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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수필아카데미 원문보기 글쓴이: 백천봉
절묘한 서정, 그 표현의 묘미/백천봉
-우이독경(牛耳讀經)/남해진과 매화예찬(梅花禮讚)/서정길을 중심으로-
수필은 누가 어떻게 말하든 도덕적 이성과 예술적 감성을 바탕으로 하는 격(格)의 문학이다. 이렇게 표현하고 보면 뭐 수필이 대단히 딱딱하고 어렵게 느껴지는 글인 것 같지만 사실 이것이 예술적 형상화의 작업을 원만히 수행했다면 문제는 달라진다. 여기서 예술적 형상화란 바로 도덕적 이성과 예술적 감성을 바탕으로 한 문학적 표현임은 두 말할 나위도 없다. 문학적인 표현에 있어 그 표현의 묘미가 화자의 서정과 절묘한 조화를 이룰 때 그것은 곧 명작이 될 수밖에 없다. 절묘한 서정, 그 표현의 묘미를 우이독경(남해진)과 매화예찬(서정길)에서 찾아보고자 한다.
①달아낸 처마 밑 공간이다. 세탁기 사용할 두어 자 높이 위로 시렁 몇 칸 얹었다. 꼬개꼬개 챙겨 넣고 돌려 묶은 박스들 위엔 싸락눈 먼지다. 밑종이 바르지 않은 하얀 물푸레나무 당새기가 덩그렇다. 무릎높이 의자 놓고 하나 내렸다. 약콩 같은 그 놈들 응가가 주르르 흘러내린다. 한 움큼도 넘겠다./우이독경(남해진)
②봄에 피는 꽃의 특징은 화사함이 으뜸이다. 지천에 흐트러지게 피는 개나리, 온 산을 분홍빛으로 물들이는 진달래며 단아한 모습의 목련이나 눈이 시리도록 노란 산수유의 아름다움은 봄이 극치이다. 시골 마을마다 연록의 바탕 위에 핀 살구꽃과 복숭아꽃에도 눈길을 뗄 수 없지만 엄동설한을 이겨내고 고목등걸에서도 꽃을 피우는 매화는 기품이 돋보인다. 우리 선인들도 꽃의 으뜸으로 梅花를 꼽는데 주저하지 않았고 선비들은 사군자 중에서도 매화의 고고한 자태를 자신의 의지로 표현했다./매화예찬(서정길)
①의 문장엔 거의 조사(措辭)가 생략되어 있다. 하지만 문장의 흐름에 전혀 불편함이 없다. 오히려 생략된 조사로 인해 글의 흐름에 탄력을 준다. 그저 물이 아래서 자연스럽게 흘러 내리는 느낌이다. 그리고 밑줄 친 부분처럼 전체적인 문장은 비유적 수사가 지배하고 있다. 적절한 비유로 생각의 깊이를 더해 주는 문장들엔 군더더기가 없어 보인다. 잘 된 비유는 이처럼 글의 성공 여부를 가늠케 하며 특히 이것이 첫머리의 글이고 보면 작가의 글-높이를 대변해 주는 것은 두 말 할 필요가 없다. 그리고 용어의 선택 또한 주제를 형상화하기에 아주 적절한 용어들이다. ‘시렁’,‘꼬개꼬개’,‘밑종’,‘당새기’,‘약콩’ 등의 단어는 구수한 추억을 끌어올리기에 적적한 용어들이다. 다만 이들 용어가 적어도 시가 아닌 이상 표준말을 애써 찾아 써야 할 의무를 수필가는 가져야 한다. 독자는 지역적으로 한정되어 있지 않다. 수필이 본격산문을 바탕으로 한 글이라면 적확한 단어의 사용은 수필가의 또 다른 사명의 하나다. 그렇다면 ‘꼬개꼬개’는 ‘꼬기-꼬기’, ‘당새기’는 ‘받짇고리’ 정도로 고침이 좋을 듯하다.
여기에 비해 매화예찬(서정길)의 서두를 보라.
담담하게 서술해 간 표현이 예사롭지 않다. 조사의 생략이나 비유의 기법이 전혀 없지만 어디 문장에 흠이 있는가. 그야말로 정격의 문장으로 한 점 흐트러짐이 없다.
이처럼 두 사람의 문체적 특징은 확연히 다르다. 바로 이런 점이 글의 개성이며 문체는 곧 사람이란 ‘뷔퐁’의 말에 동의를 하지 않을 수 없다. 보라, 한 사람은 달변가로 언어의 마술사처럼 그 성격 또한 호방하고 활달하다. 여기에 비해모르긴 해도 매화예찬의 작가는 이희승의 딸깍발이를 연상케 하는 고고한 선비의 자태를 지니고 있는 인물임에 틀림이 없으리라. 낭만적 서정과 어투는 항상 비유법이나 영탄법 등의 감정을 토로하는 수사적 기교를 동반하고 지성적이고 관념적인 서정의 문투는 현란한 수사나 기교가 없는 건조체를 지향한다. 동일한 서정의 표출이면서도 문체상의 차이에서 오는 그 느낌이 확연히 다름을 알 수 있다.
그 다음 문장들을 비교해 보자.
③ ‘3552 번호와 이름 새겨진 중3 명찰이 표표히 33년 세월을 버티고 있다. 누르기싸움으로 납작코 된 단추에서는 아직도 깔깔대는 녀석들이 금방이라도 튀어나올 것 같다. 교표 문양의 요철 따라 흘러가는 황동 색깔과 어우러져 이끼 닮은 푸른 녹이 상감(象嵌)처럼 피어있다. 고등학교 선거 때 뚝뚝 마구 떨어지던 검지의 피로 써내려갔던 혈서, 그 때 묻은 핏자국이 모자 안감 얇은 천에 풋감물 마른 얼룩으로 남아 있다. /우이독경에서
④ 올해도 아내는 매화축제가 시작되는 3월 중순경에 섬진강 변을 다녀왔을 만큼 유독 매화를 더 좋아했다. 수 십리 길을 수놓은 매화를 즐기는 것이 년 중 행사처럼 되었다. 매화와 관련된 서적을 탐독하고, 모임에서도 아내의 話題는 매화 예찬론이다. 수묵화가 열리는 화랑에 가면 매화그림 앞에서는 아예 망부석이 되고 만다. 知人에게 보내는 카드조차도 매화 그림을 택할 정도다.
몇 해 전부터는 시각의 즐거움을 미각으로 한 단계 업그레이드 시켜 놓았다. 제법 통통해진 꽃 봉우리를 따다 도자기에 고이 저장하였다가 찾아오는 손님에게는 의례 매화차를 내어놓기도 한다. 매화에서 발산되는 향기만큼이나 삶을 풍성하게 꾸며나가는 모양이다./매화예찬에서
③과 ④의 문장에서도 문체상의 특징은 확연히 드러난다. 서술어의 사용, 단순한 문제 같지만 가만히 들여다보면 두 사람의 성질이나 격의 차이를 고스란히 보여 주고 있다. 밑줄 친 ③의 문장에서 보듯 ③의 작가는 비정적인 사물을 정물화 하고 있다. 행위의 주체가 하나같이 사물로 되어 있다. 사실 이러한 표현의 묘미는 하루 이틀에 얻을 수 없다. 소위 글재주가 있는 사람만의 개성적 표현이다. 이처럼 비정적인 사물을 의인으로 정물화 하여 행위의 주체나 주어로 삼을 때 문장은 사람이 살아 움직이는 것처럼 현실감과 생동감을 획득할 수 있다.
『수용미학적 관점』에서는 과거의 작품을 어떻게 이해하고 해석하는가가 문학연구방법론의 주요과제였다. 그런데 어떤 시점이든지 주체의 의식 속에는 과거의 지식, 현재의 의식, 미래의 예지가 포함 되어 있다. 따라서 인식한다는 것은 현재와 과거 또는 회상과 기대가 융합되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단순한 재생산으로서의 현재화’가 아니라 ‘인식하는 생산적인 현재화’를 핵으로 하고 있다.(현대비평의 이론과 실제에서)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과거의 사실’을 현재화 하는 기법이나 ‘인식되어지는 생산적 현재화’의 기법에 효율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기법 중의 하나가 비정적인 사물을 정물화 하는 기법이다. 행위의 주체가 사물이면서 그것이 곧 인식의 주체가 될 때 ‘과거의 사실’은 ‘인식되어지는 생산적 현재화’로 나아가는 것이다.
예를 들자면 위의 글 ③에서 ‘명찰이 세월을 버티고'와 ' 검지의 피로 써 내려간 혈서’는 현재적 존재치로 인식되어지는 것이다. 이와 같은 등식이 성립 되는 또 하나의 문장이 바로 부모님으로 물려받은 ‘하얀 망사 스타킹 길게 당겨 놓고 도망친 뱀 허물이다. 자지러질 듯 울다가 금방 사라질 몇 날 일생인데, 뭐가 그리도 급해 방금 쏙 빠져나간 매미 남은 껍데기다.’ 로 비유된 작가의 육신이다. 이 모든 것들이 ‘기증’이란 극단적 ‘서정의 행위’로 이어지면서 ‘인식하는 생산적인 현재화’로 나아간 것이다. 실로 전편이 팽팽한 긴장감 속에서 절묘한 서정, 그 표현이 돋보이는 작품이라 아니 할 수 없다. 꼭 하나 아무리 읽어 보아도 제목이 ‘우이독경’이 될 수 없는 이유는 ‘화자’와 ‘독자’가 함께 ‘기증’이란 단어에 전혀 거부감을 느낄 수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글의 제목을 ‘하고 나면 별 것도 아닌데’로 고쳐라. 이렇게 제목하나 고치고 나면 이 작품은 아마도 가까운 시일 내에 신춘문예의 반열에 올라서 있을 것임을 확언하는 바이다.
이해를 돕기 위해 '우이독경'-전문을 함께 해 본다.
牛 耳 讀 經 (우이독경)/ 남해진
[달아낸 처마 밑 공간이다. 세탁기 사용할 두어 자 높이 위로 시렁 몇 칸 얹었다. 꼬개꼬개 챙겨 넣고 돌려 묶은 박스들 위엔 싸락눈 먼지다. 밑종이 바르지 않은 하얀 물푸레나무 당새기가 덩그렇다. 무릎높이 의자 놓고 하나 내렸다. 약콩 같은 그 놈들 응가가 주르르 흘러내린다. 한 움큼도 넘겠다.
희끄레 빛바랜 노끈 풀면 30년 세월 풀썩 돌아앉아 그 시절 송두리 채 살아나것다.
바램은 서툰 궁수의 화살로 날았다. 분/기/탱/천/이다.
내기에 속아서 하늘고추 하나 먹고, 뒹굴고 자빠지고 온갖 동작으로 버둥거린 적 있다. 그런 분기다. 그보다 가없는 탱천이다. 하복 바지 둘은 형체만 남았지, 큰 물 간 철망의 너덜한 꼬락서니다. 동복 상의 오른쪽 어깨는 초가 처마 끝 참새 집처럼 파먹었다. 앞니가 돋았나, 모자챙 한 편을 뻥과자 베문 듯 무참히도 갉아 놨다. 그도 모자라 다른 하나 윗부분 반을 너덜너덜 넝마로 쏠아 놓았다.
사랑한 적 없지만 이 때 만큼 놈들을 증오한 적도 없었다. ‘언젠가 긴히 쓰이리라’ 하여, 우리 집 세 녀석 보듬듯 했는데··· 몇 날 며칠 동안 심사가 멀미처럼 마냥 느글거렸다. 그러나 하릴없다. 집사람 친구 세탁소에 물어도 보고 다른 곳 찾아다니며 사정도 해봤지만 신통찮다. 사제복 깃 같은 동복 빳빳한 목 카라며 두껍은 모자챙 박을 재봉틀이 요즈음은 없다나. ‘애만 먹지 돈 안 되는 것 왜 하냐’ 하는 것 같다. 어렵게 수소문해서 한일로 밀리오레 백화점 지하 끄트머리 수선집을 찾았다. 사람이 하는 일, 안 될 일 없나보다. 거듭 부탁하고 또 허리 굽혀 ‘자신은 없지만 복원해 보겠다.’는 허락을 어거지로 받아냈다.
‘3552 번호와 이름 새겨진 중3 명찰이 표표히 33년 세월을 버티고 있다. 누르기싸움으로 납작코 된 단추에서는 아직도 깔깔대는 녀석들이 금방이라도 튀어나올 것 같다. 교표 문양의 요철 따라 흘러가는 황동 색깔과 어우러져 이끼 닮은 푸른 녹이 상감(象嵌)처럼 피어있다. 고등학교 선거 때 뚝뚝 마구 떨어지던 검지의 피로 써내려갔던 혈서, 그 때 묻은 핏자국이 모자 안감 얇은 천에 풋감물 마른 얼룩으로 남아 있다.’
생각보다 오래지 않았다. 맡긴 다음날 연락이 왔다. 그럼 그렇지, 뜸들일 때 이미 알아봤다. 노련한 의사 손끝에서 궁글러져 수술 잘 된 쌍까풀 같다. 후유-. 안도의 한숨 비운 자리에는 방심과 그 무엇에 대한 무거운 자성(自省)이 또아리를 틀고 있었다.
그런 일들이 오후 빛처럼 엷어져 가던 2월 어느 날, 생각날 때마다 느글거리던 꼬인 속을 흔쾌히 풀었다. 밴젠 냄새 폴폴 나는 교복과 교모를 찾아 핸들을 돌렸다. 평준화 정책으로 대 끊긴 중학교의 마지막 교복과 교모다. 소담스레 잘 꾸며지고 정리된 역사관에 잔잔한 마음으로 기증했다. 애증이 범벅된 세월, 땀내 밴 고등학교 교복과 교모는 지금 열심히 자료를 모으고 준비하고 있는 또 다른 역사관에 기증했다. 지금껏 찾지 못해 몹시도 애태웠다며 그리도 반겼다. 세월을 싣고 강 건너게 한 교복과 교모를 어리고 젊던 내 웃음과 눈물로 찰랑이는 기억의 모교에 미련 없이 버렸다.
“당신은 어떻게 생각해? “ 찌그럭거려도 속살 비비고 사는데 혼자의 결정은 너무 비정하리라.
“뭘?” 무턱 댄 물음에 덤덤한 아내의 반문이다.
“사실 얼마 전부터 생각했는데··· ”
“뭘 말이야?”
“음, 장기 기증 말인데, 그래도 당신한테 물어는 봐야지, 뇌사상태와 사후의 장기 기증···”
“좋은 일인데 뭐, 나도 그럴 거예요.” 예상치 못한 즉석 답이다.
“말 난 김에 같이 가서 꾹꾹 눌러 찍자?” 틈도 주지 않고 다그쳤다.
“하기는 분명히 하는데 아직은 아니예요.” 그래도 대견스러웠다.
“난 며칠 후 생일날 혼자라도 의료원에 갈 거다.”
“·····”
지천명의 나이라 해도 어림없다. 세상사 쉬운 이치도 난 잘 모른다. 이름 지어주신 아버지, 모자라는 만큼 더 채우라고 한 살 적게 올려 놓으셨나보다. 세월이 흐르면 인식과 행태는 바뀌게 마련이지만 ‘부모님께 받은 몸, 함부로 훼손하지 않는 게 효의 시작’이란 옛 글귀가 얼마간 나 자신을 움츠리게 했다. 그러나 본래 주인 없는 자리로 되돌리기 위해, 뼈와 살 물려주신 여든 여덟의 잠시 소유주, 부모님 몰래 모교 의료원 장기기증 서류에 사인했다.
둘 다는 하지 못했다. 처음 장기 기증 생각 했을 때의 작은 혼란이 있어서가 아니다. 하고 나면 별것도 아닌데, 가족들의 동의와 해부에 따른 여러 문제로 시신 기증엔 아직 도장을 찍지 못했다. 뱃전 두드리는 일상의 작은 일렁임으로 걸어 나왔다.
하얀 망사 스타킹 길게 당겨 놓고 도망친 뱀 허물이다. 자지러질 듯 울다가 금방 사라질 몇 날 일생인데, 뭐가 그리도 급해 방금 쏙 빠져나간 매미 남은 껍데기다. 그렇듯 어느 날 홀연히 연 줄 놓듯 혼 줄 끊고 달아나 명목(暝目)으로만 남을 우리네. 아니라면서도 이래저래 널부러진 차안(此岸)의 변명과 미련의 끈, 질기게도 붙잡고 간다.
강 건넜으면 타고 온 배 버리라 했는데, 그 생각조차도 끊으라 했는데···-050311-]
이에 비해 ④의 문장은 행위의 주체가 바로 인간이요, 문장의 주어가 사람이다. 한 걸음 뒤로 물러나 아내의 행위를 바로 보는 객관적 관찰의 태도가 완벽한 문장을 통해 담담하게 서술되고 있다. 화려한 수사나 비유적 기법이 없지만 독자는 흥미를 놓지 못한다. 아마도 정갈한 문장과 숙련된 문장에서 느끼는 글맛이리라. 다시 말하자면, 담담하게 흐르는 필력, 아내의 매화 사랑을 바탕으로 한 고결한 인품이 돋보이는 글이다. 나아가 사물에 대한 '예찬'을 지성적 성찰과 예술적 감성으로 적절히 조화시켜 읽는 이로 하여금 잔잔한 감동을 주는 글임에 조금도 손색이 없다. 다만 부분적인 '단락구분'과 내용의 일관성을 위해 한 두가지만 지적을 해 두고자 한다. 전편의 단락만 이렇게 고쳐보자. 그러면 이 글도 신인상에 걸-맞는 광영을 누리리라.
매화예찬 / 서정길
1) 봄에 피는 꽃의 특징은 화사함이 으뜸이다. 지천에 흐트러지게 피는 개나리, 온 산을 분홍빛으로 물들이는 진달래며 단아한 모습의 목련이나 눈이 시리도록 노란 산수유의 아름다움은 봄이 극치이다.
2) 시골 마을마다 연록의 바탕 위에 핀 살구꽃과 복숭아꽃에도 눈길을 뗄 수 없지만 엄동설한을 이겨내고 고목등걸에서도 꽃을 피우는 매화는 기품이 돋보인다.
우리 선인들도 꽃의 으뜸으로 梅花를 꼽는데 주저하지 않았고 선비들은 사군자 중에서도 매화의 고고한 자태를 자신의 의지로 표현했다.
3) 낙동강이 잘 내려다보이는 江林마을에 安東 權氏 문중의 재실이 있었고 담 모퉁이에는 한 아름이나 되는, 목피가 갈라져 시커먼 둥치의 볼품 없는 古梅다. 그래도 맨 먼저 연분홍 꽃을 피워 시린 겨울을 떨쳐내게 하는 힘을 지녔다. 누구하나 애정을 쏟지 않아 버려진 듯 했지만 손끝이 아려오는 추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핀 것이 어린 나에게 신비하기만 했다. 코끝을 가까이 하면 그 깊고 아늑한 향기가 좋아 몰래 꺾어 병에 꽂아 둔 기억이 새롭다.
4) 올해도 아내는 매화축제가 시작되는 3월 중순경에 섬진강 변을 다녀왔을 만큼 유독 매화를 더 좋아했다. 수 십리 길을 수놓은 매화를 즐기는 것이 년 중 행사처럼 되었다. 매화와 관련된 서적을 탐독하고, 모임에서도 아내의 話題는 매화 예찬론이다. 수묵화가 열리는 화랑에 가면 매화그림 앞에서는 아예 망부석이 되고 만다. 知人에게 보내는 카드조차도 매화 그림을 택할 정도다.
5) 몇 해 전부터는 시각의 즐거움을 미각으로 한 단계 업그레이드 시켜 놓았다. 제법 통통해진 꽃 봉우리를 따다 도자기에 고이 저장하였다가 찾아오는 손님에게는 의례 매화차를 내어놓기도 한다. 매화에서 발산되는 향기만큼이나 삶을 풍성하게 꾸며나가는 모양이다.
6) 얼마 전 내연산 보경사를 찾았다. 봄빛이 영글지 않은 계곡에 찬바람이 일었다. 고찰 입구에는 아직도 수령 800년이나 된 쓰러져 누운 고목이 있다. 어린 가지가 갈라진 목피 사이를 뚫고 나와 음표 같은 꽃망울을 조롱조롱 맺고 있었다. 거대한 덩치는 새 생명을 위해 자양분을 공급하느라 속을 태웠는지 텅 빈 채 지친 모습이 애처롭다. 인간을 포함한 모든 생명의 탄생에는 필연적인 고통을 감내해야 한다. 찬 기운이 가시지 않는 음지에서도 안간힘을 다해 생명을 키워내는 모습은 영락없는 어머니다. 거미가 자신의 몸뚱이를 새끼의 양식으로 내 주는 것처럼 자식 위해 희생의 삶을 살아오신 노쇠한 어머니 모습이 겹쳐졌다. 일행에게‘팔순을 바라보는 어머니 인생과 고목의 처지가 같아 가슴이 아프다’했더니 ‘죽음은 또 다른 생명을 탄생시키는 우주의 질서’라며 위로를 해준다.
7) 고향면장으로 발령 받고 난 어느 날, 지리산 벽송사 서암의 원응(元應) 큰스님께서 공직자의 바른 길을 가라며 주신 글 한 점이 불현듯 떠올랐다. 집에 걸어두고 가보로 삼으라고 했지만 사무실에 걸어 두고 공직자의 길잡이로 삼게 했었다.
생전 처음으로 받은 “百世淸風 千秋香名”글귀가 만고풍상을 견디어 내고 피어나는 매화의 상징과 너무 흡사하다.
8)오십이란 적지 않은 나이다. 삼십 년이란 짧지 않은 공직생활을 해오고 있다. 가슴 뿌듯한 일도 있었지만 적당하게 현실에 안주했던 일도 많았다. 힘든 일이 닥치면 적당하게 얼버무리거나 회피하는 제주야말로 멋지게 사는 것이라고 착각 속에 살아오기도 했다. 세상과 적당히 타협하고 안주한 부끄러운 기억들이 신 포도주 맛처럼 뇌를 자극한다.
9) 새로이 지을 집 뜰 앞에 매화 한 그루를 심고 거실에는 큼직한 설중매 한 폭을 걸어야겠다. 아내의 기쁨이 남편의 행복이니 매화를 가까이 하는 것도 琴瑟을 쌓는 것이리라. 옛 현인들은 매화를 두고 고결하고 청아한 품성의 기려 淸友, 淸客, 一枝春라 하지 않았던가. 화창한 봄날에 예사롭지 않은 멋진 친구를 만났다.
(주) 百世淸風 千秋香名 : 맑은 바람은 백년을 가고 향기로운 이름은 천년을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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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1)과2)의 단락을 붙여 주세요. 이 부분은 매화에 대한 예찬적 태도로 매화의 기품이나 속성을 밝힌 부분으로 한 단락이지요. 이런 차원에서 이 글의 도입은1)-2) 전개3)-8) 결말은 9)로 볼 수 있다.
도입:매화(속성)예찬 전제(1-2)
전개:아내의 매화 사랑과 매화를 바라보는 화자의 인생관(3-8)
결말:끝없는 매화 사랑(9)
여기서 전개 3-8은 전개1과 전개2로 나누어 주는 것이 좋은 듯합니다. 그래서 전체적으로 보면 4개의 단락이 되도록 하라.
그리고 전개 6)과 7)의 첫 문장을 고쳐라. 6)‘얼마 전 내연산 보경사를 찾았다.’라 문장과 7)
‘고향면장으로 발령 받고 난 어느 날’이란 서두로 시작 되는 두 단락은 문장의 호흡으로 볼 때 고쳐 주는 것이 좋다. 똑 같이 ‘어느 곳을 방문했다’로 시작하기보다는 6)의 첫머리를 그냥 [‘내연산 보경사 입구엔 아직도 800년 고목의 매화가 조롱조롱 꽃망울을 맺고 있다. 보는 이로 하여금 경탄과 애처러움을 동시에 느끼게 하는 고목, 텅 빈 덩치엔 그 강인함이 자리 잡고 있다. 무릇 인간을 포함한 모든 생명의 탄생에는 필연적인 고통을 감내해야만 하는가.]로 고치면 어떨까. 그 다음 문장은 그대로 이어 가라. [찬 기운이 가시지 않는 음지에서도 안간힘을 다해 생명을 키워내는 모습은 영락없는 어머니다. 거미가 자신의 몸뚱이를 새끼의 양식으로 내 주는 것처럼 자식 위해 희생의 삶을 살아오신 노쇠한 어머니 모습이 겹쳐졌다. 일행에게‘팔순을 바라보는 어머니 인생과 고목의 처지가 같아 가슴이 아프다’했더니 ‘죽음은 또 다른 생명을 탄생시키는 우주의 질서’라며 위로를 해준다.] 자연스런 연결로 보이지 않는가.
이 처럼 이 두 편의 수필, 기성수필가를 능가하는 그 ‘절묘한 서정, 그 표현의 참맛’을 한껏 누려 보았다. 흥분된 마음으로 정리한 만큼 주제 넘는 부분적 실수를 이해 바라며...■(2005.4.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