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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레미야 1장1-19절
찬송가 458장 ‘너희 마음에 슬픔이 가득할 때’
오늘부터 2-3개월 동안 예레미야 속으로 믿음의 순례를 떠나 보도록 하겠습니다. 구약성경에는 17권의 선지서가 있습니다. 그중에서 처음 다섯 권(이사야, 예레미야, 예레미야애가, 에스겔, 다니엘)을 대선지서라고 하고, 그 다음 12권(호세아-말라기)을 소선지서라고 합니다. 대선지서와 소선지서의 구분은 길이의 차이입니다. 그런데 예레미야애가는 5장으로 되어 있지만, 예레미야가 기록했기 때문에 대선지서로 분류됩니다.
이사야는 66장으로 구성되어 있고, 예레미야는 52장으로 구성되어 있지만, 내용적으로는 예레미야가 훨씬 더 깁니다. 그리고 소선지서 12권보다 더 깁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 성경으로 하면, 150편으로 구성된 시편이 가장 길지만, 사용된 단어 수로 하면 시편보다 예레미야가 더 많습니다. 그래서 실제적으로 성경에서 가장 긴 책은 예레미야입니다. 그리고 예레미야에는 예레미야 선지자 자신에 관한 내용이 적지 않지만, 그 내용이 시간적인 순서대로 기록되어 있지는 않습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조국 유다가 망할 때, 시드기야왕의 두 눈이 뽑히고 쇠사슬에 결박되어 많은 백성들과 함께 바빌론으로 끌려가는 비극을 목격했습니다. 그 뿐만 아니라 제사장들이 성전에서 죽임을 당하는 것도 보았고, 심지어 여인들이 먹을 것이 없어서 자기 자식을 삶아 먹는 것도 보았습니다.
또한 이사야 선지자는 여선자자였던 아내와 결혼하여 두 아들도 낳았지만, 하나님께서 예레미야 선지자에게는 결혼도 하지 말고, 자녀도 두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것뿐만 아니라 표적(기적)을 행한 적도 한 번도 없었고, 그가 전하는 말씀은 사람들이 싫어하는 것이었습니다. 거짓 선지자들은 유다가 망해 포로로 끌려갈지라도 2-3년만 지나면 돌아온다 했지만 예레미야는 70년이 지나야 돌아온다고 했기에 사람들은 그를 매국노처럼 여겼습니다. 그는 하나님 앞에 늘 울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를 ‘눈물의 선지자’라고 부릅니다.
성경 예레미야를 더 잘 이해하려면 그 배경을 우리나라의 1800년대 후반부터 경술국치인 1910년까지를 생각하면 됩니다. 1905년에 을사늑약이 체결되었을 때, 황성신문의 주필이었던 장지연선생이 ‘이날을 목 놓아 통곡한다’는 의미의 ‘시일야방성대곡(是日也放聲大哭)’이라는 논설을 썼습니다. 예레미야와 예레미야애가는 나라가 기울어가다가 마침내 망하는 모습을 보고, 목을 놓아서 울며 써내려간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예레미야의 소명(1-10절)
1-10절은 예레미야 선지자가 받은 소명에 대해서 기록하고 있습니다.
(1) 베냐민 땅 아나돗의 제사장들 중 힐기야의 아들 예레미야의 말이라
예레미야의 고향은 ‘아나돗’이었습니다. ‘아나돗’은 우리에게 익숙한 지명이 아닙니다. 성경을 여러 번 읽고, 교회를 오래 다녀도 우리에게 인식이 되어 있지 않은 지명입니다. 이곳은 예루살렘에서 북동쪽으로 약 4-5km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었는데, 다윗 시대의 대제사장이었던 아비아달은 솔로몬이 왕위에 등극할 때 아도니야를 왕으로 세우려는 음모에 가담했다가, 대제사장의 지위를 박탈당하고 추방되었던 곳이었습니다. 그는 몰락한 제사장 가문의 후손으로 여겨집니다.
그리고 그의 아버지 힐기야도 무명의 제사장이었습니다. 요시야 왕 때 성전을 수리하다가 율법책을 발견한 ‘힐기야’와는 동명이인입니다. 그러니까 예레미야는 잘 알려져 있지 않은 지방 출신, 금수저가 아닌 집안 출신이었습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역사는 무명한 곳, 무명한 사람에게 시작되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우리의 구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예루살렘이 아닌 베들레헴에서 나시고, 가난한 사람들의 도시 나사렛에서 자라시며, 목수의 아들로 자라실 것이라고는 그 누구도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지금 우리가 서 있는 그 자리가 하나님의 역사하심의 현장이며, 또 우리가 아무리 작고 보잘 것 없게 여겨질지라도, 우리가 하나님의 역사하심의 통로가 됩니다.
(2-3) 아몬의 아들 유다 왕 요시야가 다스린 지 십삼 년에 여호와의 말씀이 예레미야에게 임하였고 요시야의 아들 유다의 왕 여호야김 시대부터 요시야의 아들 유다의 왕 시드기야의 십일년 말까지 곧 오월에 예루살렘이 사로잡혀 가기까지 임하니라
예레미야의 사역 시기는 요시야 13년에서부터, 여호아스, 여호야김, 여호야긴, 시드기야왕까지 다섯 명의 왕을 섬겼습니다. 유다가 바빌로니아에게 망할 때가지 약 40년 정도, 그리고 그 후에 10년 정도 더 선지자로 사역했습니다. 예레미야 선지자에게 그의 사역 기간이 있었듯이, 우리에게도 기간이 있습니다. 사역의 기간뿐만 아니라 생명의 기간도 있습니다. 우리에게 허락된 기간은 언제나 하나님께서 고개를 끄덕이실 때까지이고, 마치는 때는 하나님께서 고개를 가로저으실 때입니다. 그것을 잘 분별하는 것이 믿음이고, 지혜입니다.
하나님께서 예레미야를 선지자로 부르실 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5) 내가 너를 모태에 짓기 전에 너를 알았고 네가 배에서 나오기 전에 너를 성별하였고 너를 여러 나라의 선지자로 세웠노라 하시기로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가 임신이 되기도 전에 이미 아셨고, 어머니 뱃속에 있을 때 구별해서 선지자로 부르셨다고 합니다. 그것은 예레미야가 가진 현재의 그 어떤 연약한 모습도 하나님의 부르심에 방해가 되지 않는다는 의미입니다. 또한 그가 행할 모든 사역을 알고 계시고 책임져 주시겠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전 세계 약 70억 인구 중에서 우리를 선택하시고, 우리로 하여금 그 역할을 감당하게 하시려고, 우리를 우리의 가정과 우리의 일터와 우리 삶의 자리에 세우셨습니다. 그래서 지금 우리가 있는 곳에서, 우리가 하고 있는 그 역할이 하나님께서 우리가 태어나기도 전에 정해 주신 일입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에 예레미야는 이렇게 반응했습니다.
(6) 내가 이르되 슬프도소이다 주 여호와여 보소서 나는 아이라 말할 줄을 알지 못하나이다 하니
예레미야는 자신을 ‘아이’라고 표현합니다. 유대의 랍비들은 당시 예레미야의 나이가 14살이었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여러 성경학자들은 당시 그의 나이는 18-20살 정도였다고 합니다. 우리도 예레미야의 나이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어도 동일한 반응을 보였을 것입니다. 하지만 예레미야와 우리의 다른 점은 그는 자신의 부족함과 연소함, 연약함을 고백한 후에 하나님의 부르심에 순종했지만, 우리는 끊임없이 핑계를 댄다는 것입니다.
예레미야의 반응에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7)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너는 아이라 말하지 말고 내가 너를 누구에게 보내든지 너는 가며 내가 네게 무엇을 명령하든지 너는 말할지니라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에게 너는 아이라 말하지 말고, 내가 보내는 사람에게 가면 되고, 내가 일러주는 말씀을 전하면 된다고 하셨습니다. 그것은 “내가 너를 모르고 부른 것이 아니다”라는 것입니다. 어느 정도의 능력을 가진 사람을 부를 것인지도 하나님께서 정하시고, 부르심을 받은 그가 서야 할 자리도 하나님께서 정하시고, 그곳에서 섬겨야 할 사역도 하나님께서 정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사용되는 사람은 총명하고 유능한 사람이 아니라, 순종하는 사람입니다.
축구나 야구와 같이 팀으로 하는 운동에서 감독이 선호하는 선수는 재능이나 기능이 뛰어난 사람이 아니라, 감독이 행하려는 작전을 정확하게 수행해 내는 사람이라고 합니다. 하물며 하나님이시겠습니까?
두 환상 – 살구나무 가지와 끓는 가마(11-19절)
11-19절은 하나님께서 예레미야에게 두 환상을 보여주시고, 격려하시는 것에 대해 증거합니다.
(11-12) 여호와의 말씀이 또 내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예레미야야 네가 무엇을 보느냐 하시매 내가 대답하되 내가 살구나무 가지를 보나이다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네가 잘 보았도다 이는 내가 내 말을 지켜 그대로 이루려 함이라 하시니라
첫 번째 환상은 ‘살구나무 가지 환상’이었습니다.
12절의 ‘지켜’ 앞에 작은 글씨로 ⑴이라 쓰여 있습니다. 아래에 ‘히, 살구나무라는 말과 지킨다는 말의 음이 비슷함’이라 되어 있습니다. ‘살구나무’가 히브리어로 ‘샤케드’이고, ‘지키다’는 히브리어로 ‘쇼케드’입니다. 두 단어가 자음은 동일하고, 모음만 다릅니다. 살구나무는 우리나라의 매화처럼 가장 먼저 피어 봄이 왔음을 알리는 나무였습니다. 살구나무가 봄을 알리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예레미야의 입을 통해서 전하게 한 심판이 분명이 임하는 것을 지켜볼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13-14) 여호와의 말씀이 다시 내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네가 무엇을 보느냐 대답하되 끓는 가마를 보나이다 그 윗면이 북에서부터 기울어졌나이다 하니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재앙이 북방에서 일어나 이 땅의 모든 주민들에게 부어지리라
두 번째 환상은 ‘끓는 가마 환상’이었습니다.
그 끓는 가마가 북에서부터 기울어져 쏟아져 내리는 것을 보았는데, 재앙이 북쪽에서 임하게 될 것을 알려주시는 것이었습니다.
예레미야가 선지자로 부르심을 받았을 때는 요시야왕이 통치할 때였습니다. 그 때는 정치적으로, 사회적으로 안정과 번영을 구가할 때였습니다. 중동의 최강 아시리아제국은 힘이 많이 빠져 있었고, 다른 나라들도 유다를 넘보지 못했습니다. 게다가 요시야왕은 종교개혁을 일으켜, 우상들을 몰아내고, 성전을 수리하고, 유월절을 새롭게 지켰습니다. 당시 표면적으로는 나라가 다시 중흥을 일으켜, 비상할 것만 같았습니다. 하지만 유다 백성들의 신앙은 무너질 대로 무너져 있었고, 영적으로 그리고 윤리적으로 많이 무너져 있었습니다. 유다 백성들은 그들의 속을 새롭게 하여 하나님을 향해야 했는데, 그렇지 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유다 백성들에 손을 대시겠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17) 그러므로 너는 네 허리를 동이고 일어나 내가 네게 명령한 바를 다 그들에게 말하라 그들 때문에 두려워하지 말라 네가 그들 앞에서 두려움을 당하지 않게 하리라
‘허리를 동이라’는 것은 ‘마음을 굳게 먹으라’는 의미입니다. 당시에 사람들의 옷은 통으로 되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전쟁에 나가거나, 일을 할 때는 옷이 거추장스럽지 않도록, 허리띠를 질끈 졸라매었습니다. 우리말로 표현하면 ‘신발끈을 묶다’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에게 들은 말씀을 다 전할 때에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시며, 두려움을 당하지 않게 해 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그것은 그 사역이 쉽지 않은 일일 뿐만 아니라 몹시 두려운 일이라는 의미와도 같았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약속해 주셨습니다.
(18-19) 보라 내가 오늘 너를 그 온 땅과 유다 왕들과 그 지도자들과 그 제사장들과 그 땅 백성 앞에 견고한 성읍, 쇠기둥, 놋성벽이 되게 하였은즉 그들이 너를 치나 너를 이기지 못하리니 이는 내가 너와 함께 하여 너를 구원할 것임이니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온 땅’, ‘유다 왕들’, ‘지도자들’, ‘제사장들’, ‘그 땅 백성’ 등이 예레미야 선지자가 상대해야 할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결코 쉬운 상대가 아니었습니다. 가장 높은 사람부터 가장 낮은 사람들까지 모두 상대해야 하는 벅찬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예레미야를 견고한 성읍, 쇠기둥, 놋성벽이 되게 해 주시겠다고 하십니다.
고대의 전쟁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은 성을 빼앗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만약 정복해야할 성이 너무 크고 웅장하거나, 그 성이 쇠기둥과 놋성벽으로 되어 있다면, 그 성은 난공불락일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에게 견고한 성읍과 쇠기둥, 놋성벽의 역할을 하라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그 성읍과 쇠기둥, 놋성벽은 적들의 공격으로 인해 수없이 고난을 겪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성읍과 성벽 때문에 그 안에 있는 사람들은 생명을 건질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예레미야 선지자를 민족의 성읍과 쇠기둥, 놋성읍으로 삼아 주심으로 말미암아 유대 민족이 살고 예레미야 때문에 하나님의 백성들이 새로워 질 수 있었습니다. 물론 예레미야 선지자는 말로 다할 수 없는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예레미야의 뜻이 ‘여호와께서 던지신다’, ‘여호와께서 세우신다’입니다. 예레미야는 조국의 멸망이라는 고통스러운 시대에 던져져 그 민족을 세웠습니다. 즉 예레미야는 그 어려운 시대에 하나님의 백성들을 바로 세우기 위해서 던져진 하나님의 도구였습니다.
우리들이 이 시대를 살아가는 예레미야들입니다. 우리 모두는 주님 안에서 함께 지어져가며, 어떤 역할로 부르심을 받았든지 또 몇 달란트를 받았든지, 우리의 가정에, 우리의 일터에, 우리 사회에 던져져, 그곳을 세워가는 하나님의 역사의 통로들입니다.
(사순절을 보내는) 오늘 하루도 하나님의 예레미야로 사는 한 날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기 도
하나님 아버지!
오늘부터 예레미야 속으로 믿음의 순례, 말씀의 여행을 떠나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우리도 우리가 예레미야의 고백처럼 부족하고, 연약하며, 참 보잘 것 없게 여겨지지만, 예레미야처럼 주어진 소명의 길을 잘 걷고, 잘 달려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보내기를 원하시고 통로삼기를 원하실 때, 핑계를 대지 않게 하시고 하나님께 부르심을 받아 쓰임을 받는 것이 은총이요 복임을 잊지 않게 하여 주시옵소서. 비록 그 과정에 크고 작은 장애물이 있고, 때로는 산을 돌아가는 것과 같은 일이 있더라도, 순종하는 믿음의 사람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오늘 하루도 우리를 던져 주신 우리 가정과 일터와 삶의 자리에서 주님과 함께 지어져 가게 하시고, 우리로 인해서 우리의 가정과 일터와 삶의 자리가 세워지는 하나님의 역사를 맛보게 하여 주시옵소서. 우리가 받은 달란트가 얼마인지를 세어보기 보다, 우리에게 그 달란트를 주신 하나님을 바라보는 청지기로 살아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우리 모두가 이 시대를 세워가는 예레미야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