배된다. 소나무에서 추출하는 천연유기황을 넣어 길어낸 콩나물로 밥을 짓는다. 표고버섯과 돼지고기를 더해 맛과 영양의 균형을 맞춘 튼실한 한 끼 식사이다. 마을에서는 모싯잎 송편을 만들어 볼 수 있다. 삶은 모싯잎을 찬물로씻은 후 물기를 꼭 짜서 절구에 찧은 후 쌀가루와 함께 반죽하고, 깨나 콩으로 만든 소를 넣어 송편을 빚어 솥에 찌는 과정을 체험한다. 모싯잎은 식이섬유와 칼슘, 아미노산 등이 풍부해 웰빙 식재료로 각광받고 있다.
연기제(烟起堤)에서 살구꽃 피어나는 연기길을 따라 연기마을을 거쳐왔다. 왼쪽에 풍천장어 강나루 음식점이 있다.
부안면(富安面) 용산리(龍山里)에서 연기교(烟起橋)를 건너 아산면(雅山面) 삼인리(三仁里)로 넘어간다.
주진천(舟津川)은 원래 인천강(仁川江)으로 불리다가 일제 강점기인 1911년 주진천(舟津川)으로 이름이 바뀌었다고 한다.
"주진천(舟津川)은 우리나라 남서부에 위치하는 지방 관리 하천으로서 심원면 용기리에서 서해안으로 유입되고, 중상류 유역은 대부분 농경지, 하류 유역은 대부분 산지로 형성되어 있는 지역이다. 주진천의 발원지는 고수면 은사리 수량동 명매기골에 있는 명매기샘이다. 주진천은 원래 인천강(仁川江)으로 기록되어 전해져 왔다. 일제 강점기인 1911년 행정구역을 개편하면서 배가 드나들었던 곳이라는 의미의 ‘배날’이에서 한자화된 주진(舟津)으로 지명이 바뀌었다. 그에 따라 인천강의 이름도 주진천으로 바뀌었다. 현재는 주진천이라는 명칭으로 각 행정 기관이나 사전 등에서 쓰이고 있다. 인천강(仁川江)이라는 지명은 『여지도서(輿地圖書)』에 등장하며, 일부 지형도에는 인천강을 주진천, 또는 장수강·인냇강 등으로 다르게 표기하고 있다. 조선 명종 때 이퇴계의 문하인 변성진(卞成振)이 이 강에 매료되어 아산초등학교 옆 강변에 두암초당을 짓고 형인 변성온과 함께 동문수학을 하였다. 학문을 닦을 당시 강물이 고창과 아산 지역에 자주 범람하자 물을 잘 다스려야 한다는 의미로 변성진(卞成振)의 호를 인천(仁川)으로 정하고 강 이름도 인천강으로 명명했다고 한다. 현재 고시 지명인 주진천을 인천강으로 일원화시키는 작업이 필요하다. 인천강은 역사적인 사료인 『여지도서』에 나오는 동시에 옛부터 지금까지 고창 군민들이 사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주진천(舟津川)의 본래 지명인 인천강(仁川江) 지명을 되찾고 인천강 정화 사업이 필요하다.
"1984년에 주진천 중류에 해당하는 아산면 용계리에 운곡댐이 완공되어 주진천의 주요 원천수 물을 흘려보내지 못하고, 한국수자원공사의 냉각수로 보내게 되어 수량이 부족하였다. 2000년부터 농업기반공사에서 아산면 계산리의 계산지구 농촌 용수 개발사업을 하여 운곡댐보다 큰 계산제를 건설하였다. 이 때문에 주진천은 평상시 수량이 예전에 비해 크게 줄었다고 한다. 주진천의 수량이 줄어들고 있는 반면에 주변에서 사용하는 생활 오폐수가 유입되고 주진천 주변의 축산 단지와 양어장 20여 곳에서 폐수 방류를 하면서 주진천 수질이 악화되었다. 2003년에는 주진천 인근에 거주하는 아산면 면민들이 산업화와 무관심으로 날로 오염이 심해지는 주진천을 보호하기 위해 인천강지킴이를 결성하였다. 인천강지킴이는 정화 식물 3만 그루를 심고 돌무더기, 물고기길(어도) 등을 만드는 동시에 축산단지와 양어장 20여 곳의 페수 방류도 꾸준히 감시하여 수질 개선에 힘썼다. 2010년 현재 주진천 상류에 대규모 오리사육장 건립이 계획되고 있다. 오리사육장 건립으로 인해 아산지역 주민들은 주진천 수질이 오염될 것을 우려하여 오리사육장 건립을 반대하고 있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인천강 강변에 풍천장어 음식점들이 늘어서 있다. 풍천(風川)은 민물과 바닷물이 만나는 곳을 이르는 보통명사이다.
"풍천장어(風川長魚)는 선운사 앞에서 줄포만(곰소만)으로 흘러드는 주진천(인천강) 일대 민물과 바닷물이 교차하는 지점에서 잡히는 뱀장어를 일컫는 말이다. 풍천은 바닷물과 강물이 합쳐지는 지형을 일컫는 말로 약 4㎞에 달하는 선운사 어귀의 주진천(인천강)은 예부터 큰 바람이 서해 바닷물을 몰고 들어와 민물과 바닷물이 만나는 대표적인 풍천으로 꼽힌다. 실뱀장어가 민물로 올라와 7~9년 이상 성장하다가 산란을 위해 태평양 깊은 곳으로 회유하기 전 바닷물과 민물이 만나는 이 지역에 머물게 되는데, 이때 잡힌 장어를 풍천장어라고 한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좌우로 이어지는 길은 국도22호선 선운대로, 서해랑길은 선운사 방향의 선운사로를 따라 직진한다.
부안면 용산리에서 아산면(雅山面) 삼인리(三仁里)로 넘어와 삼인교차로를 뒤돌아 보았다.
서해랑길은 아산면(雅山面) 삼인리(三仁里) 선운사로를 따라 선운산도립공원으로 이어진다.
"아산면(雅山面)은 대아(大雅)의 ‘아’자와 산내(山內)의 ‘산’자를 따서 아산(雅山)이라 하였다. 마한 시대에 모이부곡현, 백제 시대에 모양부리현, 통일 신라 시대에 모양현·고창현, 조선 시대에 고창현이었다. 아산면의 북부는 신기화산분출암이 분포하여 높이 200~300m의 산지를 이루며 남부의 일부가 대보화강암으로 구성된 50m 내외의 구릉이다. 경지율은 20% 내외에 불과하며 변산반도(邊山半島)와 함께 전라북도 서해안의 산지를 형성한다. 아산면은 고창군의 중부에 있다. 반암리·구암리·계산리·용계리·운곡리·대동리·상갑리·하갑리·중월리·목동리·주진리·봉덕리·삼인리·성산리·학전리·남산리의 16개 법정리 33개 행정리를 관할하고 있다. 동쪽으로 부안면·신림면·고창읍, 남쪽으로 고수면·성송면·무장면, 서쪽으로 해리면·심원면, 북쪽으로 심원면·부안면과 이웃하고 있다. 아산면에서는 주곡 농업 외에 잎담배가 많이 생산된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왼쪽은 선운하수처리장 선운아쿠아하우스 진입로이고 서해랑길은 선운사로를 따라 계속 직진한다.
선운하수처리장 선운아쿠아하우스 방향으로 따라가면 삼인종합학습원이 있다고 한다.
"삼인초등학교가 있었으나 1996년 아산초등학교 삼인분교가 된 뒤, 2003년에 폐교되었다. 1998년부터 전라북도 고창교육지원청이 고창삼인종합학습원을 삼인초등학교에서 운영하고 있고, 그 터는 작가들의 문학 공원으로 꾸몄다. 아산면 삼인리 84번지에 1982년 보호수로 지정된 수령 370년 가량의 느티나무가 있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선운사 풍천교차로 왼쪽으로는 풍천터널이 있으며, 서해랑길은 선운사 방향으로 직진한다.
민물과 바닷물이 만나는 곳을 이르는 풍천(風川)을 고창 풍천장어의 유명세로 이 지역 고유 지명처럼 사용하고 있다.
이곳은 아산면 삼인리 지역이다. 중앙 뒤에 선운산(禪雲山)의 상봉 경수봉이 보인다.
"삼인리(三仁里)는 전라북도 고창군 아산면에 속하는 법정리. 577년(백제 위덕왕 24년) 검단선사가 선운사를 창건할 때 모여든 사람들이 정착하여 마을을 이루었다. 조선 말기에는 무장군 탁곡면에 속했던 지역으로, 1914년 4월 1일 조선총독부령 제111호에 따라 석상(石床)·중촌(中村)·삼인(三仁) 일부를 병합하여 삼인리라 하고 고창군 석곡면에 편입하였고, 1935년 3월 1일 도령 제1호에 따라 아산면에 편입하였다. 석상 남쪽 개이빨산과 경수산 사이에 선운산(禪雲山)(334.7m)이 있고, 선운산에는 진흥굴(眞興窟)과 삼천굴(三千窟)이 있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삼인리는 아산면의 북서부에 있고 대부분이 선운산 도립공원의 일부이다. 삼인리·석상리 2개의 행정리와 삼인·석상·중촌 등의 자연 마을로 이루어졌다. 석상은 중촌 남쪽, 중촌은 삼인 서쪽에 있는 마을이다. 석상 서쪽에 석상암(石床庵), 석상 남쪽 선운산 중턱에 선운사(禪雲寺)가 있다. 선운산 남쪽 중턱에 참당사(懺當寺)가 있고, 선운사 남서쪽 개이빨산에는 아령암(兒寧庵), 아령암 남쪽에 용문암(龍門庵)이 있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선운교를 건너 선운산도립공원으로 들어간다. 왼쪽 뒤에 선운산의 주봉 도솔봉, 오른쪽에 도솔산의 상봉 경수봉이 보인다.
"선운계곡은 선운산에서 흘러내린 물이 아름다운 경치를 자랑하는 선운사를 지나면서 선운천을 이루다 주진천(인천강)에 합류하여, 소요산과 경수산 사이를 지나 서해로 흘러든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선운산도립공원 입구에서 직진하여 올라간다. 중앙 뒤에 선운산 도솔봉, 오른쪽에 선운산 경수봉이 보인다.
"선운산도립공원(禪雲山道立公園)은 전라북도 고창군 아산면 삼인리에 있는 도립 공원. 선운산은 도솔산이라고도 불리는데, ‘선운’이란 구름 속에서 참선한다는 뜻이고 ‘도솔’이란 미륵불이 있는 도솔천궁이라는 뜻으로 선운산이나 도솔산 모두 ‘불도를 닦는 산’이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선운산은 호남의 내금강으로 불리는 명승지로서 1979년 12월에 도립 공원으로 지정되었다.
관광객의 편의를 위해 선운산도립공원관리소와 선운산도립공원문화관광안내소가 설치되어 있으며, 2개의 주차장이 마련되어 있다. 이 밖에 야영장 1개소, 취사장 2개소, 간이음식점, 기념품점, 소매점, 찻집 등이 갖추어져 있다. 선운산의 경치를 살펴보면, 큰절에서 개울을 따라 올라가면 물줄기가 갈라진 곳에 교육 연수원인 자연의 집이 있고, 우측으로 더 올라가면 8가지로 소담하게 벌어진 장사송과 진흥왕이 수도하였다는 진흥굴(眞興窟)이 있으며, 개울 건너 산 중턱에는 우뚝 선 바위가 선운산에 침입하는 마귀를 방어하는 신장 역할을 하는 봉두암[일명 투구봉]이 있다. 그 위 산등성이에 돌아앉은 바위가 역시 도솔천에 들어오는 마귀를 방어하는 사자암이고, 여기서 조금만 올라가면 도솔암(兜率庵), 우측으로 층층의 바위 계단을 오르면 천 길 절벽 위에 도솔천 내원궁(兜率天內院宮) 즉 상도솔이 있다.
선운산도립공원 내에 있는 선운사는 대한불교 조계종 제24교구의 본사(本寺)이다. 577년(백제 위덕왕 24) 검단선사가 창건한 절로, 고려시대에는 호남 지방에서 가장 큰 사찰이었다고 하며, 그 후 중수와 재건을 거듭하며 현재에 이르렀다. 천연기념물로는 고창 선운사 동백나무숲[천연기념물 제184], 고창 선운사 도솔암 장사송(高敞禪雲寺兜率庵長沙松)[천연기념물 제354호], 고창 삼인리 송악[천연기념물 제367호]이 있다. 먹을거리로는 풍천장어, 작설차, 복분자술 등의 특산물이 있으며, 특히 풍천장어구이에 복분자술 한 잔으로 최고의 별미를 맛볼 수 있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앞쪽에 선운산도립공원 관광안내소, 중앙 뒤에 선운산 도솔봉, 왼쪽 뒤에 선운산 천마봉이 보인다.
선운산도립공원 관리사무소가 정면에 왼쪽에 선운산 관광안내소가 있다.
선운산 관광안내소 앞에 서해랑길 고창 43코스 안내도가 설치되어 있다.
선운산 관광안내소 앞에 여러 설치물들과 함께 서해랑길 고창 43코스 안내도가 서 있다.
43코스 주요 탐방지는 연기교, 연기제, 질마재, 미당서정주생가 및 미당시문학관, 김소희 생가. 21.1km, 7시간, 보통 난도. 역방향으로 탐방한 43코스 전체 탐방 거리는 22.46km, 전체 소요 시간은 5시간 44분, 약 1시간 15분을 단축했다. 어둠속에서 제대로 살피지 못했고, 이어서 역방향으로 탐방할 42코스 탐방 시간을 고려하여 속도를 낸 탓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