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가 해산하게 되면 그때가 이르렀으므로 근심하나 아기를 낳으면
세상에 사람 난 기쁨으로 말미암아 그 고통을 다시 기억하지 아니하느리라
지금은 너희가 근심하나 내가 다시 너희를 보리니 너희 마음이 기쁠 것이요
너희 기쁨을 빼앗을 자가 없으리라 그날에는 너희가 아무 것도 내게 묻지
아니하리라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무엇이든지
아버지께 구하는 것을 내 이름으로(in my name) 주시리라 지금까지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in my name) 아무것도 구하지 아니하였으나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요16:21-24절)
그리스도 안에서 주의 십자가의 죽으심과 다시 사심을 믿는 믿음으로 의를
얻으면 아브라함의 하나님 곧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우리의 하나님도 되십니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구약의 모든 성경들이 우리를 향한 말씀이 됩니다.
만일 성령 안에서 그리스도와 연합이 되지 않으면 이스라엘에 비해 우리는
하나님과 아무 상관이 없는 성경 밖의 이방인일 뿐입니다(엡2:11-12) 그러므로
주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은총에 의해 그리스도의 피 안에서 하나가 되어
화평을 이루어 주의 십자가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어 성령 안에서 주와
한 몸이 되지 않으면 하나님께 나아갈 하등의 근거가 없습니다(엡2:13-18절)
따라서 이와 같은 연결점을 통하지 않고 구약을 통해 막 떠들면 이스라엘과
같은 수준에 놓여 역사의 흐름을 따라 흘러가고 마는 겁니다. 결국 십자가의
도를 배척하는 혈과 육의 사람이 되어 땅의 것을 복으로 삼는 건 자동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흔들어 깨우시므로 혼이 나서 성경을 다시 보게 되는 겁니다.
구약의 하나님을 소개하며 곧장 우리의 하나님이라고 하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원시종교관을 가진 인간들에게 정신승리의 은혜(?)는 끼칠지라도 그건
들을 때일 뿐 개구리 낯짝에 물 끼얹기로 그 속에 살아 있는 믿음이 정립되지
않는 겁니다. 그러다보니 자유의지 운운하면서 끝내 하나님도 내 하기에 달렸다
하는 식의 신앙이 지속이 되고 맙니다. 생각보다 이 함정에 걸려 신음하는 이가
많습니다. 전하는 자신도 믿어지지 않고 무슨 말인지도 모를 말씀을 성경말씀이란
전제로 볼륨을 크게 높여 외치는 겁니다. 그래서 현대교회의 위대한 설교자는
천부적인 스피치 기능을 가진 사람이라는 소리까지 나오는 형편입니다. 괴롭지요.
저는 바울이 나는 날마다 죽노라 하는 것이 어찌 그의 자랑이 될까(고전15:31)하고
궁금해 하고 그렇지 못한 자신에 대해 엄청 속이 상했습니다. 예수를 믿고 주의
십자가를 지라는 말에 오염이 되어 낑낑대는 내겐 날마다 죽는 것은 언감생심이었죠.
그러나 예수를 믿던 자리에서 주의 십자가의 죽으심과 다시 사심의 대속의 은총을
순종하여 그리스도 안에 새로운 피조물로 정착이 된 다음에는 주의 죽으심을 짊어
지는 일이 일상이 되었습니다. 주의 생명이 나의 몸에 나타나기 때문입니다(고후4:10)
예수를 믿기 시작한 50여 년 만에 드디어 이게 바로 기독교구나 하는 탄성이 터집니다.
베드로는 50일(오순절)만에 터득한 걸 저는 미련해서 수십 년이 걸리게 된 것입니다.
우리 주님은 십자가에 죽으시고 다시 사신 다음 40일 이 땅에서 부활의 모습을
보이시다가 승천하신지 10일 만에 오순절 날 구약부터 예언이 되어 있고 주님이
약속하신 대로 성령을 보내셔서 주와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계시는 새 언약을
이루셨습니다. 성령이 우리 몸을 성전 삼고 번제와 속죄제를 없애시고 레위 지파의
제사장이 아닌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은 대제사장이신 주를 통해 은혜의 보좌로
나아가는 길을 환하게 보이셨습니다(행2:33-36) 주님께서 임무교대를 하신 겁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육성설교를 듣고 이적과 기사를 보고 변화산의 영광을 보고
빈 무덤까지 확인을 했으나 잠깐 혼동이 되어 예수께서 그리스도가 되심을 따르는
기간이 50일 밖에 걸리지 않았지만 우리 같은 이방인은 진리의 복음을 제대로 듣지
못하면 길게 고생합니다. 평생을 유명한 부흥사의 뒤를 이어 한국교회의 부흥을 위해
사역을 하신 한 목사님이 아침마다 보낸 로마서강해를 읽고 주님께로 돌아가시 전에
고맙다는 인사를 전한 적이 있습니다. 안타깝게도 베드로가 50일 동안 겪은 해산의
수고를 그 분은 주님 품에 안기기 직전에 하게 된 겁니다. 제겐 참 답답한 기억입니다.
베드로가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안에 그가 있고 주께서 그 안에 계시는 계명을
알지 못할 때는 주님 어디로 가십니까(쿠오바디스)하고 물었습니다. 모든 인간들의
공통 질문이기 때문에 영화까지 만들어 베드로가 쿠오바디스하고 물었다고 꾸민 겁니다.
아뇨 오순절 이후에는 베드로는 다시는 쿠오바디스 하고 묻지 않습니다. 아니 물을
필요가 없습니다. 초대교회가 주의 몸을 기념하여 떡을 떼며 교제한 사실이 증명합니다.
만일 말씀과 성례전을 가지면서도 쿠오바디스 하고 묻는 얼간이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토록 허공을 향해 산 기도를 하며 고래고함을 치던 기간, 40일을 굶으며 참 자아를
찾다가 거의 죽을 뻔 한 일, 진리를 찾아 서점을 쥐잡듯 뒤졌고, 어느 강의에 진리가
있나 하여 3,000개 넘는 먼저 깨달은 분들의 테이프를 들은 일, 성경진리를 강해한
테이프 1600개 정도를 만년필로 필사하느라 손가락에 괭이가 박히기 까지 한 일 등은
저로 하여금 이런 수고를 통해 아담 안에 있던 나의 옛 사람이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그리스도 안에서 새 사람이 되어 내가 아니라 그리스도이시라는 해산의 수고를 하는
기간이었습니다. 긴 싸움이었습니다. 그로 인해 얻은 건 육신으로는 상이용사가 되었지만
딱 하나 다윗이 가진 믿음인 삼위 하나님 안에서 하늘 신작로로 난 시온의 대로를 따라
주의 이름 안에 주의 이름을 부르짖는 참 기도(프로슈코마이)를 할 수 있는데 이른 겁니다.
그로 인해 바울과 같이 나도 날마다 죽노라 하고 나를 부인하고 나의 십자가를 지는 것이
나의 자랑이며 나의 가치이며 나의 삶의 의미와 목적이 되었습니다. 지렁이 같은 제게
이와 같은 구원의 복을 베푸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우리 아버지 하나님은
마땅히 찬양을 받으셔야만 합니다. 참 기도를 허락하신 주님께 영광의 찬송을...할렐루야!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 건강하십시요
할렐루야 감사합니다!