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미 없다’는 ‘의미 있다’이다 / 신형호
퇴직한 지 6개월이 지났다. 아직도 어둑어둑한 새벽 어김없이 알람 소리와 함께 반사적으로 일어난다. 지금 왜 일어날까? 출근도 하지 않고 일찍 할 일도 없는데. 다시 누워보지만 이미 정신은 말똥말똥해져 눈을 붙이기가 어렵다. 수십 년 동안 길든 습관이라 좀처럼 바뀌지 않는다. 이젠 느긋이 늦잠도 즐기고 느린 걸음으로 하루를 맞이하고 싶지만, 마음과 몸이 엇박자를 내며 주파수를 맞추지 못한다. 창밖은 푸른 하늘이지만 푸르게 보이지 않는다. 막연한 불안감에 쫓기듯 우울하다. 세상 이치를 알고 듣는 대로 모두 이해할 수 있다는 나이건만 나는 어린애보다 못한 것 같다.
영국의 사회철학자 피터 라슬렛은 인생을 4단계로 구분하여 설명했다. 제1기 인생은 태어나서 배우고 성장하는 시기이고, 제2기 인생은 독립하여 가족을 이루고 돌보며 직업인으로서 사회에 이바지하는 시기라 한다. 제3기 인생은 퇴임 후 이제까지 일 때문에 미뤄두었거나 하지 못했던 혹은 하고 싶은 일을 맘껏 즐기는 인생의 황금기라고 정의한다. 그러면 지금 나는 인생의 절정을 맞고 있는 게 아닌가. 그런데 무엇이 나를 찻잔 속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하는 것일까?
‘퇴직만 하면 읽고 싶은 책도 마음껏 읽고 산 찾아 물 따라 바람과 동무가 되어야지.’ 늘 마음속에 그리던 소망이었다. 자유인이 되면 하고 싶은 일, 가고 싶은 곳을 마음대로 하고 갈 수 있을 줄 알았다. 아니었다. 바램보다 먼저 다가와 내 곁에 붙는 것이 있었다. 조직에서 떨어진 상실감과 공허함이 정신과 몸을 칭칭 감았다. 어떻게 해야 새 삶을 예전과 원만하게 연결해 갈 수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인문학 강의, 운동, 악기 등 다양한 활동을 대안으로 제시해 주지만 마음이 움직이지 않았다. 평상심이 사라졌다. 니힐리즘에 빠진 것일까? 매사에 의미가 없어졌다.
아침 일찍 신천 둔치로 산책하러 나갔다. 무더위를 몰아낸 선선한 바람 한 줄기 속에 녹음이 산책길을 호위하고 있다. 길섶에는 하얀 개망초가 소금을 뿌린 듯 하늘거리고 군데군데 노란 달맞이꽃들이 가을을 기다리고 있었다. 간이 운동기구 옆 벤치엔 나이 지긋한 노인 몇 분이 건너편 산만 바라보고 아무 말이 없다. 만물이 시작하는 시간이건만 그들에게는 시작보다 마무리가 보이는 것은 나만의 기우일까? 물끄러미 바라보는 눈빛은 온화하지만 영롱한 빛이 보이지 않는다. ‘그러려니’ 하는 삶의 달관도 엿보이지만 ‘의미가 없네.’라는 허무가 더 또렷하다.
저녁을 먹고 거실에서 텔레비전을 보고 있을 때다. 밝은 소식보다 어두운 뉴스가 나날이 늘어간다. 팍팍한 현실을 참고 꿋꿋이 살아가는 다큐멘트리드라마를 나는 좋아한다. 살아가는 모습이 안타깝기도 하지만 상대적으로 위안을 얻기 때문이다. 3포 시대를 지나 7포 시대라 했던가. “에휴, 의미 없네요.” 취업준비로 종일 도서관에 갔다가 들어온 아들의 말에서 다시 상실감에 빠진다.
별빛보다 가로등이 더 환한 늦은 밤 신천 둔치의 둑에 앉았다. 답답한 날에는 한밤에도 산책을 나오곤 한다. 며칠 내린 가을비로 냇물이 제법 넘실거린다. 물가 풀숲에서 오리 몇 마리 줄지어 가는 모습이 평화롭다. 꿈결처럼 포근하다. 다스릴 수 없는 내 마음을 조용히 물에 풀어 놓았다. 잠시 어지러운 듯했으나 이내 편안해졌다. 한때는 흐르는 강물처럼 살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생각한 날도 많았다. ‘의미 없다’는 말을 곱씹어 보았다. 한참 되뇌다 갑자기 머리를 찌릿하게 하는 생각이 스쳤다. ‘없다’라는 말은 결국 ‘있다’라는 말과 통한다. ‘많이 안다’라는 것은 ‘많이 모른다’와 뜻이 같지 않은가‘ 마음이 조금 밝아졌다. 그렇다. 생각을 조금만 뒤집어 보면 세상의 ’의미 없다‘라는 말은 ’의미 있다‘는 내용이 된다.
눈이 확 뜨인다. 사방을 돌아보았다. 물 흐르는 모습이 더욱 사랑스럽다. 사물 하나하나가 새롭게 보인다. 낮게 엎드린 엉겅퀴 꽃도 달리 보이고 비스듬히 누워있는 아카시아 잎들도 싱싱하게 소리치는 듯하다. 불빛에 반짝이는 모래알 하나부터 눈앞에 펼쳐지는 모든 것이 다 신비롭다. 삼라만상은 각각 놓여 있는 장소와 피우는 꽃, 모두가 나름의 가치와 의미를 가진 것이다. 손바닥 뒤집어 보면 답이 나오는 일을 왜 모르고 끙끙 앓기만 했을까? 가로등 불빛 때문이 아니라 생각의 전환에 온 세상이 더 눈부시다. 알 수 없는 실체로 늘 침울하던 가슴속이 조금은 환해지는 듯했다.
‘있다’와 ‘없다’의 관계를 조심스레 그려보았다. 왜 그렇게 보지 못했을까? 사랑, 배려, 돌아봄이 부족해서였을까. 냇물 소리가 점점 크게 들린다. 오늘 밤에는 잠을 푹 잘 수 있겠지. 새벽 알람이 울려도 느긋하게 단잠을 누릴 수 있으리라. 삶의 황금기인 제3기 인생이 다시 시작되리라. (2015. 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