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살았던 ‘우리 집 이야기’
◎ 아파트
어렸을 적 내가 살던 동네인 충정로 3가에 1930년대에 지어진 아파트가 하나 있었다. 외관이 초록색인 1동짜리 4층 건물이었다. 사람들은 그 집을 ‘도요도(도요타)아파트’라고 불렀다. 우리나라 말로 풍전아파트라고도 불리기도 했고, 그 후로 충정아파트 등 여러 이름으로 바뀌어 불렸다. 나중에 알게 된 것은 일본인 ‘도요타 다네오’라는 사람이 임대수익을 목적으로 지은 것이었다. 당시에 나는 아파트라는 데가 무슨 용도로 쓰이는 건물인지, 사람이 사는 집인지 사무실인지 잘 몰랐다. 그리고 별 관심도 없었다.
이 건물은 보존과 철거를 두고 의견이 많았다가 붕괴위험이 있어 2022년에 철거로 결정되었고, 그 자리에 다른 건물이 들어섰다는 기사를 읽었지만 가보지는 못했다.
그 후로 아파트라는 이름을 들은 것은 박정희 대통령 때 지은 마포 아파트였다. 1960년대 초에 지은 마포아파트는 한 동짜리가 아닌 단지형 아파트로써 개별 연탄보일러 식 난방이었다. 1960년대에는 시민아파트라는 것도 있었다. 산자락에 무허가로 지은 판자 집들을 철거하면서 철거민을 수용할 아파트를 서울시에서 지은 것이다. 와우아파트라는 아파트가 있었는데, 그 중 한 동이 무너져 많은 사상자를 냈다. 불도저라는 별명을 가진 김현옥 서울시장이 그 일로 사표를 냈던 거로 기억된다.
초기에 지은 아파트들은 주로 서민들을 위한 것이었지만 그 후로 중산층을 위한 아파트들이 들어서기 시작하였다. 반포 주공아파트, 압구정동 현대 아파트, 여의도 시범 아파트등 대 단지 아파트가 들어섰다. 남편은 증권거래소가 여의도로 가면서 여의도가 발전되었다고 말한다. 증권거래소 이전으로 증권회사와 금융기관이 대거 따라 움직인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보다 먼저 새 국회의사당이 들어선 것을 보면 여의도의 개발이 그 때부터 시작되었던 것 같다. 여의도 비행장으로 만 알려졌던 여의도 벌판에 국회 의사당, 증권거래소와 금융기관, KBS 방송국까지 들어서고, 속속 고층 아파트도 들어서며 여의도는 부유층이 사는 동네가 되었다.
강북에 살고 있던 친구들 중 많은 이들이 그 때부터 아파트를 찾아 주거지를 이동하였다. 명문 고등학교들도 하나 둘 강남으로 이전하고, 강남은 8학군으로 자녀들 교육의 1번지가 되었다. 아파트 값이 오르고 투기가 횡행하자 노태우 대통령 때 200만호 신도시를 건설하였다. 분당, 일산, 평촌, 산본, 중동 신도시다. 이 때 내가 살고 있던 곳의 성당 교우들도 아파트청약에 당첨되어 많은 이들이 신도시로 떠났다.
새로 들어서는 정부들은 경기(景氣) 진작이 필요할 때마다 신도시 계획을 발표하였고, 건설업자들은 경쟁적으로 전국에 아파트를 세웠다. 산세가 좋은 곳, 강이 있는 곳에 아파트들이 들어섰다. 아파트 값은 몇 배로 뛰었고, 따라서 전국의 땅값도 천정부지로 치솟았다. 질 좋은 삶을 제공해주는 주거환경에서 살고 자 하는 것이 주된 목적이었던 아파트가 재산 증식의 수단이 되어 갔다. 어느 동네 어느 아파트에 사느냐가 신분을 나타내는 기준이 되어가기도 했다. 따라서 그 경쟁의 대열에서 뒤처진 사람들의 박탈감도 커갔다.
이런 와중에서도 우리는 신림동 집에서 한 발자국도 벗어나지 않고 살고 있었다. 연탄보일러에 19공탄을 하루에 20장씩 갈아 넣고, 나중에 가스보일러로 바꾸기는 했지만, 단열이 잘 안되어 우풍이 센 집에서 살았다.
남편의 친구들은 복부인이 되어 아파트를 사고팔기도 하며, 땅에도 투자하여 월급쟁이인 남편들을 경제적으로 돕고 있었다.
친구들의 자랑이 은근히 부러웠던지 어느 날 남편이 내게 물었다.
“당신은 그런 일에 관심이 없어?”
내가 시큰둥하게 대답했다.
“이 부동산 투기 광풍에 우리까지 힘을 보태야 하겠어요? 그것이 하느님이 원하시는 일일까요? 하느님이 바라시지 않은 일에 무슨 영화가 따를까요?”
내 말을 들은 남편은
“허, 당신은 이 세상 사람이 아니니까...” 하였다.
내가 ‘이 세상 사람이 아니어서’가 아니었다. 어느 정도는 내 양심의 소리에서 나온 말이기도 했지만, 그보다는 우리 같은 대가족은 아파트에 가서 살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고, 주먹에 쥔 돈도 없어서 그렇게 말한 것이었다. 남들처럼 핵가족으로 살았다면 나도 그들처럼 편리한 주거와 더 좋은 교육환경을 찾아 갔을 지도 모른다.
장황하게 아파트 이야기를 늘어놓았지만 결론은 42년 살던 집을 떠나, 서울 근교의 작은 도시, 작은 아파트로 이사와 14년 째 우리 부부가 살고 있다는 것이다. 내 생에 아파트 생활은 없으리라 생각했었는데, 정원 같은 공원을 옆에 끼고 있고, 마당을 쓸 일도, 겨울에 눈을 치울 일도 없는 편리한 집에다 마지막 둥지를 틀었다.
지금부터 나는 토평동으로 이사 오기까지 살았던 ‘우리 집 이야기’를 써 볼 생각이다. ‘집 이야기’ 라기 보다는 그 안에서 있었던 삶과 사람들의 이야기가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