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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 내 잔인한 '장난기'의 피해자
# 평상 위의 낮잠
아, 얼마나 깨끗하고 아름다운 날인가.
오늘 같은 날에, 어떤 시인은, ‘눈이 부시게 아름다운 날’이라는 표현을 썼나봅니다.
정말, 눈이 부시도록... 아니면 눈이 시리도록, 선명한 색상으로 세상은 가득 차 있습니다.
오전 내내 후텁지근하게 찌뿌렸던 날씨가, 갑자기 검은 구름을 몰고 오더니 폭우를 쏟아 부었습니다.
천둥과 번개를 동반한 비바람이 몰아치는데, 정말... 세상이 뒤집어지는 줄 알았습니다.
마당은 붉은 황토 물바다였고, 힘차고 거센 빗줄기는... 가까이거나 먼 산들을 그 형체도 보이지 않을 정도로 시야를 흐려놓드라구요.
나는 마루에 앉아, 고스란히 그 변화를 지켜보면서... 비가 쏟아지는 풍경을 수채로 드로잉을 했는데요,
그러면서 번쩍번쩍 번개가 칠 때는, 솔직히...
'혹시 저 번개가 이 마루로 떨어지지는 않을까?' 겁이 나기도 했답니다.
그렇지만 작업을 하던 중이라(내 스스로는 그런 상황을 꽤나 신성시합니다.),
'그런 외부 상황에 좌우되지 말자!' 면서, 들이치는 비로 스케치북의 겉장이 젖어가는데도... 내 작업에 열중했습니다.
그 와중에도, 집 마당 끝자락의 코스모스 몇 포기가... 비바람에 견디지 못하여 찢겨 쓰러져 나뒹구는 게 보였습니다.
요 근래, 큰비가 올 때마다(비가 멈출 때마다)... 옆으로 누운 놈들을 지줏대 까지 박아주면서 세워 놓았고, 찢겨진 옆 줄기는 끈으로 묶어주었었는데......
그런데 이번에 내린 비로, 저렇게 찢겨 쓰러져 누워버린 코스모스는... 다시 세울 수도 없을 것 같드라구요.
그러니, 이제 어쩔 수 없이... 뽑아서 버려야 할 것 같습니다.
꽃 피기도 전에 자연 현상으로 수명을 다 한 것이니......
한 시간여, 세상을 폭우로 뒤덮던 비는... 거짓말처럼, 한 순간에 멈추었습니다.
그러더니 동쪽 하늘로부터 파란 색의 하늘이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습니다.
아, 얼마나 깨끗하고 아름다운 하늘이던지......
역시 비가 갠 하늘은 더욱 선명했고, 햇살도 쨍하게 빛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서 산 사이로 찢어져 오르던 하얀 구름들도 그 모습을 감추더니, 이제는... 하늘이 파란 색으로 넓기만 합니다.
그 뿐 아니라, 갑자기 기온도 쑥 올라간 듯합니다.
그러면서도 때가 되었기에, 점심을 챙겨먹고 샤워도 하고 나와 보니... 아까와는 너무도 다른 세상으로 바뀌어 있었습니다.
나는 '夢想?' 앞 은행나무 아래 평상에 앉았습니다.
눈앞에 펼쳐지는 풍경이 얼마나 깨끗한지, 현실감마저 없게 느껴질 정도랍니다.
호수는 옥빛으로 아른거리고, 그 뒤로 서 있는 깨끗한 산.
아, 이 아름답고 깨끗한 세상에 무엇이 더 필요할까요?
정말, 더 이상도 더 이하도... 아무 것도 필요없이, 이 세상은 너무나도 아름다웠습니다.
'이럴 땐 뭘 어떻게 한다지? 뭘 해야 가장 보람차고 아름답게 이 상황을 만끽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도 들더라구요.
그때, 하얀 구름 한 덩이가... 푸른 산 뒤에서 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삐죽이 고개를 내밀면서 커지고 있었습니다.
어느 틈엔가 나무에선 매미 우는 소리, 그리고 풀섶에선 이름 모를 벌레 소리도 들려왔구요...
내일이 '중복'이라는데, 이제... 그 지긋지긋한 장마는 아주 물러간 것일까요?
아, 이런 모습이... 지구상의 한 여름을 대변하는 것일까요?
여름입니다.
어쩐지, 이제 부터는... 진짜 여름일 것 같은 생각도 듭니다.
아, 그렇다면, 이 여름을 만끽하기 위해서라도... 뭔가를 찾아야만 했습니다.
그 게 뭔 줄 아십니까?
하 하 하...
그냥, 평상에 벌러덩 누워버리는 일이었습니다.
그랬더니, 짙푸른 은행 잎 사이로... 파란 하늘이 보였고,
그 아래 군데군데에 열린 은행 알이, 맑은 색이면서도 제법 굵었습니다.
저 굵은 은행 알이 노랗게 변하면, 가을이 되는 거겠지요?
그러면서 눈이 스르르 감깁니다.
한 줄기 맑은 바람이, 자장가보다 더 몽롱하게... 날, 낮잠 속으로 빠져들게 합니다.
7 . 25
요즘에 컴퓨터도 없다 보니, 기로는 시간이 좀 남아도는 기분이었다.
그래서 이른 아침에 나와, 일단 개를 풀어주고는... 집 뒤켠의 풀을 뽑는 작업을 마무리 했다. 그러면서,
'오늘 쯤은, 누리아한테... 전화가 올 법도 한데......' 하는 생각도 했지만,
아침을 먹을 때까지 아무런 기척도 없었다.
그래서 기로는 작업방부터 청소를 하기 시작했다.
밤에 김 선생님과 군산의 정원장 부부 등이 오기로 돼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이 오면 기로는, 자신이 스페인에서 개발했던 '쁠라또 장(Plato Jang)'으로 저녁상을 준비할 것이고,
한국인들 끼리 스페인 손님들 맞을 의견조율과 여행 계획을 짤 생각이었다.
그 와중에 기로는 이불도 내다 널었다.
햇볕이 좋지는 않았지만, 오늘 올 손님들도 하룻밤을 자고 갈 것이어서... 나름대로의 준비를 해야만 했던 것이다.
그러면서는 물론 세탁기도 돌렸는데, 거기서 그친 게 아니라... 마침 반장이 왔길래, 그의 도움을 받아...
통나무 집과 '夢想?' 사이의 풀밭에 있던 나무 탁자도 아예 '夢想?' 마당으로 옮겨 놓았다.
그런 다음, 반장에게 매실 엑끼스 한잔을 얼음을 띄워 대접했다.
그렇게 둘이 평상에 앉아 있는데, 키큰 아저씨가 나왔다.
그러다 보니 이 '둔터니' 마을의 남정네들의 모임이 된 듯했는데,
그런 사이에도 하늘엔 구름이 짙어졌다가 해가 나오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아니, 장마가 끝났다더니... 왜 이리 하늘은 금방 비를 몰고 올 것처럼 흐리기만 한지, 정말... 짜증이 나네요." 하고 기로가 불평을 하자,
"그렁게나 말여..." 하고 키큰 아저씨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오늘이 중복이자 토요일이라 그런지, 박 만석은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아침부터 손님들이 몰려와, '夢想?' 앞 평상 모임에 합류할 수 없었던 것이다.
(엊그제 있었던 그집의 골칫거리 문제와는 아랑곳없이, '돈벌이'에 열중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하루 종일 날씨는 그 타령이었다.
비가 내린 것도 아니면서 계속 오락가락댔던 것이다.
*
어제는 김 선생님과 정원장 부부가 왔다.
물론 내가 스페인식으로 저녁 대접을 했고, 우리는 기분 좋게... 와인을 마시며 밤도 즐겼다.
서로가 긴밀한 협조를 하면서 스페인 친구들을 맞을 계획도 세웠는데,
이미 내 작업 방에 군불을 지펴놓았던 뒤라, 방의 상태도 최상이었다.
그리고 오늘 정원장 집에 손님이 온다기에 일찍 돌아갔는데,
어째 오늘 아침 기온은, 여름이 아닌 듯... 갑자기 선선해져 있었다.
하늘은 구름으로 덮여가고 있었는데, 호수 표면이 물결에 술렁이면서 코스모스도 살랑대는 게... 마치 가을 아침 같기도 했다.
'오늘은 스페인에서 전화가 올까?' 하기도 했지만, 아침 기온이 선선해서... 나는 방으로 들어와 보일러까지 켜야만 했다.
그러다가 열 시쯤, 화구를 사러 전주에 나갔다.
'남문'에서 버스를 내렸는데, 가죽 신발가게 옆을 지나다가... 충동적으로 샌들 한 켤레를 샀다.
그렇잖아도 시간 내기가 쉽지 않아 미적댔었는데, 샌들이 눈에 띄자마자...
'아, 맞어!' 하면서, 삼만 원을 주고 샀던 것이다.
그리곤 전주 우체국에 들렀다.
요즘 컴퓨터 없이 생활하다 보니, 내 홈페이지 상황이 너무 궁금했기에... 무료로 인터넷을 이용하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우체국 안에 있던 다섯 대의 컴퓨터가 사람들로 꽉 차, 빈 곳이 없어서... 조금 기다려야만 했는데,
젊은 애들 한 커플이 컴퓨터 두 대를 차지한 채 장난을 치고 있어서, 이맛살을 찌푸리지 않을 수 없었다.
결국 그들이 나가고 나서야, 나는 그 중의 하나에 자리를 잡았다.
그런데 내 사이트엔 별 변화가 없었다.
그러니까 요즘 내가 홈페이지에 업데이트를 하지 못해, 그나마 있던 방문객들한테도 외면을 받고 있는 모양새여서,
'이렇게 금방 표가 날 줄이야!' 하고 실망하지 않을 수 없었지만, 그렇다고 내가 그들을 원망할 그 어떤 구실도 없을 것이었다. 그토록 내가 정성을 들였던 홈페이지인데도, 단 며칠... 공백기간이 생기자마자, 방문객들은 미련없이... 등을 돌리면서 떠났을 수도 있었던 것이다.
허긴, 그런 게 세상 이치니까......
그래서 지난번에 왔던 제자들의 까페에 들어가 보니, '夢想?'에 와서 찍었던 사진과 이야기들이 올라와 있었다.
그런데 거기엔 의외로 재미있는 사진들이 많아서,
'아무래도 녀석들은 미술을 했기 때문인지, 제법 좋은 사진들이 많구나......' 하면서 나는, 뭔가 모를.... 흐뭇함도 함께 하는 것이었다.
어찌 됐건, 내가 그들을 가르쳤던 것이고, 그런 바탕으로... 이제는 사회생활을 너끈히 하고 있는 녀석들이라서.......
그렇게 내 홈페이지에서 실망했던 아쉬움을 제자들 까페에서 조금 보상을 받고는,
내 발걸음은 오늘의 목적지였던 화방으로 향했다.
그런데 화방에서 지체한 시간이 좀 길었던지, 내가 타야할(돌아와야할) 버스를 놓치고 말았다.
하는 수 없이 다음 버스를 기다려야만 했는데, 내가 정류장에 도착하기 전에 바로 버스가 지나간 듯... 근 한 시간 넘게 기다려야만 했다.
약간 지친 몸으로 버스에서 내려 마을로 걸어오다가 나는, 길 가 숲에 나던 ‘왕 고들빼기’를 조금 뜯었다.
점심 반찬이 마땅치 않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내 머릿속에는,
'어서 빨리 '夢想?'에 돌아가, 이런 것과 풋고추 등으로... 빨리 점심을 먹어야겠다.' 하는 생각 뿐이도록, 허기도 진 상태였던 것이다.
그런데 마을 길로 접어들어 내려오다가 보니, 산장 할머니가 집 마당에 앉아서 뭔가를 하시기에,
"뭐 하세요, 할머니?" 하고 인사를 하자,
"어디 갔다와?" 물으셨다.
"예, 전주 좀... 다녀오느라고요."
"근디, 손에 뭘 들었어?"
"예, 왕고들빼기요."
"뭐허게?"
"그냥, 점심에 싸 먹을까 해서요......"
"그려? 아이고, 그러고 보믄... 화가 선상은 사람이 참 건실혀!"
"예?"
나는 처음엔 그게 무슨 말씀인가 했다.
"응, 다른 사람 같았으믄... 전주에 나간 길에, 뭐 맛있는 거라도 사먹고 올틴디..."
"아! 근데, 제가 무슨 돈이 있어야지요..."
"그렁게. 그려도 참, 사람이... 얌전허고 알뜰혀..."
"돈이 없어서 그렇지요." 했는데,
할머니는 손가락으로 '산장 가든'을 가리키며,
"저기 봐. 우리 아들네..." 하더니, "전주 사람들도 저렇게들... 점심 사먹으러 여까지 몰려들 오잖여? 다른 사람들은 저렇게 음식을 사 먹으러 댕기는디, 전주까지 나간 사람이... 이렇게 돈을 아끼믄서 집에 와서 밥먹을라고 오는 것 봐. 그리고 손에 저렇게 반찬거리까지 뜯어가지고 오는거 본게, 보통 알뜰헝게 아녀..." 하시는 것이었다.
그래서 보니, 아닌 게 아니라... 오늘따라 산장엔 많은 차들로 붐비고 있었다.
그래서,
"제가 저런 사람들처럼 팔자가 좋나요? 어디......" 하자,
"아녀, 더 훌륭한 사람여..." 하는 거 아닌가.
"아이, 할머니도... 훌륭하다니요!" 괜스레 나는 민망해지는 기분이었다. 그래서 후딱 돌아서며,
"할머니, 풋고추 몇 개 따 갈 께요. 점심에 찍어 먹게요." 하고 화제를 돌렸는데,
"아믄, 얼마든지 따다 먹어. 화가 선상이 따가는 건, 하나도 안 아까운 게..." 하시는 것이었다.
어쨌거나 기분은 좋았다.
그저 내 자신의 사소한 일까지도 인정해 주시는 이웃이 있다는 게......
사실, 그 말씀이... 얼마나 든든하고 고마운지 몰랐다.
그렇긴 하지만 나는 확실히 민망한 면도 없지는 않았다.
왜냐면 내가 식당에 가서 밥을 사 먹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는 평소 생활태도이기도 해서 그랬던 지라,
결국은 그것도... 내 까다로운 식성으로 인한 '굴레'이자, 어떤 면에서 보면... ‘사서 하는 고생(?)’인지도 몰랐기 때문이다.
그렇게 돌아와 점심을 먹은 뒤, 그리고 낮잠까지 자고 난 뒤에... 바르셀로나의 '누리아' 전화를 받았다.
그녀는 이제 막 휴가로 접어들었다며, 한국에 오기 위한 준비가 시작되었다고도 했다.
그래서 한국에서의 일정에 대한 얘기를 주고 받았다.
밤이 되자 비가 부슬부슬 내리기 시작했고, 군산의 형과 형수님이 김치를 가지고 왔다.
7 . 28
이 날(7. 28)은 이렇게 일기도 썼고, 다른 편지도 써서 홈페이지에 올렸는데...
일기의 뒷부분이 너무 빠르게 끝낸 건, 아마... 다음 편지를 써야했기 때문에, 확... 양을 줄였던 것으로 보인다.
# 내 '장난기'
"아이, 내 신발에 뭐가 이렇게 묻었는지 몰라..." 하는 말을 (크게)하면서(소리치듯) 나는,
걷는 양쪽 발(신발)을 무릎 높이까지 옆으로 차올리며, 씰룩샐룩... 우스꽝스럽게 걸어 나갑니다.
"아이고!"
얼굴이 벌개지도록 웃으며(웃지도 못하면서), 산장 아저씨는... 부리나케 쫓아 와서는, 나를 꽉 껴안으면서까지 꼼짝 못하게 단속을(?) 하는데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아저씨를 벗어나,
가능하면 산장 원두막에 앉아 식사하던 손님들이 다 볼 수 있도록(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봤을 걸요? 다 잘 보이는 마당이었으니까요.), 다리를 양 옆으로 들어 올리며... 또 다시,
"누가 일부러 묻힌 거야, 뭐야? 왜 이렇게 신발에... 뭐가 묻었냐고?" 하면서, 씰룩쎌룩 엉덩이를 흔들면서까지 걷습니다.
"장씨! 아이고, 그만 혀! 내가 장씨 땜시... 미쳐!."
산장 아저씨는 쩔쩔 매면서, 나를 잡고 꼼짝 못하게 안고는... 있는 힘 없는 힘 다 써서, 나를 식당 안으로 끌고 들어갑니다.
그렇게 둘이 사라집니다. 무슨 연극 무대도 아니고......
하 하 하 하....
이게 무슨일이냐구요?
한 번 들어보세요. 아주 재밌는 얘길 겁니다.
나는 어제 샌달 한 켤레를 샀습니다.
여름이기도 하거니와 시골에 살면서 걷는 일이 많아졌던 나는, 언제부턴가 샌달의 필요성이 있어서였지요.
그런데 사실은, 마땅히 여윳돈을 만들지 못하던 나는... 샌달을 산다고 하면서도, 피일차일 미루고 있다가,
어제 전주에 나가는 길에 가죽신발 만드는 곳을 지나다가... 즉흥적으로 거금(?) 3만원을 주고 샀던 것입니다.
그런데, 어제 산장아저씨가 군청에 갈 일이 있다며... 나에게 같이 가 줄 것을 부탁했었기 때문에, 산장으로 가서... 마침 안에 계시던 아저씨 앞을 지나가면서, 천연덕스럽게...
"에이! 신발에 뭐가 묻은 거야?" 하면서, 일부러 신발을 앞으로 죽 들어 올리며 아저씨의 주의를 끌자...
"어! 장씨, 신발 샀네?" 했었거든요.
그 얘길 참고로 들으시면 재미가 있을 겁니다.
사실, 며칠 전에 '夢想?' 앞 평상에서는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그 날도 키큰 아저씨와 산장 아저씨 셋이서 이런 저런 얘기를 하고 있었는데, 마침 산장 아저씨가 신고 왔던... 이제는 다 떨어져간다는 인조 가죽 샌달에 대한 얘기가 나왔습니다.
"이제 이건 다 신었어." 라는 산장아저씨의 말에,
"그려? 그려도, 튼튼허게 보이는 디..." 하고 키큰 아저씨가 말했습니다.
"응, 작년에 사서 1년을 신었응게, 본전은 뽑은 편여..." 산장아저씨의 말이었습니다.
"1년이나 신었어?"
"예. 그런디, 며칠 전에 채소장시가 왔는디, 샌달 튼튼한 것을 신은 거 같어서, 얼마주고 샀냐고 물응게... 만 오천원 줬다는디, 바느질을 쓰게 한 거 같습디다. 그려서 나 한테도 똑 같은 거 하나 사다달라고 돈까지 주고 부탁혔시라." 하면서, "장씨, 그 채소장시 언제 와?" 하며 나에게 물었습니다.
"월요일에 올 걸요? 이 동네엔 매주 월요일에 온다고 했던 것 같은데요......"
"그려? 그럼 낼 모레네?"
"예... 또 사시게요?" 하며 내가 물으니,
"응, 이 건 다 신었고, 허드레로 신을 거 하나 필요혀서..." 하시드라구요.
그 때, 키큰아저씨가,
"그럼, 저런 신발이 또 있단 말여?" 하고 물었고,
"예, 지난번에... 비싸고 좋은 걸로 하나 준비해두셨거든요..." 하고, 내가 대신 대답했습니다. 그러면서도 나는,
"뭐, 십오만 원을 줬다나요?" 하고, 이때부터는 살짝 말을 꼬기(?) 시작했습니다. 그 양반이 어떻게 하는지가 궁금해서였습니다.
그러자 키큰 아저씨가,
"뭐어? 십 오만 원씩이나 주고?" 하고 놀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내가,
"예, 메이커 있는... 좋은 거 하나 사 두셨다고, 자랑하시드라구요." 했는데,
"아녀! 십삼만 원 주고 샀어." 웃음기가 가득한 산장아저씨가, 그래도 2만 원 정도는 깎고 샀다는 듯이, 우리 둘 사이에 끼어들었습니다. 그런데,
"십삼만 원씩이나 주고 신발을 사?" 키큰아저씨가 놀랍다는 듯, 눈이 휘둥그레지는 것이었습니다.
"예, 그 ‘고래 심줄 같은 돈’으로요." 얼른 내가 말을 가로 채 대답을 했습니다. 어쩐지 자꾸만 얘기를 비틀고(?) 싶어드라구요. 내 '장난기'가 서서히 발동하고 있었던 거지요. 그러자,
"어이구, 이게 무슨 일여? 근디, 그 신발은 왜 안 신고 다니는 거여?" 키큰 아저씨 역시 호기를 만난 듯(?) 다소 얘기를 확대하려는 모습이드라구요.
그래서 나는 탄력을 받은 김에 아예 일을 벌이기 시작했지요.
"아니예요. 이미 신었답니다. 지난번 부부 동반으로 놀러갈 때, 그리고 임실의 군청 갈 때... 그럴 때만 신고 다니시거든요......" 하며 고개를 돌려 보니, 이미 산장아저씨는 얼굴이 벌개져 있었습니다.
아무리 아이 같으신 그 양반도, 이쯤에서는... 키큰아저씨와 내가 나누는 말이, 곧... 자신의 자린고비적인 돈 씀씀이에 대한 비꼬임이란 걸 알아차렸던 것이지요.
그런데, 얘기는 이때부터 재미있어지는데......
"근데요... 그 신발을 신고서 어딘가 밖에 나갈 때는요..." 말하면서 내가 불쑥 일어나,
"에이! 내 신발에 뭐가 묻은 거여?" 하면서, 신발을 양 옆으로 벌리며 실룩쎌룩 걷는 모습으로 걸어나가자, 더 이상 참지 못하던 산장아저씨는,
"아니, 왜 그려?" 하고 부리나케 일어나, 나를 잡아끌면서...
"아이고! 장씨..." 하며 얼굴이 벌개지도록 웃드라구요. 사실 본인은 그런 적이 없었는데, 내가 일부러 놀리기 위해 말을 꾸며냈던 것인데도,(그 양반을 웃기게 하려고)
마치 본인이 그랬던 것을 내가 흉내라도 낸 것처럼... 순진하게도, 쩔쩔 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니까, 나는 산장아저씨를 놀리려는 농담에 불과했는데, 정작 당사자는 마치 십삼만 원하는 샌들을 신고 나갔을 때... 다른 사람이 관심 좀 가져주기를 바라면서 그런 제스춰를 했던 것(속마음)을 들킨 사람처럼... 얼굴이 홍당무가 된 채 나를 잡아 댕기는 것이었지요.
"아이고, 내가 장씨 땜시... 못 살어!" 하면서 말입니다.
그런데, 내가 거기서 끝낼 사람이던가요?
나는 한 술 더 떠서...
"옛날에, 어떤... 한 아주머니가 있었는데요, 고생 끝에... 돈을 보아, 새로 산 금반지를 손에 끼고 외출을 했는데... 그 반지를 자랑하고는 싶은데, 다른 사람들이 반지를 쳐다보지도 않으니까, 괜히 일도 없이... 반지 낀 손가락을 사람들 얼굴 앞으로 펼쳐보이면서,
"즈-어-기가 어디래요?" 하면서 이리저리 손가락을 휘저었다는 모션을 취하자,
산장 아저씨는 뒤집어져 일어나지도 못하드라구요.
사실, 그 우스개소리는... 구식도 한참 오래된 구식 버전인데,
순진한 산장아저씨는, 그런 것에도 그렇게 순진하게 대응하고 있었던 듯싶습니다.
그날처럼 얼굴이 벌개지도록 웃는 모습을 본적이 없거든요......
아무튼 요즘 뭔가 집안 문제로 심란해하시는 분을, 그런 식으로... 웃어죽게 만드는 데는 성공을 했던 것이지요.
그러니 기왕에 흥이 오른(?) 나는, 아니, 내 잔인하기까지 한 '장난기'는,
거기서 멈출 수가 없어서... 다시 한 번, 앞으로 걸어 나가면서,
"아이, 내 신발에 뭐가 이렇게 묻었담?" 하면서 다시 씰룩쎌룩 엉덩이를 흔들며 걸어가는 시늉을 했더니,
산장아저씨는 이젠 고개를 들지도 못하드라구요.
아, 순진한 양반......
그러더니 결국, 평상에서 일어나 나를 홱! 잡아 앉히면서는,
"나, 갈랑게..." 하면서 웃으며 도망쳐버리드라구요.
그 뒷모습을 보며,
"저 노랭이가 큰 돈 썼구만." 하면서 키큰아저씨도 오금을 박드라구요.
그래서 우리는,
"와. 하 하 하..." 둔터니 마을이 떠들썩하도록 웃었답니다.
글쎄요, 그 양반... 집으로 돌아가면서도, 얼굴을 제대로 들고 갔나 모르겠습니다만......
그런 일이 며칠 전에 있었거든요.
그런데, 오늘 내가 새 샌들을 신고 그 집에 가서 그런 행동을 리바이벌 했으니... 다시 산장아저씨는 얼굴이 벌개지면서 나를 잡아 앉혔던 것이지요.
10 년 차이도 더 나는 아저씨를 그렇게 놀려도 되는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요즘엔 내가 그런 식으로 돼버렸습니다. 그 양반을 꼼짝 못하게 만들어 놓은(?) 거지요......
아무튼 군청에 갈 꽃단장(?)을 하던 아저씨는, 아주머니를 부르고 나에게 물으며... 바쁘기만 했습니다.
돈을 얼마나 챙겨갖고 가야하는지, 준비물은 뭐가 필요한지...... 그러더니,
"장씨! 양말은 신어, 말어?" 묻드라구요.
그 전에 외출할 때 보니, 샌들에 양말을 신으셨길래,
"샌들엔 양말을 안 신어도 되거든요?" 했었기에, 또 오늘 나도 당연히 맨발에 샌들을 신은 상태여서... 그 양반은, 그 문제에 갈등을 느끼셨던 것이지요. 그러면서도,
"근디, 내 발이 주살나게 생겨서..." 하는 겁니다.
발톱 두께가 1cm는 될 법하게 두껍고 못 생겨서 늘 불만이시거든요.
그런데 그 좋은 신발을 깨끗한 양말에 신고 싶으신데, 내가 그러지 않아도 된다니까... 이래저래 마음에 걸렸던 것이지요. 그래서 내가,
"알아서 하세요. 허지만 샌들은 그냥 맨발에 신어도 됩니다. 더구나 양복바지도 아닌 면 바지를 입는 경우엔..." 하고 다시 말씀 드렸는데도,
"그러까?" 하더니, 손에 들고 있던 양말을 방안에 휙 집어 던지드라구요.
"내 발이 못 생겨서..." 그러면서도 발 타령을 하기에,
"누가, 발만 보나요?" 하고 한 마디 던지면서,
그렇게 둘이서 막 트럭에 올랐는데, 갑자기,
"가지마!" 하는 겁니다.
"?..." 나는 그게 무슨 뜬금없는 손린가 했습니다. 그래서 어리둥절해 하자,
"그렁게, 가지 말고... 여기서 살어."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아니, 또 그 얘깁니까?" 나는 눈에 힘을 줍니다.
그러니까, 바로 조금 전에 나에게 그런 놀림을 받고도, 좋다는(?) 얘기지요. 그 마음을 바로 확인시켜 주는 그런 표현을 쓰시는 걸로 보면, 역시 순진한 양반은 순진한 양반이지요.
"서울 가서 산다고, 뭐 특별나게 다를 거 있어? 사람 사는 게 다 거기서 거기지. 그냥 여기서 이렇게 살으믄 되잖여... 물 좋고 공기 좋고..."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웃기만 했습니다.
이제 그 말에 대한 대꾸는 하지 않겠다는 생각을 이미 오래 전에 해 두었기 때문이지요.
구불구불 2 차선 아스팔트 길을 돌 때마다 산장아저씨의 몸도 휘어집니다.
그 분이 운전할 때는 모션이 크거든요.
다른 사람은 미동도 없이 차만 틀게 하는데, 산장아저씨는 커브길을 돌 때마다 본인의 몸이 먼저 틀어지거든요.
그렇게 마을의 샌들을 신은 두 사나이들이 룰루랄라 트럭을 타고 군청으로 달립니다.
역시 트럭의 카셋 테잎에선 음악이 흐르고 있었는데,
"안 시끄러워?" 하고 내 의향을 묻기에,
"나, 신경 쓰지 마시고 맘대로 하세요." 하는, 관대함(?)도 보여주었지요.
니가 잘나 인생이냐, 내가 못 나... ~~
쿵짝뽕짝 음악은 트롯트로 흐릅니다.
그런데,
"좋은 노래도 한 두 번 인디..." 하고, 조금은 걸리는 듯 산장아저씨는 그런 말로 내 눈치를 봅디다만,
없는 것보다는 나을 수도 있지요. 그리고 아무 대화도 없이 두 사나이가 뭉툭하게 목석처럼 아름다운 시골길을 달리는 것보다는, 그럼 음악이라도 들으면서 달리는 게 훨씬 나은 일이지요......
군청에 가서는 이래저래 복잡하게 일을 처리했습니다.
그렇게 일을 끝내고 오는데, 산장아저씨는 오늘도 ‘손으로 만든 짜장면‘을 먹자는 겁니다.
"별로 생각없는데요......" 했는데도 시간 간격을 두고 세 번째 물어오기에,
"그러면 그렇게 하시지요." 내가 선심쓰듯 대답하니,
"면 것이 속에 안 좋으믄, 말고..." 하는 겁니다.
"아니, 그렇진 않아요."
그래서 짜장면 집에 들어가, 짜장 두 개를 시켜 놓았는데,
주인 아주머니께 바로 돌아오겠다며 아저씨는 날더러 잠깐 나가자고 하드라구요.
밖에 나온 나는, 의아해서,
"무슨 일인데요?" 하고 물으니,
"아니, 그냥... 그 안에 있으믄 답답헝게..." 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우두커니 짜장면 나오길 기다리고 앉아있는 게 싫으셨던 겁니다.
내참!
산장아저씨는 그런 분입니다.
우리는 낄낄대면서 손바닥만 한 강진면 소재지를 조금 걷다가 다시 짜장면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렇게 짜장면을 먹는데,
내가 반절쯤 먹고 있을 때, 몇 젓가락 질로 이미 끝을 본 아저씨는... 내가 끝나길 기다릴 여유도 없는 분입니다.
벌써 지갑을 꺼내 주인 아주머니에게 계산을 하드라구요.
웃음이 나올 겨를도 없이, 나는 서둘러 짜장면을 입에 밀어 넣고 씹으면서 밖으로 나와야만 했습니다.
비가 내리고 있었습니다.
웬 놈의 비가 이렇게 내리는지... 장마가 끝났다더니, 장마 때와 다를 것 없이 내내 흐리더니 결국 비까지 뿌리는 것이었습니다.
다시 시골길로 트럭을 달려 구불구불 달려 호수의 운암대교를 건넙니다.
정말, 다리를 건너며 바라다 보이는 우리 마을은 너무 아름답습니다.
아직 그 곳에서 사진을 찍진 못했지만, 머지않아... 맑고 좋은 날에 카메라를 들고 와서, 몇 컷의 사진을 남겨 두어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 아름다운 마을에서 사는 것도 행운일 것 같다는 생각은 했지만, 오늘은... 말로 내뱉지는 않았습니다.
"오늘 수고혔어."
"아니요. 즐거웠는데요.."
산장아저씨는 날 '夢想?' 에 내려주고는, 수줍은 듯 차를 돌려 산장으로 돌아갔습니다.
몇 시간 만에 돌아온 주인을 보고, 격은 꼬리가 빠져라 흔들고 몸 둘 줄을 모릅니다.
그런데,
어?
마루에 무슨 비닐 봉지가 보였는데,
그 안엔 아직 열기가 식지 않은 옥수수 네 개가 들어있었습니다.
'누가 갖다 놓았을까?'
옆집 할머니는 아니었을 텐데,
그렇다면... 산장 할머니?
비도 내리고, 나는 그 옥수수를 누가 갖다 놓았는지 궁금하긴 했지만... 그 궁금증을 바로 풀 생각은 없었습니다.
‘숨겨진 정’처럼... 당분간은 모르는 채(내일 알게 될지 그 이후가 될지 모르지만), 수수께끼처럼 아름다운 정만을 간직한 채 오늘을 보내고 싶어서였습니다.
7 . 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